마야의 ‘인간 사냥’…긴박한 밀림 추격전
1000㎞ 넘는 거리 달린 ‘신예’ 루디 영블러드
“살육과 폭력 강조” vs “가족애라는 뭉클함”
인간 생존 본능과 구원에 대한 사색
주인공 ‘재규어 발’(루디 영블러드 분)은 밀림 추격 액션을 선보인다.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적군 스파르타 군대가 입성하기 전부터 아테네는 티푸스가 돌아 이미 죽음의 도시가 됐다. 천연두의 확산으로 타격을 입은 로마군은 게르만 용병에게 무기를 쥐여주면서 결국 476년 그들 손에 멸망한다. 16세기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잉카 제국, 마야문명이 스페인 군인들에게 패망한 것도 전염병 탓이었다. 유럽인들이 퍼뜨린 천연두와 홍역으로 인구 절반이 사라지면서 침략자들은 이른바 신대륙을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했던가. 유럽 사회의 고상한 지식인들에게 ‘공포의 천형(天刑)’으로 불린 매독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한 콜럼버스 일행이 유럽으로 유입시켰다는 설이 입증되고 있다.
이 시기 마야인들을 재조명하며 권력을 향한 욕구와 생존 본능을 정교하게 그려낸 영화 ‘아포칼립토’는 보는 이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화려한 마야문명에 대한 묘사와 숨 막히는 밀림 추격전은 코로나19로 인한 답답함을 해소해 줄 만하다.
멜 깁슨의 ‘새로운 시작’
‘아포칼립토’의 감독 멜 깁슨(왼쪽)과 그가 캐스팅한 마야어를 사용하는 무명 배우들. [Icon Entertainment International 배급사 제공]
영화 개봉 당시 반응은 엇갈렸다. 때마침 불거진 멜 깁슨의 기행 탓에 뉴욕타임스는 “극단적 야만성이 도드라진다. 스릴러 공포 영화를 넘은 그로테스크한 코미디”라고 평가절하한 반면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깊은 사색가(thinker)는 아닐지라도 대단한 이야기꾼(storyteller)”이라고 평가했다.
‘아포칼립토’의 스토리는 지극히 평이하다. 침입자들에 맞서는 가혹한 운명의 원주민 가장 ‘재규어 발’의 처절한 혈투가 골자다. 멜 깁슨은 이러한 단조로운 스토리를 갖고도 140분 동안 관객이 집중력과 긴장감을 잃지 않도록 했다. 이 영화가 4000만 달러(487억 원)의 제작비에 1억2000만 달러(1464억 원)의 흥행 수입을 올린 것을 보면 관객 반응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에 “문명은 스스로 붕괴되기 전까지 외부에 의해 정복되지 않는다”는 문장이 뜬다. 이는 미국의 진보적 문명사학자 윌 듀런트(1885~1981)가 베스트셀러 저서 ‘문명이야기’에서 민족의 우열이 존재한다는 제국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한 문장이다. 영화에서 이 문구는 십자가를 앞세워 상륙하는 스페인 정복 무리의 엔딩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제국주의 미화라는 집중 포화를 맞았다. 당시 멜 깁슨은 “이분법적인 선악, 강약 논리가 아니라 서양 문명이라는 더 큰 폭력의 역사적 반복을 예고하는 것”이라 항변했다.
산 사람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영화에서 재연된 마야 문명의 제사 의식 장면. [Icon Entertainment International 배급사 제공]
아무리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해도 베일에 가려진 16세기 중남미의 밀림을 정교한 이미지로 담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멜 깁슨은 제작사의 우려에도 ‘잘나가는’ 배우들보다 다소 거칠어도 담백한 무명배우들을 캐스팅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당시 원주민처럼 마야어를 사용하는 무명배우들은 역동적인 마야 시대 인물로 되살아나 생동감 있는 드라마를 빚어냈다.
마야의 ‘인간 사냥’ 전사들은 대여섯 명씩 포로들(마을 주민)을 일렬로 긴 나무에 엮은 뒤 자신들의 왕국으로 향한다.
보통 전쟁은 영토를 빼앗고 약탈하는 게 목적이지만, 마야족은 오로지 제단에 바칠 포로를 잡기 위해 전쟁을 했다. 영화에서도 전사들은 마을 주민의 급소를 찌른 뒤 산 채로 제압해 도시로 끌고 간다. 도시로 가는 중 그들은 천연두 자국이 역력한 의문의 원주민 여자아이와 맞닥뜨린다. 마야 전사들에게 앙심을 품은 아이는 “낮이 밤으로 뒤바뀌고 재규어와 달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너희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며 저주를 퍼붓는다. 어디에 왜 끌려가는지 모르던 ‘재규어 발’ 일행은 난생처음 마야 왕국의 중심 도시에 들어선다.
카메라 앵글에 담기는 빛, 색, 소리 하나까지 멜 깁슨은 역사적 사료와 학자들의 고증을 따랐다. 100여 명의 전문가를 고용해 세트장에 역사 속 마야 도시제국을 건설했다. 외곽의 허름하고 황폐한 빈민 오두막촌, 정비된 야자수 지붕의 중산층 오두막촌을 차례로 지나면 피골이 상접한 하층민이 일하는 채석장이 나온다. 당시 자연재해로 왕국 존폐의 기로에 서 있던 마야의 실상을 반영하듯, 영화 속 무표정한 마야인들은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가뭄과 기근으로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
시내에 들어서자, 갑자기 나타난 인파가 요란하게 포로들을 환영한다. 그리고 그들의 몸에 파란색 페인트를 칠한다. 스산한 느낌은 잔인한 살인을 예시하는 벽화 앞에서 극에 달한다. 이윽고 포로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이 쿠쿨칸 피라미드 제단이라는 걸 알고 사지를 떨지만, 피라미드 밑에 모인 사람들은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눈에 보이는 게 없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제사장은 산 사람의 가슴을 돌칼로 가르고 펄떡이는 심장을 떼어낸다. 목이 잘려 신단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포로를 보며 시민들은 너도나도 환호성을 지르고 시신을 차지하기 위해 광분한다. 아무리 여러 번 보아도 이 장면은 불편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국인에게 인신공양이라고 하면 언뜻 심청과 공양미 300석이 떠오르지만, 마야의 인신공양은 그 잔인성이 상상을 초월한다. 고대 로마인들과 이집트인들이 황금과 사후 세계를 삶의 주요 가치로 삼았다면, 마야를 비롯한 중남미 문화에서는 신의 은혜를 갚기 위해 피를 바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마야 신은 5일 동안 세상을 만든 다음, 스스로를 희생해 해와 달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신이 스스로를 희생한 것처럼 인간도 희생해야 세상이 유지된다고 그들은 맹신했다. 또한 잔인하게 희생시킬수록 가치가 커지고 신과의 관계가 돈독하게 된다고 믿었다.
같은 중미 문화권의 제사 의식이지만 마야와 아즈텍 왕국은 엄밀한 차이가 있다. 마야인들은 노예를 신에게 바치기는 했어도 귀족처럼 출신 성분이 좋거나 영특한 마야인의 피는 신을 더욱 만족스럽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제단에 바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반면, 아즈텍인들은 종교의식을 빙자해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포로나 노예를 제단에 바쳤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13만 개의 두개골이 전시된 아즈텍의 촘판틀리(일종의 납골당)를 파괴했다는 문헌도 전해진다. 따라서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포로들을 이용한 종교의식은 마야보다는 아즈텍 문화에 가까워 보인다.
마야에서는 운동 경기 승리팀 주장의 심장을 제단에 바치는 풍습이 있다. 영화에도 이 장면이 나온다. 마야에서 노년층이 없는 이유도 노년이 되기 전 자신을 희생시켰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기근이 심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제사장은 신에게 더욱 많은 제물을 바치려 전쟁을 부추겼을 것이다.
마야문명은 세계 10대 문명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노예와 빈민들의 삶은 맨손으로 토목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척박했다. 역법, 건축, 천문에 관한 지식은 제사장과 왕족이 독점했다. 그들은 무지한 백성들을 농락했다. 영화에서 제사장이 ‘재규어 발’의 가슴에 칼을 꽂으려는 순간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 현상이 일어난다. 순간 제사장은 긴장하는 낯빛이 역력하지만 이내 “쿠쿨칸이 만족한 것”이라며 흥분하는 군중을 달랜다.
아즈텍의 촘판틀리
일식 덕분에 ‘재규어 발’은 제단에서 걸어 내려오지만 자유의 몸이 된 것이 아니었다. 마야 전사 9명과 쫓고 쫓기는 밀림 추격 액션을 시작한다. 부상당한 ‘재규어 발’이 겨우 나무 위로 올라가 한숨 돌리는데 설상가상 나무 위에는 재규어가 떡하니 그를 노려보고 있다. 재규어를 피해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주인공, 그를 쫓는 마야 전사의 추격신은 숨이 멎을 정도다. 결국 마야 전사는 재규어에게 공격당한다. 이를 보고 천연두에 걸린 아이의 불길한 예언을 떠올리던 다른 전사는 뱀에 물려 죽는다. 이처럼 ‘재규어 발’은 기상천외한 기습공격으로 마야 전사들의 공격에 맹렬히 대항한다. 역경을 뚫은 그는 통쾌하게 가족을 품에 안는다.영화 ‘아포칼립토’를 보고 있자면, 관객은 마치 한 마리 재규어가 돼 정글을 휘저으며 질주하는 것 같다. 긴박한 스피드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물론 위대한 마야문명의 성취는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살육 현장과 미개한 폭력의 충격만 기억된다. 대신 이 영화에는 가족애라는 뭉클한 메아리가 숨어 있다. 또한 촬영 기간 내내 1000㎞가 넘는 거리를 대역 없이 달린 주인공 루디 영블러드의 열연도 코로나블루(우울증)로 닫힌 마음에 훈훈한 여운을 선사한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문화와 사회’(공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