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차원 이동이 금지됐다는 소식은 빛의 속도로 전파됐다. 우주 전체로 퍼져나갔던 이동자들은 ‘안식의 성단’으로 불린 고향 은하로 돌아가 영원한 적멸에 들었다. 밤의 행성에서 머물고 있던 이동자 으름스 르므 으함은 이탈자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지구 기준으로 공전주기가 330년인 밤의 행성은 으름스의 또 다른 고향이었고 그의 여생은 아직 5000년 이상 남아 있었다. 수십억 광년 넘게 우주를 유랑한 다른 이동자들에 비해 초심자에 불과한 그는 더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2
행성은 두 개의 태양 주변을 ∞ 형태로 공전했다. 태양 사이의 중력 차이와 행성의 불규칙하고 느린 스핀 운동이 만들어낸 기이한 궤적이었다. 이 때문에 행성이 두 태양 사이를 통과하는 동안엔 밤이 없었다. 행성의 양쪽 지평선 위로 마주 보며 출현한 두 태양은 작열하는 빛을 150년 이상 쉼 없이 내리비췄고 이 혹독한 자연환경은 생명의 씨앗을 지표면 아래로 밀어냈다.행성에서 태어난 최초 생명체들은 본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촉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두 태양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빛과 열의 지옥이 시작됐고 대부분의 종은 사멸했다. 간신히 생존한 생명체는 촉수를 뿌리삼아 지표면 아래로 파고들어야 했다. 그들은 무자비한 고온을 이겨낼 두껍고 큰 유리질 막의 눈만 외부에 노출했다. 그렇게 150년을 견디고 나면 비로소 행성에 밤이 되살아나곤 했다.
3
으름스는 밤을 좋아했다. 지표 밖으로 나온 커다란 원반형 눈으로는 어지간한 천체망원경 수준으로 많은 별을 관찰할 수 있었고, 뿌리화된 촉수 일부를 밖으로 뻗어 동료의 촉수에 닿을 수도 있었다. 밤의 행성 생명체는 그렇게 사랑을 나눠 다음 세대 종자를 땅 아래 심었다.누군가 광활한 밤의 행성 표면을 가까이에서 관찰했다면 촉수가 삐져나온 둥근 원반체가 군락을 이룬 장관을 목도했을 것이다. 그건 동물이라기보다 식물 세계에 가까웠다. 으름스는 기분이 좋아질 때면 제 특유의 향기를 만들어 촉수 관을 통해 대기 속으로 퍼뜨렸다. 그러면 멀리 있던 동료들도 제각기 자기 냄새를 공기 중에 실어 보냈는데 그게 그들의 언어였다.
밤의 휴식 속에 침잠할 때면 으름스가 숙주 삼은 생명체가 땅속 깊이 감춰둔 작은 뇌를 통과해 수많은 상념이 오고갔다. 비록 우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동을 선택하고 첫 육화를 감행했지만 그는 더 떠돌고 싶지 않았다. 무한한 우주의 궁륭(穹)을 평화롭게 올려다보고 비슷한 생명체와 향기로 교감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동자 체질이 아니었다.
으름스의 짝은 그가 만들어낸 냄새 언어로 ‘비욱’이라는 향기를 내는 동료였다. 비욱은 으름스의 오른쪽에 자리 잡고는 멋진 냄새를 풍기곤 했다. 비욱이 뿌리화된 촉수를 천천히 움직여 자기 곁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100년 넘게 지켜보던 으름스는 상대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둘은 천생연분이었다.
별들은 볼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빛났고 위치 조합을 바꿀 때마다 다른 형상을 선보였다. 으름스는 타고난 천문관측자였다. 그는 자신이 새로 궁리해낸 별자리를 비욱에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마음을 전달할 발음기관이 없기에 포기해야 했다. 대신 촉수를 뻗어 비욱을 만졌고 비욱의 촉수와 힘을 합쳐 씨앗을 만들었다. 그렇게 파종된 으름스와 비욱의 자손은 차츰 번성했고 밤의 향기는 더 짙어졌다.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