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호

[윤채근 SF] 차원 이동자(The Mover) 8-3

행성의 죽음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0-05-18 0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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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주>

    1

    비욱의 시신은 급속히 말라갔다. 수액 순환이 멈춘 둥근 눈은 차츰 광채를 잃더니 이내 쪼그라들어 땅 밑으로 사라졌다. 숙주로부터 빠져나온 으름스는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파동이 다가와 말했다. 

    “이제 떠나자. 이 행성엔 희망이 없다.” 

    파동을 따라 행성 대기권까지 상승한 으름스가 물었다. 

    “희망이 없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말 그대로다. 이 행성은 머잖아 멸망한다. 너 같은 이탈자들 때문이다.” 



    “섭동파가 밀려오나?” 

    “그렇다. 인접 은하에서 발생한 거대한 섭동파가 다가오고 있다. 저 두 태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이유를 아직 모르겠나? 이 행성의 현재 시공은 먼지처럼 분쇄될 거다. 운이 나쁘다면 행성 차원 질서마저 뒤틀릴 수 있다.” 

    “섭동파가 차원 질서까지 뒤틀 수 있나?” 

    “물론이다. 그 때문에 차원 이동은 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난 경고 없이 널 소멸시킬 수도 있었다.” 

    “차원 질서가 뒤틀리면 어떻게 되나?” 

    “글세…. 그것까진 모르겠다. 아마 해당 시공 차원 사이의 동일성이 상실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이질적인 차원이 자꾸 증가할 테고 결국엔 서로 충돌할 거다.” 

    “차원끼리 뒤엉키다 마지막엔 사건 발생까지 불가능해지는 건가?” 

    “글쎄.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상황이 악화된다면 아예 차원에 공백이 초래되거나…, 아니면 블랙홀을 능가할 암흑지점으로 변화하겠지.” 

    “암흑지점?” 

    “입구도 출구도 없는 완벽한 무.”

    블랙홀로 4차원 시공간에 주름을 만든 뒤 그 사이 웜홀을 이용해 바늘로 꿰매듯 움직이는 워프 이동은 섭동파 유발 원인 중 하나였기에 제한적으로만 허용됐다. 짧은 워프 후엔 긴 광속 이동이 이어졌고 차원 안정성이 확보되면 다시 짧게 워프해야만 했다. 안식의 성단을 향하는 이 긴 여정은 으름스에게 지루할 따름이었다. 

    “난 개체로 남고 싶다.” 

    으름스가 속삭이자 이동 속도를 늦춘 파동이 물었다. 

    “이동자로 남고 싶다는 뜻인가?” 

    “잘 모르겠다. 그저 감각을 지닌 채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 성단으로 돌아가 의식을 버리고 영원한 안식에 들기엔…, 난 너무 미숙한 것 같다.” 

    “짝을 그리워하나?” 

    한참 망설이던 으름스가 대답했다. 

    “비욱이 그립다.” 

    으름스는 비욱이 그리웠다. 비욱의 부드러운 촉수는 늘 서늘해 어루만질 때마다 상쾌한 느낌을 일으켰다. 상대를 배려해 만들어낸 갖가지 향기는 무한한 상상을 자극했고, 하늘에 펼쳐진 별의 율동과 기막히게 공명했다. 비욱이 옆에 있는 한 일말의 외로움도 깃들 틈이 없었고 그렇게 영겁토록 정지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비욱이 그립다.”

    3

    얼음 성단 외곽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빙질의 운석과 그 운석이 파괴한 소행성의 잔해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오래전 성단 중심부에서 일어난 초신성 폭발의 여파였다. 한참 침묵하던 파동이 말했다. 

    “난 추격자 가운데 오래된 편이다.” 

    갑자기 여정을 멈춘 이유를 궁금해하던 으름스가 조용히 물었다. 

    “멈춘 이유가 무언가?” 

    “제안을 하고 싶어서다.” 

    주변을 크게 돈 으름스가 물었다. 

    “놓아주는 거라면 사절한다. 쫓기고 싶지 않다.” 

    “그 반대다. 혹시 추격자 되고 싶은 생각은 없나?” 

    으름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수많은 성간 물질이 빚는 빛의 파노라마를 말없이 응시하던 파동이 다시 말했다. 

    “넌 추격자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우리가 지닌 음파화된 감각보다 몸이 주는 관능적 감각을 선호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이동 자체엔 관심이 없고. 추격자가 되려면 이탈자만큼 차원 이동을 거듭하되 극도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동을 즐기는 순간 변절하기 때문이다.” 

    으름스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파동이 덧붙였다. 

    “난 오래됐다. 순발력 있거나 가속 능력이 강한 이탈자를 추격하기엔 이제 역부족이다. 너처럼 비활성이거나 이동 속도가 느린 이탈자만 포획할 수 있게 됐다.” 

    오래 망설이던 으름스가 물었다. 

    “날 어떻게 믿나?” 

    으름스 곁으로 바싹 다가선 파동이 말했다. 

    “넌 잠재적 가속 능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비욱 속에 처음 육화됐을 때 비욱의 시각으로 네 본질을 봤다.” 

    “어떤 본질인가?” 

    “비욱이 구성한 너는…, 멀리 볼 줄 아는 관람자였다. 끈기 있고 냉철하며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건 추격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래서 150년 동안 관찰하며 기다렸다.” 

    오랜 침묵 끝에 으름스가 살며시 속삭였다. 

    “비욱은 진심으로 날 좋아했나?” 

    “진심으로 아끼고 존경했다.” 

    “비욱의 기억을 아직 간직하고 있나?” 

    “조금.” 

    “어떤 기억인가?” 

    잠시 망설인 파동이 낮게 속삭였다.
     
    “영원한 이별.”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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