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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상사는 안 변하더라…변화 위해 싸울 의지 없다”

[사바나] 밀레니얼 세대 대리 8人의 직설(直說)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회사·상사는 안 변하더라…변화 위해 싸울 의지 없다”

  • ●사원이 일을 ‘받는’다면 대리는 일을 ‘찾는’다!
    ●“대리는 여러 번 좌절한 뒤 잔류 결정한 사람”
    ●“회사에만 의존하면 회사에 끌려가게 돼”
    ●“정시 퇴근·홀로 점심 보장 못 받으면 기본권 침해”
    ●“회사보다는 개별 프로젝트가 조직 생활에 중요”
    ●“회사에 대한 충성과 애착심은 60%”
    ●“상사 이해시키려면 다툼 번져…쓸데없는 감정 소모”
    ●“너희도 꿈이 ‘별’(임원)이냐는 질문에 공감 어려워”
‘사바나’는 ‘회를 꾸는 ,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편집자 주>


[동아DB]

[동아DB]

본디 회사는 정글이다. 누구나 인정 투쟁에 몰두하고, 또 누구나 자기 셈법을 곱씹는 곳. 순진한 열정으로 받아 든 사원증은 사실 정글로 가는 초대장이다. 

모든 회사에는 저마다의 문법이 있다. 문법을 익히지 않으면 어느 회사에서도 생존할 수 없다. 살아남아야 날개를 펴 비상할 수 있다. 생존과 비상의 언덕배기에 있는 직급이 대리다. 근속연수로는 4~8년, 연령대로는 20대 후반~30대 초반 사이의 밀레니얼 세대 직장인이 언덕배기에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다. 대기업 계열 헬스앤드뷰티(H&B) 업체 6년차 직장인 홍희정(가명·29) 씨도 대리가 돼서야 비로소 생존의 문법을 익혔다. 

“사원일 때는 수동적으로 진행되는 업무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회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불만이 강했어요. 대리가 되니 책임이 주어졌고, 업무 설계도 주도적으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방향성 없이 일하던 사원 때와 달리 경영진이 원하는 바를 더 정확히 확인해 성과와 퍼포먼스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원은 ‘가능성’, 대리는 ‘가능함’

산업화 시대건 4차 산업혁명 시대건 대리가 하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B2C(Business to Consumer)건 B2B(Business to Business)건 기업 현장에서 고객을 가장 많이 접촉하는 사람은 대리다. 현장에서 뛰는 대리로부터 아이디어가 나오고, 거기서 신제품·신사업이 잉태한다. 홍 대리는 “실무에 있어 가장 날카롭게 촉이 서 있고, 예민하며, 말단의 비효율까지 인지하고 있는 직급이 대리”라고 표현했다. 대리는 회사의 중추신경이다. 



중소 영·유아식품업체에서 일하는 김진희(가명·32) 대리는 “대리는 회사 최전방에서 고객과 소통하며 현장 이야기를 선임에게 전하고, 선임은 대리를 통해 현장을 직·간접 경험한다”고 말했다. 중견 건설업체 7년차 직장인 김세은(가명·29) 대리도 “임원과 부장, 차장, 과장도 대리를 거쳤지만 현장의 모습은 그때그때 변화한다. ‘지금 현장’에 있는 대리의 현장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기업 계열 유통업체 6년차 직장인 문지성(가명·33) 대리는 굴지 대기업의 ‘대리 생활’을 이렇게 정리했다. 

“기획 및 보고서 작성은 대리급이 맡고, 보고 일정을 조율하는 일은 과장이나 차장급이 맡아요. 보고는 부서장(부장급)과 대리가 동석해 임원에게 진행하는 식입니다. 부서장은 대리로부터 요약받은 보고 내용을 임원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보고에 대한 임원의 질문은 대부분 대리가 답변하는 식이죠.” 

사원이 일을 ‘받는’다면 대리는 일을 ‘찾는’다. 도제식(徒弟式) 교육은 사원 시절에 유효기간이 끝났다. ‘배우고 있다’는 자기 변호는 미숙련의 알리바이 노릇을 더는 하지 못한다. 교(敎)와 육(育)이 답을 갖고 가르치는 행위라면 학(學)과 습(習)은 필요한 걸 스스로 찾아가는 행위다. 사원이 개념을 외웠다면 대리는 개념을 설계해야 한다. 사원은 ‘가능성’에 기대지만, 대리는 ‘가능함’을 추구한다. 

고로 “20대에는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김애란 ‘서른’ 중)해하는 사람이 대리다. 회사 안팎으로는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을 써야 할 때다. 처세(處世)의 기술을 한껏 발휘하고 조직 문화에도 차츰 눈떠야 할 시점이다. 요컨대 대리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 직장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대리로 승진하기까지 혼란과 방황이 없었을 리 없다. ‘걸어온 길을 계속 가야 할까. 이만 발걸음을 돌려야 할까.’ 곁에서 이어지는 퇴사 행렬은 심리적 동요를 자아냈을 터다. 컨벤션(convention) 기획업체 7년차 직장인 유선혜(가명·32) 대리는 입사 초 빈번히 번민에 휩싸였다. 입사 동기 5명 중 3명이 반년 안에 퇴사했기 때문이다. 동기들은 입사 뒷날부터 불합리와 부당을 말하다 사원증을 반납했고, 결국 남은 사람이 소수자가 됐다. 

“과장, 차장 등 실무급에 있는 선배들은 오히려 나간 동기들을 두고 ‘차라리 일찍 진로 선택 잘했다’고 했어요. 그럼 남은 사람은 뭐가 돼요? 팀장과 본부장은 남은 사람을 따로 불러 밥을 사주면서 ‘잘해 보자’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혼란스러웠어요. 의지가 생기기는커녕, 내가 잘못 살고 있나 싶었습니다. 나간 사람은 소신껏 제 갈 길을 현명히 택한 사람이 되고, 남은 사람은 윗사람의 ‘감언이설’에 속아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취급받는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떠날지 말지 고민하다 남기로…”

3월 25일 서울 종로구의 한 대기업 사무실 모습.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3월 25일 서울 종로구의 한 대기업 사무실 모습.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이혁진, ‘누운 배’ 중) 

대리는 일생은 아니어도 한동안 젊음을 팔기로 굳게 마음을 먹고서야 손에 쥘 수 있는 계급이다. 유선혜 대리도 꾸역꾸역 회사에서 버텨 4년 만에 대리로 승진한 뒤 동종업계로 이직했다. 덕분에 월급이 한번에 15% 넘게 오르는 경험을 누렸다. 그새 유 대리와 함께 회사 잔류를 택한 동기 한 명은 전직(轉職)했다. 그 덕택에 유 대리는 입사 동기 중 가장 먼저 대리 명함을 팠다. 그는 “퇴사해 새롭게 취업할 자신이 없어 남았을 뿐”이라며 짐짓 겸양의 자세를 보였지만 고민을 거듭해 내린 결론이었을 테다. 

4월 5일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이 최근 1년간 신입사원 채용을 진행한 기업 356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곳 중 6곳(64.6%)이 ‘조기 퇴사한 신입사원이 있다’고 답했고, 퇴사 시점은 입사 후 평균 5개월 이내로 조사됐다. 또 응답 기업의 80.9%는 과거 세대보다 밀레니얼 세대의 조기 퇴사 비율이 더 높다고 응답했다. 

그러니 밀레니얼 세대 대리들이여. 악착같이 ‘버텨온 삶’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대리가 되기까지의 지난한 세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직장생활을 안 해본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과정”(‘한국의 대리들’ 중)이었을 테니 말이다. 

어디 사원·대리뿐일까. 사람은 늘 조직에서 떠날지, 남을지 질문에 부딪힌다. 완벽한 조직은 없다. 회사, 정당, 시민단체, 심지어 국가까지 조직은 주기적으로 퇴보를 겪게 마련이다.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이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Exit, Voice, and Loyalty)’에서 통찰한 바에 따르면 조직이 퇴보할 때 개인의 선택지는 셋이다. 이탈(Exit), 항의(Voice), 충성(Loyalty). 

항의는 조직의 회복을 위해 경고음을 울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다. 항의로 개선을 시도해도 변화가 없다면 개인은 조직을 이탈한다. 일견 항의보다 적극적 행동으로 보이지만 실은 조직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는 뜻이다. 그도 아니라면 개인은 회사에 남는다. 대리들은 수년간 이탈과 항의 사이에서 치열히 고민하다 어떤 이유에서건 잔류를 택한 사람들이다. 헬스앤드뷰티(H&B)업체 홍희정 대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원과 달리 대리는 회사에 가졌던 기대가 절대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좌절을 여러 차례 경험한 뒤, 회사를 떠날지 말지 고민하다 회사의 비전을 고려해 결국 남기로 결정한 사람들이에요. 어떤 면에서는 회사나 상사가 변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적정선 이상으로 투쟁할 의지는 없습니다.” 

그는 최근 발탁 승진으로 입사 동기들보다 1~2년 앞서 과장 승진이 확정됐다. 총성 없는 전쟁터인 대기업에서 채 서른 살이 되기 전 과장 계급을 쟁취하는 사람은 드물다. 잔류한 홍 대리의 마음속에서 불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는 “불만은 여전했지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받아들이니 도리어 성과에 집중하게 됐다”고 했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건 그가 대리 직급에서 몸으로 익힌 회사 생활의 경구(警句)다.


“점심 따로 먹는 게 익숙한 세대”

직장 생활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tvN 제공]

직장 생활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tvN 제공]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인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세대에게 회사에 대한 충성은 회사에 애착을 갖고 장기 근속하는 것을 뜻했다. 충성심의 제도적 기반은 호봉제였다. 조직 기여도와 상관없이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가파르게 올랐다. 사실상 종신고용 모델을 바탕으로 도입한 임금 체계였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회사는 직원의 이탈(Exit)을 방지하기 위해 ‘가족 같은’이라는 낱말까지 동원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생전에 직원들을 두고 “남이 아니라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라고 칭했다. 오랫동안 한국의 회사는 유사가족(類似家族)의 형태를 띠어왔다. ‘오너’는 가부장이었고, 직원들은 가부장이 보듬어야 할 인격체로 규정됐다. 

밀레니얼 세대는 ‘집단 vs 개인’ 구도에서 후자에 무게중심을 둔다. 호봉제는 연봉제로 바뀌었지만 불만 따위는 없다. 중견 건설업체 7년차 직장인 배세희(가명·31) 대리는 “본인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에 걸맞은 직급과 연봉을 받을 뿐”이라고 ‘쿨’하게 답했다. 평생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에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이유는 없다. 중견 제조업체 6년차 직장인 이석준(가명·32) 대리는 “회사에 애착은 있다”면서도 이렇게 부연했다. 

“직원이 회사에 기여하는 바와 회사가 직원의 발전에 기여하고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하는 것이 서로 플러스 방향으로 일치할 때 상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겁니다. 회사의 성장과 직원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앞날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죠. 회사에만 의존하면 회사에 끌려가게 됩니다.” 

이해관계의 차이는 사소한 데서도 드러나곤 한다. 영·유아식품업체 김진희 대리는 “밀레니얼 세대는 정시 퇴근이 당연하고 점심을 따로 먹는 것이 익숙한 세대”라면서 “회사에서 이런 사항이 지켜지지 않으면 본인의 기본권이 침해받는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대 갈등은 조직 안에 늘 도사리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4월 8일 발표한 ‘한국기업의 세대갈등과 기업문화 종합진단 보고서’를 보면,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 있다’는 항목에 20, 30대는 각각 35.2%, 33.5%만 동의했지만 40, 50대는 각각 47.4%, 66.7%가 동의했다. 보고서는 대한상의가 30개 대·중견기업에 소속된 직장인 약 1만3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를 기초로 세대별 심층면접(FGI) 과정을 거쳐 작성됐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 10명 가운데 6명(63.9%)은 세대 차이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 내 세대 차이를 ‘문제’로 인식하는 이들은 아랫세대일수록 더 많았다. ‘세대 차이가 업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20대의 41.3%와 30대의 52.3%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40대는 38.3%, 50대는 30.7%만 ‘그렇다’고 답했다. 

밀레니얼 세대 대리들은 상사와 몇 마디 나누다 별달리 소통 가능성이 엿보이지 않으면 입을 닫는다. 중견 건설업체 배세희 대리는 “대화로 상사를 이해시키려 할수록 서로 평행선을 그으면서 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대리가 굽히는 쪽으로 결론 나는 일이 잦으니 쓸데없이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밀레니얼 세대는 충성심이 없다’고 단언하는 건 금물이다. 앞선 허시먼의 분류를 다시 빌자면, 이탈이나 항의가 아닌 잔류는 충성(Loyalty)과 포개진다. 대기업 유통업체 문지성 대리의 말이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있지만, 회사로부터 받은 복리후생 때문은 아니에요. 회사에서 내가 이뤄낼 수 있는 성취, 수년간 알고 지낸 동료들과의 관계가 회사에 대한 애착을 키우는 주효한 요인입니다.” 

행복감을 느껴야 충성심이 씨앗을 틔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행복은 오래 일할수록 오르는 임금이었다. 미래에 대한 확실성이 베이비부머 세대를 회사에 붙들어맸다. 밀레니얼 세대는 불확실성을 넘어 초불확실성 앞에 놓여 있다. 밀레니얼 세대를 다룬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행복에도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는 거야. 어떤 행복은 뭔가를 성취하는 데서 오는 거야. 그러면 그걸 성취했다는 기억이 계속 남아서 사람을 오랫동안 조금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게 자산성 행복이야. 어떤 사람은 그런 행복 자산의 이자가 되게 높아. 지명이가 그런 애야. ‘내가 난관을 뚫고 기자가 되었다’는 기억에서 매일 행복감이 조금씩 흘러나와. 그래서 늦게까지 일하고 몸이 녹초가 되어도 남들보다 잘 버틸 수 있는 거야. 어떤 사람은 정반대지. 이런 사람들은 행복의 금리가 낮아서,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이런 사람은 현금흐름성 행복을 많이 창출해야 돼. 그게 엘리야. 걔는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지.”


‘자산성 행복’과 ‘현금흐름성 행복’

밀레니얼 세대에게 필요한 건 ‘자산성’이건 ‘현금흐름성’이건 ‘지금 여기의 행복’이다. 충성의 대상은 ‘나를 고용한 조직’이 아니라 ‘내가 이뤄내는 성취’다. 게임업체 6년차 직장인 박성우(가명·33) 대리는 “‘공동체의 성공’보다 ‘개인의 성공’이 상위에 자리하고 있다. 회사에서 내 성공에 밑받침될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을 얻고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에서 최선의 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게임업계의 경우 한 회사에서 10년 뒤 과장, 20년 뒤 부장을 바라보기에는 프로젝트 실패, 팀 해체, 회사 인수 등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금전적으로 보더라도 한 회사에서 정해 놓은 연봉 테이블에 맞춰 얻을 수 있는 상승 폭보다는, 지금 가진 능력을 다른 회사에 어필해 이직 시 얻을 수 있는 상승 폭이 훨씬 크죠.” 

밀레니얼 세대가 맞닥뜨린 한국은 저성장이 ‘뉴 노멀(New Normal·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 부상하는 경제적 표준)’로 자리매김한 국가다. GDP(국내총생산)가 늘지 않는다면 기업의 성장도 벽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고속 성장의 영화(榮華)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기업 유통업체 문지성 대리는 “올해 20년 근속을 맞게 된 분들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지날 무렵 입사했다”면서 운을 뗐다. 

“그분들은 불황을 이겨낸 기업들이 위기를 지나 반등하고 있을 당시 사원, 대리, 과장으로 착실히 올라왔어요. 아무래도 낙관적인 환경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을 겁니다. 지금은 IT(정보기술)나 바이오업계 등을 제외하면 기업이 폭발적 성장을 이뤄내긴 어렵잖아요.” 

지난해 10월 30일 취업 포털 사람인이 2030 직장인 724명을 대상으로 ‘최종 승진목표’에 대해 설문조사 한 결과에 따르면 41.7%가 ‘딱히 직급 승진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했다. 특히 20대 44.6%가 진급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밝혀 30대의 35.2%보다 9.4%포인트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문 대리가 말을 이었다.


“포트폴리오 한 줄 위해 회사 생활”

“회사·상사는 안 변하더라…변화 위해 싸울 의지 없다”
“이따금 임원들과 저녁식사를 할 때면 ‘너희도 꿈이 별(임원)다는 거 아니냐’라는 얘기를 들어요. 임원들은 근면, 성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임원 자리에 오른 배경이라 강조합니다. 하지만 경제 상황이 바뀌었는데 이런 조언에 공감하며 회사를 다니긴 어렵죠.” 

영·유아식품업체 김진희 대리는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직원의 성장에 도움 주는 제도를 운영해야 한다. 회사 성장과 직원 성장 간 괴리감이 커지면 직원들이 굳이 회사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면서 “회사에 대한 충성과 애착심은 60%”라고 했다. 

밀레니얼 세대 대리는 쇼핑몰에서 상품을 고르듯 내 회사와 남의 회사를 견주고 비교한 뒤 충성심을 품을지 말지 결정한다. 그것은 경제학의 눈으로 볼 때 합리적 행위다. 헬스앤드뷰티(H&B)업체 홍희정 대리는 “회사에 충성심이 있지만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라면서 “동종업계에서의 회사 위상, 내가 쏟는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인정, 더 나은 대안을 탐색하다 결국 지금 회사가 최선이라고 판단했을 때 충성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은 2019년 4월 9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 

“한 직장에 30년 다닌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축적이 아니라 퇴적될 가능성이 도리어 높죠. 직장이 아니라 각 태스크(task) 중심으로 나름의 개념설계를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죠. 그런 환경에서 커온 사람이라면 연차가 5년이건 10년이건 고수라고 할 수 있어요.” 

컨벤션 기획업체 유선혜 대리는 휴무일마다 이 특보가 쓴 ‘축적의 길’을 유심히 읽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축적이라는 낱말로부터 찾는다. 

“포럼과 전시를 기획하고 개최하다 보면 자연스레 포트폴리오(portfolio)가 쌓여요. 제가 일하는 업계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그거 한 줄’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한 줄을 위해 회사 생활을 하는 거예요. 시행착오를 거치며 축적을 거듭하다 보면 고수가 될 테고, 그때 제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곳이 제가 충성해야 할 직장이겠죠.” 

중견 제조업체 이석준 대리 역시 “회사에 기대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온전히 나의 힘으로 성취와 보상을 손에 쥘 수 있다”고 했다. 중견 건설업체 김세은 대리는 “회사 생활은 커리어의 발전을 위한 과정”이라며 “퇴사가 옳은 답은 아니지만 무조건 회사에 순응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회사의 설계도에 빨려 들어가지 않겠다

이들에게 회사가 잘돼야 더 나은 미래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감은 찾기 힘들다. 그것은 체념이나 자조(自嘲)와는 다른 정서다. 당면한 현실에 스스로를 맞춰가되, 회사가 만들어놓은 설계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겠다는 의지일 뿐이다. “떠나게(Exit) 하지 않으려면 ‘나’를 충성(Loyalty)으로 유인할 태스크(task)와 성취감, 보상체계를 제공해 달라.” 밀레니얼 세대 대리들의 요구는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다. 이제 기업이 답해야 할 차례다.




신동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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