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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꽃 날리는 날 어울리는 술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버들꽃 날리는 날 어울리는 술

  • 더디고 더딘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기분인데, 달력은 벌써 넉 장째다.
    봄을 맞이한 몸과 전염병을 경계하는 마음이 따로 노는 비정상적인 시간을 원망해 본다. 그렇지만 부자연스러운 지금도 내 삶의 소중한 조각이다.
    흰 말이 빨리 달려가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면 과연 말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눈 깜빡할 새보다 더 짧을 것 같다. 그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라 비유하며 장자가 남긴 말 ‘백구과극(白駒過隙)’이 떠오른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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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행동반경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좁아졌다. 집과 회사만 오가는 데도 발걸음을 총총 옮기게 된다. 집 밖에서 머무는 게 불안해 집에 일찍 오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없이 기웃기웃 서성거린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니 봄의 한가운데 도착해 있다. 인색하게도 빨리 움직이던 발걸음이 만발한 매화나무 아래서 눈에 띄게 느려지고, 집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와 묵은 겨울 살림 정리도 살살 시작하게 된다. 몸과 마음이 도무지 참지 못하고 펴는 봄의 기지개를 얌전히 묶어두는 게 쉽지는 않다.


두견주와 함께 오는 봄

창포 뿌리즙과 찹쌀로 빚은 창포주.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창포 뿌리즙과 찹쌀로 빚은 창포주.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하늘이 맑아진다는 절기 ‘청명’이 막 지났다. 4월 4일 청명 즈음에는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온갖 꽃이 흐드러진다. 모든 것이 피고 움트는 아름다운 이 시절을 우리 선조들은 한 잔 술에 담아 마셨다. 진달래 넣은 두견주, 복사꽂 넣은 도화주 등이 음력 3월 청명을 대표하는 술이다. 

청명을 선두로 계절 흐름에 맞게 술을 빚고 나누어 마시기가 이어진다. 선조들의 시간은 농사 흐름과 맞물리며, 태양 24절기와 달의 달력(음력)을 중심으로 계획돼 있다. 우리 삶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식탁 위에 올라오는 섭생 흐름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선조들 시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제부터 말하는 절기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옛사람들은 5월 단오에 창포 뿌리즙과 찹쌀로 빚은 창포주를 마셨다. 창포주는 다가올 무더위를 견디도록 몸에 기운을 북돋고,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를 지닌 술이라 여겨졌다. 한창 농사가 바쁜 5월에는 품앗이 때 먹을 술도 따로 빚었다. 이를 품앗이 술이라 하여 서로서로 나누어 먹었다. 

6월 보름인 유두절에는 더위를 잠시 피해 물가에 나앉아 달착지근한 동동주를 마셨다.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유두(流頭)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는 양력으로 치면 7월 말, 8월 초경이다.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때다. 




새해 첫날 마시는 술인 도소주(왼쪽)와 술지게미에 물, 흑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주. [한국음식문화 제공, 전주주조 공식홈페이지]

새해 첫날 마시는 술인 도소주(왼쪽)와 술지게미에 물, 흑설탕 등을 넣어 만드는 모주. [한국음식문화 제공, 전주주조 공식홈페이지]

7월 백중이 되면 농사일이 한풀 꺾이며 한숨 쉬어간다. 이때는 막걸리를 농주로 빚어 걸게 나눠 마셨다. 8월 한가위에는 햅쌀로 신도주(新稻酒)를 빚어 차례상에 올리고 귀하게 마셨다. 쌀알이 동동 뜨도록 짧게 익힌 동동주로 달게 빚어 즐겼다. 9월 중양절에는 만발한 국화로 술을 빚어 마셨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빚은 술을 끓이거나, 증류해 마시기도 했다. 막걸리나 술지게미에 한약재를 넣고 끓인 모주가 흔했다. 

새해 첫날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술인 도소주(屠蘇酒)를 가족이 나눠 마셨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오곡밥 먹기 전에 꼭 귀밝이술(이명주·耳明酒)을 마셨다. 아이들도 살짝 입을 대도록 했는데 한 해 동안 좋은 소리만 들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가양주 빚어 마시는 마음

이렇게 사시사철 마신 술은 당연히 집집마다 빚는 ‘가양주(家釀酒)’였다. 빚는 사람마다 맛이 다르고, 지역마다 재료나 비율, 양조법도 달랐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가 생을 바쳐 정리한 ‘임원경제지’에는 200여 가지의 양조법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것, 기록되지 않아 전해지지 못한 양조법을 짐작해 보면 1000여 가지는 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이토록 다양했던 가양주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밥 지을 쌀도 부족했던 1960년대를 지나며 자취를 감춰버렸다. 

과거 서울 지역 가양주 중 가장 인기를 누린 건 삼해주(三亥酒)라고 한다. 이름에 술 빚는 방법이 숨어 있다. 세 번(三)의 돼지날(亥) 술을 빚는다. 음력 1월 첫 돼지날 밑술을 빚고 다음 돼지날이 돌아오면 덧술(중밑술), 그다음 돼지날에 마지막 덧술을 빚어 합쳐 숙성하는 삼양주(三釀酒)다. 

돼지 날 술을 빚는 이유는 12지신 중 돼지 피가 가장 붉으면서 맑고 선명해 그날 술을 빚으면 맑고 맛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해주는 빚는 시간과 정성만큼 술맛이 좋기로 이름나 있지만 손이 많이 가서 이 술을 빚어 판매하는 양조장이 흔하지 않다. 그러니 빚어 마실 수밖에 없다. 

사회적 격리라는 낯선 경험은 우리에게 일상의 새로운 면모를 경험케 하고 있다. 내 경우는 외근이 사라지면서 사무실에서 차분히 업무 보는 시간이 늘었다. 회사도 침체기라 업무량이 줄면서 계획에 없던 여가가 생겨버렸다. 내친김에 오랫동안 희망하던 경험치 쌓기를 사부작사부작 해보기로 했다. 바로 술 빚기다. 

술 빚기 초짜인 나는 2020년 첫 돼지날인 2월 2일, ‘찬우물농장’과 ‘지우도농’ 등 친환경 농업공동체 농부님들과 함께 삼해주를 빚어보기로 했다. 삼해주 빚는 법은 산가요록, 음식디미방, 임원경제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같은 여러 고문헌에 기록돼 있다. 밑술을 먼저 빚고 두 차례 덧술을 보태는 방법은 어느 책이나 같다. 반면 쌀 종류, 물 양, 숙성 기간 등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세 차례 술을 빚을 때 쌀을 모두 다르게 조리하는 흥미로운 양조법(임원경제지)을 따랐다.


세 번의 돼지날 맑은 물로 빚는 술

1 앉은뱅이밀로 만든 누룩. 2 완성된 밑술. 3 덧술을 만들려고 빚은 구멍떡. 4 밑술에 덧술 더하기. 5 마지막 덧술을 빚고자 고두밥 넣기. 6 숙성을 기다리는 삼해주.

1 앉은뱅이밀로 만든 누룩. 2 완성된 밑술. 3 덧술을 만들려고 빚은 구멍떡. 4 밑술에 덧술 더하기. 5 마지막 덧술을 빚고자 고두밥 넣기. 6 숙성을 기다리는 삼해주.

준비물은 좋은 쌀, 깨끗한 물, 전통 방식으로 만든 밀누룩, 깨끗한 독이다. 먼저 지난가을 수확한 좋은 쌀을 구하고, 깨끗이 씻는 것이 중요하다. 쌀 씻기 방법은 ‘백세(百洗)’, 즉 100번 씻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기는 당연히 어렵다. 예상컨대 문헌이 작성된 시절 쌀은 지금만큼 깨끗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쌀은 몇 차례만 정성껏 씻으면 맑은 물(白水)이 나온다. 게다가 도정까지 잘 돼 있어 물에 쉽게 불고, 전분기도 잘 빠져나온다. 굳이 100번이나 물에 적실 필요는 없다. 

밑술을 빚을 때는 깨끗이 씻은 젖은 찹쌀(토종 대궐찰 품종)을 빻아 묽게 죽을 쑨다. 누룩(앉은뱅이 밀)은 미리 준비해 술 담그기 2~3일 전부터 채반에 얹어 햇살과 밤낮 부는 바람, 이슬을 맞혀두면 좋다. 단, 빗물에 닿는 건 피해야 한다. 찹쌀죽이 완전히 식으면 곱게 부순 누룩을 넣어 큰 덩어리가 없도록 충분히 풀어가며 섞는다. 누르스름한 빛의 걸쭉한 밑술을 독에 부으면 첫술 작업은 끝이다. 

12일 뒤 다시 돼지날이 찾아오면 덧술을 빚어 합친다. 덧술은 깨끗이 씻은 멥쌀(졸장벼)과 찹쌀(나미)을 합해 가루 낸 뒤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 국수 반죽하듯 덩어리로 뭉친다. 단단한 반죽을 조금씩 떼어 ‘구멍떡’을 빚는다. 납작한 도넛 모양이다. 이렇게 빚은 구멍떡은 물에 삶아 익혀 곱게 으깨 풀처럼 만든다. 이렇게 몽땅 으깰 것을 왜 일일이 구멍떡으로 만드나 했더니 물에 삶았을 때 빨리, 골고루 익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잘 식은 쌀풀에 밑술을 붓고 누룩을 더해 골고루 섞이도록 잘 푼다. 밑술, 풀, 누룩을 골고루 합하기에는 사람 손만 한 것이 없다. 끝없이 주무르고 주무르다 보면 어느새 콩고물처럼 고소해 보이는 노란색 걸쭉한 중밑술이 완성된다. 다시 독에 붓는다. 

마지막 돼지날 빚는 덧술의 주인공은 밥이다. 멥쌀(졸장벼)과 찹쌀(나미)을 섞어 고두밥을 짓는다. 밥을 짓는다기보다 쌀을 찐다는 표현이 맞겠다. 고두밥을 독에 담긴 밑술에 살살 섞어 넣고 물을 더한다. 고두밥과 물을 먼저 섞어 밑술에 더해도 된다. 이것으로 삼해주 빚기는 끝난다. 이제 고문헌에 적힌 그대로 ‘버들꽃이 날릴 때’ 항아리를 열어 보면 된다. 삼해주는 짧게는 12일 길게는 100일까지 숙성한다. 술을 빚어 기쁘지만 버들꽃 날릴 때 혼자 마시게 될까 싶은 걱정과 쓸쓸함도 함께 있다. 


술잔은 무겁게 마음은 가볍게

막걸리는 뽀얗고 불투명한 상아색으로, 도수가 낮은 편이다.

막걸리는 뽀얗고 불투명한 상아색으로, 도수가 낮은 편이다.

‘비는 내리고/하늘에 뜨지 못한 달이/작은 그릇 속에 떴다 (중략) 얼마나 온 걸까/찌그러진 주전자 끝에/눈물 맛이 나는 하루’(막걸리, 임권). 

술을 담그고 나니 시 한 수가 떠오른다. 행여 엉엉 울고 싶은 일이 생기더라도 막걸리 한잔에 근심을 풀고 지나가면 좋겠다. 소주는 쓸쓸한 마음에 붓자니 너무 따갑고 쓰다. 맥주는 지나치게 쾌활해 근심 위에 이 술을 부으면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 이럴 때는 탁주가 제격이다. 구겨진 내 얼굴도 비치지 않고, 밥처럼 구수하니 맛도 좋다. 분명 차가운 술을 먹는데 마음은 뜨끈해지는 정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가양주를 빚었나 보다. 

가양주를 빚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먹을지 고민해 볼 일이다. 나처럼 술빚기 초보자들은 맛보고 싶은 마음이 급한데다 솜씨도 어설프니 막걸리로 내려 먹는 게 수월하다. 게다가 빚은 술 양이 워낙 적으니 청주를 걸러 내야 하나 마나 고민도 된다. 

우리가 마실 수 있는 가양주, 즉 전통주 유형은 탁주, 청주, 증류주로 크게 나뉜다. 과실주도 있지만 곡물이 원료가 아니니 잠시 빼두자. 

막걸리는 탁주에 속한다. 술이 발효하면 독 바닥에 곡물 건더기가 가라앉고, 위에는 맑은 술이 뜬다. 막걸리는 위에 뜬 술을 따로 떠내지 않고, 건더기와 술을 한꺼번에 주물러 거른 술이다. 모두 알다시피 뽀얗고 불투명한 상아색을 띠며 알코올 도수가 낮은 편이다. 탁주, 탁배기, 막 거른 술, (집에서 만들었으니) 가주, (농사일 하며 먹기 좋으니) 농주 등으로 불렸다. 

청주는 가라앉은 건더기를 가만히 두고 웃물만 떠내 거른 맑은 술이다. 전통 방식은 가라앉은 건더기에 ‘용수’를 박아 그 안으로 맑은 술이 고이게 했다. 용수는 싸리나무, 대나무, 버드나무 같은 것을 가늘게 쪼개 촘촘하게 엮어 만든 둥글고 길쭉한 바구니다. 요즘엔 구하기 힘들뿐더러 고운 체가 다양하게 나오니 이것을 이용해 맑은 술을 거를 수 있다.


동동주, 증류주, 모주

울산 복순도가 양조장. [홍중식 기자]

울산 복순도가 양조장. [홍중식 기자]

그럼 동동주는 뭘까. 발효를 거치는 중 떠오르는 밥알을 굳이 거르지 않고 위에 뜬 술과 함께 퍼낸 것이다. 동동주를 맑게 거르면 청주라고 볼 수 있다. 곁가지가 하나 더 있다. 청주를 거르고 남은 술지게미에 물을 섞어 거른 것도 탁주라고 부르며 예전엔 꽤 많이 소비됐다고 한다. 물을 섞은 술과 그러지 않은 술을 구분하려고 탁주와 막걸리로 각각 부르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다. 쌀과 술이 흔한 요즘에는 굳이 술지게미에 물을 탄 탁주까지 만드는 양조장은 잘 없다. 그렇지만 집에서 내손으로 술을 담그고 보니 술지게미에 물을 타서라도 술을 오래오래 맛보고 싶기도 하다. 

증류주는 청주를 증류해 받은 술이다. 향과 맛이 응축되면서 알코올 도수가 40% 내외로 높아진다. 증류주를 이야기할 때는 과하주(過夏酒)를 빼놓을 수 없다. 과하주는 이름 그대로 여름을 나는 술이다. 청주와 청주를 증류한 술을 섞어 숙성해 만든다. 알코올 도수를 높여 더운 여름에도 발효가 더는 일어나지 않게 하면서 맛은 부드럽게 즐길 수 있다. 집에서 간단하게 과하주를 만들고 싶다면 술지게미에 시판 소주를 부어 숙성시키는 방법도 있다. 맛은 다소 떨어지겠지만 여름 내내 손수 담근 술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술을 거르고 나면 술지게미가 꽤 남는다. 이것 역시 쓸모가 만만치 않다. 술을 좋아한다면 마땅히 모주를 만들어야 한다. 술지게미에 물과 흑설탕 그리고 생강, 대추, 감초, 계피, 갈근 같은 약재를 넣어 만든다. 계피를 제외한 약재를 먼저 물에 푹 끓여 우린다. 그 물에 계피와 술지게미를 넣고 보글보글 끓으면 입맛에 맞게 흑설탕을 넣는다. 은근한 불에서 계속 저으며 막걸리 같은 농도가 되게끔 끓여 체에 거른다. 이렇게 하고도 남은 술지게미는 목욕 시 피부에 바르듯 살살 문질러 각질 제거나 보습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모주를 만드는 대신 오이, 무, 가지 등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소금에 버무린 다음 술지게미에 박아 장아찌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흔히 들어본 주박장아찌가 바로 그것이다. 술지게미는 주박, 주정박, 주자, 주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술지게미를 효모 대신 사용해 빵을 빚는 이들도 있고, 가볍게 말려 알코올 성분을 날린 뒤 텃밭에 거름으로 줘도 아주 좋다. 정성껏 빚은 술이 건더기 한 톨까지 이토록 쓸모가 있다니 아직 맛도 보지 못한 술을 거나하게 마신 듯 웃음이 난다.


핫하고 힙한 전통주의 세계

경기 오산양조의 전통주 빚기 체험. [경기관광공사 제공]

경기 오산양조의 전통주 빚기 체험. [경기관광공사 제공]

전통주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막걸리학교를 비롯해 수수보리아카데미, 한국가양주연구소, 한국전통발효아카데미센터, 한국전통주연구소, 북촌전통주문화연구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전통주연구개발원, 배다리전통주학교, 연효재, 전라슬로푸드문화원 등으로 다양하다. 백화점 문화센터 등에서도 종종 전통주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기도 한다. 술 빚기를 배우지 않고 집에서 막걸리를 뚝딱 만들 수 있는 키트도 있다. 막걸리 분말과 효소제 등이 들어 있어 재료를 넣고 미지근한 물을 부어 하룻밤 두면 영락없는 막걸리가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막걸리는 그대로 마시기도 하지만 과일 주스나 휘핑크림, 커피, 설탕 등을 넣어 색다른 칵테일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막걸리를 살짝 얼린 다음 과일 또는 과일즙, 요구르트와 함께 곱게 갈면 개운한 맛의 스무디 칵테일이 된다. 

저마다의 개성 넘치는 전통주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요즘이다. 하나같이 빼어난 패키지와 기발한 이름만큼 내공이 가득한 품질을 갖고 있다. 울산에 위치한 복순도가의 ‘손 막걸리’는 자글자글 강렬한 탄산이 남달라서 막걸리계의 샴페인으로 불린다. 석류즙처럼 빨간 ‘붉은 원숭이’는 오로지 붉은 쌀(홍국)로만 술을 빚는다. 삼해주처럼 세 번 빚는 경기 남양주의 ‘봇뜰막걸리’는 ‘오미(五味)’를 모두 담은 맛 좋은 술로 통한다. 충북 청주에서 만들어지는 ‘풍정사계’는 하나의 이름 아래 청주, 과하주, 탁주, 소주가 모두 생산돼 하나하나 다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최근 만난 가장 특이한 전통주를 꼽자면 술샘의 ‘이화주’다. 예부터 있던 술 종류인데 만드는 이가 그간 없었나 보다. 이 술은 요거트 혹은 푸딩과 비슷하다. 색은 탁주에 가까운데 액체가 아니라 찰랑찰랑하는 덩어리다. 이화주는 물 없이 쌀과 누룩만으로 빚는다. 누룩도 밀 아닌 쌀누룩인 ‘이화곡’을 사용한다. 쌀가루로 구멍떡을 빚고 삶아 익힌 다음 식힌다. 구멍떡을 으깰 때 이화곡을 넣고 한참을 주물러 섞이게 한 다음 항아리에 넣는다. 물기가 없으니 주물러 섞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고 한다. 2~3일 동안 발효하고 한 달 이상 숙성하면 요거트 같은 이화주가 만들어진다. 물이 안 들어가니 신 맛이 적고, 쌀이 많이 들어가니 당연히 달고, 발효 기간이 짧으니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다. 누구라도 신기하고 좋아할 만한 전통주다. 배꽃 필 때 빚는 술이라 이화주(梨花酒)라 이름 붙었다. 

이와 비슷한 재미를 주는 것이 느린마을 양조장에서 맛보는 사계 막걸리다. 술 빚은 지 1~2일 된 것을 봄, 3~5일 차는 여름, 6~7일 차가 가을, 8~10일 차는 겨울 막걸리라 칭한다. 살아 숨 쉬는 막걸리가 익어감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자리에서 맛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전통주를 한자리에서 맛보고 싶다면 백곰 막걸리&양조장, 안씨막걸리, 산울림1992, 윤서울, 작(酌) 같은 곳을 방문해 본다. 전통주에 일가견이 있는 직원 혹은 전통주 소믈리에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술과 어울리는 음식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요즘은 대형 마트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구하기 힘든 전통주를 온라인으로 쉽게 구해 마실 수도 있다.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녹

한동안 맥이 끊겼던 우리 술은 1960년대 시판 막걸리로 부활했다. 초기엔 쌀 대신 밀가루와 옥수수가루 등으로 빚으니 영 맛이 없어 사람들 눈길에서 멀어졌다. 대신 소주, 맥주, 양주가 막걸리 자리를 하나둘 차지했다. 다행히도 어려운 와중에 양조법을 이어온 양조가들이 현재는 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로 등재돼 옛 맛을 되살리고 있다. 또 신흥 양조장들이 생겨나며 잃어버린 가양주의 맥을 찾을 뿐 아니라 전에 없던 가양주 새싹 틔우기도 해내고 있다. 신흥 양조장의 공통점이라면 개성과 실력으로 단단히 무장해, 마치 패션 소품처럼 ‘핫’하고 ‘힙’하며 ‘쿨내’가 진동하는 전통주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견학 가능한 양조장이 여럿 있다. ‘더술’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개성 있는 신상 전통주 소식이 궁금한 사람에겐 네이버 카페 ‘대동여주도’를 추천한다. 

술은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녹(祿)이라는 말이 있다. 술 빚은 사람의 정성, 나의 노고를 다해 구한 것이다. 귀하게 여기며 잔을 들고, 기분 좋게 마셔 정신을 맑게 하되 과음하다 명을 재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 보내는 다짐이다.




신동아 2020년 5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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