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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변화의 땅’ 미얀마에 절실한 것? 최선은 YS, 차선은 라모스

안경환 前 국가인권위원장 현지 르포

  • 안경환 |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제4대 국가인권위원장 ahnkw@snu.ac.kr

오늘 ‘변화의 땅’ 미얀마에 절실한 것? 최선은 YS, 차선은 라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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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1월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미얀마에 햇살을 드리웠다. 그러나 53년 군부독재의 그늘은 여전히 스산하다. 미얀마에도 봄은 오는가.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은 11월 15~19일 미얀마 인권위원회와 인권 현안에 관한 국제조사단의 일원으로 옛 수도 양곤을 방문해 희망이 움트는 미얀마 현지 취재에 나섰다.
“아웅산 수지의 버마, 출구는 있는가?”
10여 년 전에 쓴 제법 긴 글의 제목이다. 1989년 군사정부는 미얀마로 국호를 바꿨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여전히 버마로 통칭되고 있었다. 우아한 자태의 여인 아웅산 수지(70)는 버마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버마 국민은 그를 ‘다우(Daw, The Lady)’로 부르며 경모한다. 건국의 영웅 마웅 아웅산 장군의 부인, 즉 어머니의 타이틀을 상속한 셈이다. 국제사회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이름으로 수지를 절대선(善)의 화신으로 칭송하는 반면 그와 버마 국민을 탄압하는 군사정부를 악(惡)으로 규정했다.
2001년 세계 인권의 심장, 스위스 제네바에 ‘On-Line Burma Library(OBL)’가 개설된 것을 계기로 버마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각종 인터넷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범람하는 각종 ‘수지 문건’을 읽은 필자가 어렵사리 두 차례 현지를 탐문한 뒤에 글을 썼다. 은밀하게 ‘레이디’의 측근도 잠시 만났다. 나라 밖에서 모은 작은 마음의 징표를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지의 상황은 바깥에서 듣던 것처럼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군사정부가 그토록 오래 집권한 것은 국민의 신뢰가 전무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 인도와 중국 사이의 긴장을 십분 활용하는 등 국제적 역학관계를 적절히 이용한 외교술이 돋보였다. 오지를 연결하는 지방도로, 교량과 수리시설의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에 감사하는 지방 주민도 많았다.



노련한 군부, 숭고한 반대자

소수민족의 정치적 요구를 적절히 수용해 세력균형을 이룬 점도 점수를 얻을 만했다. 또한 개방정책을 통해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했고, 선진 외국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양성체제를 만든 공적도 작지 않았다. 한마디로, 체제의 원천적 정당성 문제를 접어둔다면 군사정부는 한 나라를 이끌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오로지 민주적 이상에 의지해 ‘숭고한 반대자’의 길을 걸은 수지와 이름뿐인 그의 정당(NLD)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군부를 지원하는 결과가 된다며 외국 자본의 투자를 말리고, 심지어는 버마에 여행조차 오지 말라는 당부를 당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는 수준이었다.   
정말이지 답답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통합된 국내 민주세력, 국제사회의 압력,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화답하는 군부 내 세력이 존재해야만 그나마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당시로는 셋 중 어느 하나도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이면 버마에도 라모스가 출현할 것인가’라는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필리핀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피델 라모스의 선례처럼, 군사정부를 문민정부로 대체하는 과도기에는 새로운 시대정신에 개명한 군인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정석의 수순인 듯했다.     



조지 오웰의 나라

2015년 11월에 다시 찾은 미얀마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희미하게나마 출구가 보였다. 지난 10여 년 동안 국제사회의 압력은 한층 강도를 더했다. 군부 지도자들도 한결 유연해졌다. 강경·온건세력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긴 힘들 것이다. 국내 시장의 개방도 가속화했다. 외국 자본의 도입으로 산업이 탄생했다.
“미얀마에서는 환경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도무지 공장이 없으니까.”
이런 얘기는 이제 옛말이 됐다. 미얀마는 1997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가입했고, 2014년에는 의장국이 되기도 했다. 2011년 11월에는 국가인권회가 설립됐다. ‘독립된 기관’일 것을 요구한 유엔의 기준에는 한참 미달하는 ‘알리바이 기관’이지만, 인권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는 국가기관이 탄생한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일이다. 희망에 가득 찬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작가 조지 오웰은 버마와 인연이 깊다. 그는 오래전부터 버마 지식인들에게서 ‘위대한 예언자’라는 평판을 얻었다. 오웰이 버마를 염두에 두고 3권의 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제목이 명시하는 ‘버마 시절(Burmese Days, 1934)’에 더해 세계인의 고전이 된 ‘동물농장(Animal Farm, 1945)’과 ‘1984년(Nineteen eighty Four, 1949)’도 버마 이야기라는 것이다.




‘버마 시절’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버마 상황을 그린 일종의 연대기다. 청년시절 식민지 경찰로 근무한 오웰 자신의 체험이 투영됐다. 주인공인 영국 관리가 자살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몰락을 상징한다고 읽힌다. 사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오웰은 그 시절 현지인의 풍습에 따라 손마디마다 문신을 새겼다고 한다. 아직도 버마의 시골사람들은 문신을 즐긴다. 총탄을 막아주고 뱀에게 물리지 않게 하는 부적이라고 믿는다.
1947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국 버마는 복수정당제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했고, 1950년대엔 아시아에서 가장 전도양양한 신생국가로 비쳤다. 비옥한 땅, 식견 높은 정치지도자, 풍성한 문화인,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정착 등 모든 면에서 모범국이었다.
그러나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네윈 군사정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그 결과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다. 바로 ‘동물농장’의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돼지들은 인간의 농장을 반란으로 무너뜨리고 동물공화국을 세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혁명’ 슬로건을 내걸지만 돼지계급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라는 단서가 덧붙여진다. 버마의 군부가 곧 돼지다.
‘1984년’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이 처참하게 유린되는 전체주의 사회를 그렸다. 엄혹한 경찰국가, 무자비한 군사독재에 시달리는 미얀마인의 일상이었다. ‘조지 오웰 독서 클럽’이 불온단체로 낙인찍히고, 그의 작품이 유통 금지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오웰은 폐결핵으로 죽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병상에서 구상한 작품의 제목은 ‘흡연실 이야기(A Smoking Room Story)’다. 불과 3000~4000단어 분량의 단편소설을 구상한 것이다. 이상에 불타는 영국 청년이 식민지 버마의 습한 정글 생활 끝에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쓸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아우트라인과 몇 개의 문장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담배와 폐암의 상관관계에 대한 예언적 내용을 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식민지 경영(담배)은 국제적 평화공동체(인체)를 파괴하는 암적 제도라는 메시지를 담지 않았을까. 어쨌든 작가의 버마 사랑이 각별했던 만큼 이 나라에서 작가 오웰의 지위는 신화적이다.



凍土에 핀 희망의 싹

킨 마웅 소는 양곤의 택시 운전사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요행히 아내와 아들을 얻었다. 1993~94년 양곤대 역사학도이던 그는 입학한 학교 대신 세칭 ‘인세인(In Sein)대학’을 졸업했다. 인세인은 악명 높은 정치범 감옥이다. 발음대로 ‘정신 나간 놈들(insane)’의 수용소라는 냉소적 해학이 통용된다. ‘인세인대’ 출신을 채용해줄 직장이 없었기에 자영업자의 길을 택했다. 양곤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택시 운전사는 대부분 학생운동권 출신이라고 한다. 오웰도 근무한 적 있는 이 견고한 식민지 건물은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역사박물관으로 변한 서대문형무소가 연상된다.
마웅 소에게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성지들을 안내해달라고 주문했다. 유니버시티 애비뉴 54번지, 수지의 저택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과거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다. 양곤대 중앙도서관의 사서주임은 어색한 웃음으로 그를 맞았다. 그의 학생 시절을 기억하는 듯했다. 대학 정문 오른편에 철망으로 가둔 녹지가 보인다. 오래전에 학생회관이 서 있던 자리다. 네윈 집권 시절에 학생회관을 철거하고 새들의 놀이터로 조성했다고 한다.
수위는 ‘허락 없이’ 철망 안을 들여다보는 외부인에게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철망 너머 보 아웅 키유(Bo Aung Kyaw)의 기념비가 마구 자란 초목 사이에 서 있다(‘보’는 ‘지도자’라는 뜻). 스산한 풍경이다. 1938년 12월 20일, 영국 경찰의 곤봉에 맞아 죽은 최초의 학생이다. 붉은 벽돌의 바고(Bago) 남학생 기숙사는 아웅산이 학생 시절에 기숙한 건물이다. 버마 독립운동의 요람인 셈이다.   
양곤대 웹사이트에선 뜻밖에도 수지의 동영상이 방영된다. 영어 메시지다. 대학발전위원장의 일을 맡아 기부를 독려하는 역할이다. 국제적 명성을 감안하면 더없는 적격자이지만 사연이 궁금하다. 양곤대 법학부의 전임교수는 단 3명이다. 강사 10명과 외래교수 3인이 일손을 더한다. 학생 수도 나라의 규모를 감안하면 너무나 적다. 군인은 본능적으로 법률가를 싫어한다. 우선 말이 많은 데다,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할 장소를 마련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캠퍼스에 한국국제교류재단(The Korea Foundation)의 흔적이 보인다. 반가운 일이다.  
아웅민 키네는 갓 17세가 된 고등학생이다. 2015년 3월 10일, 양곤에서 100여 마일(약 160km) 떨어진 중소도시 레파단에서 가두시위가 일어났다. 정부가 공표한 ‘학원안정법’ 제정을 반대해 나섰다. 일부 지역에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비밀 연대조직이 결성돼 있다고 한다. 경찰의 무차별 폭력이 뒤따랐다. 3월 23일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린 사진 한 장이 소년을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다. 포효하는 듯 공중에 몸을 날리며 소리치는 소년을 에워싸고 10여 명의 정복 경찰이 곤봉 세례를 퍼붓는 사진이다.
소년은 2개월 이상 타라와디 감옥에 감금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됐다. 어린 나이를 감안한 재판부의 배려라고 했다. 소년은 국가인권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했고, 인권위는 이례적으로 경찰이 시위진압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는 의견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인 ‘집회 시위의 자유’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국제 인권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미얀마에는 최소 6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용돼 있다. 지속적인 국제적 압력에 답하듯 2015년 4월 테인 세인 대통령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약속을 이행하는 대신 바로 다음 날 대학생 둘을 새로 구속했다. 


“나의 무대는 거리와 법정”

총선을 한 주 앞둔 10월 말, 감금된 60여 명의 레파단 시위학생은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11월 17일 양곤의 국립병원에서 만난 두 학생은 물만 마시면서 각각 24일, 22일을 버텼다고 했다. 그들은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에 들떠 있었다. 1시간 면담하고 나오는 우리의 뒤를 한 무리의 승려들이 이어받았다. 몇 시간 후, 학생들이 단식을 풀고 감옥으로 되돌아가 장기투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나라 불승들의 도덕적 권위를 확인케 하는 장면이다.
로버트 산 마웅은 특이한 이력의 변호사다. 여섯 차례 정치범으로 체포됐고 총 13년간 복역했다. 감옥 안이든 밖이든 버마의 모든 정치범 뒤에는 그가 버티고 있다. 그는 2012년에 정지됐던 변호사 자격을 되돌려받았다. 2015년 마틴 에널스 인권상(Martin Ennals Award for Human Rights Defenders)을 수상했다. 작고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이름을 따서 1993년에 창설된 이 상은 ‘인권운동가의 노벨상’이라는 별칭이 따른다.
양곤 시내 허름한 거리에 자리한 옹색한 거소 겸 사무실에 ‘위생법 클리닉(Hygienic Legal Clinic)’이라는 당호(堂號)가 붙어 있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드는 법률사무소라는 뜻이다. 온갖 잡다한 문건이 빼곡히 들어찬 한쪽 벽면 중심에 수지의 사진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는 수지가(家)와 각별한 관계가 있다. 1954년 5월 26일 신생아 로버트를 세상의 빛으로 받아낸 사람은 타워레인 병원의 수간호사이던 수지의 어머니 다우 킨 키였다. 후일 로버트는 수지의 백부가 운영하던 법률사무실에서 실무 연수를 마치고 변호사가 된다.
버마의 학생 민주화운동은 1974년 12월 세칭 ‘우 탄트 항거(U Thant Uprising)’로 시작됐다. 유엔 사무총장(1961~1971)을 지낸 우 탄트가 그해 사망했다. 그는 네윈에 의해 축출된 우 누 총리의 측근이었다. 국제적 명망가 우 누가 미국에서 반정부운동을 벌이자 네윈은 국경을 차단하고 탄압정치를 강화했다. 국민의 기대와 달리 네윈은 우 탄트의 국가장(國家葬)을 거부했다. 양곤대 학생들이 학교 구내에 묘역을 조성하고 추도식을 거행하자 경찰의 무차별 총격과 체포가 뒤따랐다.
로버트도 그때 체포됐다. 40년 고행의 시작이었다. 로버트는 자신은 절대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소신을 천명한다. 모든 정치가는 권력의 편이고 자신은 민중의 편임을 거듭 강조한다. “만약 수지가 요청할 경우 인권위원이라도 맡으면 어떠냐”고 떠봐도 그의 반응은 단호했다. “나의 무대는 거리와 법정이다.”   



주부에서 戰士로

마 탄다르는 11월 총선에서 수지의 당(NLD) 후보로 하원의원에 선출돼 2016년 2월 정식으로 등원한다. 지역구는 이라와디 지구의 엔메타운(Enmae Township). 그는 2014년 8월 군부의 총탄에 남편을 잃었다. 국제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코 파게티(Ko Par Geti) 사건이다. 언론인이던 남편은 군부의 비리를 취재하다 살해당했다. 서둘러 암매장한 그의 시체가 발견됐다. 군부는 그가 무기를 뺏으려 했기에 사살했다며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그를 살해한 군인은 처벌되지 않았다.
아내는 상·하 양원에 청원을 냈으나 감감무소식이다. 다만 청원을 받은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에 진상조사를 지시했다. 인권위는 두 차례 의례적으로 안부를 물었을 뿐이다. “당신이 국회에 등원하면 진상조사와 가해자 처벌이 이뤄질 것 같으냐”고 묻자 마 탄다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의 문제”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건넨 작은 부채에 그려진 수지의 얼굴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2008년 제정된 미얀마의 새 헌법은 별도의 장(7장)을 두고 다마토(Damadaw,버마 군대)의 특수한 지위를 명시했다. 이전 헌법에도 유사한 조항이 있었지만 한층 강화됐다. 버마 사회의 위계질서는 어김없이 군(軍)-관(官)-민(民) 순이다.
1988년 8월 8일, 그 견고한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Four 8(8888)’로 불리는 국민 봉기가 일어나자 아웅산 수지의 인생은 극적으로 바뀐다. 외국인 학자 남편과의 사이에 자녀를 둔 평범한 인텔리 주부이던 그가 졸지에 버마 국민의 영웅 아웅산 장군의 후계자로 부상한 것이다. 어머니의 임종과 장례를 위해 일시 귀국한 그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버마 국민의 ‘영구 인질’이 됐다.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군부는 수지를 가택연금에 처한다. 1989년 군사정부는 국호를 미얀마로, 수도 랑군을 양곤으로 개칭한다. 영국 제국주의의 치욕스러운 잔재를 제거하는 ‘역사 바로 세우기’ 의식이었다.


헌법이 보장한 군부 특권

1990년 5월, 확신에 찬 군부는 대국민 약속을 지켜 선거를 치른다. 그러나 뜻밖에도 수지의 급조된 정당(NLD)이 압승한다. 당황한 군부는 선거의 효력을 부인한다. 그 선거는 버마족(族)을 포함한 미얀마 전체 인민의 헌법을 만들기 위한 제헌회의 대표를 일부 뽑는 의식이었다고 견강부회(牽强附會) 법리를 폈다. 2005년, 정부는 느닷없이 행정수도를 내륙에 새로 건설한 도시 ‘네피도’로 옮긴다는 포고를 한다. 비밀리에 몇 달에 걸쳐 진행된 건설공사에는 중국의 자본과 기술, 노동력이 동원된 것으로 드러났다.
457개 조문으로 치장한 새 헌법은 이례적으로 권력구조 조항을 앞세우고 기본권 조항(8장)을 뒷전으로 밀어낸다. 현실의 정직한 투영인 셈이다. 헌법은 혈통의 순수성을 대통령의 자격으로 요구한다. 즉 배우자나 직계존비속이 외국 국적을 보유하거나 보유했던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 물론 수지를 염두에 둔 규정이지만, 이러한 민족주의 정서의 뿌리는 깊다. 1947년 헌법과 1974년 헌법에도 유사한 조항이 있었다.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으로 20년 이상 외국에서 체류한 사람은 공직에 나설 수 없었다.
버마 군대의 지위는 헌법 이상으로 공고하다. 법전에 사형(死刑)은 있지만 1988년 이래 한 건도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형(私刑)은 만연한다. 군이 주범이다. 군의 힘은 지방으로 갈수록 강력하다. 군사적 필요를 내세우면 무제한 토지수용이 가능하고, 토지보상위원회는 군과 관이 지배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의 원성이 외국 인권단체의 귀에도 쟁쟁하다. 군의 협력 없이는 민주화가 불가능하다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세계사엔 그런 예가 많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에버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당은 전통적 지주계급인 융커를 기반으로 한 제국군부와 협상을 통해 과도기 질서를 잡았다. 군이 의회주의를 존중하는 대신 의회는 군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에버트-그레나’ 협정이다. 그러나 독일 군대는 특권만 누렸지, 히틀러의 집권을 사전에 막지 못했다.
미얀마에 김영삼(YS) 전 대통령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선출한 문민의 힘을 바탕으로 군부를 제압할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이 절실하게 기대된다. 그러나 버마 사회는 아직 그럴 만한 단계가 아닌 것 같다. 현재로서는 YS보다는 라모스가 정답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버마-미얀마 군부는 한국의 통치술을 배웠노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곤 했다.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3분의 1의 지명권을 준 유신헌법(1972~1980)이 미얀마 새 헌법의 모델이다. 한동안 양곤대 캠퍼스는 폐쇄, 분산, 이전을 거듭했다. 1975년 서울대 캠퍼스가 동숭동에서 관악산으로 이전한 것도 학생운동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묘수로 받아들인 이들이다.  
세계는 박해받는 민주화의 지도자 수지에게 과도한 호의를 보내왔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쥔 수지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인권과 민주라는 이상보다 힘과 목전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게 국제정치다. 정치 민주화 요구를 앞세워 경제 제재를 풀지 않는 미국과 이미 버마 땅 깊숙이 자본을 담근 중국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도 큰 과제다. 11월 선거는 수지 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상·하원 선출직 491석 중 390석을 확보해 군부에 자동 할당된 166석(25%)을 제하고도 절반을 훌쩍 넘겼다.



우려 속 축복과 격려

관심의 초점은 대통령 자리다. 헌법에 따라 하원, 상원, 군부가 각각 한 사람씩 후보를 내고 의원의 과반수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 누가 행정부의 수반이 되든지 국정의 최종 책임은 수지와 선거와는 무관하게 행정부를 견고하게 장악한 군부의 몫이다.
버마는 분명히 달라졌다. 적어도 양곤에서는 자유의 열풍이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그러나 분출하는 국민의 욕망을 정제된 제도로 체화하는 국가적 과업은 모두에게 인내와 희생을 강요한다. 가녀린 용모의 귀부인, 아웅산 수지의 앞날에 우려 섞인 사랑의 축복과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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