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분권의 새로운 방향 제시에 학계 주목
- 연정의 제도화, 의회의 집행부 견제 약화는 숙제
지호영 기자
2015년 12월 1일 오후 경기대 종합강의동 209호. 방청객 2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형준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의 발표가 이어졌다. ‘협력적 거버넌스 관점에서의 경기 연정 성과와 발전방향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박 교수는 “경기 연정은 여야가 서로 협력해 행정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정치적 비전이자 협력 거버넌스 체제”라며 “정치 행위자들 사이에 불확실성을 줄임으로써 거래비용과 갈등비용도 함께 줄여 도민의 정책 수용성을 높일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경기 연정은 2014년 6·4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마한 남경필 당시 경기지사후보가 제안한 일종의 협치(協治) 모델. 도의회 다수당인 야당이 ‘정책합의로 시작하자’고 역제안한 것을 남 지사가 받으면서 그 싹을 틔웠다. 야당 출신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를 임명해 그에게 보건·환경·여성 부문 업무를 맡겼고, 여야가 정책을 공동 실시하면서 집행부 권한이던 예산 수립 단계에 도의원들을 참여시키는 등 새로운 정치 실험을 이어갔다.
한국정책학회는 그간의 성과를 고찰하고 제도화를 모색하기 위해 이날 기획 세미나를 마련했다. 지방정부의 정치 실험을 주제로 학회가 세미나를 연 것은 이례적이다. 정책학회가 지방정부 정치·행정 현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주목한 것은 시의적절하다는 방청객의 평가가 나왔다. 권기헌 한국정책학회장(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도 개회사를 통해 “경기 연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협력적 거버넌스를 재현한다”며 “실천적 방안 모색을 통해 경기도의 성장 발전, 나아가 국정 상생(相生)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삐뚤삐뚤해도 한 방향으로
원래 연정은 복수의 정당이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의 좌우 대연정처럼 이념이 다른 정당들이 연립 정권을 구성하는 형태다. 경기 연정은 이와 성격이 좀 다르다. 남 지사가 생각한 개념은 정치를 하나로 모으는 ‘정치연합’이다. 구체적인 사항은 협의를 통해 만들어가자는 의지다. 지금까지 10차에 걸친 연정실행위원회를 개최하면서 수많은 협의를 했다. 그래서 경기 연정은 삐뚤삐뚤하지만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전거처럼 달린다.이날 세미나에서 박 교수는 도의회 회의록 언어 네트워크 분석, 화장장 건립 갈등사례와 도민 설문자료를 비교 분석한 자료를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김문수 전 지사 시절인 8대 의회 회의록과 남경필 지사 취임 후 구성된 9대 의회 회의록을 입수해 언어 네트워크를 분석해보니 김 전 지사 시절 14위이던 ‘야당’(당시 민주당)은 11위로 3계단 올라섰고, 8대 의회엔 없던 ‘연정’이라는 단어는 4위에 올랐다.
‘연정’과 ‘야당’이라는 단어가 회의록에 많이 등장한 것은 9대 도의회가 화합과 협치를 구현하는 증거라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8대 의회에선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의 주요 정책인 무상급식 예산 문제로 여야가 맞붙었던 만큼 ‘교육감’ ‘예산’이 빈도수 1, 2위였는데, 9대 의회에선 ‘학교’ ‘학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박 교수는 부천시와 경기도, 부천시민 간 갈등으로 백지화한 부천 추모의집(화장장) 추진 사례와 5개 기초단체가 참여해 추진 중인 화성시 공동형 종합장사시설 사례를 비교했다. 연정 이후 경기도가 갈등관리기구를 자임하면서 협력의 물꼬를 텄다는 게 그의 평가. 그러나 정치적 대립에 따른 거래비용은 줄었지만 내부 조정비용이 증가했고, 조정비용을 줄이려면 지속으로 신뢰를 구축해야 하는 만큼 연정의 제도화가 숙제로 남았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1년 3개월가량 된 경기 연정으로 정부나 정치에 대한 도민의 신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아졌고, 정책 수용성은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연정은 도민 행복을 위한 실천적 수단으로 정책합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로 나선 이영미 경기대 교수는 “연정은 수단이고, 목적은 도민 행복과 삶의 질 향상인 만큼 ‘아웃풋(결과)’과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는 ‘아웃컴(성과)’까지 평가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반면,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는 “의회 고유 권한인 견제기능 약화와 생산적인 정쟁의 실종은 장기적으로는 연정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도지사에게 통치 안정성을 부여하는 쪽으로 흐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경기 연정’ 주체들이 세미나장에서 손을 맞잡았다. 김현삼 도의회 새정연 대표의원, 강득구 의장, 남경필 지사,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 이승철 도의회 새누리당 대표의원(왼쪽부터). 지호영 기자
“성긴 소쿠리를 탄탄한 대야로”
세미나 발제자인 김종갑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독일 뮌헨 광역시의 연정과 경기 연정을 비교하면서 정부 형태 중 기관대립형(presidential system), 기관융합형(parliamentary system) 유형을 소개했다. 대립형은 권력분립주의에 입각해 지자체의 의사결정과 집행 기능을 각각의 기관에 분립시켜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고, 기관융합형은 의사결정을 집행부와 의회가 상호 공유하면서 행정 능률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와 같은 대립형 유형인 뮌헨 시 시장은 사민당(SPD) 출신, 다수 의석은 기사당(CSU)이 차지했지만 의회가 정당 간 연합을 통해 집행부 장관직을 분점하는 연정을 채택했다.김 조사관은 “뮌헨 시는 대립형이면서도 정당 연합을 통해 내각을 분점하는 연정 유형의 대표적 사례”라며 “뮌헨의 사례를 볼 때 협치 연정모델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려면 비례의석을 확대하고, 정당의 설립·취소 요건을 완화하고, 신생 정당 진입장벽을 낮추는 다양한 제도적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세미나의 두 번째 세션에서는 ‘경기 연정의 제도적 공고화 방안’이 집중 논의됐다. 여야가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만든 ‘성긴 소쿠리’를 ‘탄탄한 스테인리스 세숫대야’로 만들자는 논의였다.
‘경기 연정의 의의와 성공조건’을 주제로 발제에 나선 박상철 경기대 교수는 “경기 연정 기본조례(안) 입법 TF를 통한 연정의 제도화를 준비해야 한다. 입법 TF를 구성할 때에는 여·야·주민대표가 참여해 협력 경험과 사례를 분석하고 입법화를 위한 기초자료 준비에 나서야 한다”며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연정의 제도화는 정치권이 개헌을 논의할 때 주요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헌법 제8장 지방자치의 제117조, 118조에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헌법 조항에는 지방자치단체와 의회 설치 및 의원 선임 방법 등을 법률로 정하도록 돼 있는데, 여기에 연정의 헌법적 근거와 주민의 정치적 결정권(주민투표 등)을 추가해 법률로 정하자는 주장이다. 그는 경기연정의 제도화를 위한 롤모델로 오스트리아 연정 시스템 도입을 제안하면서 “단계별 상설 연정위원회 구성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토론자로 나선 이용모 건국대 교수도 “경기 연정이 꽃을 피우려면 헌법, 정당법, 선거법 개정과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한 제도 도입이 필수”라며 “내년 총선을 기점으로 한국형 연합정치 형태를 명확히 제시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고 분권형 개헌으로 가는 힘을 모으면 경기도의 작은 연정이 미래 선진적 정치제도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남경필 지사, 강득구 경기도의회 의장, 이기우 사회통합부지사, 김기언 경기대 총장,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생 등 각계의 ‘연정 관계자’가 다수 참석했다. 특히 이 부지사는 발제자, 토론자들의 발언을 메모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켜 방청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