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호

새 연재 | 조선의 아버지들

멸문지화 자식들에게 “벼슬길 오른 듯 당당하라”

유배지 정약용의 ‘치마폭 훈계’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1-12 10: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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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은 정조의 총아였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문제로 집안이 몰락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아내의 낡은 치마폭을 잘라 만든 서첩에 20대 두 아들에게 보내는 교훈을 적었다. 가족이 위기에 처할수록 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말라는 당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르침이다.
    기세 좋게 잘나가다가도 갑자기 맥없이 꺾이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인생은 그럴 수가 있다. 그럴 때 위기에 빠진 가장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선 후기에도 한순간에 끝없이 추락한 이름난 사내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 오늘날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바로 그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정약용은 정조의 총아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천주교 문제 때문에 그의 온 집안이 몰락했다. 장래가 유망했던 정약용은 서남해안 강진의 배소(配所, 귀양지)로 쫓겨났다. 그는 18년 동안 그곳에서 가난과 고독을 벗하며 늙어갔다. 하지만 정약용의 푸른 뜻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학문을 갈고닦아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뜻을 세웠다.
    정약용에게는 멀리 경기도 양주 마재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에 시달리며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아버지 정약용이 절해고도의 벼랑 끝에 선 절박한 심정으로 가족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피첩’이 있다. 거기에는 두 아들에게 주는 일종의 가계(家戒), 즉 교훈이 기록돼 있다. 이 글은 바로 그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고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다. 현대는 정약용이 살던 조선 후기보다 훨씬 위험하고 불안정하다. 강요된 퇴직, 사고, 질병 등 일상적 위기가 삶을 짓누른다.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버지 정약용’에게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의 청고한 기개와 의연함을 떠올리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노을빛 치마의 가르침

    지난 10월 중순, 국립민속박물관은 정약용의 귀중한 유물 한 점을 언론에 공개했다. ‘하피첩’(보물 제1683-2호)이 그것이다.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에 애틋한 마음 전해왔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으로 꾸며,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1810년 초가을이었다. 죄인 정약용은 이미 10년째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방될 조짐은 거의 없어, 유배는 어느덧 기약 모를 일이 되고 말았다.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그리움과 걱정은 더욱 깊어졌다. 그 무렵 아내 홍씨 부인이 보낸 낡은 치마가 강진의 유배지에 도착했다. 시집올 때 아내가 입은 활옷, 곧 결혼예복이었다. 다홍치마 5폭이었다.
    정약용은 아내의 정을 가슴에 새기며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이태 전에 수리한 다산초당의 동암(東菴)에서였다. 그는 낡은 치마폭을 자르고 중국산 종이를 오려붙여 아담한 서첩 하나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이 서첩을 자신과 홍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주려고 했다.
    당시 큰아들 정학연(丁學淵·1783~1859)은 28세, 둘째아들 정학유(丁學遊·1786~1855)는 25세였다. 그들에게 줄 서첩은 ‘하피첩’이라 했다. ‘붉은 노을빛(霞) 치마(帔)로 된 서첩(帖)’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이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아내와의 사랑을 추억했고, 아들들에 대한 자신의 훈계에 애틋함을 더했다.
    정약용의 문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피첩’의 제작 경위를 자세히 기록한 글 하나가 발견된다. ‘하피첩에 제함’(‘다산시문집’, 제14권)이다.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그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나는 이것(아내의 활옷)을 잘라내어 조그만 첩자(帖子)를 만들고, 붓끝이 가는 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 두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훗날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양친 부모의 손때 묻은 자취를 바라보면 그리운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 아닌가.



    ‘하피첩’은 이렇게 탄생했고, 그 집안의 가보가 돼 대대로 전해졌다. 서첩에 담긴 정약용의 가르침은 길이 후손들의 삶을 이끄는 지표가 됐다. 그러나 1950년 여름, 6·25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서첩은 안타깝게도 분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갑자기 2005년,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잇는 어느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짧은 봄날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약용의 가족들은 남부러운 줄 몰랐다. 그의 집안은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조상 대대로 홍문관의 영예로운 벼슬을 거듭해 ‘8대 옥당(玉堂, 홍문관) 집안’이란 명성이 자자했다.
    영조 때는 한동안 조정에서 배제되는 등 곤경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정조는 탕평책을 힘써 추진해, 노론 위주의 조정에 일부 남인 학자를 등용함으로써 새로운 기풍을 조성했다.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등용해 훗날 영의정에 임명하기도 했다. 청년학자 이가환 등 남인의 젊은 재사도 여럿 발탁했다. 정약용도 그중 하나였다.
    1783년 정약용은 진사시에 합격했고, 6년 뒤인 1789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자 정조는 정약용에게 명령해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게 했다. 또 그를 ‘초계문신(抄啓文臣, 대신들이 추천한 유망한 청년 관리)’으로 뽑아 당대의 재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정의 반열에 서게 했다. 결과적으로 정약용은 삼사의 화려한 벼슬을 두루 역임한다. 경기도 암행어사에 발탁돼 상당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정조는 정약용의 재주를 아꼈다. 친상(親喪)을 당해 벼슬을 떠나 있던 그에게 화성 수축(修築)에 필요한 여러 도구와 기계를 설계하도록 명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훗날 정약용은 그때의 사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용(=정약용)이 이에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렸다. 활거(滑車)와 고륜(鼓輪)은 작은 힘을 이용해서 큰 무게를 옮길 수 있었다. 성을 짓는 일이 끝나자 주상(=정조)께서 말씀하셨다.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써서 돈 4만 냥의 비용을 줄였다.’
    -정약용, ‘자찬묘지명’


    정약용이 속한 남인은 조정의 소수파였다. 그럼에도 정조의 비호가 있었기에 그의 승진은 남달랐다. 30대 젊은 나이에 정약용은 병조참지(정3품)와 형조참의(정3품)라는 고위직을 역임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아마도 수년 뒤에는 정승 판서로 등용될 전망이 뚜렷했다. 1780, 90년대의 젊은 정약용과 부인 풍산 홍씨, 그리고 어린 두 아들에게는 인생의 봄날이 한껏 펼쳐졌다.



    겨울 내 건너듯 했건만…

    그러나 정조가 쓰러지자(1800년) 천주교 문제가 크게 불거졌다. 이미 1790년대에도 두어 차례 시비가 일어나긴 했다. 그래도 그때는 정조의 적극적인 보호 덕에 별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정약용이 ‘여유당(與猶堂)’이란 호를 사용하게 된 배경이 그것이다. 여유당은 ‘겨울 내를 건너듯, 이웃을 두려워하듯’ 조심스럽게 산다는 뜻이다. 정약용은 정치적 위기가 다가옴을 직감하고 이런 호를 지어 스스로 경계했지만, 다가오는 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조정에서 서학(西學) 즉, 천주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게 된 데는 당시 내외의 환경 변화가 작용했다. 18세기 초중반, 이웃나라 중국에서도 몇 차례 ‘교안(敎案)’ 곧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724년 옹정제는 중국인에 대한 천주교의 선교금지령을 내렸다. 자연히 중국의 천주교세는 위축됐다.
    설상가상으로 1742년 로마 교황 베네딕트 14세는 조상 숭배를 포함한 일체의 우상 숭배를 금지했다. 이후 중국과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의 제사를 폐지할 뿐만 아니라 사당에 모신 위패도 받들 수 없게 됐다.
    중국에서 천주교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빠진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에 천주교가 들어왔다. 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에서도 곧 천주교 문제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대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그런 정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지도적 활동을 수행한 것은 정약용 집안 사람들이었다. 1784년 1월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은 사신행차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그 영향으로 정약용의 형 정약종은 천주교 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조선을 대표하는 신학자가 됐다. 정약용의 또 다른 형인 정약전도 천주교 신자였고, 정약용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과 친밀한 이벽, 이가환, 권철신 등 서울의 남인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호자는 떠나고…

    조정에서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이 문제 된 것은 1791년의 ‘진산사건’ 때가 처음이다. 남인 학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앙상의 이유로 위패와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지한 사실이 발각됐다. 그러자 조정에 진출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이후 조정에서는 천주교 문제가 여러 차례 제기된다. 1795년, 결국 정약용은 조정에서 쫓겨나 금정찰방(충남 청양)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정조가 적극적으로 감싸준 덕분에 그해 겨울 다시 조정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형조참의에 이어 우부승지, 좌부승지가 돼 정조를 측근에서 모셨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 문제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은 줄어들지 않았다.
    1797년 신변의 위기를 느낀 정약용은, ‘자명소’라는 일종의 반성문을 국왕에게 제출했다. 젊은 시절 한때나마 천주교 신앙에 빠져든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책만 보고 만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기며 빠져들었습니다.”(‘자찬묘지명’) 정조는 그에게 쏟아지는 비판이 줄어들기를 희망하며, 이번에는 그를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보냈다. 이태 뒤 천주교에 관한 조정의 논란이 사그라지자 정조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동부승지에 제수하고, 도성에 들어오자 형조참의에 제수했다.’(‘자찬묘지명’)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문제는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것 같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사정이 일변했다. 왕조의 전통에 따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을 맡았다. 왕후 일파는 천주교 문제를 크게 일으켜 반대파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독점할 계획을 꾸몄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까닭이 거기에 있다.
    정약용 삼형제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존망의 기로에 섰다. 희생자 중에는 노론과 북인도 일부 포함됐지만, 대부분은 정조가 중용한 ‘남인 신서파’, 곧 남인 출신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정약)용의 형 약전·약종 및 이기양 ·권철신·오석충·홍낙민·김건순·김백순 등이 모두 차례로 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의) 문서들 가운데는 도리어 (정약)용의 누명을 밝게 벗길 만한 증거가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약용에게는) 형틀을 벗기고 의금부 안에서 자유를 얻었다.
    -‘자찬묘지명’



    두 아들에게 주는 家戒

    수사가 본격화하자 정약용이 천주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무죄방면될 가능성이 컸다. 다수의 대신은 정약용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대신 서용보가 그의 유죄를 강력히 고집하자 역풍이 불었다. 서용보는 일찍이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에 자신의 죄상을 적발한 사실 때문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결국 서용보의 주장대로 정약용은 중한 벌을 받았다. 그는 경기도 기장현으로, 그의 중형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됐다. 또 다른 형 정약종은 여러 교우와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해에는 ‘황사영 백서사건’까지 일어나 환란이 겹쳤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인데, 그는 요행히 박해를 벗어난 천주교회의 젊은 지도자였다. 황사영은 신유박해 사건의 참혹한 전말을 기록해 북경의 천주교회에 보고할 작정이었다. 그는 이 기회를 빌려 교황청에 청원하기를, 중무장한 함대를 조선에 파견해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담긴 극비문서가 국경에서 관헌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이로써 천주교에 대한 탄압의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정약용 집안은 초토화했다. 그야말로 ‘폐족’ 신세가 돼버렸다. 경상도 장기로 유배된 정약용은 다시 붙들려가 혹독한 문초를 당하고 이번에는 전라도 강진으로 내쳐졌다.
    한 해, 두 해 정약용의 유배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10년째가 됐다. 그는 곧 풀려나리라는 기대를 접지 않을 수 없었다. 1801년 그가 멀리 유배를 떠나올 때만 해도 큰아들 정학연은 19세, 둘째 정학유는 16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그들은 28세, 25세의 청년이 됐다. 유배지의 아버지는 그들의 성장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걱정 또한 많았다. 이 아이들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아비가 날마다 부지런히 훈도해도 부족한 점이 많을 텐데, 멸문의 화를 당해 가난과 한숨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천리 먼 길에 거듭 편지를 보내 타이른다 한들, 과연 자식들에게 무슨 효과가 있을지 아버지는 염려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특단의 조치를 결심했다. 정약용이 ‘하피첩’을 만든 배경이 그러했다.     
    나는 아직 ‘하피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안다. 서첩이 제작되던 그해 가을, 아버지 정약용이 동암(東庵)에서 쓴 ‘두 아들에게 주는 가계(家戒)’를 ‘다산시문집’에서 발견했는데,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하피첩’의 내용과 일치한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렇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내려준 훈계의 내용이 크게 다를 리가 없다.


    “옥돌로 보답하라”

    ‘가계(家戒)’에서 정약용은 장성한 두 아들에게 우선 ‘효제(孝悌)’에 힘쓸 것을 신신당부했다. ‘논어’에도 기록돼 있듯, 효제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효’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요, ‘제’는 동기간의 사랑을 나타낸다. 요컨대 가족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사랑을 말한다.
    ‘가계’에서 정약용은 ‘효제’의 개념을 좀 더 확장된 것으로 봤다. 그는 멸문지경에 빠진 정씨 일가 전체를 효제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는 4촌 또는 6촌까지 포함하는 친족공동체의 해체를 막고 결속을 다지라고 아들들에게 주문했다. 신유박해로 풍비박산이 된 그의 집안이었다. 모두가 벼슬을 잃고 세상의 외면을 받아, “가난이 극심해졌기에 한두 말의 곡식”을 이유로 친척들이 서로 “다투고 끔찍한 말까지 일삼아” “원수가 되기 쉬운 상황”이었다. 아버지 정약용은 그 점을 걱정했다.
    가문의 해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버지는 이렇게 주문했다. “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이쪽에서는 옥돌로 보답하라.” 우리가 마음을 넉넉히 써야만 “모두가 감동하고 기뻐하며 저절로 화목한 가문이 된다.” 위기에 처한 정씨 일가로서는 우선 “문호(門戶)를 보존”하는 것, 가족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다. 아버지가 이 점을 가장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어서 아버지는 절대 수도권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했다.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서울에 살 자리를 마련하라.” 그 이유는 간단했다. “문화(文華)의 안목(眼目)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죄인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시골집에 숨어 지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래에는 서울에서 가까운 십 리 이내에 살라. 가세가 쇠락하여 도성 안에 들어갈 형편이 못 되면, 근교에 터를 잡고 과일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생계를 유지하라. 그리하여 재산이 좀 모이면 서울 한복판으로 옮겨라.

    이 가운데 실학자 정약용다운 말이 포함돼 있다. 형편이 힘들면 서울 근교에서 과수며 채소를 재배해서 생계를 꾸리라고 했다. 정약용은 근교 원예농업의 경제적 가능성을 확신했고, 그래서 아들들이 상업적 농업에 종사하기를 권한 것이다. 19세기 초반, 서울은 인구가 팽창하고 있었다. 자연히 근교에 살며 원예로 재미를 보는 농민이 적지 않았다. 정약용은 아들들이 원예 농사를 잘 지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가 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서울·지방의 문화적 격차

    정약용의 훈계 중에는 우리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그가 아들들에게 ‘수도권 사수’를 주문했다는 점이다. 문제의 핵심은 서울과 지방의 현격한 문화적 수준 차이였다. 이것이 아버지 정약용을 괴롭히는 현안이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잠깐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내려가버린다면, 결국 대대로 비천한 무식꾼이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 정약용은 관직생활을 통해, 그리고 유배지에서의 경험을 통해 지방의 낙후된 문화생활에 절망했다. 그것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에게 수도권을 절대로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21세기까지도 이런 문제점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시민이 자녀 교육 때문에 값비싼 수도권 거주를 포기하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아버지 정약용은 언제나 명랑하고 밝은 마음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안 사람들은 세상이 태평해도 늘 걱정이 많다.” 그들 당사자뿐만 아니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 세상의 버림을 받아 벼슬길이 막혀 원망하고 지내는 부류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절망감이 깊으면 도리어 재기의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렇게 부탁했다. “진심으로 너희에게 당부하거니와 늘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져라.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과 다름없이 당당하여라.” 늘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이것이야말로 처지를 반전시키는 열쇠다. ‘폐족’이 되어 어깨가 축 처진 가족에게 정약용은 이런 충고를 보냈다.
    아버지의 훈계가 말에 그칠 뿐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버지 정약용은 유배라는 형벌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삼았다.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지난 20년 동안 세상맛에 빠져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잊고 지냈다. 이제 마침 여가를 얻었도다!”(‘자찬묘지명’) 그는 유배지에서 곤경을 이기고 학문에 정진해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다. 후세는 그에게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흙수저’ 물고 재기하다

    큰아들 정학연도 일가를 이뤄, 19세기의 대학자 완당 김정희의 벗이 됐다. 초의선사를 김정희에게 소개한 이가 바로 그다. 정약용의 장손 정대림도 학문에 힘써 호군(護軍, 정사품 벼슬)이 됐고, 그 아들 정문섭도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정약용의 둘째아들 정학유도 부친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이어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정학유의 큰아들 정대무는 북청현감이 됐는데, 그를 포함한 삼형제는 온건개화파의 영수 운양 김윤식과도 교유했다.
    1910년, 이 나라는 민중의 비원 속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그들의 성취가 우리의 마음에 흡족하지는 못하다. 그러할지라도 아버지 정약용의 가르침이 세월의 모진 풍파에도 대대로 이어져 멸문지화에서 스스로 벗어난 것은 큰 다행이다. 당시 정약용의 자식들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흙수저’를 물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르침을 가슴에 깊이 새긴 덕분에 재기할 수 있었다.
    가족이 위기상황에 빠질수록 더욱 더 서로 배려하고, 가족의 문화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며, 당당한 태도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 정약용의 부탁. 이것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가르침일 것이다.  

    ● ‘아버지 정약용’의 가르침
    - 배려하고 양보해 가족해체를 막아라.
    - 서울에서 가까운 10리 이내에 살며 높은 문화 수준을 유지하라.
    - 늘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하고 진취적인 태도를 가져라.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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