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호

명사 에세이

1도 더 따뜻한 사회

  • 현명관 | 한국마사회 회장

    입력2016-01-11 13:5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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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집무실 창문 밖으로 차디찬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나목(裸木)들에 시선이 가고서야, 비로소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음을 실감한다.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을 드러낸 가지들은 침묵 속에 묵묵히 혹한을 견뎌내고 있다. 모진 바람이 지배하는 시간을 인내하고 나면 가지들은 다시 꽃을 잉태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북풍한설에 맞서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굳건함의 이면에는 오기와 열정, 생에 대한 낭랑하고 영롱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등단작 ‘나목’의 마지막 구절처럼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은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얼마 전 우리 직원들과 함께 김장김치를 담갔다. 추운 날씨에도 300여 명이 참여해 정성껏 손질하고 버무린 김치는 무려 9t, 1200상자에 달했다. 수천 포기 김장김치 상자가 차곡차곡 쌓인 렛츠런파크 서울(구 서울경마공원) 주차장은 온통 붉은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2015년 11회를 맞은 ‘사랑의 김치나눔행사’는 연말연시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김장김치를 통해 따뜻함을 나눠온 한국마사회의 전통 있는 봉사활동이다.
    매년 해온 행사이지만 2015년에는 조금 더 특별했다. 꽃마차를 동원해 김장김치를 싣고, 렛츠런파크 인근 비닐하우스촌을 방문해 일정한 주거가 없는 노인들에게 김장김치를 직접 나눠준 것이다. 도로 위 이목을 집중시키며 김장김치를 가득 싣고 나르는 꽃마차를 탄 기분 좋은 보람도 잠시. 비닐하우스촌의 너무도 열악한 상황을 마주하면서 김장 봉사의 뿌듯함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 한 켠의 무거운 부채로 변했다.



    反轉처럼 펼쳐진 풍경

    영하의 바람을 온몸으로 버티고 선 비닐하우스들은 한겨울 나목을 연상케 했다. 초등학교 여자아이 키만한 높이의 비닐하우스 대문을 열고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가자 이불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70대 할머니 두 분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두어 평 남짓한 방 안 가득한 한기와 켜켜이 쌓아둔 연탄, 옷가지와 어지러이 엉켜 있는 녹슨 생필품들이 이분들의 생활을 짐작게 했다.
    할머니들은 2평 남짓한 이 비닐하우스에서 20년을 살았다. 최소한의 주거생활도 보장되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이 이분들을 받아주는 유일한 안식처인 셈이다. 비닐하우스 속에서 20년의 세월을 나목처럼 살아낸 할머니들을 보면서, ‘봄에의 믿음’을 실현시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물, 전기 등 주거생활 필수조건조차 충족되지 않은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이곳에는 300여 가구의 주거난민이 살고 있다. 재개발 등 개개인의 굴곡진 사연에 떠밀리다 마침내 이들이 정착한 곳이 이곳 비닐하우스촌이다. 주민 대부분은 60~70대 노인층으로 차상위계층, 기초생활수급자는 물론이거니와 자식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수급 대상이 되지 못한 빈곤층이 절대 다수다.
    렛츠런파크와 불과 10분 거리의 인접한 곳에 반전처럼 펼쳐진 낙후된 풍경은 우리 사회 가슴 아픈 속살을 보는 듯했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비닐하우스, 판잣집, 움막 등에 거주하는 주거취약계층이 약 11만3000가구로 집계된다. 이들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은 사실상 상하수도 시설, 화장실, 전기배선, 가스 시설 등 주거에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시설을 지원받지 못해 주거복지 혜택으로부터 소외돼 있다.



    ‘나라 복지’ 틈새 메우기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오랜 속담이 있다. 표면상으론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의미이지만, 실은 가난의 책임을 개인에게 슬쩍 전가하는 듯한 말이다. 가난한 데는 가난한 자들 스스로에게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가난이 개인의 무능의 소치나 숙명처럼 여겨졌다면, 오늘날 빈곤 문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됐다. 복지예산 100조 원 시대를 열었지만 사회 양극화가 가속화하면서 제도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틈새 빈곤층 인구가 늘어났다. 굶는 사람은 줄었지만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근로 빈곤층(워킹 푸어)’도 점점 더 늘고 있다. 노령화, 글로벌화에 따라 노인, 결혼이주 여성, 탈북자 등 ‘신(新)빈곤층’의 문제도 심각하다.      
    물론 김장김치 한 포기, 연탄 한 장이 근본적인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 사회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온정이 이들에겐 혹한을 견디는 생존 수단이 될 수 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지만, ‘나라 복지’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한 틈새를 사회 구성원들의 온정과 땀으로 촘촘히 채워나간다면, 문제는 분명히 개선될 수 있다.  





    ‘봄에의 믿음’

    한국마사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말(馬)’이다. 말의 평균 체온은 37.5도로 사람의 체온보다 1도 더 높다. 그 때문인지 말을 활용해 우리 사회 온도를 높일 수 있는 나눔 활동도 다양하다. 매년 경마를 통해 나온 수익 중 1조4000억 원이 국가와 지역사회, 농어촌 상생 발전을 위해 환원된다. 그뿐만 아니라 대표적 사회공헌사업의 일환으로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청소년을 재활승마를 통해 치료하기도 하고, 렛츠런파크 서울의 경주마 배설물 중 말똥은 친환경 비료로 가공돼 어려운 여건 속에 있는 전국 농가에 큰 보탬이 되기도 한다.
    신년에는 ‘말(馬)’의 따뜻한 기운이 곳곳에 전파되는 1도 더 따뜻한 사회를 소망해본다. 조금 더 어둡고 낮은 곳에 관심을 가지고, 각자의 재능과 땀을 함께 나눠 서로가 서로의 ‘희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나눔이란 거창한 지식이나 재산,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이자 의지다. ‘봄에의 믿음’은 겨울 동안 헐벗은 나목들뿐 아니라 더 따뜻한 사회, 더 행복한 새해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현 명 관


    ● 1941년 제주 출생
    ● 서울대 법대, 일본 게이오대 석사(경제학), 제주대 명예경영학박사
    ● 제4회 행정고시 합격, 삼성물산 대표이사, 전경련 상근부회장,
       민화협 상임의장
    ● 現 (사)창조와 혁신 상임대표, 한국마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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