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호

실패한 듯한 은퇴와 현명한 은퇴 가르는 세 가지

[4050 은퇴플랜] 돈의 흐름, 관계의 씨앗, 자신의 역량 홍보

  • 최익성 플랜비디자인 대표

    입력2026-06-15 07: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실패한 ‘듯한’이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의미

    • 자연스레 카드 꺼내고, 귀하게 여겨주는 사람 많아야

    • 결정적으로 나를 귀하게 써주는 사람 있어야

    • 늦은 때는 없다…은퇴는 도착점 아닌 ‘전환점’

    은퇴는 준비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사건이다. AI생성 이미지

    은퇴는 준비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사건이다. AI생성 이미지

    이 글의 제목을 정하기 전 한참을 ‘실패한 은퇴’와 ‘실패한 듯한 은퇴’ 사이에서 고민했다. ‘실패한 은퇴’라고 쓰면 그것은 판결이다. 그런데 누가 누구의 은퇴를 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50세에 직장을 나온 것이 실패인가. 매달 들어오는 돈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 실패인가. 만날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실패인가. 어렵고 고단한 상황, 그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듯한’을 선택했다. 지금 이 순간 그렇게 보일 뿐,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 작은 여지를 닫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 글은 막연한 위로를 건네려는 것이 아니다. ‘듯한’이라는 여지가 남아 있을 때 정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가능성은 그것을 직시하는 사람에게만 열린다.

    은퇴 후 행복한 사람들에게 있는 세 가지

    오래 이 일을 하다 보면 은퇴 이후의 삶에서 뚜렷한 패턴이 보인다. 행복하게 나이 드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놀랍도록 뻔한 것들이다. 뻔하다는 것과 쉽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갖춘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첫째, 돈 앞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단순히 부자라는 뜻이 아니다. 밥 먹는 자리에서 계산서가 나올 때 자연스럽게 카드를 꺼내는 것.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 커피 한잔 살 수 있는 것. 손주 생일에 용돈 봉투를 건네면서 주저하지 않는 것. 이 작은 장면들이 노후의 존엄을 만든다. 큰돈이 아니다. 작은 돈 앞에서 위축되지 않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의 구조를 만들어뒀다. 국민연금이 나오기 전까지의 공백기, 이른바 연금 보릿고개를 어떻게 건너느냐를 미리 설계한 사람들이다. 목돈이 있는 것과 매달 들어오는 돈이 있는 것은 심리적으로 전혀 다르다. 목돈은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 사람이 쪼그라든다. 외출이 줄고, 약속이 줄고, 결국 주위 사람도 줄어든다. 



    매월 들어오는 돈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면, 알파도 있다. 자문이든, 강의든, 파트타임이든 다양하다. 소규모라도 일을 통한 수입이 있는 사람들은 돈의 액수와 무관하게 태도가 다르다. 돈이 들어온다는 것이 경제적 문제이기 이전에 ‘내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현명한 은퇴는 얼마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매달 얼마가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었느냐로 결정된다.

    둘째, 귀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많다. 만날 사람이 많다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조건이다. 친구든, 지인이든, 옛 동료든 상관없다. 내가 연락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나를 찾아오는 관계를 말한다. 약속을 잡자고 하면 기꺼이 나오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이 관계적으로 고립되지 않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카카오톡 단체방이 열두 개여도 일대일로 편하게 연락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관계가 아니라 목록에 불과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의견을 구하고, 같이 있는 시간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다섯 명만 있어도 노후의 외로움은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이 관계들의 출처를 추적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재직 중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업계 모임에서 꾸준히 얼굴을 비추고,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조언을 건네며, 퇴직 전부터 동호회를 다니는 등 이런 노력이 쌓여 퇴직 후에 먼저 연락이 오는 관계를 형성한다. 퇴직 후에 새로 만들려는 관계는 깊어지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씨앗은 지금 심어야 한다. 귀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내가 먼저 그들에게 귀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셋째, 무엇보다 ‘귀하게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이다. 나의 능력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쓸모에 대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는 경제적 문제이기 이전에 존재의 문제다. 인간의 자존감은 ‘쓸모 있음’에서 나온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점, 내가 만들어낸 가치를 상대방이 인정한다는 점 등이 은퇴 후 정체성을 지탱하는 강력한 기둥이다.

    “당신이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 한마디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자문이든, 강의든, 멘토링이든 형태는 무엇이든 좋다. 그런데 이 역시 퇴직 후에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재직 중에 업계 바깥으로 자신을 알려온 사람,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사람, 꾸준히 글을 쓰거나 강단에 섰던 사람 등 이런 사람들에게 퇴직 후 제안이 온다. 회사 안에서만 인정받아 온 사람은 회사를 나오는 순간 무명이 된다. 역량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역량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귀하게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퇴직 전에 이미 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였다는 뜻이다.

    ‘실패한 듯한 은퇴’의 세 가지 풍경

    현명한 은퇴의 세 조건을 거꾸로 뒤집으면 ‘실패한 듯한 은퇴’의 풍경이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쓰면서 주의하고 싶은 점이 있다. 이 풍경이 그 사람의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구조의 문제이자 타이밍의 문제이고,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던 것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돈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이다. 퇴직금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구조를 미처 만들어놓지 못했다. 목돈을 통장에 넣어둔 채로 매달 생활비를 꺼내 썼다. 처음 1년은 괜찮지만, 줄어드는 숫자를 보면 심리가 달라진다. 국민연금이 나오는 65세까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0년 넘는 시간이 남는다. 국민연금이 언제 나오는지 계산하는 버릇이 생긴다. 친구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계산서가 나오는 타이밍이 신경 쓰인다.

    그런 위축감은 얼굴에 드러난다. 상대방이 눈치채는 순간부터 만남은 어색해진다. 어색해지면 연락이 줄어들고, 연락이 줄어들면 관계도 좁아진다. 돈이 관계를 조이는 것이다. 돈이 없었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흐르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지 않은 것이 문제다.

    두 번째는 고립되는 사람이다. 단체방은 있는데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어색하다. 옛 동료에게 연락해 볼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왜 연락하나 싶겠지’ 하는 생각에 휴대전화를 내려놓게 된다. 퇴직 직후 몇 개월은 지인들이 밥 한번 먹자고 했다. 그 이후로 먼저 연락이 오는 사람이 없다. 이해관계가 사라진 자리에 어색함만 남는다.

    연락이 오는 선배들이 있긴 하지만, 만나고 나면 피곤하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서 훈수를 두기 바쁘다. ‘요즘 것들은 어쩌고’ ‘우리 때는 말이야’로 두 시간이 지나간다. 차라리 안 만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점점 좁아진다. 어느 순간 하루의 대화 상대가 배우자 한 명이거나 TV 속 사람들이다.

    외로움은 천천히 남은 삶을 잠식한다. 처음에는 ‘그냥 좀 심심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일상이 되면 무기력으로 바뀌고, 무기력은 우울증으로 넘어간다. 이 하강 곡선은 조용하고 느리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채기가 어렵다.

    세 번째는 아무도 찾지 않는 사람이다. 역량이 없는 것이 아니다. 퇴직할 때 후배들이 걱정했지만, 30년을 쌓아온 전문성을 믿었다. 그런데 퇴직 후 그 역량을 어디에 쓸지를 몰랐다. 재취업을 알아봤지만 나이 앞에서 막혔다. 지인을 통해 자문 자리를 알아봤지만 구체적 제안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회사 바깥에 없다는 것이었다. 재직 중에 단 한 번도 회사 밖으로 자신을 알릴 기회를 만들지 않았다. 세미나에 나가지 않았고, 글을 쓰지 않았고, 외부 네트워크를 만들지 않았다. 회사 안에서만 빛나던 역량은 회사를 나오는 순간 조용히 꺼진다. 이것이 가장 억울한 풍경이다. 분명히 뭔가를 가지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 그 허탈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늦은 때는 없다…은퇴는 도착점 아닌 ‘전환점’

    앞서 언급했듯, 이 화의 제목은 ‘실패한 듯한 은퇴’다. 그 단어 하나의 차이가 전부다. 삶은 한 장면으로 판결 나지 않는다. 60세의 어느 오후가 고독하다고 해서 70세의 오후가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퇴직 후 2~3년을 허둥지둥 보내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찾은 사람들이 있다. 60대 중반에 처음 강의를 시작한 사람, 65세에 처음 동호회에 나간 사람, 퇴직 후 5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은 사람. 이들의 공통점은 어느 시점에서 ‘지금이라도 시작하자’는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다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이 있다. 늦게 시작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50대에 심은 씨앗과 65세에 심은 씨앗은 같은 씨앗이지만 열매를 맺기까지의 시간이 다르다. 어떤 열매든 가능성은 살아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움직이는 사람에게 열린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명한 은퇴는 결과가 아니라 ‘설계’다. 현명한 은퇴를 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하나로 요약하면 그들은 은퇴를 도착점이 아니라 ‘전환점’으로 이해했다. 실패한 듯한 은퇴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퇴직을 ‘끝’으로 이해했다. 열심히 달려온 레이스의 결승선이자 이제 쉬어도 된다는 신호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 준비 없이 그 선을 넘고 나서야 깨닫는다. 결승선이 아니라 새로운 레이스의 출발선이었음을.

    현명한 은퇴를 향해 가는 사람들은 다르다. 돈의 흐름을 만들어뒀고, 관계의 씨앗을 심어뒀고, 자신의 역량을 바깥에 알려뒀다. 결승선을 넘는 순간 이미 다음 레이스가 준비돼 있다. 이 두 부류는 돈이 얼마 있느냐, 직급이 얼마나 높았느냐로 나뉘지 않는다. 같은 행동도 퇴직 전에 하는 것과 퇴직 후에 하는 것은 결과가 전혀 다르다. 현직이라는 배경이 있을 때 뻗어나간 손과 빈손으로 뻗어나가는 손은 상대방에게 전혀 다르게 닿는다.

    마지막으로 세 가지만 물어보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지금 40~50대라면, 아직 설계할 시간이 있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어도 된다. 첫째, 매달 들어오는 돈의 구조가 있는가. 둘째, 퇴직 후 65세까지의 공백기를 버틸 현금 흐름이 설계돼 있는가. 목돈의 크기보다 흐름의 설계가 더 중요하다. 셋째, 귀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지금 몇 명인가. 솔직하게 세어보라. 손에 꼽힌다면, 지금 씨앗을 심어야 한다. 어색함을 이기는 것이 관계 근육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이다. 회사 밖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내 이름을 검색하면 무엇이 나오는가. 없다면 지금부터 만들어야 한다. ‘귀하게 써주는 사람’은 내가 먼저 세상에 나를 보여준 사람에게 찾아온다.

    세 질문에 모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설계를 시작한 사람이다. 하나라도 막히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시작해야 할 때다. 은퇴는 준비한 사람과 그러지 않은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사건이다. 그 차이는 퇴직 후가 아니라, 퇴직 전의 조용한 시간 속에서 이미 결정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