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플레이어, 설계자들은 따로 있다
1987년 체제의 시효는 끝났다
코드를 짜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자유주의가 지면서 기독교가 소환된다
AI가 이성 역할, 인간은 탈세속화, 재영성화로…
열반의 상태도 데이터로 측정할 수 있는 시대
K가 제국이 된 이유, 다음 판은 아시아

박해윤 기자
역사학자 이병한(현재 광주과학기술원 전문위원·사단법인 다른백년 대표)은 책상 앞의 지식인이 아니라 현장을 밟는 탐문가다. 1000일 동안 100개 나라를 걸어서 통과하며 쓴 ‘유라시아 견문’(전 3권)에 이어 ‘아메리카 탐문’ ‘차이나 탐문’을 잇달아 펴냈다.
기자는 그가 쓴 ‘아메리카 탐문’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지금 ‘뉴 아메리카(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는 트럼프는 무대에 오른 상징적 플레이어일 뿐, 설계자들은 따로 있다.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J D 밴스가 그들이다. 이들은 트럼프를 앞세워 정치 교체가 아니라 문명 교체를 꿈꾼다. ‘코드’가 헌법을 대신하고 ‘알고리즘’이 정당을 대신하는 세계, 자유-민주-공화국에서 디지털-기독교-제국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미국이다.”
미국의 변화를 ‘문명 교체’라는 거대한 틀로 보는 그는 그 한가운데서 뜻밖의 질문을 꺼내 든다. AI가 이성의 자리를 대신할 때, 인간은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트럼프는 플레이어, 설계자들은 따로 있다
그는 언제라도 거리와 산을 걷고 뛸 수 있는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긴 파마머리부터 범상치 않아 보인다. 며칠 전 중국에서 돌아왔다고 하길래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다.어딜 다녀오신 건가요.
“송나라 옛 수도 개봉(開封·카이펑)에 다녀왔어요. 새로 구상하고 있는 미래 문명 3부작을 쓰기 위해서요.”
왜 개봉인가요.
“개봉은 농업 문명의 표준이 만들어진 현장입니다. 제가 볼 때 인류 문명은 지금 세 번째 단계로 진화 중인데, 첫 번째가 농업 문명이었고, 두 번째가 산업 문명이었어요. 세 번째가 지금 ‘디지털 문명’ ‘AI 문명’이죠. 그 초입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뿌리부터 천착해 보고 싶어서 농업 문명 편을 쓰려고 해요. 농업 문명의 표준이 중국이었잖아요. 그 패러다임이 완성된 때가 송나라였고요. 과거제도, 성리학, 지폐 같은 것들이 그때 만들어진 겁니다.
여름엔 뉴욕으로 갑니다. 뉴욕은 산업문명의 패러다임을 완성해 놓은 현장이지요. 거기서 앞으로의 미래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파이낸스는 어떻게 작동할까, 거버넌스는 어떨까 이런 걸 생각해 보려 합니다.”
현장을 직접 밟는 방식이 특유의 작업법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낸 책 제목들이 ‘견문’ 혹은 ‘탐문’인 것에서도 느껴지지만요.
“보통 작업을 그렇게 해요. 현장에 가서 관련 책들을 하루 종일 읽고,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면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영감이 떠오르죠. 책으로 읽는 것과 발로 하는 건 다르니까요.”
책 ‘아메리카 탐문’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뭐였나요.
“제가 1978년생인데요. 대학생 때 최초의 정권교체(DJ 정부)가 있었죠. 저도 2년 있으면 쉰 살이 되는데, 이른바 ‘87년 체제’라는 걸 저 나름대로 온몸으로 경험한 세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87년 체제’의 시효가 다 끝난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어요. 선거를 하면 할수록 당선되는 정치인들 수준은 더 떨어지는 것 같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 과거에 누가 더 잘못했나를 갖고 싸우잖아요. DJ가 발탁했던 분들이 지금도 여전히 나라를 운영하고 있고요. 오래전부터 좀 답답하다고 느꼈어요. 한국에는 돌파구가 전혀 안 보이는 것 같은데, 미국에는 뭔가 변화가 시작됐구나 싶었죠.”
미국에서 느낀 변화란 것이 오바마 대통령 당선부터를 말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오바마가 당선될 때 마침 미국에 있었는데 저도 처음엔 굉장히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걸 보면서 그도 결국 기득권 질서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존의 부패한 파이낸스 시스템을 다 살려준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화려한 레토릭으로 재선되는 걸 보면서 ‘아, 데모크라시가 거대한 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지금 새로운 미국을 만드는 사람들은 실리콘밸리를 주축으로 한 젊은 테크노 세력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세계화, 자유주의, 다문화주의를 반대하고 민족주의, 반자유주의, 백인-기독교 근본주의 기치를 내걸고 있어요. 이게 얼마나 성공할지 모르겠고, 지금은 가능성이 갈수록 떨어지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산업문명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운영체제(OS)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아메리카를 만들자고 나선 상황입니다.”
코드를 짜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책 ‘아메리카 탐문’의 저자 이병한은 “지금 미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사람들은 실리콘밸리 젊은 테크노 세력”이라고 말한다. 박해윤 기자
“틸은 1998년 페이팔을 창업할 때부터 꿈꾸어 온 게 있어요. 관료제 국가의 전면 해체입니다. 워싱턴의 딥 스테이트, 행정국가를 파괴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는 ‘선출되지 않은 수십만 공무원이 비대하고 무능한 연방 기구에 똬리를 틀고 앉아 세금을 축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면서 그 칼자루를 쥐게 된 거예요. 실리콘밸리에서는 그를 밤의 대통령, 그림자 대통령이라고 부릅니다. 틸은 미국의 다음 40~50년 판을 짜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딥 스테이트(deep state)’는 직역하면 ‘깊은 국가’, 즉 선거로 뽑히지 않았지만 실제로 국가를 운영하는 관료 집단을 가리킨다. 대통령은 4년마다 바뀌지만 FBI, CIA, 국무부, 국방부, 재무부 고위 관료들은 바뀌지 않는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이들이 실제 정책을 집행하고, 정보를 쥐고, 예산을 다룬다.
피터 틸 같은 실리콘밸리 우파들이 보기에 이 집단은 선출되지 않았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사실상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틸의 목표는 워싱턴에 수십 년째 똬리를 틀고 앉아 어떤 대통령도 쉽게 손대지 못했던 관료 권력 전체를 해체하겠다는 것입니다. DOGE(정부효율부)가 연방 공무원을 대량 해고하고, 규제 기관들을 축소하고, 행정 기능을 민간과 기술로 대체하려는 것이 모두 이 맥락입니다. 트럼프는 그 명분을 정치적으로 대중화한 상징이고, 실제 설계는 틸이 수십 년간 준비해 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선거로 뽑힌 정치인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진 관료 집단을 코드와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겠다는 것. 그것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MAGA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부통령인 J D 밴스의 행보도 매우 주목할 만하죠.
“밴스는 굉장히 상징적인 인물이에요. 러스트벨트 노동계급 출신으로, 해병대에서 예일대 로스쿨로,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38세에 상원의원, 40세에 부통령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죠. 하지만 그가 진짜 대표하는 것은 ‘올드 아메리카의 종식’이에요. 자유 민주 공화국을 뒤로하고 디지털 기독교 제국으로서 새로운 아메리카를 만들겠다는 것, 새 아메리카의 향배를 쥔 인물이 바로 밴스입니다.”
자유주의가 지면서 기독교가 소환된다
여러 주제를 갖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 대화의 주제는 이 인터뷰가 ‘AI시대 다시 보는 인문학’이란 점에서 미국의 디지털 운영체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기독교와 연결된다는 지점에 대해 더 묻고 싶습니다. 기계와 숫자, 논리가 지배하는 디지털 세상과 기독교라는 정신세계가 어떻게 연결될까요.“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은 중국을 이겨야 한다는 것,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서양이 계속 인류 문명을 주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죠.
지난 20세기를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이런 프레임은 맞지 않아요. 이번에 중국 가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는데 소림사가 상장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이건 완전한 초(超) 자본주의죠. 그래서 저는 ‘앞으로 세계는 좌우라는 이념 경쟁이 아니라 문명의 충돌’이라고 주장한 헌팅헌의 말이 더 실효성을 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젊은 테크노 세력은 더는 서양 문명의 핵심을 자유주의나 계몽주의에서 찾지 않아요. 중국도 저렇게 초자본주의로 가는 판에 그걸 내걸어서는 별 차별성이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서양의 뿌리로 다시 돌아온다면 역시 기독교다’ 그런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수백 년 해봤더니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해졌다고 보는 거예요. 가족, 공동체 그 해답을 성경적 질서에서 찾고 있는 거죠.”
지난 책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탈(脫)세속화, 재(再)영성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때부터 감지된 흐름이라고 보이는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10년 전 유라시아 여행을 했을 때 3년 동안 여행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탈세속화, 재영성화’였어요.”
좀 어려워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세속화(secularization)란 간단히 말해 ‘신이 물러난 세계’잖아요. 근대 이후 과학과 이성이 세계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가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났습니다. 신비와 의미가 걷히고 계산 가능한 합리성의 세계, 20세기 사회학은 이것을 문명의 필연적 경로로 봤습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소득이 올라갈수록 종교는 희미해집니다. 세속화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 명제가 무너졌어요. 세계가 더 종교적이 되고 있죠. 이것이 ‘탈세속화(de-secularization)’입니다.
탈세속화는 지금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정치 귀환이나 이슬람 부흥, 힌두 민족주의의 팽창, 러시아 정교회의 재건, 그리고 한국에서는 무속과 사주명리학, 타로에 대한 MZ 세대의 열광 같은 거겠죠.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방향은 같다고 봅니다. 합리성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백을 인간이 느끼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는 “AI가 이 흐름을 가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성의 영역, 즉 분석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일을 기계가 대신하면, 인간에게 남는 시간과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이성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향하겠지요. 의미, 관계, 초월, 몸의 감각, 공동체 등 이런 영성의 영역으로 말이죠.
‘탈세속화, 재영성화’는 단순히 종교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문명 전체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유라시아 여행에서 제가 느낀 징후들이 미국에서 일어났다는 걸 확인하고 약간 짜릿했어요. 결국 이게 메가트렌드인가, 인간의 거대한 뿌리로 돌아가는가 하는 질문이 들어왔지요.”
영성이란 개념을 어떻게 보세요.
“나보다 더 큰 어떤 것에 대한 ‘공속감(公屬感)’이라고 봐요. 나(I)라는 존재가 더 큰 우주나 세상과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죠. 현대인들은 그런 것에 대한 소속감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살기가 힘들고 예측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다 보니 인간으로서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각이죠.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돌아온 탕자’가 된 거랄까(웃음).”
AI 시대에 영성을 더 갈구할 것이란 말은 뭐죠.
“AI는 인간의 이성이 했던 역할을 대신해 주는 거잖아요. 9시 출근해서 6시 퇴근이라는 업무 시간은 이성을 발휘하는 시간인데, 그걸 AI가 훨씬 더 잘해 줄 거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엄청나게 벌 수 있어요. 하루 16시간 가운데 잠자는 시간 8시간 빼고는 텅 비어 있는 시간을 맞을 거거든요. 그렇다면 그 시간에 뭘 할까요? 저는 종교인들의 삶에 주목합니다. 그 텅빈 시간을 계속 수행하고 기도하면서 사시잖아요. 그 안에 분명히 깊은 맛이 있어서 하시는 거겠죠. 저는 우리가 맞이하는 시대의 영성에 대한 추구는 과거의 종교가 그대로 확산된다기보다 영혼의 갈망을 채워주는 다른 형태의 무언가가 나올 거라고 봐요. 이미 그러고 있죠.”
득도 과정도 데이터로 측정할 수 있는 시대
그는 이 대목에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득도(得道)의 과정도 데이터화할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을 펴면서 이를 게임에 비유하기도 했다.“롤 플레이 게임은 노력을 통해 자기 아바타의 역량을 강화해 가는 과정이잖아요. 운동도 마찬가지인데 이제는 구도의 과정도 데이터화할 수 있다고 봐요. 마음이 평화를 얻는 과정을 데이터로 측정하고 가시화하는 거죠. 뇌파라든지 심장 상태 같은 걸로요. 불가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라는 것도 데이터화할 수 있다는 거죠. 그걸 게임으로 만들면 레벨을 점차 올려가고 거기서 어떤 보상도 해줄 수 있고요.”
그의 주장은 얼핏 불경스럽게(?) 들린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미 명상 앱은 심박수를 측정하고, 뇌파 기기는 집중의 깊이를 수치로 환산하고 있지 않은가.
오랜 수행자들의 뇌를 MRI로 찍어보면 일반인과 다른 패턴이 나온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그의 말은 처음에는 억지스럽게 들렸지만 따지고 보면 종교가 오래전부터 해온 일이었다. 수행의 단계를 나누고, 득도의 경지를 위계화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진전을 인정해 주는 것. 그의 제안은 어쩌면 그 오래된 구조를 디지털 문명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대화의 마지막 챕터로 넘어가기로 했다.
K가 제국이 된 이유, 다음 판은 아시아
유라시아와 미국 중국을 탐문한 그는 한국의 미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책을 보면 미국의 설계자들에게는 사상과 철학이 있던데, AI 문명의 판이 새로 짜이는 이 전환기에 우리에게는 어떤 청사진이 있을까요.
“곧 나올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원고를 모두 넘긴 상태라 곧 나올 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대한민국은 5000만 인구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다 했다고 생각해요. K-컬처로 대표되는 지금의 대문자 K가 그 결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려면 판을 더 키워야 해요. 조금 튀는 이야기지만 저는 ‘한국의 다음 20년’의 목표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시아(United States of Asia)’를 만드는 정도로 크게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의 원대한 목표가 있어야 이 지긋지긋한 양당 간의 싸움이라든지 정치 유튜브 소모전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시아’는 어디서 출발한 발상인가요.
“출발점은 미국의 건국 과정에 있습니다. 250년 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3개 주의 느슨한 연합체였지요. 서로 다른 역사와 이해관계를 가진 주들이 연방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데 200년이 걸렸습니다. 이걸 아시아에 적용해 보자는 거지요. 한국을 중심으로 일본, 동남아, 몽골, 중앙아시아까지 디지털 문명의 공동체로 묶어내자는 것입니다.”
너무 큰 담론이라 몽상에 그치지 않으려면 많은 토론과 공감대가 필요해 보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인류 문명이 세 번째 단계로 진입했다고 했는데 문명마다 패권의 핵심 자원이 달랐습니다. 농업 문명에서는 땅이었습니다. 더 많은 땅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식량을 생산했고,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렸습니다.
산업문명에서는 자원, 즉 석탄·철·석유를 누가 쥐느냐가 국력을 결정했지요. 그래서 식민지가 생겼고, 수탈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의 핵심 자원은 ‘데이터’입니다. 데이터는 땅이나 자원과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가집니다. 빼앗을 수 없어요. 데이터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매력이 있어야 해요. 홀려야 하는 거죠. 여기서 K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K-팝·드라마·음식·뷰티 이것들은 단순한 문화 수출품이 아닙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콘텐츠를 소비하고, 한국 플랫폼에 자신의 데이터를 남깁니다. 이것이 디지털 문명의 언어로 번역된 제국의 문법입니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누구를 지배하지 않고도, 데이터가 흘러들어 옵니다. 제가 K를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유럽연합(EU)과 비교하면 윤곽이 더 선명해집니다. EU는 산업문명의 논리로 만들어진 연합체잖아요. 공동 시장, 단일 화폐, 관세동맹 등 경제적 이해를 묶는 방식이었지요. 제가 구상하는 아시아 연합은 데이터와 문화와 플랫폼이 만드는 디지털 생태계입니다. 과거 필라델피아와 보스턴과 뉴욕이 산업문명의 허브였던 것처럼, 서울과 도쿄와 싱가포르와 자카르타가 디지털 문명의 허브 도시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그의 말은 답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으로 느껴졌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거의 묻지 않는 종류의 질문들이었다. 아시아 연방이 과연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되뇌이는 순간 내가 갇혀 있던 상상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꼈다.
하긴 그것이 인문학의 본질 아닌가.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질문의 크기를 키우는 것,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며 질문의 크기가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동아 만평 ‘안마봉’] ‘투표지’에 나타나는 정치인들의 설화(舌禍)](https://dimg.donga.com/a/380/211/95/1/ugc/CDB/SHINDONGA/Article/6a/06/df/e8/6a06dfe805fca0a0a0a.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