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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실 얼굴이 제일 어려워”

마지막 ‘극장 간판장이’ 김기봉·김형욱 화백

  • 유두진 | 자유기고가 tttfocus@naver.com

“최진실 얼굴이 제일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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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연배우 잘못 그리면 ‘술 먹고 그렸냐’ 핀잔
  • ● 1970~90년대 전성기…낭만 담아 3, 4일에 ‘뚝딱’
  • ● 발랄·깜찍 정윤희, 우아한 장미희
  • ● 무엇이든 그리는 ‘종합 화가’
‘촤르르~’ 영사기가 돌아간다. 뿜어져 나오는 영사기 불빛이 관객의 열기와 엉킨다. 캄캄한 실내 한쪽에선 오징어가 구워지고 그 옆으로 플래시를 든 여직원이 지나간다. 손님의 자리를 확인 중이다. 상영 30분이 지났지만 고개를 꼿꼿이 들고 들어오는 남자, 그의 큰 머리를 바라보며 투덜대는 객석의 여자, 퀴퀴한 냄새….  

옛 단관 극장의 풍경이다. 그 시절, 극장 간판을 내거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멋지게 그려진 간판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곤 했다. 이 극장, 저 극장 다니며 간판 그림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멀티플렉스가 대중화하면서 단관 극장은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영화 그림을 그리던 ‘간판 화가’도 설 자리를 잃었다. 그 시절 꿈과 낭만을 그리던 극장 미술부 간판 화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지난 10월 28일 인천의 한 화실에서 반백 년 넘게 영화 간판을 그려온 김기봉(85) 화백과 그의 제자 김형욱(69) 화백을 만났다. 김기봉 화백은 2003년을 끝으로 붓을 놓았다. 김형욱 화백은 요즘 교회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고 했다.





인천 5대 개봉관 ‘접수’

김기봉 화백은 한국 극장 간판 역사의 산증인이다. 16세 때부터 간판 그림을 그렸다.

“동인천역 앞에 ‘인천영화관’이 있었는데, 그곳 점원으로 일했어요. 극장 화가들 심부름도 하고 도시락 나르면서 그림을 배웠지요. 6·25전쟁이 터지면서 극장 문을 닫았어요. 얼마 후 나도 군대에 갔고, 제대 후 다시 붓을 잡았죠.”

이후 줄곧 고향 인천에서 활동했다. 그가 간판 화가로 자리 잡아갈 무렵만 해도 인천은 서울보다 ‘간판 기술’이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단성사, 국제극장, 스카라극장 등 서울 개봉관을 찾아다니며 그림 구도와 표현법을 연구했다. 그의 그림이 서울의 대형 극장 간판처럼 세련미를 뽐내자 인천 영화업계가 인정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 지나 인천 내 5대 개봉관 그림을 도맡아 그리게 됐다.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간판 화가로 ‘안정적 인생’에 접어든 1967년경, 청년 김형욱이 극장을 찾아온다. 그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스무 살 때였어요. 극장으로 찾아가 김기봉 선생님 문하생이 됐습니다. 그때 두 명의 제자가 있었으니 제가 세 번째 제자가 된 거죠. 밑바닥에서부터 그림을 배웠습니다.”

김형욱 화백은 “그냥 극장이 좋았다”고 한다. 어렵던 시절, 극장은 최고의 문화공간이자 낭만의 장소였다. 밥만 먹여줘도 좋으니 간판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김형욱 화백 같은 지망생이 적지 않았지만 끝까지 버텨내는 이는 드물었다.

“간판 일이 생각보다 힘들어요. 그림 실력은 물론 성실함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해요. 우리를 ‘간판장이’라고 낮춰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이 직업이 절대 만만치 않아요.”

김형욱 화백의 말에 스승 김기봉 화백이 맞장구를 친다.

“그렇지, 성실해야지. 적어도 20년 이상은 꾸준히 해야 어디 가서 명함을 내밀지.”

그간 김기봉 화백의 지도를 받은 제자는 수백 명이 넘는다. 대부분 1년을 못 버티고 나갔다. 거대한 영화 간판을 정밀하게 그려내는 지난한 작업을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두 화백이 가장 힘들게 그린 간판은 무슨 영화였을까.  

“게리 쿠퍼,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년 작)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워낙 대작이라 정성을 많이 쏟은 작품이거든요. 윌리엄 홀든 주연의 ‘피크닉’(1955년 작) 간판을 그릴 때도 만만치 않았고요. 주연 배우를 중앙에 배치하고, 주변은 피크닉 온 사람들로 하나하나 채워 넣었어요. 영화 그림 하나 그리는 데 보통 3, 4일 걸리는데, ‘피크닉’은 이틀쯤 더 걸렸어요. 무척 고된 작업이었지만 보람도 컸어요.”



간판 2개면 사장 월급

김형욱 화백은 찰턴 헤스턴 주연의 ‘대지진’(1974년 작)을 떠올렸다. 스승의 그늘을 벗어나 인천 문화극장에서 미술부장으로 근무할 때 그린 것이라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했다. 로저 무어 주연의 ‘007 뷰투어킬’(1985년 작)을 그릴 때 기억도 생생하다.

“총을 든 흑인 여배우(그레이스 존스)의 다리를 크게 부각해 표현했는데 인상 깊었어요. 완성한 그림은 극장 입구에 세워 손님들이 가까이서 감상하게끔 했죠.”

 간판 화가는 명절 때 무척 바빴다. 요즘은 극장이든 집이든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과거에는 설, 추석 명절 때 극장으로 몰려가 영화를 많이 봤다. 이때는 주로 대형 영화가 상영됐는데, 대목인 만큼 특별히 손이 많이 갔다. 입체 간판도 세워야 했다.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극장 직원들은 한가하지만 간판 화가는 더 바빠졌다.

“관객이 적게 들면 개봉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리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는 정신이 없죠. 전작(前作)을 그린 뒤 숨 돌릴 새도 없이 새 영화 간판을 그려야 하니 밤을 꼬박 새워가며 작업했죠.”

간판 화가는 극장에 속한 직원이 아니라 프리랜서가 대부분이다. 극장 안에 있는 미술실에서 간판 그림을 그릴 뿐이다. 팀을 이뤄 활동하는데, 영화 그림 한 장당 얼마를 받는 식으로 일한다.

“개봉관 그림 하나가 웬만한 회사 부장의 월급 정도 됐어요. 개봉관 2개만 그려도 사장 월급보다 많았어요. 물론 팀을 꾸려 작업하니까 혼자 다 갖는 건 아니죠. 받은 돈으로 팀원 용돈 주고, 그림 도구도 샀죠. 그래도 벌이는 꽤 좋았어요.”

김형욱 화백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가 인천 간판 화가의 전성기라고 했다. 당시는 포스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극장 간판 외에 인천 지역 해수욕장 간판도 극장 화가들이 그렸다.


멀티플렉스에 밀려나

“관광지나 해수욕장 간판을 부업으로 그리곤 했어요. 인천 작약도에는 해마다 출장을 갔어요. 관리 업자가 자주 바뀌니 간판을 새로 그리는 일이 많았어요. 관광지에서 그림을 그리며 한 사나흘 신나게 놀았죠. 송도 유원지에도 자주 불려 다녔어요. 좋은 시절이었죠….”

극장 간판 화가의 ‘좋은 시절’은 2000년대 들어 막을 내린다. 멀티플렉스의 급격한 성장 때문이다. 1989년 서울 강남 씨네하우스 5개 스크린에서 시작된 멀티플렉스는 1998년 CGV가 강변 테크노마트에 11개짜리 복합 상영관을 세우면서 본격화했다. 이후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멀티플렉스는 스크린을 나눠 여러 영화를 상영하므로 대형 간판을 세울 필요가 없다. 포스터 기술 또한 나날이 발전해 그림 간판을 대체해 갔다. 단관 극장은 하나둘 사라졌고 간판 화가도 일자리를 잃었다.

김기봉 화백은 2003년 인천 미림극장에서의 작업을 마지막으로 붓을 놓았다(미림극장은 이듬해인 2004년 문을 닫았다). 멀티플렉스에 떠밀리듯 물러나긴 했으나 미련은 없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고, 간판 그림 그리는 데도 신물이 난 터였다.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 고령의 그에겐 벅차기도 했다. 그러나 왕성하게 활동할 연배이던 김형욱 화백은 아쉬움이 컸다.

“저도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에 극장 일을 그만뒀어요. 더 하고는 싶었지만 멀티플렉스가 워낙 강세라 버텨낼 재간이 없더라고요. 생계를 책임져야 할 50대라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시위도 했죠.”

설 자리를 잃은 간판 화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기봉 화백에 따르면, 그 시절 간판 화가들은 지금 대개 아파트 경비 같은 일을 하거나 집에서 손자를 돌보며 지낸다. ‘모나리자’ ‘이삭줍기’ 명화 카피본을 그리며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화 카피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있었어요. 일이 없어진 간판 화가들이 그쪽으로 많이 옮겨갔죠. 간판 화가가 그린 ‘카피본’은 미국으로 수출돼 가정집에 걸려요. 수요가 많죠. 서울 삼각지 화랑가도 수출용 그림을 그리면서 유명해졌죠. 그런데 이제는 명화 시장도 중국에 완전히 밀렸어요. 워낙 싸게 수출하니까….”



문희, 최진실에 정성 들여

김형욱 화백은 지금도 현역이다. 교회에서 ‘신앙 그림’을 그린다. 인천 지역 화가들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지난 9월에는 10여 년 만에 영화 간판을 다시 그리는 감동을 맛봤다. ‘인천, 어느 날 영화가 되다’라는 옛 영화 전시회를 기획한 인천시립박물관이 그에게 영화 그림을 의뢰했다. 김진규, 주증녀, 황정순 주연의 ‘사랑’(1957년 작)이다.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그린 배우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두 화백의 눈빛이 반짝였다. 역시 미술인이기에 앞서 영화인이었다. 김형욱 화백은 1970년대 인기 여배우 문희를 그릴 때 무척 정성을 쏟았다고 했다.

“제가 배우 문희와 동갑인데 요즘 말로 ‘왕팬’입니다. 그래서 문희가 출연하는 작품은 제가 전담해 그렸어요. 밑그림 그리기나 전체 윤곽 잡기는 다른 화가가 해도 얼굴만큼은 꼭 제가 그렸습니다. 누구도 못 건드리게 했죠(웃음).”

김기봉 화백은 최진실을 그릴 때 신경을 집중했다고 한다.

“인물 표현이 힘든 배우였어요. 야무지고 예쁘장했지만, 아주 미인이거나 개성 넘치는 얼굴은 아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간판 화가들도 그리기 어려운 얼굴로 최진실을 첫손에 꼽곤 했어요. 그렇다 보니 최진실 주연 영화가 걸린다고 하면 걱정부터 앞섰어요. 간판 그림이 최진실처럼 안 보이면 처음부터 다시 그려야 하니까….”

누구나 기억하듯, 최진실은 당대 최고 인기 스타였다. 그의 얼굴을 모르는 관객도 없었고, 자연히 간판은 수많은 관객의 입길에 올랐다.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보이면 “술 마시고 그렸느냐”며 혹평을 퍼부었다고 한다.

김기봉 화백은 자신이 그린 배우를 여럿 만났다고 했다. 영화를 개봉하면 배우들이 극장을 돌며 반응을 살피는 경우가 있는데, 최무룡, 허장강 씨 등을 만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형욱 화백은 정윤희와 장미희를 만나 눈앞에 펼쳐진 당대 최고 여배우들의 미모에 가슴 설레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거지꼴’로 만난 정윤희, 장미희

“배우들이 인천 문화극장, 현대극장 등을 돌며 ‘홍보쇼’를 했어요. 그때 간판 그림을 제가 그렸는데 그 인연으로 배우들을 만났죠. 작업하던 중 식사 자리에 불려갔는데, 온몸에 페인트(간판 화가는 물감이 아닌 페인트로 그림을 그린다)가 튀어 있어 깡통만 차면 딱 거지꼴이었죠. 그 화려한 사람들 옆에 웬 ‘거지’가 앉아 있으니 얼마나 우스웠겠어요. 극장 여직원들이 유리창 밖에서 훔쳐보고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데 배우들이 ‘간판 잘 그려줘서 고맙다’며 깍듯이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뿌듯하던지…. 참 멋진 배우들이었어요. 정윤희는 발랄하고 깜찍했고, 장미희는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있었지요. 달리 배우가 아니더군요.”

기억을 이어가는 김형욱 화백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간판 화가는 낭만적인 직업이었음에 틀림없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다시 이 일을 택하겠냐”는 질문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김기봉 화백은 그림 작업을 그만두고 극장을 함께 운영하자는 제의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제 그림 기술로 먹고사는 게 편해서요. 극장 그림도 하나의 작품이고, 내가 그린 걸 대중이 감상하는 거니까요. 전시회에 걸리는 그림보다도 (제가 그린 간판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보람 있죠. (젊은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딴 거 할 마음은 없어요.”

김형욱 화백도 마찬가지다.  

“다른 일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일을 할 거 같아요. 순미술 작가는 인물, 정물, 풍경 등 자기 분야 그림만 그리지만, 간판 화가는 동양화, 서양화, 초상화, 구상화에 이르기까지 다 그릴 수 있거든요. ‘종합 화가’라는 자부심이 있어요. 영화 그림 그릴 곳이 더는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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