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리랑 축전’ 비유, 부적절했다
- 탄핵은 보수의 ‘살아남기 위한 죽음’
- 처음엔 탄핵 찬성…‘횃불’ 보고 걱정 커졌다
- ‘횃불’들이 새 정권에 ‘지분’ 요구할 것
- 박근혜, ‘기분 나쁜 여자’ 때문에 ‘국민감정죄’ 걸려
- 낯 두껍고 속 검은 親朴은 벌 받을 사람들
- 우리가 ‘맹렬한 혁명’ 속으로 들어갈 상황인가
“모과들이 참 잘 맺었는데 아무도 안 들고 가요.”
마당을 가운데 두고 왼쪽엔 부악문원이, 오른쪽엔 이 작가의 살림집이 자리 잡았다. 마당을 가로질러 10여 개의 계단을 오르니 그의 서재가 나왔다. 서재 지붕 너머로, 아이를 업은(負兒) 형상을 한 부아악산(負兒岳山)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1998년 1월 경기 이천시 장암리에 들어선 부악문원은 이 작가가 사재를 털어 인문학 인재 양성을 위해 지은 서원(書院)이다.
“나처럼 (시골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해선 안 돼요. 인터뷰 안 한 지도 오래됐고요.”
이 작가는 앞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러다 “자칭 보수라는 분들은 다 어디로 숨었냐”는 기자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는지, 몇 시간 뒤 “한번 내려오시라”며 빗장을 풀었다.
그는 지난 12월 10~11일 신동아 인터뷰에서 “박근혜, 최순실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화가 벌컥 나지만, 대중영합적인 야당과 선동적인 ‘횃불’도 심히 우려스럽다”며 양가감정을 드러냈다. 최근 논란이 된 그의 신문 칼럼 얘기부터 끄집어냈다.
“‘잘된 집단체조’ 정도였으면…”
▼칼럼이 ‘촛불 민심’을 폄훼했다는 비판이 따랐다.“다른 글은 한 자도 고치고 싶지 않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리랑축전’은 부주의했던 것 같다. 그냥 ‘잘된 집단체조 같다’고 했으면 될 것을. (칼럼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아리랑축전’에 제일 화가 많이 났을 거 같다. 국민의 자발적인 행동을 아리랑 축전에 비유하는 바람에 흔히 말하는 ‘색깔론’을 제기한 것처럼 됐으니…그것도 아주 치명적이고 뼈저리게.
그런데 더불어민주당 성명과 정청래 전 의원이 뭐라고 한 것 말고는 내게 항의 전화 한 통도 없었다. 의도적인 묵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제목의 12월 2일자 ‘조선일보’ 칼럼에 이렇게 썼다.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 하지만 이 또한 어찌하랴. 그 촛불이 바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성난 민심이며 또한 바로 ‘국민의 뜻’이라는 것은 지난 한 달 야당의 주장과 매스컴의 호들갑으로 이제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논리가 되었다. (…) 이 땅의 보수의 길은 하나밖에 없다. 죽어라, 죽기 전에.”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했지만, 촛불 집회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아리랑 축전’에 비유한 대목이 큰 논란을 불렀다.
▼보수에게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이라고 주문했다. 현재의 보수는 죽어야 하나. ‘새로운 정신’은 뭔가.
“칼럼은 국회 탄핵 결의안 가결(12월 9일) 전에 썼다. 내가 ‘죽어라’라고 한 것은 1차 죽음, 즉 ‘탄핵하라’는 뜻이었다. 그래야 보수의 자기변명도 되고, 자기 죽음도 된다. 보수가 자신의 몫을 못 하니, 새 보수는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해야 한다. 현재의 이 보수가 망한 것은 가치와 이상은 앞에 두지 않고 실리와 정권만 보고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만 했기 때문이다. 죽을 놈들이다.”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 중 상당수도 탄핵에 찬성한 것으로 보인다.
“탄핵에 찬성했다고 배신한 건 아니다. 비박계와 일부 친박계가 탄핵(에 찬성)한 것은 죽음, 살아남기 위한 죽음이었다. 탄핵 찬성 투표를 한다는 것은 당원으로선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스스로 결정한 죽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 구체적인 길은 천 갈래, 만 갈래다. 이제 (보수는) 흩어졌다가 새 깃발로 태어나야지, 안에서 싸우면 안 된다. 칼럼에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건 ‘보수 세력 없이 통일 되는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 이라고 한 마지막 부분이다.
“‘보수 없는 통일’ 겁난다”
보수가 너무 늦게 죽으면 복귀(집권)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난번(이명박 대통령 집권)처럼 10년 후에라도 돌아오면 괜찮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앞으로 10년 후의 집권도 어려울 거 같다. 그사이에 보수 없는 통일이 된다면…보수 세력이 빠진 통일은 굉장히 겁나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왜 그런가.
“야권 지도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추미애 대표 등은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같은, 북한의 위협에 맞설 정책들을 폐지하겠다고 하는데 대단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에서 ‘일이 나빠졌을 때’는, 패망한 월남보다 보트피플이 훨씬 많을 거다. 보트 수용 여력을 떠나 보트에도 올라타지 못하는 사람 중 1000만 명 정도는 ‘정신적 보트’를 타야 한다. 정치 지도자라고 해도 1000만 명을 정신적 보트에 태울 권리는 없다. 이 얘기 하다가는 또 색깔론 (논란이) 될 것 같다(웃음), 거 참….”
테이블 위에 놓인 책 한 권에 눈이 갔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 책 첫 장에 ‘존경하는 이문열 작가님. 분단의 시대에 대한 나름의 고민과 미래를 생각한 흔적을 담았습니다’는 송 전 장관의 자필 헌정사가 쓰여 있다.
송 전 장관은 이 책에서 ‘2007년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표결 전 우리 정부가 북한의 의견을 물어봤고, 문재인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등이 이 과정에 개입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됐다가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꼼꼼히 읽어보니 무척 고심하며 쓴 글이더라. 얼마 전 김대중(DJ)·노무현 정부 때 장관을 지낸 분들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송 전 장관을 만났다. 말과 행동을 삼가는, 절제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돌아온 뒤 그분이 책을 한 권 보내주셨다.”
변혁을 도운 代價
▼결국 탄핵 정국으로 돌아섰다.
“나도 처음엔 ‘탄핵 찬성파’였다. 그런데 국회의 탄핵 결의안 표결 직전 촛불집회에 횃불이 등장하는 걸 보고 우려가 커졌다. 나는 횃불혁명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우려인가.
“한국 근현대사를 봐도 그렇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후 하와이로 갔는데, 주동한 학생들과 그들 주변의 힘이 정치에 관여하면서 데모를 얼마나 많이 했나. 박정희가 나올 때까지 계속했다. 학생들도 남북 통일운동을 하며 빌미를 만들어줬고. 사회 혼란을 걱정하던 많은 국민은 5·16(군사정변)이 터지자 ‘올 것(5·16)이 왔구나’ 했다. 자꾸 그게 연상된다.
프랑스 대혁명도 혁명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본 ‘법복귀족(法服貴族)’들의 동조 내지 묵인 아래 상퀼로트(Sans-culott, 상류층이 입던 짧은 바지인 ‘퀼로트’를 안 입은 사람이란 뜻으로 혁명 전위의 하층민을 일컫는다)의 횃불이 있었다. 나는 촛불집회 참여자 중 80%가량은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이라고 보지만, 저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배경은 의심스럽다. 집회를 주최한 1500개 단체에서 6명씩만 나와도 1만 명이다, 이들이 충분히 조직화할 수 있다.”
▼횃불이 헌법재판소로 향할 것으로 보나.
“앞으로 한 달이 가장 불같은 변화의 달이 될 거다. 만약 횃불이 빠지고 촛불이 차분한 감시자 역할에 머문다면 헌재의 판결대로 따르면 된다. 그런데 횃불이 청와대에서 헌재로 옮겨가 돌아다닌다면 이에 초연할 재판관이 있을까. 대통령이 헌법을 수호하지 않아서 헌법 절차에 따라 탄핵한다는 사람들이 다중의 위력을 업고 헌재의 탄핵 심판을 강요하면 헌재 탄핵 심판 결과를 많은 국민이 받아들일 수 있겠나.
志士처럼 떠드는 사람들
문제는 이러한 횃불들은 앞으로 탄생할 새로운 정권에 지분을 요구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회 변혁을 이끈 힘, 이게 정당이 아닌 시민단체이고 이들이 변혁을 도와준 대가를 요구하면 새 정부는 이를 무시하지 못한다. 언론도 걱정스럽긴 마찬가지다.”▼언론은 왜?
“요즘 TV 방송에 나와 평론하는 사람들 말을 잘 들어보면 ‘탄핵 가결 안 되면 너 죽어’ 하는 식의 공갈이 많다. 헌재의 판단 일자를 얼마나 앞당길 수 있냐고 재판관에게 묻는 기자도 있고. 소위 평론가라는 사람들은 온갖 의혹을 사실인 양 적시하고는 마치 검사인 것처럼 몰아세운 뒤 아예 판사가 돼 판결하고 논평까지 해댄다. ‘피고’의 말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처음엔 대통령이 ‘세월호 7시간’ 동안 롯데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니, 최근엔 1시간 반 머리 손질을 했다고 하더니, 결국 20분 머리손질한 거 아닌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 대통령과 최순실 씨 보도가 나오면 시청자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곧바로 ‘이 나쁜X’이란 말을 자동반사적으로 내뱉는다. 보수 인사들도 화를 벌컥 낸다. 각종 의혹 제기와 유언비어는 일이 끝나고 모두 따져봐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우도 없고, 나중에 허위, 과장, 오보의 악용이 밝혀지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나. 이 중요한 때에 누구도 이런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떠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지사(志士)처럼 나서서 떠드는 거다.”
▼누가 지사처럼 나서서 떠든다는 건가.
“전여옥 전 의원이 최순실 씨를 잘 아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분도 한때 최씨만큼 박 대통령의 총애를 다투던 인물 아닌가. 더욱이 전 전 의원은 르포 작가가 내려던 책(‘일본은 없다’)을 표절해 먼저 냈는데, 이건 그 작가가 내려던 책을 못 내게 한 것이니 최악이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무척 화가 나는데, 요즘 보니 마치 지사처럼 말하더라. 그가 그런 말할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 동생 부부(박근령, 신동욱 부부)도 정신감정을 해볼 정도이고, 장군 부인을 개그 소재로 삼은 방송인 김제동 씨도 자숙해야 한다. 물론 과거 장군들의 횡포에 대한 반감도 있었겠지만, 지난번 국정감사 때 지적을 받았으면 해명을 하든지 거짓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이번 사건으로 모든 게 묻혀버렸다. 송민순 회고록 문제도 그렇고.
이런 걸 보면, 우리가 따져봐야 하고, 비판해야 하고, 분석해서 결과를 내야 할 일들이, 실세 행세한 기분 나쁜 여자 한 사람 때문에 전부 뒤집혀 참으로 분개스럽다. 현재 대통령은 법과 사실 자체보다는 ‘국민감정죄’에 걸려 있다.”
논리 불통 ‘못된 도그마’
▼특검 수사와 헌재 판결을 지켜봐야겠지만, 최순실 씨 국정농단 의혹은 언론 보도와 청문회를 통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그렇다. 농단이다. 기분 나쁘고 허탈하다. 그래서 내가 이상한 놈이 된다(웃음). ‘박 대통령이 잘했단 말이냐’ ‘최순실 씨가 괜찮단 말이냐’ 하고 대들면 대책이 없다(손사래를 치며). 이 사건은 주변 관리를 못한 것과 누구든 말을 못 붙이게 한 박 대통령의 잘못이다. 참모나 친박계 의원들은 말해도 소용없었을 거고. 말했다가 피해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못했겠지. 누군가에게 푹 빠지면 몰입해버려서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집안 내력 탓인지…. 그 내력 탓에 아버지도 경호실장 차지철 말에 푹 빠졌다가 비극을 맞았는데, 그게 딸도 이런 상황으로 밀어넣은 게 아닌가 싶다. 3년 그럭저럭 잘해왔다고 생각하다가 방심한 순간 사건이 터진 거다.”
▼헌법재판소가 탄핵 인용 결정을 하면 대통령도 형사소추를 피하긴 어려울 듯하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박 대통령은 탄핵 인용 결정이 나면 감옥에 안 가면 안 될 거다. 그런데 지금까지 박 대통령 측의 말은 충분히 들어보지 못했다. 통치행위를 하면서 보좌관 등의 보좌를 받을 수 있는 거고…. 대통령을 탄핵까지 할 사유가 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헌재 결정을 지켜봐야 한다.
어쨌든 죄를 지어 감옥 가는 거야 섭섭할 게 없지만, 나라꼴이 참 말이 아니다. 야당 의원들도 허무맹랑한 의혹을 제기하고 외신이 인용 보도하면 ‘나라꼴이 창피하다’고 또 공격한다. 이건 아주 잔인하고 악의적이다. 내 생각엔 지금 우리나라가 논리가 안 통하는 ‘못된 도그마’에 빠진 거 같다. 이런 상태는 변혁사에는 흔히 있는 변화이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과연 이렇게 맹렬한 혁명 속으로 들어갈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추운 겨울의 끝은 ‘시작’?
▼친박계 인사들의 역사적 소임은 끝났다고 보나.“이번 사태의 가장 직접적인 책임은 주변에서 말리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다. 이들이 바로 친박 의원들이다. 솔직히 그들의 면면은 후흑(厚黑)이다. 낯 두껍고(面厚) 속은 검은(心黑) 후안무치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도 나름의 과정은 있었겠지만 정말 파렴치하다. 이게 혁명이 돼 원인을 찾아 벌을 준다면 맨 앞에 세울 사람들이다.
이번 사태는 사실상 2016년 4월 총선 참패 때부터 시작됐다. 총선 공천을 둘러싸고 당을 쪼갠 기억이 선한데, 아무도 책임 안 지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했고…. 그래서 새누리당이 200석 운운하다가 121석이 된 거 아닌가. 총선 1주일 전만 해도 질 수 없는 선거였다. 이들이 다시 새로운 당을 만들어 꺼떡거리고 나오면 ‘보수는 죽어야 다시 산다’는 인상을 주긴 어렵다.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렇다면 새누리당은 현재의 비주류가 이끄는 게 낫다고 보나.
“둘 중 하나라면 비주류밖에 없지만, 그 외에도 많은 수혈(輸血)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각오 아래 제3 지대 사람들도 올 수 있고, 이미 떠난 사람들도 ‘좀 달라졌네’ 하면서 돌아올 수도 있고, 이번에 몸서리친 사람들도 돌아올 수 있다.”
▼이문열 작가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을 했을 때 ‘젊은 피’를 수혈한 것처럼?
“그때처럼 사람을 모으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때 ‘친박 핵심’ 최경환 의원이 국회에 입성했다. 행정고시 출신으로 학위(위스콘신대 경제학박사)도 받아 전문가로서 나름 식견을 인정받았고, 경제신문(한국경제신문 부국장)에 근무한 경험도 플러스 요인이 됐다. 그땐 박 대통령이 공천에 관여할 상황도 아니어서 전문성으로 공천을 받은 걸로 기억한다.”
▼야당의 대응은 적절했다고 보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사퇴 요구도 나오는데.
“내가 그와 관련된 글을 썼다면 제목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됐을 거다. 전래동화 ‘별순이 달순이’에 나오는 할머니는 베를 짜고 팥죽을 얻어 집에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난다. 호랑이가 ‘팥죽 주면 안 잡아 먹지’ 해서 팥죽을 줬는데, 결국 어떻게 됐나. 팔, 다리, 몸통까지 다 잡아먹혔다.
지금 ‘횃불’은 그걸 하고 있다. 과거 미선·효순 양 사건(2002년 6월 경기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 사고로 여중생 2명이 사망한 사건) 때도 처음엔 미8군 사령관 사과를 요구했다가 나중엔 한미연합사령관, 미국 대통령, 미합중국의 사과까지 요구하지 않았나. 굉장히 길고 추운 겨울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다음이 왠지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다. 무엇에 대한 불안인지는 모르겠다.”
자코뱅 독재, 북한 변수…
▼어쨌든 조기 대선을 치를 개연성이 높아졌다. 야권과 달리 여권엔 마땅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음을 기약할 만한 사람이 많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반기문 유엔사 무총장 정도가 대권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볼 때는, 현재로선 다음 대선에서 보수는 도리가 없고, 이 상황은 명의 화타(華陀)가 와도 못 고친다. 예전 미국에서 헤리티지 재단을 중심으로 노력해 10년 만에 보수 대통령을 만들었듯 길게 보고 반성과 개혁으로 새로 집을 지어야 한다.
그런데 야권 차기 대선 주자 중 문재인 후보가 가장 유력한데도 지지율은 20~23%이고, 야당 인사들도 문 전 대표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의심한다. 다크호스로 떠오른 이재명 성남시장은 형수와 주고받은 ‘쌍욕 사건’을 들어보니 확신이 안 간다. 이런 상황이라 더욱 불확실성의 시대가 올 것 같다. 내부 혁명이 변질돼 자코뱅 독재로 가거나 북한 변수로 끔찍한 일이 생길 것도 같고. 큰 변화가 올 것 같다. 이건 쓸데없는 문사(文士)의 걱정이다.”
▼몇 해 전부터 “1980년대를 정리하는 글을 쓰겠다”고 했는데.
“이제 평생 소설을 못 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쓴다는 것은 읽는 사람들이 의미 있게 들을 거라고 기대할 때 쓰는데, (날더러) 보수 꼴통이라고 말할 게 뻔하니 쓸 마음이 안 난다. 나는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진보 일변도에서 균형을 회복하길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가 가장 잘 어우러진 1980년대를 여러 노래가 어울리는 아름다운 선율로 잘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어떤 충실한 기록 같은 걸 그리고 싶었다. 나도 곧 고희(古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