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황, 겸손, 사과, 초연, 단호…
- 최순실, 갤럭시노트 惡材 통해 더 성장?
- “10년 넘게 실무 챙겨 ‘디테일’ 강해”
- “줄줄이 사고 파는데… 성과는 의문”
- “실용, 실리만 강조하면 화(禍) 부른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1968년생입니다.
안 / 평소에도 남이 질문하면 동문서답하는 게 버릇인가요?
이 / 성실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안 /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을 한 달에 몇 번 만나나요?
이 / 한두 번은….
‘이재용 압박 면접’ 청문회
안 / 장 차장이 이재용 부회장에게 ‘이러이러해서 정유라에게 말 사주고 최순실에게 돈 줬습니다. 우리 기업을 위해 필요합니다’ 이런 보고를 안 했습니까?이 / (고개 옆으로 갸우뚱거림)
안 / 아니, 자꾸 머리 굴리지 마세요.
이 /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예. 지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예.
안 / 보고를 안 받았어요?
이 / 문제가 되고 나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안 / 그 과정에서는 보고를 안 받았다는 말씀이죠?
이 / 기억에 없습니다.
안 / 자, 그러면 이 300억이 껌 값입니까?
이 / 어, 우선, 어, 제가 나중에 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생각해도 적절치 않은 방법으로 지원이 된 것 같다는….
안 / (말을 자르며) 왜 책임을 안 묻느냐, 이미 보고를 받았으니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죠?
이 / (…)
안 / 왜 대답을 못 하세요.
이 / 아, 지금 검찰조사 중이고….
안 / (말을 자르며) 이 청문회는 검찰(조사) 중인 사안도 다 답변하게 되어 있어요. 불리하면 동문서답하시거나 이제는 검찰 핑계를 대시네. 그러시면 안 돼요.
이 /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아닙니다. 정말 검찰조….
안 / (말을 자르며) 아직, 50도 안 되신 분이 이 어른들 앞에서, 이 국민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국민들 놀리는 듯한 발언하면 안 돼요.
이 / 아, 그렇게…
안 / (말을 자르며) 자, 장충기에게 보고를 받았을 것 아닙니까.
이 / 당시 제가 세부지원 사항은 정말 몰랐고요, 의원님.
안 / 그럼 장충기를 해고시키겠습니까?
이 / 나중에 조사 뒤에….
안 / (말을 자르며) 해고시킬 수가 없는 거죠. 이미 보고를 받았으니.
이 / 뭐라고 지금 변명을 드려도 저희가 적절치 못했기 때문에 죄송합니다. 조사가 끝나면 저를 포함해서 저희 조직 안의 누구든지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안 / 부회장에게 누가 책임을 묻는데요? 그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이 / 저도 책임질 게 있으면 책임지겠습니다.
안 / 물러나실 의사도 있으세요?
이 / 제 책임이 있으면 그러겠습니다.
“겸손하고 여성성 느껴져”
지난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의 한 장면이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아직, 50도 안 되신 분이 이 어른들 앞에서…”라고 말한 대목이 ‘압권’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시종 ‘로키(low key,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이 부회장은 “국민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새로운 모습의 삼성으로 태어나도록 노력하겠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갤럭시노트7 폭발 사고에 대해서도 국민에게 사과했다.이날 청문회에는 최순실 사태로 거론된 여러 재벌 총수가 출석했는데, 의원들의 질문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중됐다. 이 부회장은 하루 종일 국민 앞에서, 국내외 미디어 앞에서, 마치 취업준비생처럼 ‘압박 면접’을 받은 셈이다. 그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 부회장의 스타일이나 성격, 자질이 이 자리에서 어느 정도 드러났다.
청문회가 끝난 후 한 대기업의 대외협력부문 임원은 “이재용 부회장은 범죄 혐의에 대해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피해갔다. 일부 국민은 답답함을 느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 임원은 “동시에 이 부회장은 모욕성 질문에 긴장하거나 당황해하고, 겸손하면서 여성성이 느껴지게 말하고, 잘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고, 부회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결정권자로서 단호하게 삼성 미래전략실 해체와 전경련 탈퇴를 약속하는 태도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얼마나 많은 상속세를 냈는지를 묻는 질문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 병상에 있는 아버지 이건희 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습은 이 부회장의 인간적 측면을 부각했다는 분석이다.
이 임원은 “결론적으로 청문회에서 이재용은 ‘슈퍼 갑’으로 비치지 않았다. 재계에선 그에게 ‘어눌한 말투의 인간적인 은둔자’ ‘세계 일류기업의 예의 바른 오너’라는 인물평이 뒤따랐는데, 이런 평이 대체로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다른 기업 경영진의 한 인사는 필자에게 “이 부회장과 초등학교 동문이어서 어릴 때 우연히 그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그는 내내 방 안에서 게임만 했다. 이 부회장은 친구도 거의 사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 부회장이 ‘은둔자형’이라는 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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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꿔라’ 정신 계승
물론 비판론도 나온다. 몇몇 경제전문가는 “삼성전자 같은 한국 대표 기업이 11조 원이 넘는 돈을 자사주 매입·소각에 쓰는 건 옳지 않다. 글로벌 인수합병(M&A)에 뛰어드는 건 어땠을까”라고 반문한다.삼성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재용 부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부친 이건희 회장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은 그룹 내 사업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삼성그룹을 전자, 금융, 바이오 같은 1등 업종과 성장 가능성이 있는 업종으로 재편하는 것이 큰 방향이다.
세부적으로 삼성은 스마트폰, 반도체, 디스플레이, TV 같은 하드웨어에 집중된 사업 분야에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헬스케어, 바이오 같은 소프트웨어 산업을 보강한다. 특히 이 부회장은 해외 유망 기업을 인수해 차세대 먹거리로 키우려 한다.
이재용 체제 이후 삼성의 인수합병(M&A) 실적은 딱 떨어지는 공식 통계로는 알려지지 않는다. 필자가 자체적으로 집계한 결과, 2014년 5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삼성이 인수했거나 지분에 투자한 기업은 45개에 달한다.
삼성이 인수하거나 지분 투자한 기업 중 일부를 꼽아보면, 비디오앱 서비스업체 셀비, 사물인터넷 플랫폼 개발업체 스마트싱스, 클라우드 프린팅업체 프린터온, 빅데이터 업체 프록시멀데이터, 모바일 결제 솔루션 업체 루프페이,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조이언트, 고급 빌트인 가전 브랜드 데이코, 세계적 전장(電裝)업체 하만, 세계 전기차 1위 업체 중국BYD 등이다. 삼성벤처투자는 2015년 1월부터 2016년 4월까지 가상현실, 헬스케어, 미디어 분야 회사 등 29개 기업의 지분을 사들였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삼성의 하드웨어 사업은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 삼성이 애플,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와 싸우려면 독자적 인공지능 엔진이 필요하다. 삼성의 기업 인수는 이런 점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부회장은 매각에도 적극적이다. 유력 종합일간지 경제부의 A기자는 이 부회장을 ‘정리의 달인’이라고 일컫는다. 이 기자는 “부친인 이건희 회장보다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사업을 털어내는 카리스마가 대단하다”고 했다. 이 부회장은 2016년 9월 한 달간 2조 원 규모의 자산을 팔아치웠다. 일본 샤프 지분, 삼성 프린터 사업, ASML 지분, 시게이트 지분, 램버스의 지분이 정리됐다.
‘실용’ 때문에 ‘폭발’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전자 임원으로 10년 넘게 실무를 챙기면서 디테일에 강한 편이라고 한다. 이런 실무 경험이 강도 높은 매각 결정을 이끌어낸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장을 통해 모든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은 개별 사업부장(사장)과 직접 통화하면서 결정한다”고 설명했다.이 부회장의 매각 결정은 이건희 회장보다 더 냉정하게 이뤄진다고 한다. 대표적 사례가 2014년 11월 삼성테크윈, 삼성탈레스,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 4개 화학·방위산업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매각한 일이다. 재계 관계자는 “화학·방산 분야에서 글로벌 1등이 되기 힘들다는 이 부회장의 현실적 판단에 의해 매각이 결정됐다”고 말한다.
삼성은 2015년 10월 롯데에 삼성정밀화학, 삼성비피화학, 삼성SDI 등의 케미컬 사업부문을 3조 원에 매각했다. 2016년 1월엔 서울 중구 태평로의 삼성생명 건물을 부영그룹에 5800억 원에 팔았다. 이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계열사를 줄줄이 내다파는 것이 ‘뉴 삼성’의 실체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 부회장의 사고팔기는 어떤 손익계산서를 받았을까. 온라인 경제매체의 B기자는 “아직 실적으로 입증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여전히 이 부회장의 경영 능력에 물음표가 붙는 이유”라고 말했다.
이른바 ‘이재용 사업’으로 일컬어지는 바이오와 자동차 전장부품에서도 실질적 성과는 별로 없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2015년 매출액이 전해보다 13% 줄어든 반면 영업 손실이 70% 늘었다. 인수한 기업을 수년 뒤에 되파는 사례도 많았다. 샤프, ASML, 시게이트, 램버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제조업 상황에 정통한 중앙일간지 C기자는 “이건희 회장 와병 이후 내세울 만한 ‘이재용 치적’이 없다. 이것도 인수하고 저것도 인수하는데 잘 안 된다”고 말했다. “이재용식 인수·합병이 홈쇼핑과 비슷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사들이는 기업 대부분이 1000억 원 미만의 작은 회사들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업계는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에 대해 “이재용 체제 이후 ‘관리의 삼성’ 신화가 무너진 것 같다”고 말한다. IT업체 한 관계자는 “폭발 원인을 못 찾는 데 위기의 본질이 있다. 이재용 체제에서 ‘실용’ ‘실리’를 앞세워 삼성 내부를 구조조정했고 조직을 줄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돼 사고를 예방하지 못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당장 실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광고를 줄이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사라진 이유
제일기획 매각 불발도 삼성의 문제점을 드러낸 사건으로 비친다. 제일기획은 6월 13일 “세계 3위 광고회사인 프랑스 퍼블리시스와의 매각협상이 결렬됐다”고 밝혔다. 그러자 제일기획이 삼성 라이온즈 등 스포츠단을 인수한 것에 대해 업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매각 대상 기업이 짐만 되는 스포츠단을 왜 인수하느냐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삼성의 오락가락 전략이 매각 실패 원인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국내 최고 민간 싱크탱크로 꼽히던 삼성경제연구소는 요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1986년 ‘한국판 노무라연구소’를 지향하며 출범한 이 연구소는 1998년 ‘IMF 위기 극복 방안’을 제시했고 2002년 부동산 버블과 집값 폭락을 경고했다. 2001년 ‘강소국론’, 2004년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가는 길’ 같은 국정 의제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는 외부 활동보다는 삼성그룹 수뇌부와 계열사가 주문하는 ‘인하우스(in-house, 회사 내부)’ 연구만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연구소의 활동이 위축된 이유는 뭘까. 다른 대기업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주창하는 실용주의 때문일 것이다. 회사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대외활동은 하지 말라고 한 것 아니겠나. 미래전략실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제약이 더 커졌을 것이다. 국가적으로 손해가 됐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이재용의 실용주의 리더십에 동의한다. 세계적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용, 비용절감만 너무 강조하면 화(禍)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