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랴오닝성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遼 | 전쟁과 교류의 두 얼굴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12-22 17: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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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은 이민족에겐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 중원을 기습하는 근거지였고, 한족에겐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요충지였다. 수많은 공방전 속에 주인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땅, 조선과 중국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땅,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를 축적한 무역의 땅이기도 했다.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은 작은 도시다. 인구는 244만 명, 도시권 인구는 86만 명이지만, 중국은 행정구역을 넓게 잡기 때문에 시내 중심부를 거닐어보면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 많고 땅 넓은 중국을 돌아다니다 단둥에 오니 도시라기보다 시골 읍내 같다.

    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압록강이 나왔다. 강 건너로 북한 신의주가 보였다. 순간 ‘촌동네’ 단둥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처럼 보이고, 신의주는 캄보디아 시골 마을 같았다. 중국에서는 매우 작고 초라한 도시지만 북한과 비교하니 빌딩 숲이 즐비한 초현대식 도시로 보였다. 그나마 신의주는 중국과 교류하며 제법 발전된 국경 관문도시이고, 당성(黨性)이 우수한 인재들이 와서 견학·관광을 하는 곳이다.

    밤이 되니 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단둥 압록강변은 가로등이 휘황찬란하게 빛났고,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커다란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고 왁자지껄 떠들며 산책을 했다. 반면 신의주 쪽은 불빛 몇 개만이 성글게 켜졌고, 지독히 적막하고 고요해 유령 마을처럼 보였다. 필자의 미숙한 수영 실력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 건널 수 있을 듯 가깝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멀고 멀어 遼寧

    조선시대 사신단이 오간 길도 바로 이곳이다. 연암 박지원은 명색이 국가의 공식 사절단이었지만, 넉넉잖은 출장비를 쪼개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하다. 박지원은 만상(灣商, 의주 상인)의 밥상을 부러운 듯 묘사한다.  



    “만상 패거리는 자기들끼리 한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시냇가에서 닭 수십 마리를 씻고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고 나물을 볶으며 밥알은 자르르 윤기가 나는 것이 일행 중에서 가장 푸짐하고 기름졌다.”

    만상은 청나라와 무역하며 큰돈을 벌었다. 그들의 밥상은 공무원인 연행사(燕行使)보다 훨씬 풍성했다. 그토록 부유했던 이들의 후예, 의주보다도 더 중국에 가까운 신의주가 오늘날 저토록 초라한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요동, 랴오닝에 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랴오닝성의 약자는 ‘멀 요(遼)’ 자다. 얼마나 먼 곳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고대 중국의 중심 허난성 뤄양(洛陽)에서 랴오닝의 중심 랴오양(遼陽)까지는 1600여km나 된다.

    랴오닝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조조의 참모 유엽의 말처럼 “물길로 가려 하면 바다가 있고, 육로로 가려 하면 산으로 막혔다”. 대흥안령 산맥과 발해가 중원과 랴오닝을 갈라놓는다. 거대한 강 요하(遼河)가 요서와 요동을 나누고, 강 주변에는 광활한 늪지대 요택(遼澤)이 펼쳐져 지극히 험난한 길이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러 요택을 건널 때 종군한 병사들의 해골이 끝없이 이어져 벌판에 널렸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때도 동서 200리 진창을 메워 길과 다리를 만드는 토목공사를 한 후에야 진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원의 손이 닿기 힘든 이 곳엔 여러 부류의 종족이 살았다.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세운 예맥계와 발해·금·청을 세운 숙신계(말갈·여진), 삼연(三燕)·요·원을 세운 동호계(오환·선비·거란·몽고), 한족 중국계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이들은 작게는 요동과 만주의 패권을 장악했고, 크게는 중원을 차지했다.

    랴오닝은 중국 밖 세력에는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가 중원을 휩쓸기 좋은 근거지였고, 중국에는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자연스레 이 땅에서 수많은 공방전이 일어나며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말했다.



    끊이지 않은 북소리, 징소리

    “아하!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 천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천하가 편안한지 위태로운지는 항상 요동 들판에 달려 있었다. 요동 들판이 편안하면 나라 안이 잠잠하고, 요동 들판이 시끄러우면 천하에 전쟁이 일어나 일진일퇴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번갈아 울렸음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1000리가 툭 터진 이 평원과 광야를 지키자니 힘을 모으기 어렵고, 버리자니 오랑캐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대문도 마당도 없는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엔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땅이 되는 까닭이며,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서라도 지켜야만 천하가 안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랴오닝이 전쟁터였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길, 조선과 중국의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길,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富)를 축적한 무역의 길이었다.

    랴오닝은 이처럼 거리적, 지형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어왔다. 5500년 역사의 요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4000년 역사의 황하문명보다 앞선다. 예맥계의 고조선을 필두로 여러 유목민 세력이 살던 랴오닝에 처음 손을 뻗은 중국 세력은 연나라다. 연소왕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의 1000리, 고조선의 2000리 영토를 정복했다. 진·한 초기에는 중국계와 유목민족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으나, 한무제 때 한의 국력이 절정에 이르자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펼쳤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후 중국계 세력이 랴오닝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후한 말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탐관오리는 백성을 쥐어짰고 군대는 약했다. 머나먼 변경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이민족들은 자연스레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변방 지역부터 군벌들이 등장한다. 서량(간쑤성)에 동탁, 마등, 한수 등의 군벌이 나타났듯, 요서에는 공손찬, 요동에는 공손도가 실력자로 등장했다.


    막강 군벌의 등장

    공손찬은 여러 유목 부족을 기마부대 ‘백마의 종’으로 제압할 만큼 무용(武勇)이 탁월했고, 요서와 유주(허베이성 북부)를 장악한 북방 최강자였다. 사세삼공(四世三公)의 후예 원소도 8년에 걸친 전쟁 끝에야 겨우 공손찬 세력을 평정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오환족의 도움이 컸다. 공손찬은 이민족을 가혹하게 때려잡아 원한을 샀기에 오환족 답돈은 원소를 도와 공손찬을 격파했다. 원소는 유주를 차지하고, 오환은 요서를 차지했다. 이후로도 원소는 답돈 등 이민족의 우두머리에게 선우의 인수를 내리고, 친척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후하게 대접했다.

    원소와 오환의 제휴는 굳게 이어졌다. 조조가 관도대전으로 원소를 격파한 후 업성을 차지했을 때, 원상·원희 형제가 요서의 답돈에게 도망치자 유주·기주 관리와 백성 10만 호가 따랐다. 그만큼 원씨 일가는 하북과 오환에서 두루 인심을 얻고 있었고, 원상은 오환족에 의지해 재기를 시도했다.

    조조의 참모들은 유표가 유비를 보내 후방을 공격할 것을 우려해 철수하자고 했지만, 곽가만큼은 원상·답돈이 더욱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지금 원상을 남겨놓고 남쪽을 정벌하면 원상은 오환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사양치 않을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호족들이 또 한 차례 충돌하면 백성과 오랑캐가 모두 호응하게 될 것이며, 오환의 선우 답돈은 남쪽으로 중원을 넘볼 것이니 그가 만일 제업(帝業)을 이루려는 야심을 품으면 아마도 청주(산둥성)와 기주도 지킬 수 없을 겁니다.”

    조조는 곽가의 진언을 받아들인다. 조조가 원상·오환 연합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교통로를 마련하는 토목공사였다. 요서 지역은 여름에서 가을까지 물이 흐르는데, 얕아도 수레와 마차가 지날 수 없고, 깊어도 배가 뜨기 어려워 군대를 움직이기에 가장 어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조조는 2개의 운하를 건설하고 500여 리에 걸쳐 산을 파고 계곡을 메워 백단을 지나 평강을 거쳐서야 오환족의 근거지에 이를 수 있었다.



    50년 공손씨 정권의 최후

    장료가 선우 답돈을 베고 오환을 격파하자 원상 형제는 요동의 공손강에게 도망친다. 공손강은 공손도의 아들로 대를 이어 요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일찍이 196년 조조가 공손도를 무위장군에 영녕향후로 봉하자 공손도는 노발대발하며 조조가 내린 인수(印綬,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관인을 몸에 차기 위한 끈)를 창고에 처박아버렸다.

    “나는 요동의 왕인데, 어찌 일개 고을의 후(鄕侯)란 말인가!”

    조조가 심복 량무를 낙랑태수로 파견하자, 공손도는 요동을 후방의 낙랑으로 견제하려는 속셈을 간파하고 량무를 억류했다.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승리하고도 원씨 세력을 평정하느라 동분서주할 때 공손도는 조조의 뒤를 칠 생각까지 했다.

    “조조는 원정하느라 업에 수비가 없다고 한다. 지금 내가 3만 보병과 1만 기병으로 업을 친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공손강은 아버지만한 야심은 없었지만, 독립왕국이나 다름없는 요동의 지배자였다. 외부 세력이 달가울 리 없었다. 조조가 요동을 친다면 원상과 연합해 대항해야겠으나, 조조가 요동을 칠 생각이 없다면 오랫동안 눈엣가시이던 원씨 일가를 처단하는 게 나았다. 조조는 요동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귀신처럼 꿰뚫어봤다. 조조가 요동을 치지 않으니 공손강은 원상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냈다.

    이후 위·촉·오가 중원에서 난전을 벌이자,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독립왕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고 삼국 간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공손연이 오와 사신을 보내며 교류하자, 위는 후방의 요동이 매우 불편해졌다. 나아가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칭하며 독립했다. 결국 사마의는 4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주살하고, 관원·장군 2000여 명, 15세 이상 장정 7000여 명을 죽였다. 요동의 공손씨 정권은 50년 반세기의 역사를 비참하게 끝냈고, 요동은 위나라에게 귀속됐다.



    고구려, 발해, 고려의 활약

    이로 인해 고구려와 위는 국경을 맞닿게 됐고, 고구려 동천왕이 서안평(단둥 동부)을 친 것을 기화로 양국은 전쟁에 돌입한다. 위의 관구검은 고구려를 비류수 전투에서 격파하고 수도 국내성을 기습해 함락했고,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힘을 전혀 못 썼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가 강하다고 했던가. 위·진이 망하고 5호16국이 명멸하는 와중에도 고구려는 끝내 살아남아 더욱 강해졌고, 수·당이 중원을 천하통일할 때 이미 요동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당 시절에 ‘요동=고구려’였다. 수·당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한 끝에 당 고종이 신라의 도움을 받아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이 땅을 얻을 수는 없었다.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고구려 부흥운동 등 반발이 극심해 곧 유명무실한 기관이 됐고, 끝내 안사의 난(755~763년 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난)이 일어나며 91년 만에 폐지된다.

    고구려·말갈 연합세력이 세운 발해는 랴오닝의 새 주인이 되어 해동성국으로 불릴 만큼 세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여러 유목민족이 잇달아 일어나, 발해는 거란족의 요나라에,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 금나라는 몽고족의 원나라에 각각 무릎을 꿇었다. 중국 세력 당이 물러간 후 랴오닝은 유목민족이 발흥하는 주무대가 됐다.

    역사상 세계 최대의 정복국가인 원나라는 고려를 사실상 속국으로 삼으며, 요동에 고려총독부라 할 수 있는 정동행성을 세웠다. 훗날 명이 원을 중원에서 몰아낼 때, 고려 공민왕은 요동을 정벌했다. 신궁(神弓) 이성계는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아 모두 적군의 얼굴을 명중”시키는 대활약을 펼치며 오녀산성과 요동성을 점령했다. 군수 보급 문제로 점령하자마자 퇴각해 요동을 영토로 삼지는 못했으나, 요동 정벌은 총독부가 있던 요동을 침으로써 고려가 더 이상 원의 속국이 아님을 밝힌 정치·외교적 사건이었다.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

    명은 원을 축출해 한족 통일왕조를 재건했고, 이성계는 제2차 요동정벌을 가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다. 명태조 주원장의 경계와 정도전의 요동 정벌론으로 양국 사이가 험악해지기도 했지만, 결국 명이 요동을 차지하고 조선이 화친으로 돌아서며 양국은 명이 멸망할 때까지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랴오닝을 독자적인 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요동도사는 산둥성 소속이었으며, 단지 위소만을 세워 군대로써 그곳을 둔수(屯戍, 군영을 지킴)할 뿐이었다. 랴오닝이 수도 베이징과 워낙 가까워 반드시 지켜야 할 요충지이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명도, 조선도 손을 뻗지 않은 무주공산 랴오닝은 자연스레 다시 유목민족이 활약하는 터전이 됐다. 여진의 여러 부족은 원나라에 망한 좌절을 딛고 만주 일대에서 새롭게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특히 랴오닝의 건주 여진이 선두주자였다. 중국·조선과 가까운 이점을 살려 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활발하게 교역했다. 그 결과 “주거와 경작을 좋아하고 옷감 짜기를 잘해서, 음식과 복식이 모두 화인(華人)과 같다”는 평을 들었고, 매년 500명이 명나라로 들어가 조공무역을 했다.

    가까운 만큼 양국의 혜택도 많이 받았지만 견제도 많이 받았다. 명나라는 여진 부족들을 이간질해 싸우게 만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폈다. 건주 여진도 이간질에 희생돼 그 후손인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명나라가 건재할 때는 감히 저항할 수 없었지만, 명나라에 암군(暗君, 어리석은 임금)이 연달아 등장해 기강이 문란해지고, 임진왜란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쇠퇴의 길을 걷자 비로소 여진족이 날개를 폈다.



    나아가면 兵, 들어가면 民

    누르하치는 1615년 사냥 조직을 사회·군사 조직으로 일원화한 팔기(八旗) 제도를 정립했다. 팔기군은 “나아가면  병(兵)이 되고, 들어가면 민(民)이 되어, 경작과 전투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세워 금나라가 다시 찬란하게 부활했음을 선포했고, 여진의 여러 부족이 단결했다는 의미로 만주족이란 이름을 썼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10만 대군을 자신의 3만~4만 병력으로 대파한 뒤 여세를 몰아 여진 전체를 통일했다.

    명장 원숭환이 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꺾고, 영금대첩으로 홍타이지를 격파해 청이 요서를 넘지 못하게 막았으나, 청은 반간계로 원숭환을 제거하고 배후 근심거리인 조선을 병자호란으로 굴복시킨 뒤 허베이의 산해관을 넘어 천하를 통일했다.

    오랜 시간 전란에 시달린 랴오닝은 많은 지역이 초토화했다. 만주족이 산해관 밖 관외(關外)에 살 때 중국인들은 변경의 위험지역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청나라가 중원에 들어오자 랴오닝은 더 이상 변경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넓은 땅은 많은 중국인을 유혹했다. 만주족의 중국 정복은 역설적으로 한족의 요동 정착을 도왔다.

    관외에 한족 인구가 폭증하자 강희제는 만주가 만주족의 색채를 잃어버리고 한화(漢化)하는 것을 경계해 봉쇄령을 내렸지만, 인구 이동은 황제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건륭제는 베이징에 살던 만주족인 경기인(京旗人)에게 요동 땅을 주며 정착게 했지만, 이미 농사짓는 법을 잊어버린 만주족은 한족 이주민을 소작인으로 고용했고, 세월이 흐르며 근면한 한족이 땅을 사서 주인이 됐다. 점차 랴오닝은 만주족의 땅에서 한족의 땅으로 변했다.



    중국 흥망성쇠 압축판

    그러나 외세의 중국 진출 교두보인 랴오닝을 둘러싼 각축전은 끝나지 않았다. 갑오전쟁은 우리에게는 동학농민운동이지만, 중국에는 청일전쟁을 의미한다. 1894년 일본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며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랴오닝을 차지했다. 모든 일이 단 1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때 복병 러시아가 나타났다. 동북아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는 프랑스·독일과 함께 일본이 랴오닝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삼국간섭’ 끝에 러시아는 랴오닝 반도 끝 요충지를 군항으로 확보하고, 러시아에서 멀고도 먼 항구에 ‘다리니’, 즉 러시아어로 ‘멀다’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훗날 일본은 러일전쟁 승전 후 이 항구의 이름을 ‘다롄(大連)’으로 고쳤다. 산해관의 동쪽, 즉 ‘관동(關東)’ 랴오닝은 일본 관동군 핵심 근거지로서 중국과 동아시아 침략의 선봉이 됐다.

    이 와중에 랴오닝을 근거지로 일어난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동북왕’으로 군림했으나, 일본의 공작으로 폭사했고, 그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동북군을 이끌고 남하해 중원 대전을 끝내고 장제스(蔣介石)를 정상에 세웠다가, 시안사변(1936년 12월 2일 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의 만주군이 난징에서 온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國共) 내전 정지와 항일을 요구한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하도록 종용했다. 훗날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넣었으니, 장제스에게 장쉐량은 공도 으뜸이지만 죄도 으뜸인 애증의 존재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8월 24일 소련은 중국 공산당에 만주를 넘겼고, 공산당은 비로소 국민당을 능가할 수 있는 근거지를 갖게 됐다. 랴오닝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중국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청나라 이후 동북 지역이 중국에 편입된 지 3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중원은 아직 동북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북 역시 중원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한다. 왕하이팅의 ‘넓은 땅 중국인 성격지도’나 천관런의 ‘중국 각지 상인’ 등은 중국 각 지역의 특색을 성(省)별로 서술했지만, 유독 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 동북 3성은 한데 묶어 ‘둥베이(東北)’ 지역으로 다룬다. 중원에 산해관 밖 ‘관외’는 차이점이 없을까.

    작가 쑤쑤는 에세이 ‘쑤쑤, 동북을 거닐다’에서 동북 출신 한족이 느끼는 소외감을 표출했다. 쑤쑤는 만리장성을 보며 ‘한쪽 밖으로 내몰려 있으면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받고, 동북과 중원을 가르는 거대한 장애물 만리장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東北 프레임

    “동북이여, 너는 중원이 영원히 걱정하고 기억하고 있으며, 또한 항상 방어를 취하는 곳이며, 문밖에 내보내놓고도 억지로 품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존재다.”

    산둥성 이주민 후손인 쑤쑤는 랴오닝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면서도 오히려 중원을 고향으로 여기는 이민자의 정서를 가졌다. 그런데 중원이 동북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중원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쓴다. 중원의 편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동북인은 “덩치와 주먹, 목소리가 커서 겉모습만 보면 다른 사람들을 기죽게 하지만, 똑똑한 머리로 타인을 압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대 중국 황제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누르하치, 강희·건륭제는 동북인이 아니었던가. 금나라 때 전쟁포로로 끌려온 송나라 사람들이 동북에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한족 특유의 중원 중심주의가 드러난다.

    “한때 유명한 가문 출신이던 한족들이 지금은 마치 씨를 뿌리듯이 북방 벌판에 들어왔고, 척박한 오랑캐의 땅이던 북방 벌판은 이렇게 중화민족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쑤쑤의 언행은 동북의 소외감을 드러낸다. 동북 3성 중 가장 발전한 랴오닝도 예외가 아니다. 랴오닝은 면적 14만8400㎢(한반도의 66.4%), 인구 4390만 명으로 인구·크기 면에서는 중국 내에서 중간 정도의 성이지만, 2015년 명목 GDP 4614억 달러, 1인당 GDP 1만 달러로 경제적으로는 홍콩, 마카오, 대만을 제외한 중국 본토 내 10위권에 든다. 외관상으로는 중국에서 부유한 동부 연해지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북방의 홍콩’ 다롄은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15위의 무역항이다.

    그러나 내실을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동북 3성은 노후 중화학공업 위주 산업구조를 갖췄다. 중앙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2003년부터 10년간 고속성장을 했지만, 2013년부터는 약발이 떨어졌다. 2015년 랴오닝은 GDP 성장률 3%로 전국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다. 제조업 특성상 노동자 확보도 중요한데, 노동자들이 임금·복지가 더 좋은 광둥성 등 외지로 나가 노동력 유출도 심각하다. 이를 메우기 위해 북한 노동자를 수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경제에 정치까지 겹쳐보면 상황은 더욱 미묘하다. 2015년 7월 27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랴오닝을 방문해 경제 부흥을 독려하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경제 부흥’에 방점을 찍었으나, 시진핑의 속내는 ‘부정부패 척결’에 방점을 찍은 듯하다. 2016년 9월 랴오닝성에서 선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우리의 국회) 대표 102명 중 45명, 랴오닝성 인민대표(광역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452명이 금품수수·부정선거 혐의로 자격이 박탈됐다.

    전인대 자격 박탈은 신중국 건국 이래 초유의 일. 랴오닝성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당서기를 지낸 곳이다. 리커창의 지지 기반인 랴오닝방(遼寧幇)을 와해하려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다. 10월 말 중국공산당 18기 6중전회가 끝나자 시진핑의 약진과 공청단의 몰락이 엇갈렸다.



    북한 ‘알박기’ 풀어야

    침체된 랴오닝을 살리기 위한 절반의 해답은 한반도에 있다. 랴오닝은 중원과 한반도를 잇는다. 여진족은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교역을 하며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청나라를 세울 수 있었고, 만상 역시 대청(對淸) 무역을 통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현재 한반도 북부에서 ‘알박기’를 하는 북한은 동북아시아 전체의 원활한 교역을 가로막고 있다. 이는 랴오닝뿐 아니라 한국과 중국, 더 나아가 러시아, 일본에도 손실이다. 빗장이 풀리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교류할 때 랴오닝은 다시 활기를 찾을 수 있으리라.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오늘은 중국으로 드라이브하러 갈까” 하고는 서울에서 출발해 압록강 다리를 건너 중국을 오갈 수 있기를, 가깝게는 중국·러시아를 돌아보고, 멀게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서유럽의 끝 포르투갈의 파고 곶까지 달려볼 수 있기를, 그런 날이 어서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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