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왜 지금 다시 헌법인가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6-12-22 16: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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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돌프 폰 예링,
    ‘권리를 위한 투쟁 법감정의 형성에 관하여’,
    심재우·윤재왕 역,
    새물결, 2016

    차병직·윤재왕·윤지영,
    ‘지금 다시, 헌법’,
    로고폴리스, 2016

    에누리 없이 무정하고 건조해 보이는 책에 대해 말해보자. 그 어떤 비이성이나 비논리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공명정대한 책, 법전(法典)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독자는 맥락상, 눈치상, 여기서 하게 될 이야기가 법전이 의외로 지닌 감정적 측면과 빈틈에 대한 것임을 짐작했을 것이다.

    ‘안녕 헌법’(2009)의 개정판인 ‘지금 다시, 헌법’(2016)은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해석이 기본적인 목표이지만 그것을 통해 헌법이 얼마나 경험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의 결과물인지를 보여준다.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1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헌법 전문을 500쪽이 넘는 분량을 통해 분석과 설명과 예시로 전달한다. 이 과정에는 아홉 번의 개정을 거친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담겼다. 이 책의 헌법 읽기를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19세기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오래된 법적 견해를 함께 살펴보자. 예링의 견해 안에서 지금 다시 법을 의심하고 헐뜯어야 할 우리의 의무를 발견할 수 있다.



    법의 감정과 상대성

    예링이 12년의 간격을 두고 ‘권리를 위한 투쟁’(1872)과 ‘법감정의 형성에 관하여’(1884)라는 제목으로 빈(Wien) 법률가협회에서 펼친 두 강연은 15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에게 신선하다. 그것은 입법과 합법과 법 개정의 근본에 감정적이며 상대적인 요소들이 자리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핵심적인 개념은 ‘법감정’이다. 예링은 법의 힘이 사랑과 똑같이 감정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마치 사랑인 줄도 모르다가 어느 한순간 강렬한 사랑임을 의식하듯이, 법감정도 격정적이고 예민하며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감정은 어떠한 경우에 나타나며 어떻게 측정되는가. 윤리나 인격적인 권리가 침해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해 얼마만큼 격정적이고 지속적으로 반응하는지가 그 판단의 척도다. 또한 권리침해의 고통을 거부할 용기와 단호함이 법감정이 가지게 되는 건강함의 정도다. 그래서 법감정을 지키기 위해 수반되는 것이 투쟁이며, 윤리적 분노에 따른 투쟁은 법이 영원히 동반해야 할 노동이 된다.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는 법의 정당함을 가늠하는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법을 지키기 위한 칼을 든 것은 평화라는 목적과 투쟁이라는 수단이 법에서는 양립 가능한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링이 말하는 강렬하고 건강한 법감정이다.

    그러면서 예링은 법감정이 상대적이라 말한다. 각 시대의 법감정은 당대의 개인적, 사회적 자기보존 욕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신화시대와 구약시대의 도덕과 윤리는 강한 힘과 용기에 수반되는 정신적 힘으로서의 간계(奸計)와 복수의 능력이다. 헬리오스의 소들을 죽인 동료들 때문에 바다로 내쫓긴 오디세우스는 간계를 통해 신의 복수에 대항하면서 긴 고난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구약의 시대에도 기만과 사기는 계속된다.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인들의 금은보화를 훔쳐올 것을 명령한 것은, 당시에는 이방인은 얼마든지 속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라는 준법

    바로 이 지점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이러한 일들은 끔찍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했다는 것. 우리가 현재 범죄와 불법이라 규정하며 부도덕의 법감정을 갖기를 강요하는 법의 원칙들이 어쩌면 끔찍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둔다면, ‘지금 다시, 헌법’이 시도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을 상대주의적 세계로 열어놓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무미건조해 보이는 헌법의 문장들에서 존재의 합법적 평화를 위한 투쟁의 준거들을 적극적으로 발견해낸다. 19세기 예링의 낭만적 법감정에 해당하는 개념은 우리의 헌법 안에도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헌법 제2장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는 ‘양심(良心)의 자유’ 항목이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양심은 그렇게 선하기만 한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윤리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진실한 기준에 가깝다. 이 책에서 양심은, 한 헌법학자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실천함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다.



    즉 양심이란, 개인이 자신의 가치판단에 따라 내린 시비(是非)에 대한 태도를 바탕으로 행동할 용기와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러한 개개인의 다양한 마음과 인격을 보장해준다. 때로 겉으로 보기에 위악적이거나 사회의 다른 질서나 가치와 충돌하는 행위가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것일 때가 있다. 만일 이것이 한 사회의 맥락에서는 불온한 범법 행위여서 처벌받는다고 할지라도 양심의 자유만은 처벌돼서는 안 된다. 만일 그것이 진정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양심의 소리를 따른 것이라면, 그에 대해 강압적인 사과를 강요하지 않는 것. 이것이 모든 국민의 법인격을 존중해주는 사법 행위일 것이다.



     합법적 양심의 오·남용

     그러나 양심은 국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입법자와 사법자의 직무상 원칙이기도 하다. 입법자에게 헌법이 부여하는 권리는 아이러니하다. 제3장 제46조에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는 항목이 있다. 문제는 이 부분을 문법적으로 직역할 때 나타나는 상황이다.

    자동사 ‘우선한다’는 ‘무엇에 앞선다’는 뜻이며,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한다면 국가 이익보다 입법자의 양심이 더 중요해지는 어휘 사용의 오류가 나타나게 된다. 근·현대 대한민국 입법자들의 일그러진 유구한 양심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이 부분은 한시바삐 ‘국가 이익을 앞세워’나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하여’라고 수정돼야 한다.

    한편 사법자들에게 헌법이 부여하는 권리는 애매모호하다. 제5장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적는다. 여기서의 양심은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를 주관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리고 인간이 타락할 가능성까지를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 법제도여야 한다면, 이는 판사에게 변명과 나태함의 여지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위한 객관적 기준을 마련한다면, 그것은 법의 상대성과 양심이 해야 하는 진실한 투쟁의 기회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이 책은 결국 양심을 훈련하고 학습하는 제도를 만들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양심을 법의 수행적 감각으로 만드는 일. 법감정을 지금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일. 합법적 인격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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