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남아 있는 모든 것에 인내를 가지고, 그 의문들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 그 의문들이 현재를 살도록 하라. 훗날 언젠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사이 조금씩 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a Young Poet)’
요새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정신질환 중 하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다. 지금은 당연히 ‘질병’으로 여겨지는 PTSD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몸은 기억한다’의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이 심각한 증상이 ‘질병’으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분투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베트남 전쟁 이후 심각한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며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군인들을 치료하던 중 PTSD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를 비롯한 많은 의사는 정신적 문제로 보이는 이 고통이 실은 신체적 문제와 분명히 연결돼 있음을 발견하고, PTSD를 치료하고자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분석했다. 그의 잠정적 결론은 ‘비극은 분명 우리의 신체에 흔적을 새긴다는 것’이다.
비극을 몸에 새기는 칼
우리는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의학적으로도 사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는 뇌의 경고 시스템을 재조정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의 활성을 증대시키며 무관한 정보 속에서 관련 정보를 걸러내는 시스템을 변형시키는 등 생리학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라우마가 우리가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신체의 감정, 즉 체화된 느낌의 상호 전달을 관장하는 뇌 부위에도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PTSD 환자들이 아주 작은 자극에도 심하게 놀라거나, 위험을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을 감수하는 것은 이런 신체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남성 자체를 기피하면서 사회생활에 문제를 겪는 것, 테러나 지진 같은 대재난을 겪은 사람이 일상에서 들리는 아주 작은 소음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해 극심한 공포를 느끼는 것 등도 이런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들의 뇌는 적당한 위험을 때로는 즐기기도 하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지만, PTSD를 심하게 앓는 사람은 상처에 대한 회복 탄력성이 심하게 떨어지기에 다시 상처받지 않고자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는 소통의 고리 자체를 끊어내려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사람들은 ‘그가 사고를 겪더니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어’라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충격적 사고로 인해 인간의 뇌 자체가 커다란 변화를 겪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PTSD를 앓는 환자들이 보이는 이상 징후가 단지 성격의 변화가 아니라 뇌의 변화, 즉 몸의 변화로 인한 것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로 그런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인정했을 때, 몸을 치료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스트레스나 충격적인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나는 괜찮다’는 자기 위안을 그만둬야 한다. 그것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치료의 속도를 더디게 할 뿐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 자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치료의 기회를 놓칠 수가 있다. 스스로 ‘나는 사실, 결코 괜찮지 않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다 괜찮을 거야’라는 근거 없는 낙관 때문에, 진실을 제대로 아는 일은 점점 멀어져간다. “사람들은 군인들이 전쟁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사실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가 폭행을 당하고 학대를 받는지, 얼마나 많은 커플이 폭력과 마주하는지(실상은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무정한 세상에서 모든 가정이 안전하다고, 우리가 사는 국가는 의식이 깨어 있고 문명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잔인한 일들은 저 멀리 콩고 같은 곳에서만 벌어진다고 믿으려 한다.” 우리는 고통의 뿌리에 대해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그 방어기제 때문에 고통의 진정한 치유로부터도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
PTSD뿐 아니라 일상에서 흔히 겪는 우울이나 불안도 바로 이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회복함으로써 치유할 수 있다. 내 몸이 내 편이 아닌 상태를 극복하고, 내 몸을 진정 내 편으로 만들 때, 불안과 우울은 극복될 수 있다.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느낌, 내가 하는 행동이 진짜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고 마치 머나먼 곳에서 나 자신의 얼굴을 한 제3의 인물이 하는 행동처럼 느껴지는 것이 PTSD의 전형적인 증세다. 이를 ‘이인증(離人症)’이라고 한다. 텅 빈 무중력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듯, 허공에 발을 디딘 듯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이인증은 트라우마로 인한 해리 증상으로서, ‘사고를 당해 고통받는 나’와 ‘사고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가 내면에서 분리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나’라는 느낌을 마비시킴으로써, 마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닌 듯, 정신적으로는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멍하고 텅 빈 상태가 되곤 하는 것이 이인증이다.
트라우마 센터에서는 ‘몸의 감각을 회복하는 운동’을 통해 내 몸을 내 편으로 만들기를 시도한다고 한다. 비치볼을 던지고 받거나 드럼을 치는 것,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지압점을 누르는 것 등을 통해 내 몸의 느낌을 아는 것에서부터 치료가 시작된다. 환자의 심장 박동수와 호흡 패턴의 변화를 살펴보면서 내 몸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치유의 시작이다.
집단이 함께 참여하는 운동이나 음악은 ‘개인의 틀’에 갇힌 현대인의 삶을 공동체적인 장으로 확장시키고 무언의 치유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PTSD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음성’과 ‘몸짓’의 조화는 마음과 몸의 연결고리를 회복시켜 내면의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가톨릭 미사에서 성가를 부르고 동작을 하는 것도, 걸으면서 동시에 명상을 하는 불교의 의식도 몸과 마음의 연결고리를 느낌으로써 내면의 치유를 돕는 행위다.
‘우리 승리하리라’
저자는 미국의 시민권 운동 때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팔짱을 끼고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노래하면서 앞을 가로막은 경찰 병력을 향해 천천히 행진하던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혼자였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을 ‘한자리에, 함께, 몸과 마음을 모아’ 해냄으로써 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화합의 도가니 속에서 치유한 경험이야말로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테라피가 아니었을까.모두, 함께, 동시에 치유돼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공감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 촛불집회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당장 현실이 기적처럼 바뀌지는 않더라도, 그 수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촛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조율할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나눔으로써 집단적 트라우마에서 치유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