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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항쟁, 30年

진실 파헤친 그날의 특종 현대사 분수령 되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윤융근 기자|yunyk@donga.com

진실 파헤친 그날의 특종 현대사 분수령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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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87년이 만들어낸 체제에 산다. 그해 6월 10일 서울시청 앞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6월 명예혁명의 주역은 시민 모두일 것이나 언론의 탐사보도가 방아쇠 구실을 했다. 황호택 동아일보 고문(전 논설주간)이 출간한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은 “붓으로 싸운 민주화 운동사”(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다. 황 고문은 “사건 30년 만에 쓴 후속 보도다. 민주화를 이뤄낸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을 기록하려는 사명감으로 썼다”고 했다.

“6월 항쟁 30주년입니다. 그즈음 태어난 이들에게 물어보니 6월 항쟁을 모르는 경우도 많더군요.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의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것입니다.”



역사적 대사변 폭발시킨 뇌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은 당시 수사 관계자, 제보자, 취재기자, 딥스로트(내부고발자)들을 다시 만나 인터뷰한 후 저술한 책이다. 책을 쓰면서 박사학위 논문에 비견할 만큼 방대한 자료를 검토했다.

“6월 항쟁은 1961년 군사정변부터 1987년 신군부 통치 마지막까지 4반세기 동안 계속된 한국의 권위주의 통치를 종식시킨 시민들의 명예혁명이었다. 6월 항쟁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에서 민주주의라는 장미꽃을 피워낸 역사적 대사변이었다. 이 빛나는 6월 항쟁이라는 대사변을 폭발시킨 뇌관이 바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다.”(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1987년 동아일보 법조팀장이던 황호택 고문은 “한 대학생의 죽음이 철옹성 같던 전두환 체제를 무너뜨리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속보를 30년 만에 쓴다는 마음으로 보충 취재했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5년 2·12 총선에서 일격을 당했다. 신민당과 민한당을 합친 야권의 득표율(58.1%)이 민정당(35.3%)을 앞섰다. 2·12 총선 이후 독재 체제는 안으로부터 곪았다. 안기부, 경찰, 보안사가 상시적으로 자행한 고문은 곪아터지기 직전의 독재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전 국회의원·1947~2011)이 “박종철을 죽게 한 인간도살장”(32쪽)인 남영동 소재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스무 날 넘게 당한 고문의 실상을 폭로한 ‘남영동’을 1987년 펴냈다.”(32쪽) 박종철 사건을 6개월 앞두고는 ‘부천경찰서 성(性)고문 사건’이 터졌다. 성고문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폭풍이 밀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정권은 이른바 ‘보도지침’이라는 언론 통제를 통해 이 사건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운동권이나 인권단체의 유인물과 구속자 가족들의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TV나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었다. 5공화국 내내 언론의 숨통을 틀어쥔 보도지침이 맹위를 떨친 것이 바로 이 사건이다.”(42쪽)



‘신동아’ 性고문 사건 보도

남시욱 동아일보 출판국장은 비상한 각오를 다졌다. 이정윤 ‘신동아’ 편집장에게 성고문 사건의 전말과 고문을 고발하는 기사를 실으라고 주문했다. 1986년 ‘신동아’ 9월호에 ‘특별기획 고문’이 게재됐다. ‘고문, 인류문명의 수치’(한상범 동국대 교수), ‘권력과 고문’(김상철 변호사), ‘부천서 사건 시비의 시말’(황호택 기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고문은 이제 그만’ 긴급 입수-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고문 실태’ 등 4건의 기획기사가 실렸다.

“신동아 9월호에 10페이지에 걸친 꽤 긴 원고를 썼다. 그러나 인쇄 당일 영등포에 있던 동아출판공사에 안기부 요원 20명이 들이닥쳐 인쇄를 못하게 막았다.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언론 탄압이었고 업무방해였다. 당시 시국치안을 주도하던 장세동 안기부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49쪽)

안기부 담당자는 성고문 의혹을 제기한 부분에 빨간 줄을 북북 그었다. 안기부 검열로 황호택 기자가 쓴 기사의 일부가 삭제된 채 ‘신동아’에 실렸다.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에는 당시 삭제된 부분을 복원한 기사 전문이 실려 있다.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신동아’는 집중적인 관심 대상이었다. 안기부는 어떤 때는 ‘신동아’를 찍는 인쇄소에까지 요원들을 보내 이 잡지의 인쇄를 중단시키고 정부에 비판적인 원고를 삭제하는 횡포를 부렸다.”(47쪽)

‘신동아’는 9월호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보도한 데 이어 다음 달에는 고문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로 하고 10월호부터 ‘고문추방을 위한 특별기획’을 시작했다. ‘고문추방을 위한 특별기획①’에는 ‘고문은 영원히 추방돼야 한다’(심재우 고려대 법대 교수), ‘고문과 오판이 만든 살인범-무혐의 확정된 김시훈 씨의 경우’(황호택 기자),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성하운 기자)이 실렸다. 11월호 ‘고문추방을 위한 특별기획②’에는 김일수 고려대 교수가 ‘사법부는 고문 추방의 마지막 보루’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문명호 기자는 ‘고문고발 시민운동’ 제하 기사에서 김근태 의장 사건과 부천서 사건의 파장을 소개했다. ‘고문추방을 위한 특별기획③’과 ‘고문추방을 위한 특별기획④’가 12월호와 이듬해 1월호에 실렸다. 


폭풍이 불다

남시욱 출판국장은 고문 특집을 연거푸 내보내다가 1987년 1월 1일자로 편집국장 발령을 받는다. 그로부터 보름 만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 군이 고문을 받다 사망한다. “집요한 추적 끝에 그 전모가 밝혀진 대하드라마 같은 사건”(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황호택 고문의 회고다.
“남시욱 편집국장은 만약 내가 어떻게 되더라도 박군 사건은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고 부국장에게 당부했습니다. 그 사건 담당 기자였다는 사실은 자부심이자 행운입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석간 동아일보는 가판에서만 40만 부가 팔려나갔습니다. 가정 배달 60만 부에 가판까지 합치면 100만 부가 나간 겁니다. 그만큼 국민은 진실 보도와 민주화에 목말랐고, 그런 갈증이 결국 전두환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박종철 군 사망은 중앙일보 1월 15일자 1.5판의 2단짜리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1보를 놓친 동아일보는 이 순간부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보도의 선봉장이 된다. 동아일보는 1월 15일자 지방판 중간톱 5단 기사로 이 소식을 키우고 박종철 군의 얼굴 사진까지 구해 실었다. 그러곤 부검에 입회한 박군의 삼촌과 의사 오연상 씨의 증언을 토대로 쇼크사가 아니라 고문치사임을 밝히는 기사를 썼다.

“14일 오전 11시 45분경 박 군(고·故 박종철 씨)을 처음 보았을 때는 (…)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들로부터 들었다.”(동아일보 1987년 1월 17일자)

1월 15일자 지방판부터 악명 높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기사를 키운 것이었다. 1월 16일자에는 ‘폐에서 출혈반 발견’ ‘피멍이 많이 발견됐다’고 전하며 고문치사임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1월 19일자는 1면부터 사회면까지 6개 면에 걸쳐 고문치사 사건 사실 규명과 고문 추방 캠페인 기사로 채웠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고문치사의 진실을 파헤친 그날의 특종, 보도 통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1987년 1월 19일자 지면은 전체 12면 중 6개 면을 박종철 사건 기사로 뒤덮다시피 했다. ‘지구 최후의 날’과 같은 지면 제작이었다.‘(‘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앞표지에서 인용)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황호택 고문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소설가는 머리로 글을 쓰고 기자는 발로 글을 씁니다. 황열헌 동아일보 기자는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기사도 안 나갈 텐데 뭐 하러 가느냐’는 와중에도 박종철 씨의 시신을 화장하는 벽제화장터를 취재해 1987년 1월 17일자 ‘窓’이란 코너에 기사를 썼습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라던 아버지 박정기 씨의 마지막 말이 국민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동아일보 1월 17일자 3면에는 김중배 논설위원이 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중)

동아일보가 1987년 5월 22일자에 치안감을 비롯한 상급자들이 고문치사범 축소 조작을 모의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5월 27일 6월 항쟁을 주도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날에 맞춰 ‘박종철 군 고문살인 사건 은폐 조작 규탄 범국민대회’를 열기로 했다가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이름을 바꿨다. 6월 9일 연세대 학생들이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최루탄이 이한열 군의 뒷머리를 강타했다. 6월 10일 시청 앞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황호택 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30년 만에 다시 쓴 ‘박종철 속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회유와 협박,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내부고발자(딥스로트)들이 있었다. ‘30년 만에 진실 밝히는 딥스로트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에는 30년 전 사건 관련자들을 심층 인터뷰해 사실을 재확인하고 이번에 새롭게 밝힌 내용을 담았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에서 6월 항쟁을 거쳐 그의 1주기까지 고비마다 진실 규명에 기여한 사람들이 많다. 사슬에서 한 고리만 빠져도 체인의 기능이 상실돼버리듯 그들 중 누구 하나가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민주화는 더 늦어졌거나 더 많은 희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황호택(사진) 동아일보 고문은 198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기자로 활약했다. 논설위원, 수석논설위원, 논설실장, 논설주간을 역임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한국기자상을 두 해(1987, 1988) 연속 수상했고 동아대상(1987)을 받았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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