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호

이문열 장편소설 새 연재

둔주곡(遁走曲) 80년대

제1부 제국에 비끼는 노을 - '돌아가는 노래'

  • 이문열

    입력2017-06-22 15: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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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 위에서 한식을 만났는데          (馬上逢寒食)
    돌아가는 길 벌써 늦은 봄이네.     (途中屬暮春)
    옛 강나루 애틋이 바라봄이여       (可憐江浦望)
    낙수다리 위에 아는 이 안 보이네. (不見洛橋人)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버스가 추풍령 자락을 오르기 시작한 무렵부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한시 한 구절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어렵사리 한 연(聯)을 어울러놓고 시제를 떠올려보니 ‘당음(唐音)’ 첫머리에 나오는 ‘도중한식(途中寒食)’이란 오언율시였다. 그러나 옛날의 ‘당음’에는 첫 연 네 구만 나와 그걸 오언절구로만 알고 있는 이도 있다. 떠돌다 겨울 나고 말 등 위에서 한식을 만났는데, 이제 봄도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저 건너 정든 고향 강나루를 애틋하게 바라보니, 낙수(洛水) 다리 위에는 아는 얼굴 보이지 않네. 좀 더 정감 있게 풀이하면 대강 그런 귀향 모티프의 영회시(詠懷詩) 쯤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읊조려놓고 보니 계절이 좀 엉뚱스러웠다. 양력이긴 해도 벌써 7월로 접어들었는데 무슨 한식(寒食)에 또 봄 타령인가, 그는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길을 돌려 시원스럽게 낸 통유리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는 계절을 확인하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리 저리 찬찬히 살피다 보니 창밖의 계절도 꼭 여름만을 펼쳐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 짙고 무성해진 고속도로 양편의 계곡과 들판이며 가까운 산의 초목들은 어김없이 7월 초순의 신록을 펼쳐 보였지만, 그것들이 뿜어내는 생명력과 그 위로 떠도는 무슨 아지랑이 같은 옅은 후광은 아직 다하지 않은 봄기운 같은 걸 느끼게 했다. 두꺼운 방음 유리 속 연푸른 필터를 투과한 빛의 굴절이 그와 같은 느낌의 변화를 준 게 아닌가 싶었다. 너무 일찍 켠 고속버스의 에어컨도 그의 때늦은 봄 느낌에 한 원인이 된 듯했다. 그날 오후에 서울에서 있을 신문사 인터뷰를 의식해 차려입은 여름 정장에 약간 세게 튼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이 파고들어, 이른 봄 날씨의 찬 기운 같은 느낌으로 그의 계절감각을 뒤틀어놓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사이에도 창밖은 눈여겨볼수록 달라져 차츰 그의 느낌도 짙은 신록과 더불어 이미 다가든 초여름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한 군데 도로변 야산의 밤나무 등성이는 허옇게 덮어쓴 밤꽃으로 나른하면서도 애매한 고혹의 분위기를 자아냈고, 흔히 외설스러운 느낌으로 규정되는 그 비릿하고 알싸한 향기마저 두꺼운 차창을 뚫고 들어오기라도 한 듯, 어릴 적 그런 밤나무골을 지날 때의 야릇한 긴장과 흥분을 되살려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당음’ 첫머리에서는 절구(絶句)처럼 보이는 그 시가 원래는 율시(律詩)였다는 걸 나중에 알고 초당(初唐)의 시편 사이에서 어렵게 찾아내 이어둔 그다음 연에 이르자, 그는 문득 기억에 자신이 없어졌다. 첫 연에 덧붙여 외운 그 네 구절 가운데 특히 애절한 구절이 하나 있었다는 느낌까지는 겨우 되살려냈지만, 당장 첫 연에 이어서 욀 수 있는 것은 한 구절도 없었다.

    나중에 따로 외워서 그런가, 두어 해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하며 가망 없는 기억을 되살리다가 끝내 포기하게 되면서 슬그머니 그의 기억은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이들에게는 별로 인기 없던 당시(唐詩)를 머릿속에 우겨넣듯 외우는 것으로, 바깥세상과 이어진 어두운 상념을 털어내던 막막한 늙은 사병 시절을 공연히 심란해하며 더듬어보았다.

    사법시험을 핑계 삼아 몇 년 잡학과 몽상으로 객기를 부리며 떠돌던 그가 또래보다 네댓 해 늦어 입대한 그해 유월쯤의 일이었다.
     이 교육 저 훈련 거쳐 군번 받은 지 100일이 넘어서야 자대(自隊) 배치를 받은 첫날, 지급받은 관물로 불룩한 더플 백을 메고 본부중대 내무반을 찾아가니, 벌써 예비군복으로 갈아입고 전역신고를 기다리는 까마득한 선임사병 둘이 있었다.

    텅 빈 내무반에서 무료한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이제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온 신병을 한심한 눈길로 바라보다가, 떠나는 고참병으로서 마지막 큰 선심이나 쓰듯 병영생활을 잘 넘길 수 있는 몇 가지 요령을 일러주고 자상한 충고와 격려까지 보태었다. 그리고 ‘어렵겠지만 잘 견뎌봐’ 하며 힘든 곳에 어린 아우를 두고 떠나는 형들처럼 애처로워하는 표정으로 등까지 도닥거려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둘 모두 그보다 두어 살 어렸다. 같은 농촌 출신인 그 둘은 월남전이나 한번 구경해볼까 하고 첫 번째 입영 명령을 받자마자 군대로 달려왔지만, 이미 월남 파병이 중단되어 이 나라 전방 야포대에서 통신가설이나 하며 3년을 보내다가, 그때는 제대 출발을 한 시간가량 앞두고 있었다.

    그 무렵으로 봐서는 그리 이른 결혼이 아니었지만, 그러잖아도 늦어 어설픈 그의 입대는 그 결혼 때문에 더욱 어설프고 막막해졌다. 하지만 결혼과 병역의무 이행을 그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로 삼은 그들 신혼부부는 결혼에서 그의 입대까지 몇 달 동안 두 사람이 앞으로 함께 이겨내야 할 그 3년의 엄혹한 시련에 나름의 대책을 궁리했다. 대개는 어수선한 신혼의 밤잠을 설쳐가며 마련한 그 대책 가운데 몇 가지는 암담했던 복무기간 3년뿐만 아니라 뒷날의 삶에도 아주 유익하고 요긴하게 쓰였다.

    그가 입대한 첫해 여름에 큰아이를 낳은 아내는 자대 배치를 받아 그의 군사우편 주소가 확정되면서부터 두 주에 한 번꼴로 그에게 보내는 편지에 문고판 ‘한한(漢韓) 대역 당시(唐詩) 삼백 수’를 몇 장씩 뜯어내 함께 넣었다. 아마도 입대 전에 약속이 있어서였겠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그는 일등병 시절의 지루한 교육훈련이나 시답잖은 사역 시간 내내 그 한시 구절들을 무슨 주문처럼 외우면서 자칫 무료한 자투리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가 상병 시절 초기 통신기재병 직책을 맡아 전방 포병대대 통신장비 창고 한 모퉁이에 자신의 서류함과 책상을 가지게 되면서 당시 외우기는 끝이 났다. 아내의 편지에 마지막으로 동봉된 페이지 숫자로 그때까지 외운 것을 대강 헤아려보니 절구 율시 합쳐 한 200수 남짓했다. 그때만 해도 사병 복무기간이 3년6개월에서 하루도 에누리없이 채워져야 했던 시절이라, 따져보면 거의 한 해 꼬박을 그는 하루 한 편의 당시를 외우면서 때운 셈이 되었다. 좀 전 그가 떠올린 ‘도중한식’도 그때 외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밖에 그때 이후로 그가 특별하게 고전문 독해(讀解)에 전념한 적이 없음에도, 제대로 된 옥편(玉篇) 있고, 시골 정자 현판 초서나 소전 대전 벽자(僻字)가 아닌 글씨에, 띄어쓰기나 방점 웬만큼 되어 있는 고전한문이면, 아무 글이나 겁 안 내고 읽어보겠다고 덤벼들 수 있게 된 것 또한 그때 외운 ‘당시 삼백 수’에 힘입은 바 컸다.



    2.


    그사이 버스는 고속도로에서는 드물게, 길모퉁이를 돌 때의 가벼운 쏠림 같은 느낌을 주면서 얕은 오르막으로 올라섰다. 예전 그 어디에선가 예쁘장한 고속버스 안내양이 장갑 낀 손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관광 안내를 대신해 ‘여기가 경부고속도로에서 가장 커브가 심한 구간입니다’라고 알려주던 곳 같았다. 하지만 그 무렵은 그 휘어진 도로가 어떻게 펴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안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이라 생략하기로 했는지, 안내양은 운전대 곁 통로 건너 낮은 곳에 있는 접는 의자에 앞만 바라보며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초기 고속버스의 잦고 상세하던 관광 안내도 언젠가부터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다는 게 방금 새로 찾아낸 무슨 특별한 기억처럼 불쑥 떠올랐다.

    1970년대 초반 몇 년 산사(山寺)의 객방이나 고향 문중 강당이며 고택 정사(精舍) 같은 곳을 떠돌다가 마침내 모든 걸 접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처음으로 타보게 된 고속버스를 떠올리게 된 것도 그때였다. 뒷날 서른을 훌쩍 넘기고야 연좌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처음 국제항공편 기내로 들어섰을 때 못지않게 고속버스라는 그 새로운 형태의 교통문화는 그에게는 감동을 넘어 거의 감격적이었다.

    초등학생은 그냥 오르기가 거북할 정도의 계단 두 개를 올라 덩그렇게까지 느껴지던 버스 바닥, 그 아래로는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높이의 화물칸이 있고, 위로는 키 큰 남자의 손바닥도 닿지 않을 높이의 천장에, 어른이 매달려도 끄떡없을 가죽 띠와 플라스틱 링으로 만들어진 손잡이가 늘어진 그 실내 공간은 넓고 시원스럽다는 느낌을 넘어 위압적인 데마저 있었다. 거기다가 45도로 젖혀지는 베개 달린 의자 등받이며 다리 긴 사람에게도 넉넉한 그 발 받침대는 그때까지의 교통수단에는 한 번도 기대해본 적 없는 장거리 여행에서의 편의와 안락을 보장해주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고속버스는 그레이하운드 단일 차종이라 버스마다 달려 있던 화장실 또한 처음 타보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문화 경험이었다.

    그의 기억이 그렇게 7,8년 전을 더듬고 있는데 갑자기 뒤편에서 약간 다급함이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봐라, 차장. 차장 어딨노?”

    약간 술기운 실린 듯한 그 목소리에 일순 차 안이 조용해졌다. 그러면서도 차 안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안내양이 앉은 좌석 쪽으로 잠깐 몰렸다가 다시 소리친 사람 쪽을 향했다. 그에게는 왠지 그런 그들의 눈길에 대책 없는 실수를 한 사람에게 보내는 어떤 낭패스러움 비슷한 동정 또는 엄중한 규칙 위반이나 금기 무시에 대한 우려와 비난 같은 것이 섞여 있는 듯 느껴졌다.

    실은 그도 그랬다. 70년대 초의 어느 날인가, 공군 파일럿 같은 넥타이를 맨 셔츠 상의와 줄 세운 나사 바지 제복에, 운전수(手)도 운전원(員)도 운전사(士)도 아닌, 고속기사란 생소한 호칭으로 나타난 운전자들과 영화에서 본 비행기 스튜어디스 같은 복장과 제모에 고운 목깃 스카프까지 맨 안내양들은 오랜만에 도회지로 내려온 그를 까닭 없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그때도 우리 공항이 있고 국제선 국내선 모두 국적기가 취항하고 있었지만 기장이건 스튜어디스건 그녀들을 마주보고 말을 주고받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았다. 거기다가 그 뒤 오래잖아 있게 되는 늦은 입대로 3년이나 더 세상에서 격리되고, 제대 뒤에는 다시 지방 도시에 자리 잡아 어렵게 뿌리내리느라 장거리 여행에나 쓰는 고속버스와 거의 무관하게 몇 년을 지내오면서, 그런 교통체제를 대하는 묘한 경원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안내양 쪽에서 아무 대답이 없자 이번에는 조금 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뒤편에서 앞쪽으로 다가오며 소리를 높였다.

    “봐라, 앞에 거다 처자, 니 차장 아이가? 왜 사람이 찾는데 대답이 없노?”

    그가 돌아보니 아직 얼굴에 술기운이 불콰하게 남은 성깔 있어 뵈는 중늙은이였다. 그러자 예절 바르지만 악의는 숨기지 않은 뾰족한 목소리로 안내양이 대답했다.

    “저 대구발 경부선 7023호 고속버스 안내양인데요. 이 버스에는 차장이 없어요.”

    “안내양은 무신 안내양, 앉은 자리 딱 보이 바로 그 차장 자리고, 하는 일 보이 바로 딱 옛날 그 일인데. 차장, 야야, 봐라. 백줴 씰 데 없는 소리 주끼지(중얼거리지) 말고 차나 좀 세와라.”

    “시속 100킬로도 넘게 다니는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버스를 세우라니요? 아니, 할아버지 왜 그러시는데요?”

    “내 이전에 보이 개그린 차에는 변소가 달래(달려) 있었는데, 여기는 왜 그기 안 달맀노?”

    그런데 그 ‘개그린’이란 발음이 어디서 들어본 듯은 하면서도 귀에 낯선 게 왠지 우리말 같지 않고 외국어처럼 들렸다. 안내양이 못마땅한 심사를 깐족거림으로 바꾸어 받았다.

    “할아버지 ‘개그린’이란 말 그거 영어로 무슨 그런 차종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말로 ‘개 그려진 차’를 말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 차 그거 그레이하운드라고 서양 사냥개 몇 마리를 상표로 써서 차체에 그려둔 걸 보고 시골 사람들이 ‘개 그린 차’라고 불렀던 게 그렇게 차 이름으로 굳은 거라고요. 처음부터 미국서 쓰다 버린 중고차 들여왔다가 얼마 안 돼 폐차되어 고속도로에선 없어진 지 벌써 여러 해 되고요. 그리고….”

    “시끄럽다. 고마. 촤라(치워라). 그래 아는 성 시리 나댈 거 없다. 여러 말 시러부이(스러우니). 개그린이 우예튼(어쨌든) 간에 문제는 그게 아이라 변소라 카이. 내가 대구서 차 타기 전에 쏘주 한 고뿌(컵) 마싰디랬는데, 칠곡(휴게소)서 암치도 안킬래 그냥 지나쳤뿌랬디, 인제는 더 못 참겠다. 그러이 운전수 양반보고 아무데나 차 쫌 세와달라 캐라. 까딱하믄 오줌 싸겠다.”

    “이 할아버지가 증말. 할아버지 증말루 이전에 고물딱지 그레이하운드라도 한번 타보시기는 한 거예요? 그게 벌써 어느 고릿적 일인데. 그러고, 나한테 마구잡이로 차장, 차장 해대더니 이제는 우리 고속기사님한테까지 운전수 양반이래. 나 참, 기가 막혀.”
    안내양이 눈길까지 쏘아보듯 할금거리며 그렇게 받아쳤다. 그러자 그 중늙은이도 벌겋게 낯성을 냈다.

    “이기 무슨 이 따우 물건이 있노? 뭐시라? 니 지금 니한테 차장, 차장 캤다꼬 이래 누마리 하얗게 치뜨고 덤비는 게라? 하는 꼬라지 보이 고속버스 차장질 하는 기 억시기 대단한 출세나 한 줄 아는 갑네. 어데 뚤팬(뚫린) 입이라꼬 함부로 이래 쳐주끼노? 니 시방 내한테 훈계할라 카나 뭐 하노? 아이, 암만 캐도 이거 안 될따. 장수를 잡을라 카믄 말을 쏘라꼬, 차장 잡을라믄 운전수부터 잡도리 쳐야제.”



    그래놓고 목소리부터 가다듬은 뒤에 고속기사를 어르듯 말했다.

    “보소, 운전수 양반, 내 말 다 듣고 있제? 우선 급하이 차부터 쫌 세와조야(세워줘야) 될따. 일케(이렇게) 삔질삔질한 베로베또(벨벳) 깔아 논 새 뻐스 바닥에 술내 나는 오줌 한강이 나서야 되겠나? 그러이 좋게 말할 때 차부터 얼른 세우라꼬. 퍼뜩!”

    그때까지 말없이 그 시비를 듣고만 있던 승객들도 그 중늙은이가 갑자기 고속기사를 덮치듯 그렇게 소리치자 모두가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차안을 가만히 살펴보니 고속기사의 반응을 두고 긴장하는 기색들이 뚜렷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느긋한 고속기사의 목소리가 무겁게 굳어가던 차안의 분위기를 일시에 풀었다.

    “하이고, 어르신.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거는 안 되겠습니다. 벌써 대전 지나 한창 바쁜 경부고속 상행 노선입니다. 그것도 금요일 오후고요. 길바닥에 함부로 버스를 세우기도 어렵지만 세운다 해도, 점잖은 어르신이 이 허허벌판 어디에 바지 까고 쭈그려 앉겠습니까?”

    “가재는 게 편이라꼬, 가마이 보이 운전수 양반도 차장하고 한 핀(편) 무울라(먹으려) 카는 가베. 아무리 비싼 돈 내고 탄 차라 캐도 촌놈 급한 거는 아주 무시하겠다, 이 말이제?”

    “우리 안내 김 양이 성깔은 좀 있어도 그리 버르장머리 없는 애는 아닙니다. 어르신. 너무 노여워 마시고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여기서 이제 한 10분만 가면 금강휴게소가 나옵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화장실이 제일로 널찍한.”

    어휘는 표준말이라도 억양은 그 늙은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영남 사투리로 고속기사가 그렇게 눙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펄펄 뛰듯 소리를 질러대던 그 중늙은이가 갑자기 목소리까지 낮추진 못해도 모두가 알아듣게 수그러드는 어조로 우물우물 물러났다.
    “아이, 그래? 머, 일이 정 글타믄 그라지 머. 차장 딸아(계집아이) 조거, 쪼매 괘심키는 하지마는 거기다 갈바(맞서) 왕배야 덕배야 떠들어봐야 억시기 낯 날 일도 없고오. 글치마는 될라? 내 오줌보가 여다서 또 10분이나 더 배기낼라?”

    조금은 뜻밖인 그 중늙은이의 그런 대꾸에 은근히 긴장해서 듣고 있던 승객들이 알아보게 안도의 기색을 드러냈다. 그도 그걸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속도와 편의가, 안락과 여유가 언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모두를 참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치른 비용이 만만찮다는 것을 모두가 잊지 않고 있으며, 아무리 큰 효용과 능률이라도 부당한 권위로 행사되면 언제까지 참아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러자 그에게 약간은 엉뚱한 사고의 비약이 일어, 근년 들어 잇단 정부의 긴급조치들이 억제하려는 사회 분위기와 그것에 진력내고 반발하는 집단의식의 은밀한 충돌을 거기서 언뜻 엿본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어 근대화 산업화의 성과, 개발독재의 당근에 보상적 정권의 빵과 서커스, 유신이라는 낡고 폭력적인 권위주의의 제도화 따위, 그 무렵 사회의식의 상부에서 기층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던 은밀한 공론 같은 그런 개념들이 두서없이 그의 의식을 뒤헝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부터는 4·19 때 자유당을 비판하는 사설 몇 번 실었다가 대낮에 어용단체의 테러를 당한 것을 무슨 대단한 혁명 참여 지분으로 자부하는 지방 신문사 늦깎이 기자의 어정쩡한 지사의식도 한몫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신 8년차로 접어들며 사회 전반을 은근히 죄어오는 어떤 파국의 예감 또는 종말의식에 은근히 예민해져 있는.

    다행히도 버스는 10분이 채 못 돼 금강휴게소에 도착했고, 그걸로 차안의 짧은 분란과 긴장은 일단 가라앉았다. 그동안의 시비에 자극받아서였는지 갑작스러운 요의(尿意)로 다른 승객들에 섞여 화장실을 다녀온 그가 다시 고속버스 좌석으로 돌아오다 보니 앞줄 빈자리로 옮겨 앉은 안내양이 아직도 속이 풀리지 않았는지 손수건으로 젖은 눈가를 닦다가 손거울을 보며 조심스레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지도로는 대전이 대강 그 중간쯤이 된다. 그러나 근년 들어 그가 마음으로 서울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곳은 거기서 훨씬 더 북쪽으로 올라가 고속도로가에 천안까지의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나타날 때부터였다.

    그날도 그랬다. 금강휴게소를 떠나고도 한동안 그는 그전의 한가로운 여수(旅愁)에 젖어 있었다. 잘 기억나지 않는 ‘도중한식’의 전(轉)결(結)에 갈음해 봄길 떠도는 감회를 읊은 다른 한시를 몇 수 떠올려보기도 하고, 난데없이 아헨도르프의 낭만적인 산문시 한 구절을 흥얼거려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차창 밖으로 ‘천안 24km’라는 도로표지를 보고서야 그는 퍼뜩 가까워진 서울을 느끼고 거기서 자신이 들러야 할 곳과 만나야 할 사람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 따위로 주의를 돌렸다.



    3.
    “그날이 언제야? 언제 가야 하는데?”

    전날 서울 출판사 편집장이 장거리 전화로 해온 요청을 그가 무슨 민망한 일이나 털어놓듯 보고하자, 부장이 눈은 여전히 보고 있던 다음 날 치 국제판 교정지를 살피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수성 색연필 심이 녹기 좋게 물에 적신 교정지가 금방이라도 처져 내릴 듯했다. 호오(好惡)와 희비를 짐작할 수 없는 부장의 표정과 어조였지만, 그에게는 왠지 그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읽혔다.

    “내일 오전에는 여기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늦어도 10시까지는 제 스포츠 판 끝내고 11시 고속버스를 타야 서울의 오후 3시 인터뷰에 댈 수 있겠습니다.”

    “중앙지 인터뷰라면 지난달에도 몇 군데 요란 벅적하게 하고 왔잖아.”

    “그건 수상 소감 인터뷰였고…, 이건 이번에 새로 출간된 책 홍보 관련으로….”

    부장이 아직 특별하게 호오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도 그는 오히려 움츠러드는 기분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끗발 좋은 계간지 현상문예라지만, 결국은 신출내기 소설가 책 한 권 내주는 일인데 뭐 그리 난리스러워? 또 내일 오전 우리 스포츠 면 편집은 그렇다 쳐도 오후에 있을 이번 주 특집 판은 어쩔 거야? 서울 어디 신문사하곤지는 모르지만 그 인터뷰 그거 내일 저녁으로 미루면 안 돼? 보아하니 이 기자 새 책 좀 낫게 팔아주자고 작정하고 해주는 인터뷰 같은데. 내일 오후 늦게 서울 올라가 그쪽 담당 기자는 저녁때 만나보고 술이라도 한잔하며 얘기하면 더 좋잖아? 그리고 토요일 반공일만 결근하고 일요일까지 이어 쓰면 올라간 김에 서울 일 한꺼번에 더 많이 봐둘 수도 있고.”

    부장이 여전히 교정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같은 억양으로 그렇게 받았다.

    “실은 내일 오후 3시로 잡은 것도 사정해서 시간을 미룬 겁니다. 명색이 신춘문예 친정이라고 저쪽 문화부장님이 많이 봐주셔서, 토요일 석간 박스로 나갈 기사 취재를 금요일 오후 인터뷰로.”

    “그 동네 그거, 지가 내질렀다고 새끼 하나는 확실하게 챙기네. 그런 건 우리 공장도 본받아야 하는데.”

    “거기다가 토요일에는 잡지사 좌담 하나와 스포츠신문 인터뷰가 더 있고, 일요일에는 데뷔작 검열 문제로 만나봐야 할 고향 선배도 있습니다.”

    “바쁘군, 바뻐.”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부장의 표정에는 여전히 희로애락의 감정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럼 내일 조퇴하고 월요일 출근해도…, 괜찮겠습니까?”

    이제는 사표를 생각해볼 때도 됐다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차마 그것까지는 입에 올리지 못하고 우선 필요한 것만 부장과 마찬가지 억양 없는 투로 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근래 결근이 잦아진 말단 편집기자로는 좀 뻔뻔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사람 여섯 명으로 본판 8면에 한두 차례 개판(改版)까지 있는 석간신문 편집과 주말 특집 한 판에 지방판 보태 하루 여남은 판을 소화해야 하는 편집부의 사정은 수습(修習) 끝내고 3년 줄곧 편집부에서만 일해 온 그가 더 잘 알았다.

    “괜찮고 뭐고, 이 기자가 하마 다 결정해놓고 있으면서. 내가 뭐라 하면 또 사표 써들고 나설 거잖아?”

    부장은 그제야 힐끗 그를 올려보며 그렇게 답해놓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오전 그가 자신이 맡고 있는 스포츠 판 편집을 서둘러 마치고 11시 고속버스에 맞춰 타기 위해 신문사를 나설 때까지 부장은 그를 아예 ‘공장’ 안에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가 몇 가지 자잘한 기억과 함께 전날 퇴근 무렵부터 그날 아침 신문사를 조퇴하고 나설 때까지의 일을 이리저리 떠올리다가, 이제는 새로운 일상으로 편입되어가는 새내기 소설가로서의 삶을 문득 돌아보았다.




    4.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그에게도 간절하게 원하던 일은 불행처럼 느닷없고, 도둑처럼 슬그머니 찾아왔다. 한 일곱 달 되나, 그가 크리스마스 특집 판에 쓸 10단 박스 하나를 짜고 있는데 책상 한쪽으로 밀어둔 전화기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먼저 밝힌 상대가 전화 받는 쪽이 누군지를 물었다. 그가 이름을 대자 상대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내 거침없이 이었다.

    “그럼 이불휴(李弗休)는 필명이겠군요. 원래의 외자 이름에 아닐 불(弗)만 끼워 넣은 거 같고. 당선 축하드립니다.”

    그는 기습 같은 그 통고에 잠시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길마저 멎는 듯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린지는 처음 상대가 자신이 소속된 중앙지 신문사를 밝힐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두 달 전쯤의 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이른바 4대 일간지를 훑어보고 있는데, 그 무렵 한꺼번에 실리는 신춘문예 공모 공고 사이에서 시원하게 뽑아 눈에 띄는 박스 기사가 하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타 공인으로 이 나라 제일의 부수를 자랑하던 신문이 문화면을 빌려 낸 것으로, 이 땅에 신춘문예란 제도가 생기고 처음으로 중편소설을 공모하게 된 목적과 의의를 애써 강조하는 원고지 8매 분량 정도의 6단 박스 기사였다. 마침 그날은 소속사 편집국 간부회의에서도 이듬해 신춘문예 모집 공고를 결정한 날이어서, 그는 그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들이 다니는 신문사를 꼭 ‘우리 공장’이라고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편집국 간부들이지만, 지방신문이라도 구색은 갖춘다는 체면치레 이상의 의미가 있는 행사로 신춘문예 공모를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박스 기사 전문(前文)을 다 읽기도 전에 그는 한 편집기자로서의 참고가 아니라, 이미 서른이 넘은 작가 지망생으로서 자신을 위해 그 공지 사항과 응모 요령을 정독하고 있었다.

    한 해 늦어 들어간 대학교 신입생 때 우연한 인연에 끌려 가보게 된 문예창작 서클에서 그는 아무런 예비동작 없이 사나흘 만에 단편소설 한 편을 써서 바로 그 주 토요일 합평회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과분한 찬사와 갈채를 문학이 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으로 삼아 시작된 그의 습작 시절은 나을 만하면 재발하는 무슨 끔찍한 소모성 질환처럼 그의 황폐한 20대를 구석구석 갉아먹었다. 그러나 그만큼 흔적도 쌓여, 그 무렵 그는 절망적으로 찢거나 태워버린 것을 빼고도 사과 상자 하나 분량은 넘는 습작 원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는 중편의 형태로 된 것도 여섯 묶음이나 되었다.

    원고 마감일인 12월 10일까지 달포 남짓, 이 신문이 요구하는 300매 안팎의 중편을 새로 얽기에는 넉넉한 날수가 아니다. 이 공고는, 적어도 이번 첫 회에서는, 이것에 고무되고 격려 받아 새로 쓴 작품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고품 경쟁을 시키겠다는 거다. 천방지축,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새내기 문청(文靑)들이 아니라 곰삭은 작가 지망생들의 성숙한 재능을 발굴하려는 거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오랜만의 격려와 고양까지 느끼며 바로 그 현상공모에 응모하기로 했다.

    이튿날부터 그는 자기에게 할당된 그날 치 편집만 끝나면 바로 편집부 자료실로 퇴근해 거기서 기식한 게 그 시작이었다. 제법 정선된 만 권가량의 도서와 신문 관련 자료집에 이런저런 부도(附圖)가 비치돼 있고, 필요하면 작은 회의실로 쓸 수 있는 공간에 여남은 석 열람실까지 갖춘 그 자료실은 지난 3년 그에게는 개인 서재나 연구실처럼 활용되어왔다. 그런데 그때부터 정확히 한 달 보름 그곳은 오전 11시쯤 편집부에서 퇴근한 그가 다음 날 새벽 최소한의 수면과 생필품 보급을 확보하기 위해 집으로 퇴근할 때까지의 임시 집필실이 되었다. 차장 직급으로 자료실장을 맡아보던 마음 좋은 선배의 호의와 새벽의 들락거림을 양해해주는 당직실 덕분이었다.




    처음 보름 그는 그간의 습작 가운데 중편 형태의 원고 몇 편을 골라 수정과 첨삭을 하며 응모작을 다듬어보았다. 자신이 신춘문예를 바라보는 편견대로, 사회적 시의성(時宜性)과 심사위원들의 선호를 추정해 주제를 설정한 뒤 적당한 수준의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표현기법으로 엮어나간다. 대강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해보니 보름이 지나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작품이 없었다. 놀란 그는 얼결에, 또는 너무 빨리 든 절망적인 기분으로, 그런 습작들을 포기하고 남은 한 달 동안에 새로운 작품을 쓰게 되는데, 뒷날 돌아보면 참으로 아슬아슬한 선택이었다. 그때만 해도 군대 이야기, 특히 병영생활과 군대 조직을 부정적이거나 지나치게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은 국가보안이나 군사기밀 누출의 판단과 관련되어 기피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복무 중 마지막으로 경험한 사단급 포병 기동훈련을 가상 전쟁으로 각색해 본격적인 병영소설로 구성했다.

    시의성 대신 시대적 금기를 건드린 게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고 사변(思辨)에 대치된 체험의 생생함과 감각적인 표현이 야유와 경멸을 내장한 채 군사문화를 희화화하고 있다는 혐의를 준다…. 회상이 그 작품에 대한 그런 논평에 이르자 그의 사념은 차츰 둔주곡(遁走曲)의 어지러운 대위(對位)선율처럼 이리저리 나뉘어 흩어졌다. 그는 애써 회상을 밝고 낙관적인 쪽으로 이끌려고 애쓰며 처음 신춘문예 당선 통고를 받던 날부터 그 뒤 일곱 달을 되돌아보았다. 시상식을 앞뒤로 한 달 잔치 같은 나날이 지나고 오래잖아 뒤를 이은 격려가 방금 책으로 엮여 나온 그 소설의 현상공모 당선이었다.

    그해 2월 ‘신춘문예 당선작가 특집’으로 월간지 두 개에 단편을 하나씩 발표한 뒤, 그는 다시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세 개의 계간지 중 하나에 편집위원으로 있던 신춘문예 심사위원 한 분으로부터 그해 봄 호에 실을 중편 한 편을 청탁받았다. 이미 원고 마감이 임박한 그때 금방 쓸 수 없는 중편을 청탁한 것으로 보아 어떤 자리에선가 습작으로 중편 재고가 몇 편 더 있다고 실토한 것을 들어 그분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처음 자신을 잡지에 추천했거나 큰 상의 심사위원으로 자신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이는 일생의 문학적 스승으로 모시는 관행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스승의 엄명을 받들 듯 두말없이 습작 중편 하나를 급하게 매만져서 보냈던 것인데, 며칠 뒤 그분에게서 뜻밖의 서신이 날아왔다.

    …우리 잡지사에서는 ‘우리시대 작가상’을 제정해 매년 여름 호에 발표하고, 소정의 상금과 더불어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원고 응모 마감일이 2월 말이고 시상자 결정은 4월 말이며, 지면 발표는 우리 잡지 여름 호가 되고 단행본으로는 6월 초 발행입니다.
    이번에 보내주신 옥고는 우리 ‘시대문학’ 봄 호 게재를 위해 청탁한 것이었으나, 검토한 편집위원 가운데는 그 작품을 금년도 ‘우리시대 작가상’ 응모작으로 돌리자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어 먼저 작가의 의견을 묻습니다. 이번 계간지 봄 호 투고를 여름 호에 발표되는 ‘우리시대 작가상’ 응모작으로 바꾸는 데 동의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좀 어리둥절했으나 기꺼이 그 제안에 동의했다. 그러자 그 일은 먼저 풍문으로 뉴스가 되고, 5월이 되어서는 그 계간지 여름 호 ‘우리시대 작가상’ 수상자 발표와 500매 중편을 한꺼번에 실은 특집으로 신춘문예 중편 당선보다 더욱 떠들썩하게 그를 세상으로 불러냈다. 다시 6월 들어 중편 둘로 묶인 그의 첫 번째 책이 출간되고, 그 책은 내용 못지않게 책 출간을 둘러싸고 떠도는 풍문과 기담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렇게 되자 그는 원고 청탁으로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홍보 판촉 행사나 문단 모임에 자주 불려나갔다. 그때 그들은 대개 시대나 문학의 이름으로 그를 불렀으나, 불려가게 되는 곳은 언제나 서울이었다. 그리고 방금도 그는 초판 10만 부가 매진된 여세에 몰려 다시 서울로 불려가는 참이었다. 등단한 지 일곱 달 만에 두 편의 중편과 세 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다시 네 군데 잡지사의 청탁에 세 군데를 수락했다. 그 가운데 중편 두 편이 몇 달 간격으로 이름 있는 상을 받고, 그 무렵 무슨 유행처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문예잡지의 경쟁적인 원고 청탁은 자칫하면 중단편 습작 재고(在庫)가 그해 안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들게 할 정도였다.
    서울이 드디어 나를 불렀다. 나를 불러 쓴다. 또는 기른다, 만들어간다. 세운다. 그리고 다시 소모한다. 소모한다. 쥐어짠다…. 그 무렵 가끔씩 그는 꿈속에서 가위눌림으로 찾아드는 청탁의 압박에 시달리다 깨어나 휑한 머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5.
    희뜩 차창을 스쳐가는 것이 있어 돌아보니 그새 천안 분기점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었다. 그걸 보자 다시 ‘여기가 능수버들 전설로 유명한 천안삼거리가 됩니다.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길과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길 그리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이 만난다고 해서 삼거리란 말이 생겨나고, 과거 보러 가던 선비와 능수 아가씨의 버들 전설이 생겨났지요’라며 시작하던 예전 안내양들의 고운 목소리가 떠오르며 이번에는 천안이란 지명이 갑자기 그를 감상적인 회고로 이끌었다.

    경부선 기차로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절 그에게는 언제나 천안이 서울로 올라갈 때보다 고향인 경상도로 내려갈 때 더 강하게 의식되었다. ‘아, 나는 드디어 서울에 왔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적어도 영등포 역쯤에 기차가 들어서거나 늦어도 한강 철교를 우르릉거리며 건널 때가 되어야 했지만, 서울을 떠날 때는 언제나 천안쯤 와서야, 그것도 무언가 어두운 상념에 빠져 있다가 호두과자를 사라는 잡상인의 소리에 퍼뜩 깨어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서울을 떠났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동수단을 고속버스로 바꾼 뒤로도 감정의 습관 혹은 기억의 고집은 그대로 남은 것인지, 하행 고속버스가 천안을 지날 때도 가끔 서울을 떠나는 느낌을 되살려냈다. 그런데 그날은 그 느낌이 좀 유별났다. 그가 천안을 의식하면서 먼저 기억 속에서 건져 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다가가는 서울이 아니라 떠나는 서울이고 그것도 대개는 서울에서 패퇴해 떠나던 날의 쓸쓸함과 처량함이었다. 이어 전부터 앓아온 걷잡을 수 없는 조울(躁鬱)의 증상처럼 그의 의식은 조금 전 등단 초기의 득의와 고양을 깨끗이 털고 10년 전 마지막으로 서울을 떠나던 날 밤의 보통열차로 돌아갔다. 빗발 내리긋던 어두운 삼등칸 창틀과 겉으로는 비장함을 연출하고 있어도 안으로는 그저 막막하고 암담하기 그지없던 그때의 심사를 떠올렸다.

    나는 길을 잘못 든 속인(俗人)이었다…. 무언가 가슴 깊은 곳을 찔러오는 듯한, 야릇한 아픔 같은 것까지 느끼며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 그는 과장스럽게 되뇌었다. 자신의 말이라기보다는 좋아했던 어떤 예술가 소설 속의 한 구절이었다. 이어 그는 마음먹고 쓰는 성장소설의 미문(美文) 서술처럼 떠나던 날의 심경을 아스라한 기억 속에서 펼쳐나갔다.

    다니던 대학교에는 자퇴원을 내어 영영 돌아갈 다리를 끊고, 어렵게 이어왔던 2년의 어지러운 인연들과도 아무 기약 없이 결별했다. 더러는 영롱하기 그지없던 개성들과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빛날 것 같은 영감(靈感)도 만났지만, 그들과 우의도 나누고 오해도 주고받았지만, 함께 아파하며 뒹굴고, 때로는 성난 주먹질로 피탈까지 본 적이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진실과 미신을 밤새워 떠들며 술잔도 정도 함께 나누었지만, 누구와도 다시 만나자고 다짐한 적 없고 누구에게도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적 없이 나는 떠났다. 누구에겐가는 내가 새로 걸으려는 길을 알리고도 싶었으나, 이해받기보다 떠나는 내가 세상을 향해 품은 속된 원한이나 천박한 악의가 들킬까 겁났고, 더러는 이미 탄로 난 내 나약과 들춰진 영혼의 상처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게 싫었다.

    그는 한층 과장된 의식으로 오래 덮어두었던 기억을 더듬다가 다시 그때의 작별 의식과 이어지는 고리 하나를 더 찾아냈다. 그래, 맞아. 나는 그때 다시는 너희를 만나지 않겠다고 모진 맹세를 내걸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른바 뜻을 이루어 돌아온다 해도 그때 너희들이 있을 곳은 어김없이 낯선 곳. 그 시절 우리에게 공기와도 같던 자살의 충동과 허무, 함께할 전우도 없고 끝내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던 그 암담한 싸움, 숱한 설익은 영혼들이 전열조차 제대로 갖춰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그 참혹한 전장을 너희가 어떻게 헤쳐 나가 그 어디에 가 있을지 나는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어정쩡한 사랑놀이 뒤의 부질없는 미련 같은 것은 있었지만, 그 또한 한번 나뉘고 나니 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겼고 지워진 길은 다시 찾지 못했다. 마음속에 남겨놓은 한 가닥 길도 그때는 들켜서는 안 될 치명적인 외길처럼 느껴졌으며, 그래서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내 청춘은 교정을 떠나는 그날로 엄중하게 봉인되어 유폐되었다.

    그때 틀림없이 나는 무언가 거창한 꿈을 꾸었지만, 그게 푸른 구름이었는지 솟구치는 바람이었는지 너무 멀고 허망해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얼결에 접어든 길은 누구도 지난 흔적이 없어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부인하며 떠나는 길이라 나를 잡을 이도 없지만, 내가 바라보는 곳이 애매해 그 어느 길모퉁이에서 기다려주는 이를 바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낯설어 써늘하게까지 느껴지던 그 밤의 차창 밖으로 때마침 다가온 역 구내의 불빛에 홀연히 솟은 듯 나타난 이름 모를 간이역이 그때까지의 실없는 비감과 울적함을 한순간의 인상적인 기억으로 바꾸었다. 자정이 넘은 초겨울의 빗줄기 속에 그 무렵만 해도 간혹 남아 있던 식민지 시절 목조 양식의 조그마한 간이역사가 어찌 그리 음습하고 황량해 보이던지….



    깊은 물속으로 한없이 자맥질하듯 10년 저쪽 세월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던 그의 감상이 화들짝 깨어나듯 현실로 돌아온 것은 그사이를 쉴 새 없이 달려온 고속버스가 판교를 지나고 난 뒤였다. 저만치 4차선 고속도로를 여덟 개의 출입구로 펼쳐 막고 있는 서울 톨게이트와 그 지붕 위쪽으로 크게 써 붙인 ‘여기서부터 우리의 서울입니다’라는 문구를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이 서울을 떠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고 있음을 퍼뜩 깨우쳤다.

    이제까지의 모든 상념이 한낱 부질없는 되돌아보기 또는 꼴같잖은 자족감으로 치장된 의도적 추체험이나 아닌지. 그때 스물한 살의 대학 자퇴생은 이제 서른을 넘긴 나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인 가장이 되었다. 그런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한 게 천안을 지나면서부터였으니 벌써 한 시간이 다 돼가는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른하리만큼 흐트러지고 풀어진 감정을 가다듬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사이 먹구름 짙어진 차창 밖의 하늘과 비바람의 예감에 움츠러든 것 같은 고속도로변의 거친 조경이 그의 의식에  무슨 요사라도 부린 것일까. 조금 전 같은 애상 어린 감회는 아니라도 여전히 그를 무겁고 어두운 회고의 정서에 묶어두었다.

    예전 기차로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절 차창 밖으로 서울역의 붉은 벽돌 역사(驛舍)가 보이면 그는 거기서 어김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결핍과 고통의 예감으로 가슴부터 서늘해졌다. 특히 대학에서의 마지막이 된 세 학기에는 벌써 멀리 서울역사의 둥근 돔이 보이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처럼, 그리고 엄살처럼 되뇌게 되는 말이 따로 있었다. 이제부터 넉 달 뒤,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는 또 죽었구나, 이번에는 그대로 어육(魚肉)이 나리….

    집에서 어렵게 얻어온 1만 원에서 국립에 사범대학이라 싼 등록금 8000원을 제쳐놓으면 남는 게 2000원. 그중에 500원으로 한국일보에 가정교사 구직광고를 내고(다른 신문에도 1단 두 줄짜리 구직광고란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대개는 한국일보에만 가정교사 구직광고를 냈다), 전화번호가 있는 친지 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입주 가정교사를 찾는 사람들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나머지 1500원으로 다음 방학을 맞아 고향집으로 내려갈 때까지의 잡비 및 비상금으로 버텨야 하는데, 그게 정말 쉽지 않았다. 가정교사로 입주해 첫 사례금을 받을 때까지 버텨내기가 그랬고, 설령 버텨낸대도 방학 때까지 남은 날이 첩첩산중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유학생에게 맞춤형이 되는 입주 가정교사 자리는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구한다 해도 한 학기를 한 집에서 버텨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잡무수(雜務手)겸 서사(書士)에 때에 따라서는 마당쇠를 겸하고 방학도 없이 아이들을 가르쳐도 한 집에서 한 학기를  온전히 채우는 가정교사는 드물었다. 운때 맞지 않아 한두 번만 가정교사 자리를 옮기게 되어도, 그 학기의 태반은 구박덩어리가 되어 이 친구 저 친척집에 동가숙(東家宿) 서가식(西家食) 신세로 떠돌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서울역에 내릴 때도 위축이나 낙담에 못지않게 새로운 긴장과 투지도 일어, 그럴 때 그는 자신을 격려하듯 중얼거리고는 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구나, 드디어 돌아왔다. 그리고 대개는 새로운 다짐으로, 또는 장한 결의라도 하듯 혼잣말을 보탰다. 이왕에 온 이상은 맥없이 너에게 지지 않겠다. 쉽게 물러나지는 않겠다.

    그런데 그날은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 지붕에 높고 커다랗게 걸린 ‘우리의 서울’이란 문구가 문득 그 시절 서울역 붉은 벽돌 역사와 덩그런 돔을 떠오르게 하며, 까닭 모를 투지와 긴장감으로 그때까지의 음울한 회상을 털어내고 예전처럼 결연히 중얼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구나. 드디어 서울에 왔다…. 그러자 돌아온다는 말에 이어 난데없이 고향이란 말이 조합되면서 추풍령을 넘을 때 읊조렸던 ‘도중한식(途中寒食)’의 정서가 되살아나고, 그렇게 애써도 그저 애절했다는 느낌만 기억에 남아 있던 그 율시의 결구(結句) 한 구절이 불쑥 떠올랐다.

    고원장단처(故園腸斷處). 고향은 애간장이 끊어지게 하는 곳, 또는 고향 옛 뜰을 생각하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네. 그러나 나머지 세 구절은 과장된 개탄과 감상으로 버무려진 범속한 시국담 같았다는 어렴풋한 인상 기억뿐,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겹겹의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이 새어 나오듯 송지문(宋之問)이란 시인의 이름 석 자가 먼저 애달픔과 속절없음 그리고 섬뜩함을 무슨 휘황한 광배(光背)처럼 두르고 떠올랐다. 이어 어느 하나 따뜻하고 밝은 기색을 띠지 않은 얼굴들이 그 시인을 두고 하던 짧고 비정한 험담과 에두른 비하만 몇 마디 켜켜이 앉은 세월의 먼지를 털고 되살아났다. 말과 글의 이치에 밝고 거기에 뜻을 싣는 법도 알았으나 시비를 밝히고 선악을 가리는 데는 등한했던 사람, 아름다움과 참됨을 향한 선망이나 추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사무사(思無邪)의 큰 바탕에는 큰 믿음도 동경도 품지 못한 사람. 심전기(沈佺期)와 더불어 그리도 정교하게 성당(盛唐) 신체시의 틀을 다듬었으나 끝내 그 영광에는 동참할 수 없었던 박절한 사람….

    몇 가닥 실마리가 잡히자 그의 기억은 다시 송지문의 문학적인 삶을 참혹하게 만든 처세에서의 별난 선택으로 모아졌다. 시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기억해내면서 먼저 애달픔과 속절없음 그리고 섬뜩함부터 떠올린 것은 궁정시인, 관료시인으로서의 추문과도 같은 그의 정치적 교분과 정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 톨게이트부터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남은 길을 오는 동안 그는 무측전(武則天) 시절의 온갖 난정에 관련된 영신(佞臣) 남총(男寵)들과의 온당치 못한 친분과 거래로 죄를 쓰고 부침하다가, 끝내는 부처지(付處地)에서 다시 당명황(唐明皇)의 사약을 받게 되는 송지문의 애처롭고 처절한 생애를 까닭 모를 심란함으로 더듬어보았다. 그러다가 고속버스의 주차를 유도하는 요란스러운 호각 소리에 퍼뜩 깨어나 무슨 중요한 약속을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이나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제 막 오후 2시 반을 넘기고 있었다.

    그는 3시까지 인터뷰 약속이 있는 신문사에 도착할 수 있을지 잠깐 가늠해보았다. 그때까지의 경험으로는 택시를 타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았다. 어차피 자기 일터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그는 다시 느긋해지는 느낌으로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지난 대여섯 달 들락거리며 다시 낯익힌 풍경이 그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임을 한 번 더 상기시켰다. 나는 서울로 돌아왔거나, 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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