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에는 작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책이 가득 꽂혀 있다. 귓가에는 피아노, 기타, 첼로가 주연인 음악이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른다. 손가락은 꼼지락거리며 내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트북에 적는다.
눈으로는 험악한 사건 기록을 읽고, 귀로는 양측의 가시 돋친 말다툼을 듣고, 입으로는 피고인의 죄를 따지고, 손으로는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고 적던 법정에 있을 때와는 기분이 천양지차다. 법정에서도 재판 전에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방청석에 커피나 과자도 좀 내놓고. 내친김에 좀 더 멋대로 상상해보자면, 사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재판 시작 전에 판사가 방청석에 가서 커피도 한잔 마시며 담소도 나누고.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을 할 때에는 재판관들이 양국 당사자들과 재판 전에 저녁을 함께한다고 들었다(물론 국가 간 소송과 국내 소송이 같을 수는 없다). 유별나다고 뒷말을 듣더라도 사표 내기 전에 저질러봤어야 했나. 비현실적이라는 걸 안다. 현실적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지도. 그래도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문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그것을 감수해야 새로운 경험이라는 보상을 얻는 것 아닌가.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
그저께는 별안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4년 전 개봉한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찾아서 보았다. 한때 연인이었던 준세이(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아오이(천후이린)가 헤어진 후 각자 인생을 살아가다가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 때 피렌체 두오모 꼭대기에서 만나자던 10년 전 약속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왜 뜬금없이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제음악 ‘더 홀 나인 야즈(The whole nine yards)’가 북카페에서 되풀이해 들리던 음악이었다.14년 전에는 눈가가 촉촉해졌는데 이제는 도무지 그들의 로맨스에 몰입되지 않았다. 10년간 옛사랑을 못 잊는 것도, 10년 전 약속을 지키는 것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20대 청년의 열정은 사라지고 40대 아저씨의 냉정만 남은 것이다. ‘냉정’도 과분하고 ‘냉정과 냉소 사이’에 가깝다. 14년 전엔 못 봤지만 이제야 흥미로워서 유심히 본 대목도 있다. 시간적 상징의 대칭이다.
준세이는 뒤를 보고 서 있다. 과거에 고착돼 있다. 역사의 도시 피렌체에서 명화를 복원하는 일을 한다. 다른 여자를 만나도 옛사랑 아오이를 잊지 못한다. 반면 아오이는 앞을 보고 걷는다. 현실적이다. 미래를 쳐다보며 오늘을 산다. 그녀는 준세이를 잊고 부유한 새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한다. 패션과 상업의 도시 밀라노에 있는 보석상에서 일한다. 보석은 미래에도 끄떡없이 유지되는 가치를 상징한다.
판사 일을 하다가 관료(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 일을 시작한 지 다섯 달. 법원과 행정부는 피렌체와 밀라노만큼 서로 달랐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본질적 원인은 바라보는 시간의 방향 차이였다. 판사 때 주로 뒤를 돌아보고 서 있다가 관료가 되면서 앞을 보고 달리는 방향 전환을 겪은 것이다.
판사의 시간은 과거 사건 발생 시점에 고착돼 있다. 사람들 대부분이 함께 타고 올라가는 시간이라는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걸어 내려가면서까지 그 사건 발생 시점에 천착한다. 관료에게 사건은 도플러 효과를 일으키는 기차다. 기적소리는 기차가 다가올 때 높게 들리다가 기차가 지나쳐 멀어지면서부터는 낮게 들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를 두고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일단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이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건을 말(馬)에 비유하자면, 판사가 다루는 사태는 죽은 말이다. 판사는 돋보기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서 말이 죽은 원인을 차분히 분석한다. 반면 관료가 다루는 사건은 달리는 말이다. 부러 사건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판사와 달리 관료는 사건 속에 뛰어든다. 말 등에 올라탄 것이다. 양옆으로는 현재가 쉭쉭 지나쳐가고 정면에선 예측 못한 풍경이 들이닥친다. 등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현재의 온몸이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 끝없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고삐를 어디로 당기느냐에 따라 미래에 전개될 양상이 확연히 달라진다.
판사는 준세이의 직업인 유화복원사를 닮았다. 재판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살인사건 당시의 5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몇 년이고 재판하는 것을 보면 준세이가 이탈리아 화가 치골리의 작품을 오랜 시간 복원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복원을 위해 복원사가 물감과 끌, 확대경을 사용한다면 판사는 증거와 논리와 언어를 사용한다. 복원사의 작업이 공방에서 이루어진다면 판사의 과거 복원은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판 절차 중에서도 주로 증거조사 절차에서다.
증거조사-낭독과 열람 사이
증거조사는 말 그대로 판사가 증거를 조사하는 것이다. 법정영화 속에 흔히 나오는, 증인을 놓고 검사와 피고인 측이 신문을 하며 공방을 벌이는 장면도 증거조사의 하나다. 증거조사를 하는 목적은 판사가 어떤 사실이 있었는지에 대한 심증을 형성하기 위해서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자백하면 증거조사 절차가 짧게 끝나지만 부인하면 길어진다. 따라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하는지 여부는 판사, 검사, 변호인에게 초미의 관심사다.피고인이 부인하면 판사, 검사, 변호사 모두 일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심리적 긴장도 고조된다. 판사는 중요한 쟁점을 놓칠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 말할 때에도 어느 한쪽으로 심증이 치우쳐 보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입증 책임을 일방적으로 지고 있는 검사는 대부분 증거를 주도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증인이 어디 사는지 모르거나 소환해도 나오지 않으면 검사가 증인을 찾거나 법정에 데리고 나와야 한다. 증인이 법정에 나올 때를 대비해서 질문지(증인신문 사항)를 미리 작성해서 재판부에 제출해야 한다. 그 각각의 질문에 대해 증인의 예상 답변을 생각해보고 대비해야 한다. 증인을 신문하는 일 자체도 육체적으로 힘들다. 검사가 직접 몇 시간이고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피고인이 무죄를 주장하면 변호인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무죄변론이 성공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은 통계상 98%에 육박한다. 증거는 종류에 따라 조사 방법이 다르다. 증인에게는 신문한다. 사진의 경우에는 본다. 증거물이 있다면 제시한다. 서류에 대해서는 낭독한다. 낭독한다는 것은 가령 진술조서의 경우 검사나 법원사무관이 진술조서에 적힌 문답을 모두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의외였다. 서류는 당연히 눈으로 읽는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서류를 낭독하는 이유는 방청객을 포함한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듣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이다. 독일 법정에선 실제 모든 문서를 낭독한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모든 서류를 그렇게 낭독하는 법정은 없다. 대부분 기록이 수백 쪽 이상인데 언제 다 읽겠는가. 그래서 법은 예외적으로 열람이 적절할 때에는 열람하도록 규정한다. 열람이란 눈으로 읽거나 훑어보는 것이다. 열람도 법정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하루에 수십 건을 재판하는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그래서 판사는 대개 법정에서는 대강 훑어보고 본격적인 열람은 사무실로 돌아와 판결문을 쓰면서 한다. 판사가 수시로 야근하면서 하는 일이 바로 이 열람이다.
증인신문-소나기와 가랑비 사이
멋진 증인신문은 법정영화의 백미를 이룬다. 중학생 때 감명 깊게 본 영화 ‘어 퓨 굿 맨’의 명장면도 증인신문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법무관(톰 크루즈)이 군사법정에서 증인으로 나온 해병대 대령(잭 니콜슨)에게 도발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자 자존심 강한 대령이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치며 법무관을 훈계하는 과정에서 그만 자기가 부하의 고문을 지시했다고 실토하고 만다.
다른 법정영화나 드라마에도 이런 장면이 곧잘 등장한다. 검사나 변호사가 격정적으로 변론과 질문을 해대면 궁지에 몰린 피고인이나 증인이 마침내 입을 열고 실토하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의 법정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한번 거짓말을 시작하면 끝까지 우기는 것이 보통이다. 경험이 적은 검사나 변호사 중에서 화가 나서 격한 어조나 날카로운 표현으로 증인을 압박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것은 규정상 허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소송 전략으로도 좋지 않다.
노련한 검사나 변호사는 한 방의 질문으로 제압하려고 덤비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기본에 충실한 질문들을 던지면서 피고인이나 증인이 안심하고 거짓말을 계속 키워나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다가 틈틈이 작은 의심의 흠집을 낼 수 있는 질문들을 차분하게 던진다. 그 질문에 피고인이나 증인이 계속 거짓말을 해도 더 이상 진실을 추궁하지 않는다. 그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거나 재판장을 슬쩍 쳐다보거나 대답을 한 번 더 확인할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그런 흠집이 몇 차례 반복되면 판사 스스로 의심을 키워나가다가 결국 그 피고인이나 증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다. 마치 무술의 달인이 손가락으로 상대의 급소를 슬쩍 눌러놓으면 상대가 별것 아닌 줄 알고 돌아서서 걸어가다가 털썩 쓰러져 죽는 것같이. 주의할 것은 이것은 뉘앙스를 잘 읽어내는 노련한 판사에게만 통하는 비법이라는 점이다.
정재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