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저 메이 올컷, 유수아 옮김
‘작은 아씨들’, 펭귄클래식코리아, 2011
나는 ‘작은 아씨들’의 조와 나 자신을 동일시했다.
나는 그녀를 더욱 완벽하게 흉내 내기 위해서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지만, 제발 제목 번역만은 어떻게든 바꿔보고 싶다. ‘아씨’란 웬 말인가. 누군가 모셔줘야 하는 존재, 혼자서는 독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러나 이 소설 내용은 정반대이지 않은가. 주인공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씩씩하고 당당한 여성으로서,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인간으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한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꿈꾸는 눈물겨운 투쟁을 펼치지 않는가. 원래의 제목은 아주 간결하게도 ‘리틀 우먼(Little women)’인데, 차라리 ‘어린 소녀들’이라는 식의 평범한 번역이 나을지도 모른다. ‘작은 아씨들’이라는 제목이 우리 머릿속에 너무 오래 굳어져버려 여간해서는 바꾸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1868~69년에 걸쳐 집필된 이 작품은 ‘여성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완전히 정착되기도 전에 여성의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내면의 모험을 떠나기 시작한 네 자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크리스마스야.”
조가 양탄자 위에 드러누워서 투덜거렸다.
“가난한 건 너무 지긋지긋해.”
메그는 자신의 낡은 드레스를 내려다보며 한숨지었다.
“흥, 다른 소녀들은 예쁜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데 나처럼 가난한 애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니 불공평해.”
어린 에이미가 상처받은 목소리로 거들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또 우리 자매들이 있잖아.”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베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벽난로 불빛에 반사되어 환하게 빛나던 네 자매의 얼굴이 베스의 말에 한층 더 밝아졌다.
-‘작은 아씨들’ 중에서
이 소설의 첫 장면이다. 네 자매의 성격이 단번에 드러나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조는 돌려 말할 줄 모른다. 화끈하고 솔직하다. ‘선물도 없는 크리스마스는 도저히 크리스마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둘째 딸 조의 고백은 이 집안의 가난함을 한눈에 보여준다.
걱정 많고 책임감도 강한 첫째 딸 메그는 가난에 이골이 난 듯이 중얼거린다. 메그는 한창 예쁘게 꾸미고 싶은 나이에 항상 낡은 옷을 입고 부모님을 돕고, 동생들도 챙겨야 하니, 가난은 이 속 깊은 첫째 딸에게 너무도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에이미는 한층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줄 안다. “흥, 다른 소녀들은 예쁜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는데 나처럼 가난한 애들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니 불공평해.”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독립된 인간’
넷째 딸 에이미는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자주 상처받는다. 허영심도 많고 질투심도 많지만, 세련되게 자기 마음을 포장할 줄 모르는, 더없이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다. 셋째 딸 베스는 하늘의 천사가 땅 위에 실제로 강림한 듯 더없이 착하고 순수하다. 베스는 한 번도 투덜거린 적이 없다. 네 딸 중 가장 병약하지만, 역경을 이겨내는 마음의 전투력은 가장 강한 아이다. 베스는 모두가 ‘우울한 크리스마스’를 향해 한 마디씩 구슬프게 투덜거릴 때,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또 우리 자매들이 있잖아.” 이건 전혀 가식이 아니다. 베스에게는 한 톨의 티끌도 없다. ‘사람이 어쩌면 이토록 순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티 없이 맑은 영혼을 지닌 소녀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그들이 겪는 시련의 뿌리는 전쟁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다. 이 집의 실질적 가장은 씩씩하고 강인한 어머니다.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아이들이 절대로 기죽지 않도록 늘 용기를 심어주고, 딸들이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그리하여 ‘가난’ 하면 흔히 떠오르는 침울한 분위기는 이 소설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오히려 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낸다. 어머니와 딸들이 힘을 합쳐 역경을 이겨내는 장면은 읽는 이에게 ‘왜 나는 그때 이런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하는 뼈아픈 후회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조 마치의 집안은 항상 크고 작은 사건으로 떠들썩하지만, 그때마다 조의 재치와 용기, 메그의 침착함과 인내심이 빛을 발한다. 베스는 자신도 몸이 약하면서 더 가난하고 더 아픈 다른 사람들을 돕다가 본인까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에이미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살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꿈을 이뤄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둘째 딸 조가 가족을 향해 던지는 말들은 너무도 따스하면서도 용감무쌍하다. 메그가 숨길 수 없는 가난 때문에 서글픈 기색을 보이자 조는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언니! 내가 한몫 잡을 때까지만 기다려. 그때가 되면 마차를 타든 크림을 먹든 언니 마음대로 흥청거려도 되고,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빨간 머리 남자들과 고고하게 춤을 춰도 되니까.” 때로는 든든한 아버지 같고, 때로는 다정한 남편 같은 조. 아니 조는 세상의 그 어느 남편과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조는 단지 조 그 자신이라는 것만으로도 완벽하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니까. 조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여성적 역할을 거부하고 인간으로서 남성들과 똑같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원한다. 조는 마침내 작가가 되고, 글쓰기의 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천천히 이뤄나간다.
그들은 가난 속에서도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돼주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더없이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든 아름다운 것들, 행복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따스한 정성과 놀라운 솜씨로 직접 만들고 꾸미고 가꿈으로써 가정을 행복한 공동체로 만들어간다. 작가는 ‘남이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돈을 주고 사는 것’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을 직접 손으로 만드는 세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돈을 통한 소비가 아니라 정성과 솜씨를 다하는 창조의 세계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다. 가정적인 일은 사랑이 담긴 손길을 거쳐야 더욱 아름다워지는 법이다.”
“우리들만의 불빛을 만들어갔다”
로리가 메그의 결혼 준비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음 차례는 조’라고 말하자 조는 질색한다. “나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여자가 아니야. 나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어느 집안에나 노처녀가 한 명씩은 꼭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 “넌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잖아.” 로리는 얼굴이 발그스름해져서 조에게 간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만, 조는 여전히 눈치가 없다. 이런 ‘선머슴 같은’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내게 ‘작은 아씨들’이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들이 추구하는 행복이 내가 꿈꾸는 세상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원하는 세계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따스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착하기만 한 큰 딸 메그가 좀 더 늦게 결혼했더라면, 그녀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어린 소녀인데도 자신보다 더 어렵고 아픈 사람을 돕다가 병에 걸린 베스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하지만 그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씨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중한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거듭날 것 같다.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조는 이렇게 고백한다. “전쟁으로 등잔 기름이 귀한 시기였지만, 그 어두운 시절에 우리 마치 가족은 우리들만의 불빛을 만들어갔다.” 조의 끊임없는 글쓰기, 고독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용감한 글쓰기가 바로 ‘자기 안의 빛’을 찾는 과정이었으며,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우리들만의 불빛’을 만들어나가는 힘이 돼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