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호

어른들을 위한 리뷰

고래의 전설

중국 애니 ‘나의 붉은 고래’, 일본 애니 ‘괴물의 아이’ 그리고 ‘모비 딕’

  • 권재현 기자 | confetti@donga.com

    입력2017-06-22 14: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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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나는 고래. 국내에선 지난해 아웃도어의류업체인 내셔널지오그래픽 어패럴 TV광고로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다 촛불시위 때 세월호 아이들을 업고 촛불의 바다를 건너는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됐다.

    하늘을 나는, 그것도 떼 지어 나는 고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중국 애니메이션이 소개됐다. 6월 15일 개봉한 ‘나의 붉은 고래’다. 량쉬안(梁旋)과 장춘(張春). 두 신예 중국감독이 12년에 걸쳐 제작한 이 대작은 지난해 중국에서 개봉해 940억 원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물론 그걸 단순히 중국만의 역량으론 볼 수 없다. 이 작품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덴노(天皇)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천공의 섬 라푸타’ 등에서 차용한 장면을 여럿 만날 수 있다. 음악은 제2의 미야자키 하야오로 불리는 호소다 마모루(細田守) 감독의 데뷔작 ‘시간을 달리는 소년’의 음악감독 요시다 기요시(吉田潔)가 맡았다. 미국에서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코라의 전설’을 제작한 한국 스튜디오 ‘미르’도 제작에 참여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중국 애니메이션이라 하는 이유는 그 핵심 모티프가 중국 고전 ‘장자’ 소요유 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거대한 새 붕(鵬)의 전설이라는 데 있다. 장자가 ‘구라꾼’이 많기로 유명한 중국에서 ‘구라의 지존’으로 꼽히는 이유도 거기서 연유한다.
     
    세계 도처에는 엄청나게 큰 새에 대한 전설이 많다. 그리스신화 속 그리핀, 남미의 콘도르, 인도의 가루다(금시조) 등등. 하지만 크기에서 붕에 필적할 새는 없다. 몸통의 길이가 수천 리(1000리는 400km)에 이르고 날갯짓 한 번에 파도가 한반도 크기인 3000리나 솟구친다. 뭐 이 정도면 거의 우주새라 할 만하다.

    그런데 붕은 원래 북명(北冥)이라는 북쪽 바다에 사는 곤(鯤)이라는 물고기다. 역시 길이가 수천 리 되는 큰 물고기인데 이 물고기가 새로 변신해 붕이 되면 남명(南冥·조선시대 선비 조식의 호 남명은 여기서 따온 것)으로 불리는 남쪽 하늘로 날아간다 하였다.
    ‘나의 붉은 고래’는 붕의 전설에서 언급된 다음 단락에 주목했음이 틀림없다. ‘푸르른 하늘빛은 하늘의 본래 빛깔일까? 아득하게 멀어서 끝이 없어 그런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악의 근원은 괴물 아닌 인간

    두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은 마법의 세계에 악(惡)이 스며들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 때문이라는 설정이다. 주텐가이에서 악의 씨앗을 뿌리는 존재는 인간이다. 바로 렌과 이치로히코다. 렌이 구마테쓰의 자식이듯 이치로히코는 멧돼지 형상의 괴물 이오젠이 인간세계에서 거둔 양아들이다. 구마테쓰와 이오젠은 주텐가이의 차기 수장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다. 인간관계에선 둘 중 하나가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 마련이지만 둘은 끝까지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 문제는 그들이 인간세계에서 데려온 두 아들에게서 발생한다. 렌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이치로히코가 점차 악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것.

    렌 역시 어느 정도 자란 뒤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악의 씨앗을 발견한다. 그래서 이를 달래려 인간세계를 넘나들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탐독하다 문제 해결의 열쇠를 발견한다. 영화에선 그것이 무엇인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비 딕’을 직접 읽어보지 않은 관객(특히 어린이들)에겐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렌을 죽이기 위해 인간세계로 쫓아온 이치로히코가 ‘모비 딕’의 텍스트를 접한 뒤 거대 고래의 영으로 변신하고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렌의 심리 속에서 구현된다. 도쿄의 어두운 도심 위로 치솟는 고래는 곧 모비 딕이다. 그와 맞서 싸워야 하는 렌은 에이허브 선장이 돼야 한다. 에이허브는 모비 딕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자신은 물론 부하 선원과 배까지 모두 내던졌다. 하지만 렌은 반대로 자신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과 이치로히코의 생명까지 구하고자 한다. 도대체 렌은 왜 ‘악의 화신’으로서 모비 딕으로 출몰하는 이치로히코의 생명까지 구하려하는 것일까.

    모비 딕은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자연의 신비한 힘을 상징한다. 그것은 곧 나와 다르지만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타자 일반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세계에선 괴물이요, 괴물 세계에서도 왕따인 구마테쓰와 등가의 존재다. 동시에 인간세계와 괴물 세계에서 모두 왕따였던 렌 자신이기도 하다.

    반면 에이허브는 괴물이라 일컬어지는 존재를 접하는 순간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광기를 상징한다. 미지(未知)의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항상 기지(旣知)의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이성이 가장 폭력적으로 분출한 양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모비 딕과 같은 괴물의 속성이 아니다. 바로 렌 자신과 이치로히코와 같은 인간의 속성이다.

    렌은 ‘모비 딕’을 탐독하면서 이를 깨달았다. 그래서 에이허브의 길을 걷지 않기 위해 주텐가이와 구마테쓰를 떠나려 한다. 하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또 다른 인간 이치로히코는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자신뿐임을 자각한 렌은 이치로히코와 맞서 싸운다. 하지만 이치로히코도 이를 눈치챈 것일까. 하필이면 모비 딕의 형상으로 변신해 렌으로 하여금 에이허브의 길을 선택하도록 압박해 들어온다.

    ‘나의 붉은 고래’에서도 인간은 악의 씨앗이다. 죽은 영혼만이 머물 수 있는 북명의 세계에서 새끼 고래로 변신한 곤은 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북명에 숨어 있던 만악(萬惡)을 일깨운다. 인간의 악한 영혼을 쥐의 형태로 다스리던 늙은 마녀는 곤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과 인간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티켓을 획득한다. 그리고 곤이 붕이 되어 날아오르려는 순간 북명의 세계엔 거대한 기상이변과 지진해일이 몰아닥친다(이는 붕의 날갯짓에 파도가 3000리나 솟구친다 한 ‘장자’ 구절에 대한 변주다). 과연 춘은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속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놀랍게도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 두 작품의 해법은 동일하다. 악의 근원을 절멸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이다. 그것은 이 모든 고래 전설의 기원을 빚어낸 저 위대한 멜빌 선생도 놓친 동양적 신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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