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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억울할 땐 엉덩이를 상대방 쪽으로’

라인 지방식 분쟁해결법

  • 이종수|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억울할 땐 엉덩이를 상대방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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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에 살다 보면 교통사고 등 자잘한 일들로 소송에 휩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동양인이라고 차별받는 일도 많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마땅찮다. 그럴 땐 바지를 내려 맨 엉덩이를 내민 남성 조각상을 만들어 못마땅한 상대를 조롱했던 본 시민들의 기지를 떠올린다.
어느 곳에 살든 사람 사는 곳에는 분쟁이 발생한다. 분쟁 해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일만큼 재판에 의존하는 나라도 보기 드물 것이다. 내가 유학 와서 의과대학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때는 학교생활이 단조로워 타인과의 분쟁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자동차 사고에 변호사까지 동원

그러나 의사면허를 받아 병원에서 근무하며 사회생활을 하고부터는 헤아릴 수 없는 민사 및 형사재판을 체험했다. 민사소송은 대부분 치료비를 지불하지 않은 환자를 상대로 하거나,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수리 및 공사 관계, 또는 교통사고 등 때문에 발생했다. 형사재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통규칙 위반이 원인이다.

나는 1963년 지방병원에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샀다. 운전면허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차를 몰고 가다가 길가의 어느 집 벽을 들이받았다. 차 사고를 많이 내면 다음 해 보험금이 급등하니 이를 피하려고 보험 처리를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주 후 그 집 주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나는 그만 깜짝 놀랐다.

“귀하가 별지 계산서의 청구액을  ○년 ○월 ○일까지 지불하지 않으면 내 변호사에게 이 사건을 넘기겠습니다.”



나를 놀라게 한 첫째 이유는 변호사란 단어다. 그것도 ‘내 변호사’라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살 때 부모님은 내게 절대 변호사에게 민사사건을 맡기지 말고 상대방과 협상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가르쳤다. 한국에서 변호사에게 의뢰할 경우 변호사 경비가 많이 들어 부유층이 아니면 감당하기 어렵고 때에 따라서는 집안이 파산할 수도 있다고 귀가 아프게 들었다. 그런데 남의 집을 빌려서 살고 있는 독일 사람이 내 변호사 운운하니 놀란 것이다.

그가 많지 않은 수리비를 받기 위해 막대한 변호사 비용을 부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병원 동료에게 상의했더니 벽 수리비 청구액이 과다하다고 했다. 이번 기회에 벽 전체를 깨끗이 치장하려는 생각 같다는 것이었다.

“닥터 리, 너도 변호사에게 부탁해서 대항해.”

그런데 나는 독일 변호사 수임료가 높을 것으로 생각해 동료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청구액 전부를 송금해버렸다. 그 후 알고 보니 독일 변호사 개념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 독일에서는 법대를 졸업하고 시보 기간에 법원에서 연수하면 변호사 개업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개업한 변호사 수도 아주 많고 변호사를 통하지 않으면 소송을 할 수가 없다. 변호사 수수료도 국가가 규정한 바에 따라 청구되기 때문에 그 요금이 아주 낮다. 변호사들은 개업의나 마찬가지로 많은 안건을 의뢰받아 수가가 낮더라도 받아서 돈을 번다.

인간 상호 간의 분쟁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법이다. 독일은 국민생활을 많은 법으로 제약하고 있는 만큼 자기도 모르게 범법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 보니 사람들은 변호사비를 부담해주는 각종 법적 보호보험에 가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업 변호사 수가 날로 증가해 수임을 위한 경합도 심하다.



지나치게 딱딱한 잣대

그런데 독일이 통일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인종이 다른 독일 국적 소유자의 경우 비록 정당한 사유라도 각종 소송에서 승리할 확률이 낮아지는 것 같다. 한국 속담에 법 해석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다 걸면 귀걸이’란 말이 있다. 독일은 판례를 중요시하면서도 법관 재량에 따라 판결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민사소송인 경우 소송 상대방 변호사와 비교해서 내 변호사의 명성과 변호 능력이 우월하면 승소할 공산이 크고 변호사의 성의 및 생활관 여하가 재판을 유리하게 이끄는 요인이 된다. 형사재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독일 통일 이후 고조된 독일 국민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아 인종이 다른 독일 국적 소유자에 대한 소송에서 고의로 불리하게 만드는 변호사가 있을까 염려될 때가 있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의 낮은 처우 같은 사회문제들과 비교하면 차별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스멀스멀 느껴지는 이 차별의식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생존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2006년 봄 어느 토요일 오후 시간 여유가 좀 있어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병원일 때문에 바빠서 내가 직접 슈퍼마켓에 가는 일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집에서 파티를 할 때면 식단을 짜기 위해 몇 곳의 슈퍼마켓을 직접 돌아본다. 때마침 새로 구입한 차를 몰고 가 주차장에다 주차하고 먹을 것을 샀다. 토요일이어도 일이 있어서 병원으로 갔는데, 새 차를 못으로 긁어놓는 장난꾸러기가 적지 않아 차를 한 바퀴 돌며 점검하고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약 1시간 후에 집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인근 파출소의 경찰이 급히 다녀가라는 연락을 했다고 한다. 경찰에서 조사할 일이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파출소로 갔더니 20대 후반의 한 경찰관이 나에게 운전면허증을 보자고 했다.

“약 1시간 전에 ○○슈퍼에서 나오셨지요. 그때 교수님이 차로 후진하다가 뒤에 있는 차와 부딪쳤는데도 그냥 갔다고 두 사람이 와서 고발했습니다. 차 좀 볼까요?”

“그럴 리가 있어요? 내가 새 차를 사서 아주 조심조심 달리는데요. 후진할 때 차가 뒤에 있는 물체에 가까워지면 경고음이 울려 내가 알게 됩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나요? 그분들 이름을 좀 알려주세요. 그럼 그분들의 차에 파손된 곳이 있나요?”


곤경에 빠뜨리려는 수작

“이건 비밀 고발이니 신분은 알려드릴 수 없어요. 조서를 작성해 검찰에 넘길 터이니 그곳의 통지를 기다리세요.”
그 경찰관은 사진기를 가져와 파손된 흔적이 없는 내 차 뒷면을 여러 번 찍었다.

“이렇게 깨끗하니 별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는 염치없는 두 사람의 수작이다 생각하니 분노가 치솟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사고는 내지 않았으니 사필귀정이겠지 자위하고 8주가 지났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와보니 검찰로부터 편지가 한 장 와 있었다.

“타인의 차를 부딪치고 도주했으니 400유로의 벌금형에 처합니다. 만약 이 결정에 이의가 있으면 4주 내로 이의신청을 하기 바랍니다.”

이 통지서를 읽고 있는 동안 혈압은 올라가고 분노에 발을 동동거렸다. 즉시 변호사에게 연락해 항고하려다 숨을 깊이 쉬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런 일에 부딪히면 나는 우선 ‘무상’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지구는 그 시간에도 쉬지 않고 돌고 있고 적도에 있을 때는 지구와 같이 나도 시속 1700km의 자전 속도를 내며 달리는 셈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 빠른 속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차 사고를 내지 않았는데도 두 사람이 익명으로 고발해서 내가 벌금형을 받는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이 많은 게 우리의 보편적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독일에서 반세기 이상 살아왔고 국적도 받았지만, 남의 나라에 와 있으니 그런 일도 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뉴욕의 중국식당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서 자랐는데도 도저히 서울에서 살기가 어려워 1970년에 미국으로 왔어요. 우리 중국인은 한국에서 살기 너무 힘들어요.”



속도위반과 면죄부

유창한 한국말로 서울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던 중국식당 주인을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자라난 서울에 대한 향수에 젖을 때가 있다고 했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내가 그 말을 들을 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민족주의의 산물이다. 해외 동포는 강한 민족주의를 갖게 되지만, 강한 민족주의는 자연적으로 배타주의를 수반한다.

젊은 날에는 독일에서 법적인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즉시 변호사에게 의뢰해 소송을 제기했다. 독일 통일 전에는 본 공화국 시대이니 아직도 전승국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독일 사회가 외국인에 대해 비교적 친절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재판에서 나의 정당성을 관철하지 못한 경험이 적지 않다.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형사재판 하나가 속도위반이다. 1992년 가을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와 병원에서 일하다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갔다. 점심 도중 갑자기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가 생겼다는 병원 전화를 받고 차를 급히 몰았다. 우리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는 약 22km인데 시속 100km의 속도제한구역을 150km로 달리다 이동식 카메라에 걸렸다. 환자가 아주 위급한 때는 집에서 택시로 이동하면서 경찰에게 그 사유를 카폰으로 신고하고 시속 200km 이상 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은 환자가 아주 위중한 상태는 아니어서 내 차로 갔다. 그럼에도 마음이 다급해져 속도위반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몇 주 후 500마르크의 벌금에다 한 달간 운전면허 정지를 알리는 처벌장이 시청에서 날아왔다. 나는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속도위반한 것은 내 직업상 불가피한 사항 아니냐고 항고했다. 나는 교통사고 재판에 유능하다는 변호사를 소개받아 환자 치료상 속도위반이 불가피했다는 사유서를 제출했고, 증인으로 환자도 법정에 출석시켰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나는 간 이식관계로 환자에게 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속도위반을 해도 전부 면죄됐다. 그런데 독일 통일 후에는 사정이 변했다. 더욱이 나를 실망케 한 것은 그 유능하다는 변호사가 법정에서 수동적이며 조금도 내게 유리한 변호를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변호하는 사람도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이 교수님이 병원 환자를 살리기 전에 길 가는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를 낼 수 있어요” 하고 나이가 젊은 여자 재판관은 최초의 형량을 확정했다. 면허정지로 운전을 하지 못하고 한 달을 보내는 고역은 무어라 형용키 어려웠다. 그렇다 해도 위급환자를 위해서라면 속도위반을 계속 하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한 처벌도 불사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잊을 수 없는 민사소송

또 하나 기억이 생생한 것은 교통사고에 의한 민사소송이다. 1986년 여름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전 11시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 소화기내과에서 소화기질환에 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는데 간혼수(肝昏睡)의 인공간장 치료에 대한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런데 하루 전인 금요일 저녁에 간을 이식한 환자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해 토요일 오전 2시까지 치료하다가 옷이라도 갈아입고 강연장에 가려고 집에 갔는데 피곤에 지쳐 2시간 정도 잠에 취했다. 본 역에서 8시에 프랑크푸르트로 출발할 예정이어서 출발 전에 다시 환자를 점검하기 위해 새벽 4시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얼마나 환자 치료에 정신이 없었는지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진 것을 몰랐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가 정지해버렸다. 우선 강연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겠기에 하는 수 없이 차를 길가의 풀밭에 밀어 넣고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려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두운 새벽 시간에 시골길에서 나를 태워주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역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밤새워가며 환자를 돌보고 의학계의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강연하러 뛰어가는 나 자신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약 20분 달렸는데 뒤에서 차가 하나 달려오더니 내 곁을 지나 약 50m 앞에서 갑자기 전복돼 길가의 풀밭에 굴러버렸다. 아마 너무 빨리 질주하다가 내가 길가에서 뛰는 것을 못 본 모양이었다. 놀라서 가까이 가보니 운전하던 젊은이가 다행히 부상 없이 전복된 차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다행입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나는 기차시간에 맞추기 위해 계속 달려 역으로 갔다.

이런 일이 있고 몇 주 후 그 젊은이의 변호사로부터 편지가 왔다. 내가 길의 중앙을 달려갔기에 그 젊은이가 나를 피하느라 사고를 냈으니 차 수리비를 보상하라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차량이 두려워 길의 가장자리를 달렸는데 이 무슨 엉뚱한 소리란 말인가. 상식 밖의 요구였지만 내겐 증인이 없었다. 유능한 변호사에게 의뢰해 항고하고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됐다. 그런데 변호사만 출석해서 상대방 변호사가 내 변호사에게 제안해 쌍방이 반액씩 부담하기로 조정했다는 것이다.



한국 출신이라고 차별

“아니 변호사님, 그 젊은이가 잘못했는데요? 왜 그런 타협을 하셨어요? 나는 변호사님만 믿었는데.”

“교수님은 의과대학의 교수잖아요. 그 젊은이는 하급노동자인데 좀 도와주셔도 좋지 않습니까? 이 교수님의 수입이 그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그럴 때마다 인종적 열등감이 깃든 편견이 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자리 잡는다. 이것이 외국에 사는, 특히 유럽에 사는 아시아인의 병이다. ‘그 외국인 교수는 부자인데 자네가 좀 부담시켜’ 하는 대화를 변호사들끼리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봤다. 그 후부터 나는 열등감 탓에 민사소송은 심사숙고해 결정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기억을 더듬으면서 나는, 슈퍼마켓 앞에서 내가 뺑소니를 쳤다는 비밀 고발과 검찰의 벌금형 처리 문제를 숙고해봤다. 그 독일인들이 무슨 동기에서 내가 뺑소니를 쳤다고 했을까. 내가 자신의 차에 손상을 입혔으면 수리비를 요청하면 될 것인데, 그 요구는 하지 않고 왜 비밀고발만 했을까 궁금했다. 벌금은 50만 원 정도이니 그리 큰 액수는 아니었으나 나를 죄인으로 만든 자들에 대해 증오감이 치솟았다.

그 순간 나는 1987년 어느 날 당시 본 대학 총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날 서울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분이 나를 방문했다. 이분을 위해 본에 있는 문교 관계 부처의 장관 또는 차관, 그리고 독일학술교류처(DAAD), 훔볼트의 사무총장 등을 합해 30여 명을 우리 집에 초대해 이 장관의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온 본 대학 총장이 내게 던진 비꼬는 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이 교수는 궁전(palace)에서 살고 있군.”


본과 보이엘 시민들의 대립

자기 집은 내가 살고 있는 집보다 월등히 크며 고급 가구로 꾸며져 있는데,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빈한한 나라 한국에서 온 너 같은 자가 이처럼 잘사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비밀 고발한 자들도 아마 내가 운전하는 새 차를 보고 ‘이런 외국인 한 방 먹이자’라는 심사로 고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라인 강변에서 반세기 동안 연륜이 쌓이며 인생의 완숙기를 보내고 있는 내가 이런 분쟁에 부딪힐 때마다 떠올리는 해법이 있다. 본 대학에서 나를 길러준 은사 귀트게만 교수가 가르쳐준 라인 지방식 분쟁 해결법이다. 그 해법의 교훈은 무척 흥미롭다.

본 시의 중앙 라인 강 위에 걸려 있는 현 케네디 대교(大橋) 남쪽 교각에는 바지를 내린 반나체의 사나이가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내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조각상이 있었다. 지금은 철거해버렸지만 이 조각을 이 지방에서는 ‘본 대교의 소남(小男)’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라인 강 서쪽 도시인 본과 건너편, 즉 라인 강 동쪽에 있는 보이엘(Beuel) 사람들이 왕래하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다. 이 불편을 없애기 위해 다리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건설비 400만 마르크를 두 도시가 절반씩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1898년 다리 건설이 끝나자 보이엘 시는 건설비 지불을 거절했다. 당시 본은 대학도시이며 중세부터 쾰른의 대주교 별장이 있었던 2000년 역사의 도시이고, 보이엘은 주로 어부들이 살던 빈한한 도시였다.

본 시민들이 “왜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라고 항의하자 보이엘 시민들은 “너희가 우리 라인 강에 다리를 세웠지 않나! 우리 강에 세워놓고 무슨 건축비야”라며 대들었다. 이에 본 사람들은 “이것 봐, 우리가 성벽을 쌓고 교회를 지어 성가를 부르고 기도드릴 때 너희 야만족은 나무 위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기만 했는데 라인 강은 그때부터 우리 것이지” 하며 역사를 들추었다.

로마가 점령하기 전 라인 강 동쪽은 게르만 민족 여러 부족이 살던 게르마니아였고, 라인 강 서쪽은 켈트족 여러 부족이 살던 갈리아였다. 기원전 50년경에 로마가 라인 강 서쪽을 점령해 로마 문화가 꽃을 피운 갈리아-로마 시대가 라인 강 서쪽에 있는 본에 열렸고, 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미개의 상태가 지속됐다. 다리가 건립된 시기는 보불전쟁 후 독일의 프러시아 황제가 라인 지방 일대를 통치할 무렵이다. 로마 시대부터 천주교가 지배적인 라인 강 서쪽 지역이 1870년 보불전쟁 후 프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지역은 신교의 영향을 받게 됐다.



‘괴테의 클래식 인용’

이에 본 시민들은 건축비 청구 분쟁의 현명한 해결법을 생각한 끝에 건축비를 받을 수 없을바에는 바지를 벗고 허리를 굽혀 엉덩이를 내미는 사나이의 조각상을 만들어 보이엘 쪽 다리 지주에 붙여놓기로 했다. 이것은 고대부터 독일 서민 사이에 전하는, 상대방에게 수치감을 주는 욕설 ‘내 엉덩이를 빨아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전쟁 중 패배한 장수에게 굴복의 뜻을 표하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대학도시 본에 사는 시민이 어떻게 이렇게 야만적 표현을 할 수 있느냐는 보이엘 사람들의 평에 본 사람들은 태연하게도 그것은 독일 시인 ‘괴테의 클래식한 인용’이라며 의기양양했다. 독일의 서민 사회에서는 ‘내 엉덩이를 빨아라’라는 말을 약자로 L.m.a.A.라고 표현하나 독일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괴테의 클래식 인용’이란 말로 미화했다. 이 야하고 천한 표현이 시인 괴테의 인용이란 고상한 표현을 얻게 된 인연은 다음과 같다.

젊은 괴테는 현재의 프랑스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했다. 그곳 도서관에서 그는 중세 기사들이 황제에 반항한 사건 기록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16세기 유명한 기사의 일대기 ‘철의 손을 가지고 있는 괴츠 폰 베를리힌겐(Go..tz von Berlichingen), 막스밀리안 1세 황제 때의 용감한 제국기사’를 읽고 감탄해 6주 만에 이 내용을 희곡으로 각색했다. 이때가 1771년, 괴테가 22세 때다.

괴테는 희곡의 제3막에 괴츠(Go..tz)가 옥에 갇힌 자신을 잡으러 온 병사에게 “나는 황제를 존경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너의 부대장 대위에게 말하라. 내 엉덩이나 빨라고”라는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 후부터 지식인들은 점잖지 못한 L.m.a.A.란 말을 ‘괴테의 클래식 인용’이란 말로 대체했다. 이 작품의 원고를 괴테가 1773년, 1774년, 그리고 1804년에 개정해 공연했다.


못마땅한 곳으로 엉덩이를 돌려라

다리 건축비를 못 받은 본 시민은 이 ‘괴테의 클래식 인용’을 석조 조각으로 만들어 보이엘 시민, 특히 여자가 많이 다니는 쪽의 교각에 붙였다. 그리고 시인 괴테의 인용이라 자부했다.

세인들은 이것을 라인 지방식 분쟁 해결법이라 한다. 이 해결법은 ①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②재판을 걸지 않으며 ③무언의 요구를 영원히 하고 ④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부서지지 않으니 기억을 새롭게 해주는 항구적 요구이며 ⑤과격한 충돌을 피하는 하나의 유머러스한 방법이다. 더욱이 내가 당시 본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보이엘 사람들이 비록 건축비는 지불하지 않았어도 다리를 왕래하는 것은 관용했다는 사실이다.

본 사람들은 그 후 본 시와 이익이 상반되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이 본 대교 조각상의 엉덩이 방향을 돌렸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이 본 대교 소남의 엉덩이를 남쪽(Frankfurt)으로 돌려놓았다. 이 시기에 독일의 임시수도를 놓고 프랑크푸르트와 본이 경합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리고 통일 후는 동북에 있는 베를린 쪽으로 돌렸다. 독일연방공화국 수도를 베를린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나는 석양이 라인 강 동쪽을 물들일 무렵 본 대교 소남의 조각 밑을 왔다갔다 하며 비밀 고발로 발생한 벌금형 문제를 라인 지방식 분쟁 해결 방법으로 풀기로 했다. 괴테의 클래식 인용 조각은 내 가슴속에 간직하고 엉덩이 방향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으나 그 비밀 고발자에게 돌리기로 했다. 벌금 400유로를 송금하고 나는 정당성을 규명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법치국가의 한 시민이라고 검찰에 글을 썼다.

나는 절대로 교민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하지 않는다. 나의 생존을 좌우하는 중대사가 아니면 피한다. 라인 지방에서 반세기 가까이 살아왔으니 라인 지방식 분쟁 해결 방식을 존중하며 실천한다. 우리 교민은 독일인이 말하는 유색인종에 속한다. 유색인종 2명이 독일인 변호사를 대동하고 법정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통역을 대동하고 독일 법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김치, 고추장 등을 열거하며 상호 공격하는 것이 아름다운 장면은 아니다.

약 30년 전 일이다. 어느 교포 한 분의 소송에 내가 통역으로 법정에 선 적이 있다. 내가 그 사건이 봄에 발생했다고 한 피고의 말을 통역했더니 2월이 겨울이지 왜 봄이냐며 판사가 반문한 기억이 난다. 나는 한국에서는 음력으로 정월부터 3월까지를 봄으로 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은 관습적으로 2월은 봄이라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이와 같이 성장 과정, 또는 사회 환경의 차이에서 온 문제들을 해명해 법관 및 변호사에게 이해시키면서, 우리는 소시지 대신 김치를 먹는다는 설명까지 해야 하는 재판보다는 이 라인 지방식 분쟁 해결법이 이국에 살고 있는 교민 상호 간 분쟁 해결에는 더 적합하다고 본다.

약 15년 전의 일이다. 어느 교포 한 사람이 작은 간행물을 발간해 그 속에 나에 대한 악평을 써서 배부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큰 바다에서 헤엄치며 유럽인과의 경합에서 승리해야 하는데 적은 수의 교민이 살고 있는 독일에서 교포를 비방하며 자기만족을 얻는 교민도 적지 않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내가 아주 존경하는 젊은 교포2세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라인 지방에서 살고 있으니

“교수님, 그런 녀석은 그대로 두면 안 됩니다. 명예훼손죄로 고소해야 합니다.”  

“○○군, 안 하는 게 좋아요. 명예훼손죄로 고소해서 내가 이겼다고 해도 내가 얻을 것이 뭐지? 손해배상 청구했을 때 그분의 재산이 없으니 지불 능력이 없고, 내가 승소했다고 해서 독일 사회에 알려질 리 만무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될 교포가 얼마나 될까. 그것보다도 독일 법관 앞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독일인들에게 우리 교포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결과가 돼요. 라인 지방에 살고 있으니 라인 지방식 문제 해결 방법을 강구해보는 것이 좋지 않겠소?”

교포는 이방인의 운명 속에서 함께 생존해가야 할 공동운명체다. 서로 비방하지 말고 힘을 합해 독일사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독일뿐 아니라 지구상 어디에서건 마찬가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종수
●1929년생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저서: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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