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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國志 兵法 ⑤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 진 문공의 국가경영학

군정합일(軍政合一), 정평민부(政平民阜), 개방 인사로 내실 성장

  • 글: 박동운 언론인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 진 문공의 국가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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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覇者), 진 문공의 국가경영학

흠결 없는 인사는 국가경영의 전제 조건이다. 사진은 3월7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이헌재 부총리의 사표수리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는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

결국 리극 집단은 이오 옹립파와 합세하여 양에 있던 이오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이오가 귀국을 서두르자 측근들이 말렸다. 길은 멀고 국내에도 반대세력이 있으니 우선 요소요소를 회유하고 무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외교적 공약(空約)과 국내용 정치공약(公約)의 남발이었다.

그래서 이오는 이웃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목공에게 특사를 보내면서 친서와 선물을 지니고 가게 했다. 자신의 귀국을 보호해주면 즉위 후 하서(河西) 땅을 헌상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중국어 발음으로 진(秦)은 ‘친’, 진(晉)은 ‘진’). 그리고 국내의 리극에게는 즉위하면 분양의 땅을 쪼개어 봉하겠노라고 공약했다.

그러나 혜공(惠公)이라 칭하며 즉위한 이오는 자기 파벌의 확장과 근위대 및 정보기구의 강화에 급급했다. 배신과 파약의 연속이었다. 리극에겐 자살을 강요했고 그후에 잔당을 모조리 숙청했다. 그 꼴을 보고 국민이 심복하지 않았다.

나아가 경솔한 혜공은 은인의 나라인 진(秦)을 치려고 했다. 두 나라 군사가 한원(韓原)에서 크게 싸웠는데, 진군이 대승했다. 혜공은 포로로 잡혀 압송당했다. 배신자라고 처형당할 뻔했다.

혜공은 가까스로 풀려나 귀국했으나 대신 인질로 태자 어(퀩)를 보냈다. 그리고 자기 파벌의 중신들과 모략을 꾸몄다. 우선 ‘제후들이 외국에 망명 중인 중이를 귀국하게 한 뒤 즉위시키려 하니 불안하다’는 이유로 암살단을 파견했다. 중이는 그 소식을 듣고 거처를 동방의 대국인 제나라로 옮겨 피신했다. 인질로 갔던 태자 어는 비밀리에 도주하여 귀국했다. 그후 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즉위했으니 회공(懷公)이라 칭했다.



천하가 혜공·회공 부자의 잔꾀와 배신으로 가득찬 정보 공작과 파당정치를 혐오했다. 특히 서쪽 대국인 진(秦)나라 목공은 망명 중인 중이를 찾아내어 무력으로 귀국시킨 다음,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진(晉) 내부에 잠재하는 내응세력과 합작하여 회공을 죽였다. 그후 중이는 귀국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진(晉) 문공(文公, BC 697∼628)이다.

유랑생활 19년의 고초 끝에 62세에 즉위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초고령의 기적적인 정계 등장이었다. 문공이 즉위함으로써 진(晉)나라는 지리했던 다년간의 국정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유례없는 고령의 즉위였으나, 문공의 등장은 ‘준비된 집권’이었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마냥 적(狄), 제(齊),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초(楚), 진(秦) 등 여러 나라로 거처를 옮기면서 때론 굶주리고 때론 모욕을 참아내면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피해 다녔다. 도피에만 급급한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각국의 다양한 정치현실을 심도 있게 비교 연구했다. 나아가 귀국에 대비해 미리 정책 청사진의 대강을 마련했다. 적재적소에 등용할 인재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귀국하자마자 시행착오 없이 즉각 효율적인 국정을 펴나갈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구시대 정치의 폐해가 혼란과 불신에서 비롯된다는 데 착안했다. 그러니 새 정권의 급선무로 안정과 신뢰가 부각됐다. 신경지 개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소외권’ 포용, ‘경력파’ 무시

국내 정치에서는 우선 안정과 화합, 신뢰와 협동을 표방했다. 한편으로 집권 초창기엔 기득권층의 저항을 극소화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지지세력을 급속히 요직에 등용하여 새 정권의 통치기반을 공고화할 과제도 부각됐다.

당시의 기득권층은 궁정 안팎의 종실 귀족과 대부(大夫)들, 특히 벼슬을 이용해 토지를 불법 점유한 무리였다. 문공은 그들의 재산에 섣불리 손대지 않았으며, 과거의 죄악을 묻지도 않았다. 설령 민원대상이 있어 지지세력이 분통을 터뜨리는 경우에도 정책적으로는 ‘과거사 규명’을 하지 않았다. 만부득이한 사안이라도 단계적인 각개격파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지지세력의 요직 등용은 신(新)정권의 화급한 자위적 요청이기도 했다. 문공은 집권 즉시 망명 시절 줄곧 자기를 따르며 지켜준 충신들을 모두 중용했다. 도중에 멀어진 사람들이라 해도 적어도 당분간은 충성할 것으로 보고 한때의 유감을 접고 등용했다. 새 인재 등용에서는 그동안 구(舊)정권에서 푸대접받았거나 무대접으로 취급된 ‘소외권’ 인사들을 대담하게 기용했다. 또 군소집단(현대 용어로는 정당 결성 이전의 이익단체나 서클 등)을 포섭하고 단결시키는 데 유의했다고 한다(中國改革史, 河北敎育出版社, 石家莊, 199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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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동운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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