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호

인어공주 앞에서 안데르센을 만나다

[유럽역사기행] 기발하고 유쾌한 덴마크 코펜하겐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명예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20-05-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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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 아카데미·국회의사당 된 궁궐들

    • 열정의 조각가 토르발센의 미술관

    • 신앙의 본질 지키려 한 키르케고르의 고뇌

    • 레고처럼 유연하고 명랑한 시민들

    덴마크 코펜하겐 전경.

    덴마크 코펜하겐 전경.

    세상에서 성평등지수(GDI)가 가장 높은 곳은 덴마크다(2019년 기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도 역시 덴마크다. 2012년부터 발간된 세계행복보고서를 보면 이 나라는 늘 최상위권에 속했다. 이런 특별한 나라의 수도가 코펜하겐이다. 

    덴마크 하면 낙농업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옛날 이 나라는 그랬다. 오늘날은 세계 굴지의 산업국가다. 그것도 미국이나 독일식 공업국가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이가 좋아하는 레고(LEGO)가 바로 덴마크를 대표하는 대기업이다. 세계 어디서나 풍력발전 하면 베스타스의 터빈을 찾는데 덴마크산(産)이다.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도 덴마크가 주산지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특별하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들은 끊임없이 대안을 추구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코펜하겐은 대안의 산실이었다.

    저항과 자유의 도시

    셸란섬 북동쪽에 있는 코펜하겐은 ‘상인의 항구’라는 뜻이다. 11세기부터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그들은 바이킹의 후손이라서 처음에는 약탈과 침략을 일삼았다. 섬의 동쪽 지역인 로스킬레에 바이킹 배 박물관이 있다. 바이킹의 배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바이킹에 관한 이야기는 유럽역사기행 ‘스톡홀름’ 편 참고). 시간이 흐르자 바이킹은 노략질을 중단하고 무역업으로 전향했다. 

    무역항의 전통이 빛나는 코펜하겐은 녹지가 울창하다. 현대적 미학이 반영된 새 건물도 적지 않다. 그래도 내 눈을 끈 것은 덴마크의 긍지가 살아 있는 구식 건물들이었다. 나는 이곳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꼈다. 기성의 틀에서 탈출하려는 저항과 자유의 정신이 녹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바람은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심각하지는 않았다. 내 눈에 비친 코펜하겐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여흥과 재미를 좋아하는 실용주의자다. 

    도심에 자리 잡은 티볼리 공원이 상징적이다. 무려 1843년에 개장했으니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놀이공원이다. 작가 안데르센도 이곳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덴마크 사람들의 투쟁에는 기발하고 명랑한 점이 있었다. 시내 왕립도서관 뜰에서 내 친구 한스와 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곳은 코펜하겐대 도서관도 겸하고 있는데, 그 정원에 덴마크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한스는 재밌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히틀러 정권이 유럽을 휩쓸던 시절, 덴마크에는 8000여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나치는 그들을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덴마크 사람들은 협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숨겨주거나 또는 중립국 스웨덴으로 탈출하게 도와줬다. 그때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이런 말로 덴마크 사람들을 고무했다고 한다.

    “모두가 노랑별을 달 것이다”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에게 노랑별을 가슴에 붙이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노랑별을 달 것이다!” 

    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반격인가. 

    단호하면서도 위트 있는 덴마크 사람들이다. 아무리 심각한 일이라도 여기서는 굳이 사생결단을 할 필요가 없다. 재치 있는 말 한마디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일깨우는 힘이 이들의 문화적 자산이다. 

    내 친구 한스는 코펜하겐의 명소로 나를 안내했다. 일단 오래된 시가지로 갔다. 샤를로텐보르 궁전이 눈앞에 나타났다. 본래는 왕실이 사용했으나 1754년부터는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건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영조 때부터 왕실이 대궐을 예술가들에게 양보한 셈이다. 

    다음에 둘러본 곳은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이다. 12세기부터 왕궁으로 사용했는데 현재는 국회의사당이다. 말하자면 서울의 경복궁을 국회로 내준 셈이다. 역사적 흐름에 발맞춰 덴마크 왕가는 시민들에게 궁궐을 양도했다. 

    또 아말리엔보르 궁전도 둘러봤다. 18세기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실 전용 공간이다. 해안 가까이 있는데, 정오에 열리는 위병 교대식이 제법 볼만하다. 이 궁전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또 다른 고적이 많다. 가령 북쪽에는 ‘대리석 교회’라 불리는 프레데릭 교회가 있고, 남쪽에는 왕립극장이 위치한다. 

    한스와 함께 나는 코펜하겐의 거리를 많이도 걸었다.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넘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관광객들도 내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많은 사람이 1882년 세워진 뉘 칼스버그 조각관(글립토테크 미술관)으로 쏠리고 있었다. 창립자는 칼스버그 맥주회사의 제2대 사장인 칼 야콥슨. 자신의 소장품을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이집트를 비롯해 메소포타미아와 로마의 걸작이 많다. 근대 덴마크의 예술품과 프랑스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도 적지 않다. 로댕의 명작인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미술관 가까이에는 칼스버그 양조공장이 있다. 우리는 거기서 목을 축이며 한동안 휴식을 취했다. 티볼리 공원도 근처여서 기분이 더욱 유쾌해졌다.

    인생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안데르센

    안데르센(왼쪽)과
인어공주상.

    안데르센(왼쪽)과 인어공주상.

    아말리엔보르 왕궁의 북쪽 해안으로 갔다. 인어공주상(像)은 그곳에 있었다. 높이가 80cm쯤 되는 작은 조각상이다. 앞에서 말한 칼 야콥슨이 의뢰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어공주는 여러 번 수난을 겼었다. 세 번이나 두상이 파손됐고, 2003년에는 산산조각 나기도 했다. 조각상은 다시 제작됐다. 유명세란 이런 것인가.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작중 인물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 몹시 가난했는데, 뉘하운 운하 근처에 살았다. 부두노동자들이 북적이는 선술집 거리였다. 지금은 멋진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다. 한스와 나는 거기서 덴마크식 미트볼인 프리카델러를 주문했다. 기름지고 소박한 요리였다. 

    화제는 자연히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에 집중됐다. 그는 구두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였는지 열등감이 많았다. 자기 현시 욕구(자신의 존재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도 강했다. 10년이 멀다 하고 자서전을 고쳐 쓴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200여 편 동화를 썼다. ‘미운 오리 새끼’와 ‘인어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눈의 여왕’은 최고의 대표작일 것이다. 생전에도 인기가 높아 1846년에는 시민의 영예인 단네브로 훈장을 받았다. 유럽 각국에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았다. 19세기 영국 문단의 총아였던 찰스 디킨스가 안데르센의 애독자였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안데르센의 글쓰기는 독특했다. 그는 전래동화를 윤색하기보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해 창작의 신세계를 개척했다. 

    “나의 인생이야말로 내 작품에 대한 최고의 주석이다.” 

    이 말처럼 안데르센 작품 세계는 자신의 인생 경험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미운 오리새끼’였다. 사랑을 추구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인어공주이기도 했다. 작가는 동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그는 우리의 짐작과 달리 어린이만을 위해서 동화를 창작한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는 내 이야기를 피상적으로 읽는다. 성숙한 어른이라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안데르센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작품을 썼다. 복잡한 현실 문제를 우회적으로 고발하는 데에도 동화란 유용한 도구였다. 훈장을 가슴에 달았다 해도 그는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다. 또한 자신의 혼란스러운 성적 정체성으로 인해 깊이 고뇌했다. 안데르센은 다수의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이성애자이기도 했다. 세상사에 무능했기에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아시스텐스 교회묘지에 잠들어 있다. 한스와 나는 그의 무덤 앞에 장미꽃 한 묶음을 바쳤다.


    유럽을 매혹한 조각가의 정열

    코펜하겐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이 참 많다. 내게는 정말 인상적인 곳이 토르발센 미술관이었다. 본래는 크리스티안보르그 궁전 일부였다. 마차를 보관하는 차고였다. 국왕 프레데릭 6세의 윤허로 미술관이 거기에 들어섰다. 

    미술관에 가면 베르텔 토르발센의 여러 조각 작품과 스케치, 석고상 등이 눈길을 끈다. 아울러 그가 로마에 체류하면서 수집한 예술 작품도 보인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시대의 훌륭한 조각 작품들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화가 전해진다. 노년의 토르발센(1770~1844)은 이 미술관이 개관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으나 개관 직전 사망했다. 그를 위로하려는 뜻이었을까. 미술관 뜰에 토르발센의 묘가 있다. 

    그는 아이슬란드 태생으로 목공예가의 아들이었다. 11살에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로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로마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아손과 황금 양털’(1803)이 꼽힌다. 알다시피 이아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이다. 황금 양털을 구하려고 아르고호(號)를 타고 원정을 떠난 인물이다. 토르발센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깊이 매료됐다. 그는 신화를 형상화한 고대 예술 작품을 깊이 연구했다. 그가 로마에 40년간이나 체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덴마크 미술계의 많은 예술가가 그의 작품에서 소재도 얻었고 기법도 배웠다. 토르발센 작풍을 비판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오늘날에는 그가 19세기 덴마크 최고 조각가였다는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한스는 내게 말했다. 토르발센이 하필 신화의 세계에 몰입한 것은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그럴 법하다고 느꼈다. 따지고 보면 안데르센이 상상의 세계에 침잠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프레데릭 교회와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조각상(왼쪽)과 구세주교회 첨탑.

    키르케고르 조각상(왼쪽)과 구세주교회 첨탑.

    19세기 코펜하겐에서는 서구 근대문명에 대해 철학적으로 비판한 학자도 있었다. 키르케고르(1813~1855)였다. 한스와 나는 그를 프레데릭 교회에서 만났다. 정확히 말해 그의 동상은 교회를 빙 둘러 호위하고 있는 여러 신학자의 동상들 틈에 끼어 있었다. 

    프레데릭 교회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큰 돔(원형 지붕)으로 유명하다. 돔을 떠받친 열두 개의 기둥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생각을 더듬어보니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방한 것이었다. 

    18세기 중반 프레데릭 5세 때 교회의 건축 사업이 시작됐다. 대리석으로 지을 계획이었다. 이 교회의 별명 또한 대리석 교회다. 그러나 재원이 달려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됐다가 19세기 말에 겨우 완공됐다. 대리석을 쓰지 못하고 석회암으로 마무리했다. 

    이 교회에 왜 키르케고르가 한자리를 차지했을까. 그는 서구 근대문명에 맞서 신앙의 본질을 지키려 힘썼기 때문이다. 19세기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덴마크에도 격변기였다. 절대군주제로부터 입헌군주제로 정치체제가 바뀌었다. 사회 전반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바람이 불었다. 키르케고르는 그러한 변화를 못마땅해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자유는 시민의 평균화를 초래할 것이었다. 개인의 주관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는 당대의 교회도 비판했다. 교회가 정치에 깊이 개입해 본연의 생명을 잃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개인의 독자적 신앙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교회가 특정한 정당과 연대하는 현상이 두려웠다. 

    키르케고르는 ‘단독자’로서 살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스스로를 균질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시대 풍조에 저항했다. 개인이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진정한 종교 생활을 추구하는 자유가 가장 소중하다는 입장이었다. 인간은 종교적 자유로 말미암아 생기는 불안을 참고 견디며, 신과 단절되는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이른바 질적 변증법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실존주의가 철학계의 화두로 떠올랐다. 키르케고르는 그 선구자로서 호평을 받았다. 그가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고 단독자로서 개인의 신앙을 강조한 것은 일본에서 일어난 무교회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김교신과 함석헌 등도 무교회 운동을 펼쳤다. 

    한마디로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의 루터파 교회를 비판한 셈이다. 크리스티안스하븐섬에 가면 루터파 교회의 본산인 구세주교회가 있다. 17세기 후반 완공된 네덜란드풍의 바로크 양식이다. 멋진 건물인데 외관도 특이하다. 좌우와 상하의 길이가 똑같은 십자가 모양이다. 

    이 교회의 나선형 첨탑이 가장 눈길을 끈다. 첨탑은 높이가 90m나 된다. 400개의 계단을 걸어올라 꼭대기에 올라섰더니 코펜하겐의 전경이 발아래 전개됐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 교회를 찾아보고 싶었다. 19세기 덴마크의 정신적 지도자 니콜라스 그룬트비가 한때 봉직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키르케고르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노선은 정반대였다. 그룬트비는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려고 했다. 

    1822년 그는 이 교회 목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3년 뒤 클라우젠 교수의 합리주의 노선을 비판한 죄로 7년간 설교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는 잠시 목사직을 그만두고 영국으로 갔다. 케임브리지대에서 그는 많은 지적 자극을 받았다. 

    그룬트비는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쉴 새 없이 글을 쏟아냈다. 사회 개혁의 열망이 강해 정치에도 투신했다. 국회의원이 된 그는 시민의 자유, 특히 신앙·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소농의 권리를 대변해 그들도 토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사실이다.
     
    그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폴케 호이스콜레(시민학교, 또는 자유학교) 운동이었다. 그는 시민의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이 운동을 시작했다. 하나님과 이웃과 국토에 대한 사랑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운동은 큰 호응을 얻었다.

    구세주교회와 그룬트비

    19세기 중반, 덴마크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해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빼앗겼다. 온 나라가 깊은 실의에 빠졌을 때 폴케호이스콜레가 큰 역할을 해냈다. 구전으로만 전승되던 신화와 전설, 그리고 민요를 통해 시민들은 용기를 얻었고 재생 의지를 북돋웠다. 

    이 운동에 기여한 사람이 많았다. 크리스텐 콜드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그룬트비히의 사상적 계승자였다. 폴케호이스콜레는 훗날 다방면으로 확산됐다. 본연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자연과학을 비롯해 어업과 무역업, 농업과도 연계됐다. 나중에 이 운동은 이웃 나라로도 퍼져나갔다. 현재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폴케호이스콜레 운동과 레고 장난감이 웅변으로 증명하듯, 덴마크 사람들은 언제나 침착하고 창의적으로 대안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보였다. 코펜하겐 여행에서 나는 유연하고 명랑한 태도로 대안을 만드는 데 늘 성공적이었던 덴마크 사람들의 모습을 봤다. 오늘날 그들은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도 평화롭고 따뜻한 사회에서 산다. 돌아오는 비행기 차창에 기대어 나는 안데르센과 키르케고르와 그룬트비히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봤다. 

    ‘당신들의 꿈이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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