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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최동원이 최고의 야구선수냐고?”

홀로 빛나는 대신, 동료와 함께 빛났던 ‘별똥별’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왜 최동원이 최고의 야구선수냐고?”

  • ● 최동원 vs 선동열 사실 2승 1무 2패
    ● 1984년, 편한 상대라며 롯데 올린 삼성
    ● 최동원 투타 활약에 우승컵은 롯데에
    ● 5년 연속 200이닝 이상 마운드 지키며
    ● 그래서,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
롯데 자이언츠 선수 시절 최동원(1958~2011)이 역투하는 모습. [동아DB]

롯데 자이언츠 선수 시절 최동원(1958~2011)이 역투하는 모습. [동아DB]

“선동열을 앞질러 최동원? 그렇다. 최동원이다. 왜냐하면 최동원은 그의 ‘무쇠팔, 광속구(光速球)’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야구사에 몇 안 되는 ‘문화적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기량과 깡다구의 만남’이 곧 최고를 뜻한다면 최동원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4대문 안에 있는 안경점 주인들의 생계 유지에 일조했을 정도로 ‘금테 안경’ 최동원의 출현은 ‘파란’ 그 자체였다. 방망이 좀 휘두를 줄 알고, 공 좀 던질 줄 안다던 당시의 ‘동네 야구 스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금테 안경을 찾았던 이유는 바로 ‘최동원’이란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그래,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1958~2011)이다. 2000년대 초반 ‘대안 스포츠 웹진’을 표방하던 ‘후추닷컴’에 올라온 이 글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최동원은 그저 일개 야구선수가 아니라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아이콘으로서의 최동원은 단순히 금테 안경이라는 기표(記標)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해 투구 능력만 따지면 최동원보다 한 수 위일지도 모르는 선동열(58)과 비교해 보면 이 존재감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인터넷 검색 엔진 ‘구글’에서 ‘나의 영웅 선동열’이라고 입력해 보시라. 선동열 이야기가 나오나, 최동원 이야기가 나오나. 선동열은 ‘나라의 보물(국보)’이고 최동원은 ‘부산의 아들’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천하의 선동열조차 최동원에게 ‘쨉’이 되지 않는다.

영원한 맞수, 최동원과 선동열

최동원의 라이벌이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에이스 투수였던 선동열(58). [동아DB]

최동원의 라이벌이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의 에이스 투수였던 선동열(58). [동아DB]

프로야구 팬에게 두 선수 맞대결 결과가 ‘1승 1무 1패’라는 건 상식에 가깝다. 최동원도 살아생전에 이렇게 이야기했고 선동열도 이렇게 회상한다. ‘선발 맞대결’만 따지면 이 결과가 맞다. 그런데 1980년대는 ‘투수 분업화’라는 말조차 생소한 시대였다. 두 선수는 1986년 4월 19일(선동열 승), 8월 19일(최동원 승), 1987년 5월 16일(15회 무승부) 이외에도 두 차례 더 맞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두 선수가 처음 프로 마운드에서 맞대결을 벌인 건 1985년 7월 31일 부산 구덕구장이었다. 이날 최동원은 롯데 자이언츠 선발로 나섰고 선동열은 0-0 동점이던 3회 1사 만루 상황부터 강만식(64)에 이어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의 두 번째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끝까지 경기를 책임졌다. 선동열이 승계주자 3명에게 모두 홈 베이스를 허용하면서 롯데가 3-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고 결국 롯데가 4-2 승리를 거뒀다. 최동원은 7회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67·일본 이름 기모토 시게미)에게 2점 홈런을 내줬지만 나머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완투승을 기록했다.

1987년 4월 12일 경기는 더욱더 ‘사실상 선발 맞대결’이라고 할 만하다. 해태 선발로 나선 1962년생 투수 김대현이 1회말 1번 타자 홍문종(67)만 상대한 뒤 선동열에게 마운드를 넘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주말 경기 때만 선발 투수 예고제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김응용(81) 당시 해태 감독이 일요일이었던 이날 ‘꼼수’를 쓴 것이다. 이날은 해태가 6-2 승리를 거두면서 경기 끝까지 던진 선동열이 승리투수, 6이닝 6실점한 최동원이 패전투수가 됐다.

롯데, 선수 권익 챙기던 최동원 몰아내

이 경기에 ‘위장 선발’로 출전한 김대현은 안타깝게도 이듬해인 1988년 8월 27일 서울 경기를 앞두고 상경하던 도중 경부고속도로에서 화물 트럭과 충돌해 목숨을 잃고 만다. 같은 해 전반기에 7승을 거둔 투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구단은 장례 과정에 거의 개입하지 않았다. 보상이랄 것도 없기는 마찬가지. 이 사건을 계기로 최동원은 물밑에서 결성 준비 중이던 ‘선수협의회’를 수면으로 끌어올리기로 마음먹는다.

그해 9월 30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선수협의회 창립총회가 열리자 한국야구위원회(KBO)와 구단은 최동원 선수와 그 가족에게 “선수 생활이 끝날 수 있다”며 탈퇴를 종용했다. 그리고 롯데는 “구단이 앞으로는 마음대로 못한다는 두려움으로 (선수협의회 결성을) 극렬 반대한다”던 최동원을 11월 22일 삼성 라이온스로 트레이드한다. KBO는 은퇴 당시 팀을 기준으로 선수 소속팀을 구분하기 때문에 ‘부산의 아들’ 최동원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대구 팀 삼성 출신 선수로 남아 있다.

삼성은 1984년 한국시리즈 때 롯데와 맞대결을 벌인 팀이기도 하다. 당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삼성이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 대신 ‘만만한’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하느라 ‘져주기 게임’을 벌였다는 건 널리 알려진 이야기. 당시 동아일보는 “사자 ‘야욕의 발톱’ 팬들 가슴을 찢다”는 제목으로 이 상황을 비판했다.

결국 롯데는 29승 1무 20패(승률 0.592)를 기록하면서 OB(28승 1무 21패·승률 0.571)를 1경기 차이로 제치고 1984년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그런데 ‘4번 타자 최동원’이 없었다면 져주기 게임도 소용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해 8월 16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현 LG트윈스)과의 경기에서 4회 1사 상황에 구원 등판한 최동원은 6회말 4번 지명타자 김용철(64)이 부상으로 경기에서 빠지자 4번 타순에 이름을 올린다. 이후 1-1 동점이던 8회말 1사 만루 상황에 타석에 들어서 우익수 키를 넘기는 결승 2루타를 때려냈다. 그리고 사흘 뒤에 선동열과 선발 맞대결을 벌여 이겼다.

1984년 우승, 그 모든 순간에 최동원

최동원이 같은 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1패)을 거두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이야기. 사실 당시 7차전 삼성 선발이었던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70·일본 이름 니우라 히사오)도 6차전까지는 최동원과 나란히 3승(무패)을 기록하고 있었다. 김일융은 2011년 인터뷰를 통해 “내가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할 때 최동원은 ‘나는 어디까지든 가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차이가 승부를 갈랐다”고 말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 그러면 1984년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는 누구일까. 정답은 7차전 8회초에 역전 3점 홈런을 친 당시 롯데 타자 유두열(1956~2016)이다. 최동원은 이해 한국시리즈를 ‘최동원 시리즈’로 만들어놓고도 시리즈 MVP로 뽑히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이날 한국시리즈 7차전이 열린 서울 잠실구장에서는 한국시리즈뿐 아니라 정규시즌 MVP 기자단 투표도 함께 진행했다. 이미 최동원이 정규시즌 MVP를 받기로 한 상황이라 한국시리즈 MVP는 유두열에게 ‘나눠줬던’ 것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유두열(1956~ 2016)이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DB]

1984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유두열(1956~ 2016)이 부상으로 받은 대우자동차 ‘맵시나’ 승용차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동아DB]

혹사당하면서도 승리 놓치지 않아

김일융이 짐작한 것과 달리 최동원도 한계를 느꼈다. 그는 7차전에서 1-4로 뒤진 채 6회말 투구를 마친 뒤 도위창(84·일본 이름 도위 쇼스케) 수석코치를 찾아가 “배가 너무 고프다”고 말했다. 도 코치는 “그게 이제 그만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뜻이라는 걸 경기가 끝나고야 알았다”고 회상했다.

맞다. 최동원도 외로웠다. 야구에서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는 원래 1번이다. 최동원도 17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경남고 시절에는 등번호 1번 선수였다. 그러나 롯데에서는 등번호 11번을 달았다. 최동원은 “1번은 외롭다”면서 “‘1자 두 개가 기둥처럼 잘 버텨달라’는 뜻에서 11번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도 자신을 대신할 수 없었지만 최동원은 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마운드에 올라 특유의 용틀임 자세로 공을 던지고 또 던졌다. 최동원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여전히 역대 최다 기록인 40이닝을 던진 건 정규시즌 때 284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한 다음이었다.

‘1980년대에는 다 그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1983년 427과 3분의 1이닝을 던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장명부(1950~2005·일본 이름 후쿠시 히로아키)를 제외하면 같은 해 최동원보다 많이 던진 투수는 아무도 없다. 1980년대에 5년 연속(1983~1987)으로 200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도 최동원 한 명뿐이다.

야구계 유일한 ‘별똥별’ 최동원

현대 야구는 ‘팀 대 팀’으로 모든 역량을 결집해 맞붙는 장기 레이스다. 이제는 에이스라고 해도 투구 수 100개가 넘어가면 더그아웃에서 강판 시점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5회가 넘어 위기를 맞으면 ‘나를 좀 구원해 달라’는 듯 더그아웃을 쳐다보는 제1 선발 투수도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투수를 바꾸는 게 합리적인 선택에 가깝다는 걸 모르는 야구팬도 없다.

그러나 “마, 함 해보입시더”라며 끝내 마운드에서 버티는 투수는 야구팬 가슴에 불을 지핀다. 프로야구에서 ‘스타’로 불린 선수는 대부분 저 멀리서 혼자 빛나는 별에 가까웠던 게 사실. 팬 그리고 동료가 있는 자리에 내려와 함께 꿈을 꾸게 만드는 별똥별로 남은 선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최동원 한 명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동원은 모두가 소중히 지켜야 할 국보가 못 됐는지는 몰라도 야구팬 가슴에 누구보다 밝게 타오른 불꽃으로 남았다.

‘에이스’라는 표현은 원래 적군 비행기를 5기 이상 격추한 공군 파일럿을 일컫는 데서 유래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352기) 적기를 떨어뜨린 에레히 하르트만(1922~1993)은 이 격추 기록보다 자신과 함께 출격한 요기(僚機·wingman)를 한 번도 잃지 않은 걸 더 자랑스러워했다. 최동원 역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경기장 안팎에서 ‘우리’를 포기한 적이 없다. 최동원과 함께 야구를 꿈꿀 수 있었다는 건 확실히 축복이었다. 그래서, 다시, 그 누구도 아닌 최동원이다.


#최동원 #선동열 #부산 #롯데자이언츠 #신동아



신동아 2021년 12월호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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