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수능, 무용론 펴기엔 너무 우수한 시험

[김태일의 대자보] ‘수능’을 응용하여 문제를 해결하시오

  • 김태일 국가교육위원회 위원·前 신전대협 의장

    입력2023-11-1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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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간 변화·발전해 온 수능

    • 수능으로 외국 대학 입학도 가능

    • TOEIC·TOEFL처럼 수출도 가능할 것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11월 16일) 전 마지막 모의평가가 실시된 9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아DB]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11월 16일) 전 마지막 모의평가가 실시된 9월 6일 오전 서울 여의도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아DB]

    “정말 아름답지 않니?” 학창 시절 수업 시간 대학수학능력 시험(이하 수능) 기출문제 풀이 끝에 교사 입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그다지 유난스러운 말은 아니었다. 수업을 들은 학생이라면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표현이었다. 지금도 학교에선 이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수능 공부를 해본 지가 오래돼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마 아닐 것 같다.

    10월 10일 교육부가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 시안을 발표했다. ‘2022 개정 교육과정’ 대로 도입될 ‘고교학점제’에 따른 변화와 발을 맞추기 위한 개편 과정이다. ‘통합사회·과학’ 수능 과목 신설과 ‘내신 5등급제’ 도입 등이 주요 개편 사항이다. ‘선택’을 강조한 교육과정과 ‘통합’을 선택한 수능개편안. 고교학점제 도입에 따라, 선택 과목 간에 의도치 않게 발생하는 격차를 없애고자 필수적인 공통 과목만 평가하겠다는 것이 주요 취지다.

    양극의 절충안에 가까운 대입개편안을 두고,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호평하는 쪽은 현실적인 타협점을 잘 설정했다고 본다. 반대로 고교학점제 전격 도입에 제동을 걸었다는 비판도 있다. 교육부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중심으로 시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 후 올해 안에 최종 확정할 예정임을 밝혔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국가교육위원 중에서 유일하게 수능만으로 대학에 입학한 경우다. 그렇기에 더욱 앞장서서 수능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나눠보고자 한다.

    수백 명의 전문가가 빚어낸 아름다운 수능

    1981년 대입학력고사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모습. [동아DB]

    1981년 대입학력고사에 응시하는 학생들의 모습. [동아DB]

    1994년생인 수능은 이제 30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수능 이전 대입 시험이던 대학입학 예비고사(1969~1981년)와 대학입학 학력고사(1982~1993년)보다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예비고사는 이후 각 대학마다 치르는 본고사를 거쳐야 했다. 대학들이 본고사를 교과과정 바깥 수준으로 어렵게 내면서 학교 수업 불신, 사교육 의존 심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다음 도입된 학력고사도 문제는 있었다. 교과 위주로 출제되는 만큼 암기력만 평가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수능은 앞선 두 시험의 미비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 출제 범위를 교과목 내로 줄여 본고사의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았다. 당연히 매번 다른 문제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수험생들은 기출문제를 수없이 다시 풀었다.

    그만큼 수능의 기출문제의 완성도가 높아서다. 수능 기출문제는 서두의 일화에서 등장한 ‘아름답다’는 찬사를 받을 만하다. 그간 수능 문제를 담당해 온 것은 출제만을 위해 모인 각계각층의 전문가 집단이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수백 명씩 모여 합숙까지 불사하며 출제에 나선다. 이들이 빚어낸 문제는 작품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적 수준에서 보더라도, 이렇게 많은 고급 인력이 세상과 단절된 채로 합숙하면서 몇 주간 전념해 출제하는 시험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수능 제 기능 찾으려면 원점으로 돌아가야

    그럼에도 수능은 오랜 기간 크고 작은 변화를 겪었다. 매년 나오는 불만사항을 적극 반영해 시험의 미비점을 고쳤기 때문이다. 물론 시험제도를 고치는 대규모 변화도 있었다. 2008년에는 수능 등급제가 도입됐다. 수능 점수를 등급으로만 평가해 반영하는 시험이었다. 점수 차이가 있어도 등급이 같다면 같은 점수를 받았다. 1년 만에 해당 제도는 사라졌다. 하지만 등급이라는 알기 쉬운 척도는 그대로 수능에 남았다. 2018년에는 영어와 한국사 과목이 절대평가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수능 시험 성격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2011년이다. 이때부터 EBS에서 발행하는 교재의 일정 부분이 수능에 직접 연계됐다. 일부 문제를 ‘문제은행’ 방식으로 출제하기 시작한 셈이다. 문제은행 방식의 시험은 ‘기출문제 반복·암기’가 고득점을 담보한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EBS 교재를 수십 차례 반복적으로 풀며 문제를 외우는 방식의 공부법이 다시 성행했다. 사실상 학력고사로 회귀한 것과 다름없었다.

    나올 문제를 예측할 수 있는 만큼 시험의 변별력은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과하게 지엽적이고 어려운 ‘킬러 문항’이 등장했다. 출제 범위 내에 있다 뿐이지 사실상 시간 내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당연히 사교육 시장은 최상위권 학생을 위한 킬러 문항 준비 과정을 내놓았다. 결국 수능은 본고사와 학력고사의 단점만을 모은 시험이 돼 버렸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수능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크고 작은 문제가 누적돼 가던 중 이례적으로 대통령의 직접적인 지적이 있었다. 변별력 확보를 위한 ‘필요악’이 된 킬러 문항을 배제하겠다는 방침이었다. 해당 방침을 적용해 시행한 9월 평가원 모의고사에서 킬러 문항 없이도 변별력을 확보해 냈다. 새 수능은 큰 결점을 극복해 낼 가능성을 보여줬다.

    5등급도 만족할 수 있는 성적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과 오승걸 책임교육정책실장이 8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며 킬러 문항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뉴스1]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오른쪽)과 오승걸 책임교육정책실장이 8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며 킬러 문항 관련 설명을 하고 있다. [뉴스1]

    수능은 아름다운 문제들의 조화로운 배치다. 이렇게 귀한 문제들이 일회용으로 버려지는 것이 아깝다. 물론 수능에도 한계점은 있다. 학생들을 성적에 따라 줄 세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학업성취도가 낮은 학생들이 배제된다. 수능을 대체하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정 개정안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연히 ‘수능만능론’에 빠져 특별한 인재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한국 입시제도의 폐단을 모두 수능에 덮어씌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수능이라는 체계를 부수기보다는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고치는 방식의 개혁이 필요하다.

    고칠 방향부터 이야기해 보자. 가장 먼저 성적표를 바꿔야 한다. 학창 시절 전부를 바쳐 준비하는 시험인 만큼 성적표의 활용처를 늘려야 한다. 현재 수능 성적표에는 과목별 등급과 표준점수 등만 표기돼 있다. 대입 전선에서 유의미한 경쟁을 앞둔 학생들은 눈에 불을 켜고 숫자를 비교·분석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학생에게 성적표는 일종의 꾸중이다. ‘국평오’라는 신조어가 있다. ‘국민 평균은 5등급’의 앞글자를 따 만든 말이다. 수능 5등급은 상위 60%, 4등급은 상위 40%다. 지극히 평범한 학교생활을 하고 학급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한 학생들은 대부분 이 등급의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된다. 이 말대로 국민의 평균은 5등급일 테다.

    그런데도 5등급은 멸칭이 됐다. 현실적으로 수능 5등급의 성적은, 대학 진학에 활용하기엔 제한적인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국평오는 국민들의 평균적인 수준이 낮다는 자조로 쓰이는 말이다. 성실히 학교생활에 임하고, 주어진 대로 학업을 잘 성취한 학생이 엄청나게 많아지더라도, 5등급은 나온다. 학생의 과반은 좋은 대학과는 거리가 먼 성적을 받아 들 수밖에 없다. 좋은 문제로 점철된 수능은 상위권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일회용 규칙으로 낭비되고 있다.

    평가를 통해 수험생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도와야 한다. 수능이 정규 교육과정을 마친 뒤 치르는 시험인 만큼 자신이 얼마나 학업을 성취해 냈고, 지금은 어떤 단계인지 성적표가 설명해 줘야 한다. 수험생들이 이 성적표를 보고 자신이 잘하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인생 청사진을 그리는 재료로 쓸 수 있다.

    수능 시험도 현실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변모해야 한다. 수능은 국민 지식 수준의 기준선 구실을 한다. 수능을 치른 세대 대부분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험으로 수능을 꼽는다. 다르게 말하면 생산가능인구가 가장 열심히 공부한 내용이 바로 수능 출제 범위다. 인공지능(AI), 4차 산업혁명 등 현장에서 필요한 지식이 달라지는 지금, 수능도 이에 맞춰 변모해야 한다.

    일례로 2028년 대입개편의 ‘심화 수학’ 도입이 필요하다. 심화 수학은 미분, 적분Ⅱ, 기하를 출제 범위로 하는 선택과목이다. 자연상수·차원·기하·벡터 등을 주로 다룬다. 여기서 배운 개념들은, 빅데이터·인공지능 등 첨단기술에서는 필수적이다. 현재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사교육 부담 증가 등의 우려도 있으나, 난이도 조절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 그보다는 ‘수학적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수능 수출도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

    수능이 대학과 산업계의 구미를 모두 맞출 수 있도록 변화하는 미래를 꿈꾼다. 가능하다면 수능도 취업을 향한 스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TOEFL·SAT는 물론 심리검사나 지능검사가 대입과 산업계에 동시에 활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대학을 가지 않더라도 수험생의 학업성취도가 취업에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수능은 국내 대입 외에 용처가 있다. 수능 성적만으로 해외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아닌, 사설 교육업체의 노력 끝에 이뤄진 성과다. 수능 성적 4~6등급이면 미국이나 캐나다 대학에 지원할 수 있다. 낯선 정보에 대한 텃세인지, 한국 수능으로 좋은 학교를 갈 수 없을 거란 사대주의인 건지, 이런 진학 방법을 두고 부유한 학생들의 ‘도피 유학’ 수단일 것이란 폄훼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한국 수능의 우수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교육업체 측의 설명에 따르면 수능 성적으로 입학 가능한 해외 대학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수능의 수출에 지금이라도 정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반대로 유학생 선발에도 수능을 활용하면 어떨까. 수능이 ‘한국인 전용’ 시험이란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외국인도 영어(언어), 한국어(외국어)로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보는 것이다. 한국 대학들은 학령인구 감소에 대한 대응으로 유학생 유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다소 민감한 부분이지만, 유학생들은 한국식 입시보다 비교적 수월한 입시를 거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차이가 유학생들을 ‘동문 학우’가 아니라 ‘방문객’처럼 느껴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학생 선발에도 수능을 활용한다면 이러한 갈등을 해소함은 물론 유학생 역량 제고도 자연스레 뒤따를 것이다.

    수능을 수출한다는 발상도 해보자. 한국인과 한국 대학만을 위한 시험일 필요가 없다. 실제로 자국의 역량 미흡이나 공정성 확보를 위해, 한국의 평가 제도를 활용할 수 있길 바라는 국가도 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TOEIC·TOEFL 등 때문에 ETS에 돈을 쏟아붓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30년간 만들어낸 수능이라는 콘텐츠는 세계시장에서도 각광받을 수 있다.

    성공만 한다면 대학 서열화, 국제 성적 부진, 한계대학의 정부 의존 등 한국 교육의 고질적 문제들을 해소해 줄지도 모른다. 지난 30년간 우리나라 전 국민을 울고 웃게 만든 수능. 그에 담긴 애환과 시행착오와 극복의 역사가 미래의 난관을 헤쳐나가게 해줄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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