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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은 공공-민간 균형 이룬 강대국, 3류 정치가 발목 잡지 마라

[이근의 텔레스코프]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3-11-30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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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現 韓·日·臺 13세기 놓여도 세계 제패 쉽지 않아

    • 글로벌 공급망 미구축 시 내부 붕괴로 自滅

    • ‘경제력 = 강대국 결정 조건’인 時代, 키워드는 ‘公私 조화’

    • G7 가운데 한국보다 公私 균형 갖춘 국가 찾기 어려워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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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강대국은 어떤 국가일까. 이를 알기 위해 하나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 동아시아의 민주주의국가 한국, 일본, 대만이 현재 모습 그대로 13세기로 시간 여행을 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13세기 세계 상황을 살피자면, 아시아 대륙에선 몽골이 광대한 제국을 세웠다. 이슬람 세력은 중동과 아프리카로 세력을 넓혔으며 유럽은 중세 봉건시대로 십자군전쟁이 끝나가는 시기였다.

    압도적 군사력·기술력도 ‘글로벌 공급망’ 갖춰야 제 기능

    당장 떠오르는 답은 한국, 일본, 대만 3국이 21세기의 기술력·군사력으로 전 세계를 제패하리라는 것이다. 아무리 몽골이 강하다 하더라도 현대 무기 앞에서 꼼짝 못 할 것이고, 발달된 운송수단과 정보화 기술, 정밀 무기로 제국의 수도를 단번에 초토화하고 순식간에 황제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선 21세기적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에너지 확보가 문제다. 아무리 무기가 많고 기술력이 뛰어나도 에너지가 바닥나면 무용지물이다. 중동에서 수입하는 원유 공급이 끊겨서 비축분을 사용해야 하는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원자력 발전도 마찬가지다. 모든 에너지를 충당할 만큼의 원자력발전소가 지어진 것도 아니고, 그사이 내연기관 운송수단은 최소한으로 운용되거나 멈춰야 한다.

    수출과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부문은 큰 혼란에 빠진다. 21세기의 복잡한 글로벌 가치사슬이 순식간에 끊길 텐데, 이를 다시 한국·대만·일본으로 빠르게 재조정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당장 반도체나 배터리에 들어가는 부품과 희토류를 구하지 못할 것이고,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역 공장도 다시 세워야 한다. 증시는 무너지고, 시민들은 시장에서 사재기에 들어가고, 갑자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나올 것이다. 식량 공급도 원활치 않아 커다란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세계 제패는커녕 내부 붕괴 시나리오가 그려진다.

    물론 한국, 일본, 대만이 쉽게 무너질 국가는 아니다. 충분한 대응 능력이 있다. 3개국 지도자들은 먼저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이다. 또 국가가 극도의 혼란에 빠지기 전 질서를 잡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이어 신속히 정보를 수집·분석한 후 3개국이 공조 체제를 수립한다. 3국은 가칭 ‘G3’라는 협의체를 구성하고, 당장 급한 글로벌 공급망을 확보하는 계획을 세울 것이다. 13세기 역사에 박식한 역사학자, 지질구조와 자원 분포를 잘 아는 지질학자와 지리학자, 당시 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학자, 의료 대응을 위한 생물학자와 의사들을 소집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부터 3개국이 협력해 공급망 구축을 시작할 것이다. 13세기는 그 나름대로 군사력이 강한 제국들이 아시아와 중동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공동 군사작전 계획도 수립한다.



    협의가 끝나면 작전계획에 따라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그 뒤를 따라서 기업과 전문가, 행정가들이 들어갈 것이다. 이어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 중동 지역의 이슬람 제국을 제압하고 매장량이 풍부한 지역에 들어가 원유 시추·정제·운송시설 등을 재빠르게 구축한다. 치안을 확보한 후 지역을 안정화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현지에서 식민 통치와 유사한 형태의 지배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사업을 통해 이득을 보는 기업이 생기고, 현지에 진출해 이익을 보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지역엔 근대적 형태의 통치기구·교육시스템·노동력·인프라가 구축되기 시작하는데, 이에 필요한 인력과 자원이 대거 진출한다. 서서히 중동 지역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근접한 아시아에 서로 통상이 가능한, 근대 주권국가와 유사한 국가를 건설한 후 이곳과 한국, 일본, 대만을 연결한다.

    이제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 몽골 제국, 이슬람 제국과 벌일지 모르는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물론 압도적 군사력으로 이들을 제압할 수 있으나 노동력 및 소비시장 손실을 줄이는 게 바람직하기에 대규모 살상은 피해야 한다. 군사작전과 소프트파워 침공이 병행된다. 이들 지역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행정 인력과 노동력, 기업가 등을 만들려면 수십 년이 걸리겠지만 그래야 한국, 대만, 일본과 연결되는 공급망과 수출·수입시장이 만들어져 다시 예전과 같이 경제가 돌아갈 수 있다.

    강대국 조건 = 민간·공공 부문 균형

    현재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움직이는 세계에선 각 국가가 구축한 글로벌 공급망 아래 활발한 교역이 이뤄진다. 사진은 11월 1일 부산항 부두에 물류 컨테이너가 가득한 모습. [뉴스1]

    현재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움직이는 세계에선 각 국가가 구축한 글로벌 공급망 아래 활발한 교역이 이뤄진다. 사진은 11월 1일 부산항 부두에 물류 컨테이너가 가득한 모습. [뉴스1]

    지금까지의 사고 실험을 요약한다면 공급망·시장을 만들기 위해 점령 지역에 근대화를 이뤄내는 것, 즉 국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3개국의 공통 목표라 할 수 있다. 19세기 제국주의를 세련된 형태로 재현하는 셈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13세기의 새로운 강대국인 아시아 3국이 자신들의 경제 및 사회 구조가 잘 돌아가고 발전할 수 있도록 국제질서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 통상이 가능한 근대국가 체제를 확립하고 그들과 조약·계약으로 연결되는 공급망·시장을 확보하면서 지금과 같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급망·시장의 안정을 위해 3개국은 안보동맹을 맺어 군사력을 투사한다. 이 모든 것이 비축분이 바닥나기 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21세기의 3개국은 13세기화 되고 말 것이다.

    공상과학영화와 같은 이 사고 실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은 바로 현재 국제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20세기의 강대국들이 위와 같은 논리에 입각해 자국 경제와 사회구조에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어낸 체제라는 점이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된 21세기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최전선에 있는 강대국들이 만든 질서다. 오늘날 강대국 클럽 ‘G7’에 들어 있는 국가들은 모두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추동한 근대 국제질서의 선발 및 후발 강자이며 앞으로도 국제질서를 자국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강대국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세계적 국가경쟁력’일 것이다. 민간 부문의 강소기업이나 세계적 대기업 등 굴지의 기업들이 이 국가들을 강대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20·21세기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래 강대국은 전쟁의 승패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서 평가되는 경쟁력과 국가 경제규모로 결정된다. 즉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결정된다는 의미다. 일본처럼 정규 군대가 없거나 독일, 캐나다와 같이 군사력이 특출날 것 없는 국가도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바로 민간 부문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환경과 제도를 만들고, 필요한 규제를 할 수 있는 공공부문의 중요성이다. 국가경쟁력에서 공공부문의 기여도는 정밀한 경제학적 분석이 필요한 연구 영역이지만 자본주의 역사의 발전 과정만 보더라도 공공부문이 과도하게 큰 국가, 혹은 반대로 공공부문 발전이 미진한 국가는 강대국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근대 시대엔 민간과 공공 간 뚜렷한 구분이 없었다. 관료국가나 교회, 길드와 같은 조직에서 민간·공공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중세 유럽 도시에서 시장이 발달하고 그 규모가 커지면서 운송시설, 치안, 화폐 발행 및 금융 보증, 재산권 보호 및 분쟁 해결 등 공적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조직이 생겨났다. 이것이 떨어져 나와 근대국가의 주요 기능으로 발전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더 발달하고 범위가 넓어지면서 공중위생, 근대교육, 상비군의 창설, 노사관계의 조정, 사회보장 및 다양한 인프라 건설 등 공공재를 제공하는 공적 영역은 점차 확대됐다. 이처럼 시장이 발전하고 민간 영역이 커지면 자연스럽게 공공 영역도 보조를 맞춰 강화돼 온 것이 근대화 과정이다. 즉 민간과 공공부문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시장경제가 발전해야 경제력·군사력이 모두 강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셈이다.

    이미 강대국, 大韓民國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세계시장이란 데이터와 반도체, 인공지능(AI), 인터넷 플랫폼과 IoT(사물인터넷), 바이오 등 4차 산업혁명 시장을 의미한다. [Gettyimage]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세계시장이란 데이터와 반도체, 인공지능(AI), 인터넷 플랫폼과 IoT(사물인터넷), 바이오 등 4차 산업혁명 시장을 의미한다. [Gettyimage]

    오늘날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을 보면 공공부문의 근대화가 일찍부터 시작돼 민간 및 공공의 조화가 잘 이뤄짐과 아울러 ‘공사 구별’이라는 근대화의 철칙을 엄격히 강조하는 국가임을 알 수 있다. 브라질, 멕시코, 인도네시아와 같이 자연 조건이 뛰어난 국가임에도 강대국이 되지 못한 국가는 공공부문이 제대로 근대화되지 못하고, 엉망이거나 부패한 상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주의 국가와 같이 공공부문만 너무 비대해도 강한 경제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은 냉전이 증명한 바 있다. 요즘 미국 및 유럽의 강대국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역시 공공부문이 비효율적이고 민간 영역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시아의 선진국들, 특히 한국·일본·대만과 같이 우수 인재들이 민간 영역뿐 아니라 공공 영역으로도 진출하는 국가가 무서운 속도로 서구 국가들을 따라잡은 것도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른바 아시아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은 우수한 공공부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한국은 공적 영역과 민간 영역이 서로 상승작용을 하면서 세계적 경제력을 갖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인 세계시장의 발전 방향과 정확히 합치하면서 이젠 G7에 버금가는 경제력을 보유하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등 강대국이 그리는 국제질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들 국가의 경제력과 체제에 조응하는 세계시장이다. 여기서 세계시장이란 결국 데이터와 반도체, 인공지능(AI), 인터넷 플랫폼과 IoT(사물인터넷), 에너지의 전기화를 요구하는 환경산업, 바이오 등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장을 의미하고, 각국은 이에 따르는 국제 규범과 제도가 자국에 유리하도록 국제질서를 설계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 국제질서에서 없어선 안 될 국가로 이미 강대국 반열에 올라와 있다. 정치가 공공 영역을 무너뜨리지 않고 민간 부문의 발목을 잡지 않으면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정착할 수 있다. 지금 G7 가운데 공공부문과 민간 부문이 한국만큼 균형 있게 발달한 국가를 찾아보기 힘들다. 시진핑의 중국이 ‘피크 차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과도한 이념 국가화와 공산당의 통제에 있듯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 간 균형 파괴는 국가경쟁력을 좀먹게 돼 있다.

    한국이 이미 강대국임에도 강대국이 안 되는 것은 스스로 강대국임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요즘 한국 정치는 3류 수준 정치로 치달으며 공공부문을 파괴하고 있고, 이 영향이 민간 부문으로도 번지고 있다.

    세계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한국 국민은 스스로가 세계적 인적자원임을 증명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면서 IT산업을 이끌었고, 문화산업의 미래를 보면서 한류를 만들었으며, 이젠 의학·바이오 부문에 최우수 인력이 모이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작금의 정치권은 정신을 차리고 강대국 비전을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이뤄 강하고 잘사는 국가를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 과거 경제·정치 발전의 역사는 대한민국이 현실에 닥친 사회문제를 기술력과 개방경제, 사회 혁신으로 충분히 극복할 역량을 가진 국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신동아 12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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