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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취임사 버리고 마약치유운동가로 삽니다” [+영상]

[정혜연의 사람in] 정계 떠난 지 5년차, 남경필 J&KP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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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24-01-06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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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의 이름으로 마약 퇴치 운동

    • 정치에는 한 톨의 미련도 없어

    • 보복 정치 악순환 눈에 보이더라

    • ‘마지막 대통령’ 꿈꾼 ‘연정의 아이콘’

    • 사업 5년차, 스타트업 업계서 유명세

    [+영상] 정치에는 한 톨의 미련도 없어



    서른셋에 최연소 국회의원 타이틀을 달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 나간 선거에서 지역 시민들은 그 아들의 손을 들어줬다. 경기 수원에서만 15대부터 내리 5선을 했다. 대선후보들이 거쳐 간 경기도지사로도 일했다. 이후엔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며 모든 정치인의 꿈인 대통령을 꿈꿨다. 경선에서 패했지만 그러고도 50대 중반에 불과했다. 새 정치를 꿈꾸며 연정을 몸소 실천했던 그의 다음 행보를 궁금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세간의 기대를 뒤로한 채 2019년, 그는 만 21년의 정치 인생을 정리했다.

    시간은 더디 흐른 듯한데 벌써 5년이 지났다. 남경필(59)이란 이름은 아직도 정장을 갖춰 입은 반듯한 정치인을 연상케 하지만, 터틀넥 니트에 캐주얼 재킷을 입은 스타트업 대표가 된 지 오래다. 그는 2023년 10월쯤부터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간간이 근황을 알렸다. 총선을 반년여 앞둔 탓에 속내를 궁금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총선에서 간판스타로 내세울 인물이 넉넉지 않은 여당의 처지에선 그를 가만 놔둘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터뷰를 요청하자 두 달 뒤인 12월에 보자는 답이 돌아왔다. 한 달에 한두 건의 인터뷰만 진행한다는 그 나름의 원칙 때문이라고. 총선을 코앞에 두고 인터뷰에 몸이 단 국회의원들과 다른 답변을 듣자 그가 정말 정치에 뜻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1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남경필 J&KP 대표는 사업가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차가 됐다. [박해윤 기자]

    201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남경필 J&KP 대표는 사업가로 인생 2막을 시작한 지 벌써 5년차가 됐다. [박해윤 기자]

    라디오 출연 한 번에 전화 수십 통

    남경필은 현재 전직 정치인이나 사업가라는 타이틀보다 ‘마약퇴치운동가’로 불리고 있다. 2023년 10월 중순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가서 마약 투약으로 2023년 9월, 1심에서 2년 6개월 형을 받은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대한민국에서 마약을 퇴치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뜻을 당당히 밝힌 덕이다. 그날 이후 그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마약퇴치운동가가 돼버렸다. 인터뷰 당일 마주 앉은 그에게 마약퇴치운동가로서 어떤 일을 하는지부터 물었다.



    “라디오에 나갔는데 거기서 김현정 씨가 저를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한 가지 정정하자면 ‘마약치유운동가’라고 불러줬으면 해요. 그쪽이 더 적절한 표현이거든요. 여하간 그때까지 그런 일을 하겠다는 마음만 가지고 있었지, 구체적인 준비가 안 된 상태였어요. 말에는 힘이 있잖아요. 그날 이후 사회운동가, 기업인, 운동선수, 연예인 등 각계각층에서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본인이 마약을 했다가 처벌받은 경우, 가족이 그런 경우 등 다양했죠. 그 가운데 차인표·신애라 부부를 만났는데 어떤 식으로 이 운동을 해나갈지 갈피를 잡은 계기가 됐어요.”

    남경필과 배우 차인표는 원래 알던 사이였다고 한다. 라디오 출연 이후 차인표가 “요즘 너무 걱정된다. 연예인 중에 마약을 하는 이가 너무 많다.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형님 인터뷰를 보고 연락했다”며 만나자는 청을 해왔다고. 부부와 만난 자리에서 신애라가 주도하는 사단법인 야나(YANA·You Are Not Alone)의 이야기를 들었다.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곳인데 그 일을 하기 위해 2년간 준비했대요. 가장 놀란 건 직원이 2명뿐이라는 거예요. 아이들을 돕는 데 후원금 100%를 다 쓴다는 원칙하에 본부는 최소화하고, 허브 기능만 하도록 만든 거죠. 전국의 여러 보호아동을 돌보는 기관·단체와 연대하고, 필요한 도움을 연결해 주는 역할에 집중하기 때문에 직원이 두 명이라도 운영이 가능하대요. 이거다 싶었어요. 지금 마약치유운동을 하는 분들이 전국적으로 굉장히 많은데 뿔뿔이 흩어져 있어요. 각자 필요한 부분이 다르고, 서로 도울 수 있는 부분도 있으니 그걸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12월에 드디어 기도 모임을 시작했어요. 최소한의 중앙 운영으로 후원금 100%를 마약 치유에 전부 사용하는 기구를 만들기 위해 준비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의 시작은 아들로부터 비롯했다. 2017년 언론을 통해 장남의 마약투약 사실이 알려졌을 때 대중의 충격도 컸지만 아버지로서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그는 도지사 신분이었다. 당시의 일을 담담히 말하던 그는 더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고 말했다.

    “도지사 시절에 독일 출장을 가 있다가 애가 마약을 하다가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너무 놀랐죠. 마약을 하는 것도 몰랐는데, 어디서 숨어서 하다가 검거됐다는 거예요. 재판 이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어요. 그때까지는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더 놀란 건,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고 나서예요. 애가 다시 마약에 손을 댔더라고요. 그야말로 충격이었고, 얼마 뒤엔 화가 나더라고요. 그러고 마지막엔 ‘이제 포기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번민이 순차적으로 찾아왔습니다.”

    할아버지는 경기 지역을 주름잡는 버스회사 경남여객의 대표이자 경인일보 사주에 14·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고(故) 남평우 의원, 아버지는 15~19대 국회의원에 34대 경기도지사였다. 경기 수원의 터줏대감인 의령 남씨 집안. 부유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만큼 성공한 집안을 찾기도 어렵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왜 마약에 손을 댔을까.

    “본인의 삶에 만족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뭔가에 기대게 됐나 봐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좋은 쪽으로 승화해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가지만, 어떤 사람은 내적 결핍을 자극적인 도파민으로 채우려고 하죠. 그게 술이나 도박일 수 있은데, 저희 아이는 그게 마약이었던 거죠. 물질의 부족이 아니라 정신적 결핍, 영적인 결핍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 장남은 안양교도소에 수감돼 있다. 1심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는데 검찰에서 항소한 탓에 치료감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 교도소에 갇힌 덕에 단약을 하고 있지만 치료가 되지 않으면 완치가 어렵다.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국가의 도움을 받아 치료받기로 결심하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걸리면 야단맞고 ‘다시는 안 할게요’ 그러면서 또 하더라고요. 자꾸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데 약의 강도는 더 세지니 가족들은 배신감을 느끼죠. 보통 가족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해요. 아예 사람을 포기하든지, ‘우리가 도우면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거죠. 저희는 후자였어요. 그래서 자수를 권하고, 자진신고를 한 거예요. 앞으로 2년의 시간 동안 아들이 국립법무병원으로 옮겨가 치료받고 완치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의원회관 410호에서 보낸 16년

    국회의원이 되는 여러 경로 중에 지극히 희소한 경우가 있는데 바로 아버지의 지역구를 물려받는 경우다. 충남 공주-논산에서 10~12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석모 의원의 아들 정진석 의원(16~18·20~21대,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 부산 금정구에서 11대와 13~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진재 의원의 아들 김세연 전 의원(18~20대, 부산 금정구) 등이 대표적이다. 그 역시 대표적인 부자(父子) 정치인으로 꼽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의 부재로 공석이 된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는 것이다. 30대 정치인이 흔치 않던 1998년의 일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했던가.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정치인의 길을 꿈꿨을 듯했다.

    “꼭 그렇지는 않았어요. 다만 막연하게 정치를 꿈꾸게 된 계기는 있었어요. 1992년 아버지가 선거운동을 하시는데 사람들이 기다리는데도 안 오시더라고요. 제가 대신 올라가서 연설을 하고 내려오는데 박수를 받고 하니 기분이 묘하더라고요. 그때가 대학생 때였어요.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도 저희 아버지는 제가 정치를 안 하길 바라셨던 걸로 알았어요. 나중에 장례 기간에 어머니께 얘기를 들으니 ‘아니야, 아버지는 사실 네가 정치하길 바라셨어. 다만 박사학위 받고, 사회 경험 좀 쌓고 40대쯤 하길 바라셨지’라고 하시더라고요.”

    남경필은 유학 시절 예일대 한인학생회장을 맡았을 정도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사교적이기로 유명했다. 그는 “우리 집은 그 당시 유학생들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가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한 건 아버지의 국회장을 치를 때였다고 한다. 영정을 들고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고. 그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고 한다. 보궐선거를 치르고 15대 의원에 당선돼 아버지의 사무실로 들어가게 됐다.

    “저희 아버님이 410호를 쓰셨는데 4층 안쪽 자리라 의원들이 선호하지 않는 곳이었어요. 심지어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인근의 어느 의원은 선거법 위반으로 걸리고 하니까 ‘흉가동’이라고 불렸어요. 나중에는 그쪽으로 오세훈 시장도 16대 의원으로 오시고, 유승민 의원도 보궐선거로 17대 의원으로 오시고 해서 ‘명당’이 됐죠(웃음). 거기다가 한번 들어오면 최소 3선을 했거든요. 나중에는 사람이 몰리더라고요. 저는 끝까지 한 방만 썼어요.”

    우스개로 이야기를 풀었지만, 그 자리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16년간 국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고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여러 법안을 발의하고, 정치인으로서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보수정당의 소장파로서 기존 보수와는 다른 길을 걷기 위해 애썼고, 진보정당과 협치하기 위해 매번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그는 ‘연정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그 덕에 그가 늘 초선의원처럼 느껴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제가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을 때 우리 당(한나라당)은 이회창 총재가 대선을 준비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제가 들어가니까 젊은 정치인 그룹이 처음 생겼어요. 그 당시 김부겸, 김영춘 그런 분들이 계셨죠. (김)부겸이 형의 지역구이자 집이 군포였어요. 여의도에서 매일 만나서 정치란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집에 가는 방향이 또 같으니까 한 차로 가면서 또 정치 얘기하다가 부겸이 형을 군포에 내려주고 저는 수원으로 갔어요. 이후 16대 선거에서 원희룡·정병국·오세훈 이런 분들이 당선되면서 한나라당 소장파가 태동한 거예요.”

    5선 의원을 끝으로 남경필은 2014년 경기도지사에 도전했다. 국민 전체를 위해 일하다가 경기도민을 위해 일했다. 어느 쪽이 더 잘 맞았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편한 건 국회의원 쪽이에요. 누가 출퇴근 관리도 하지 않고, 의사결정권이 없으니 역할이 제한적이에요. 미국은 정부가 입법권과 예산편성권이 없잖아요. 모든 예산의 최종 결정을 의회가 하고 법안도 의회가 제출하고 결정하는데 우리나라는 대통령제가 강화돼 의원들이 책임질 일이 없어요. 권력은 인사와 예산으로부터 나오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경기도지사라는 직책이 더 무게가 있죠. 일례로 제가 도지사 취임 첫날 복도에 물건이 늘어져 있어서 ‘이거 좀 보기가 안 좋은데요’ 한마디 하고 올라갔는데 다음 날 다 없어졌더라고요. 의원들은 직원들한테 그런 말을 해도 다음 해 국정감사 때까지 그 자리 그대로 있어요. 도지사의 말 한마디가 그만큼 큰 거예요. 다만 경기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최종 책임을 져야 하니까 힘들었죠. 그러나 그만큼 보람도 컸어요. 리더의 ‘lead’라는 게 ‘옮기다’라는 뜻도 있어서, 남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 리더거든요. 그걸 예산과 정책으로 하니까 보람이 있었죠.”

    보복의 정치가 시작돼 할 일이 없어졌다

    경기도지사 이후 그는 연장선상에서 국민을 리드하는 대통령을 꿈꿨다. 그가 꿈꾼 대통령은 기존 정치인들과 달랐다.

    “마지막 대통령이 되려고 했어요. 다 정리해서 연정하고, 개헌해서 독일과 같은 정치체제를 만들고 싶었어요. 대통령 임기 끝날 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나오는 걸 꿈꿨어요. 어느 선배가 대통령이 되고 싶으면 나중에 누가 써준 취임사 읽지 말고 미리 취임사를 써놓고, 그대로 정치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실제로 취임사도 썼어요.”

    2017년 바른정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유승민 의원에게 지고, 이듬해 제7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갔다가 떨어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대에서 6개월, 베를린 자유대에서 6개월 공부하며 방문 학자(Visiting scholar)로 지내다가 귀국 후 2020년 총선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 생각을 접은 건 도쿄에 머물 때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 집권 2년차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제가 경기도지사를 할 때, 당대표로 있으면서 도청을 두 번 방문하셨어요. 연정을 배우러 오셨다는 거예요. 그때 제가 경기도부지사로 강득구 의원(더불어민주당)을 모셨고, 그분의 강점인 보건복지 쪽은 다 넘겨드렸어요. 그걸 듣고 문 전 대통령이 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거죠. 많은 대화를 나눴고, 앙겔라 메르켈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연정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에 동의하셨어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연정을 하는가 했더니 적폐청산이니 하면서 보복의 정치를 하더라고요. 그 강도가 점점 세지는 걸 보고 진짜 이제 정치는 그만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는 “정치의 상수는 대통령”이라며 대통령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나머지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했다. 대통령이 특정 집단을 대상화하고 공격하면서 반대편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협상의 여지를 불살라 버리면 정권이 바뀌었을 때 반대편이 자행할 행태는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참여한 국회의원 비율이 90%였어요. 그 말인즉, 문 전 대통령 지지율도 90%였던 셈이죠. 그 정도면 자기를 지지해 준 민주당, 정의당뿐 아니라 새누리당 안에 있는 50여 의원들을 연정의 토대로 삼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점점 더 거꾸로 가더라고요. 그러면 우리 당에서도 ‘싸우자, 보복하자’라는 얘기가 나올 거고, ‘대통령이 바뀌면 악순환이 계속되겠구나. 최소 10년은 이런 정치구조가 지속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그 안에 살려면 방법은 두 가지죠. 편가르기로 점철된 팬덤 정치를 하든지, 관두든지. 그런데 제가 의원 한 번 더 하겠다고 나서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남경필은 정치에 한 톨의 미련도 없다고 했다. 여전히 여당에서는 전화가 온다고. 만나자는 사람을 내칠 수 없으니 사무실로 초대하는데, 그가 요즘 하는 사업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주면 가타부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고 한다.

    2023년 12월 초에 만난 남경필 대표는 사업에 관한 질문에 “설명하려면 한 시간도 모자라다”며 눈을 반짝이는 천생 사업가였다. [박해윤 기자]

    2023년 12월 초에 만난 남경필 대표는 사업에 관한 질문에 “설명하려면 한 시간도 모자라다”며 눈을 반짝이는 천생 사업가였다. [박해윤 기자]

    ‘남경필에게 가면 길이 있다’

    그는 현재 스타트업 대표로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2020년 설립한 헬스케어 기업 ‘빅케어’를 매각하고 엑시트에 성공했다. 지금은 J&KP라는 회사의 대표라며 새 명함을 건넸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5개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일종의 투자사다.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에게 그는 “이거 제대로 설명하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며 눈을 반짝였다. 정치인이 천직인 줄 알았더니 사업가로서의 DNA도 물려받은 듯했다.

    “저희는 거의 공동대표 체제예요. 젊은 CEO들은 사업을 구체화하는 일을 하고, 저는 바깥에서 사람 만나고 펀딩을 구성하는 일을 하죠. 이렇게 분담을 하니까 완전 환상이에요. 제가 어디 가서 ‘아빠가 아니라 아빠 친구와 창업하라’고 이야기했어요. 서로 부족분을 충족해 주거든요. 아빠랑은 (싸우니까) 안 되고요(웃음). 제가 30대 때 의원으로 일하면서 잠도 안 자고 열정적으로 일했어요. 지금 제 파트너들이 그래요. 자신을 갈아 넣어서 일하는데, 저는 지금 그렇게는 못 해요. 대신 네트워킹을 이용해 펀딩하는 건 잘하죠. 그래서 대부분의 지분을 액팅 CEO가 갖도록 했어요. 저는 소수 지분만 갖고 있어요.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지분을 가져야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생길 테니까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인지 궁금해하자 그는 대뜸 “우리 집안이 또 모빌리티에 강하다”며 첫 번째 사업 내용을 줄줄 풀었다. 갓 서른이 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및 경영학과 졸업생 세 명이 만든 회사인데, 자동차를 판매하는 이커머스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쿠팡과 쓱닷컴이 180조 원 규모의 이커머스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이들이 판매하지 못하는 것이 자동차라고. 앱으로 자신의 예산 안에 원하는 옵션을 설정하고 원하는 브랜드의 차량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업 목표라고 했다. 그는 “이미 오토바이는 이러한 사업 모델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기에 자동차라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그는 무인 인공지능 식품판매 냉장고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아마존에서 8년 전 시도했다가 실패한 모델인데 업그레이드를 통해 문제점을 개선했다고.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국내 한 대학병원과 협력해 상용화를 앞뒀다고 한다.

    “이런 사업을 하는 젊은이들이 계속 저를 찾아와요. ‘남경필에게 가면 길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 많이들 사업안을 가지고 오는데, 저는 그러면 사람만 딱 봐요. 아이템은 나중이거든요. 사람이 정말 믿음직하다 싶으면 이후에 스타트업 평가를 하는 분들에게 사업안을 보여주죠. 그렇게 같이하게 된 스타트업들을 제가 만든 홀딩스사에 다 집어넣었어요. 여기서 제가 번 돈은 앞으로 마약치유운동의 재원으로 쓸 예정이에요. 젊은 CEO들에게도 돈을 벌면 매출의 일정 부분을 사회 공헌하는 데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물론 강요하진 않아요. 하지만 이 친구들이 잘돼서 사회를 선순환하는데 일조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 정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두 가지 희망 사항을 이야기했다.

    “선거를 앞두고는 아무도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없어요. 선거구제 개편은 2024년 총선이 끝나고 바로 시작해야 해요. 총선 앞두고 ‘선거구제 이렇게 개편하겠습니다’ 하는 건 그냥 레토릭에 불과해요. 총선이 끝나면 의원들은 독립성을 갖게 되죠. 공천권 가진 당대표 눈치를 볼 필요 없으니까요. 여야를 떠나 선거구제 개편은 미리부터 준비해서 다음 총선 전까지 완료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마약청 신설 꼭 해주셔야 돼요. 더 늦으면 미국처럼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예를 들어 A와 B라는 마약만 금지돼 있는데 A와 B를 더하고 C, D까지 추가한 건 마약이 아니에요. 정의가 안 됐으니까요. 그런데 이 합성 마약은 하면 바로 죽어요. 그러니까 정부가 신속하게 움직여야하고, 이걸 잡기 위한 과학기술도 필요한 거거든요. 여러 필요조건이 총망라된 부처의 신설이 정말 절실해요. 프레시한 22대 의원들이 모여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마약청을 신설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혜연 차장

    정혜연 차장

    2007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여성동아, 주간동아, 채널A 국제부 등을 거쳐 2022년부터 신동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금융, 부동산, 재태크,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의미있는 기사를 생산하는 기자가 되기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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