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떠난 조지 오웰
스페인 경찰의 엉터리 수색
1979년 YS가 화가 난 이유
경찰서장 뺨 때린 野 총재
절대불변 아니나 ‘정치적’인
글로벌 컨센서스 전환기
기삿거리를 찾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오웰은 현장에 발을 딛자마자 스페인 의용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점에서 가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는 판단이 그의 머리를 지배한 것이다.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 카탈로니아는 그런 곳이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정답게 평칭을 쓰고 그 누구도 남에게 고개 숙이거나 하지 않았다. 진보주의자였던 오웰이 꿈꾸던 이상적 공산혁명이 실제로 이뤄져 있던 것이다.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산주의의 모국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이 스페인의 자생적 공산혁명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오웰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련에 프랑코 정부는 반드시 맞서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프랑코는 히틀러의 후원을 받는 파시스트 독재자였고 히틀러는 그 당시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과 사이가 좋았다.
스탈린의 소련은 프랑코의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한 소련의 입장을 잘 파악한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의 민주정부가 파시스트 군사 독재자에게 허물어지도록 사실상 방관했다.
오웰은 전선에서 여러 차례 죽을 뻔하고 생명의 위험을 모면하며 어쨌건 살아남았다. 아내와 함께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스페인 내전의 전개 과정 속에서 오웰이 참여해 있던 무정부주의자 그룹이 단지 소수파에 머무는 차원이 아니라 심지어 공산당에 의해서조차 쫓기는 신세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스페인 혁명은 종국으로,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처단하라!’ 이 목소리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목소리보다 훨씬 큰 세상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오웰은 일단 국경을 넘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을 쫓는 공산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분증 같은 중요한 문서를 잘 숨기는 일은 그래서 중요했고, 반대로 그걸 찾아내는 것이 공산주의 비밀경찰의 핵심 업무였다.
그리하여 오웰이 스페인을 떠나기 며칠 전, 경찰은 그와 아내가 있는 호텔을 찾아와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새벽에 문을 쾅쾅 두드린 다음 여러 명이 밀려들어와 이곳저곳을 뒤지고 서랍을 꺼내고 물건을 들어 엎었다.
문제는 이 경찰들이 수색을 하는 방식이었다. 앞서 말했듯 그들은 여기저기 다 뒤지고 담뱃값도 뜯어보고 모든 것을 살펴보는 듯 행동했다. 하지만 형사들은 침대에는 손을 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침대 밑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우리가 뭘 숨긴다면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공간인 침대에는 결코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왜였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오웰의 아내가 침대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경찰이었고 공산당원이었지만 동시에 스페인 남자들이었다. 스페인 남자들에게 여자를 침대에서 끌어낸다는 것은 무도한 행위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 행동은 스페인 남자라면 결코 하지 않을 일이었다.
스페인 경찰의 수색은 엉터리였다. 오웰은 트로츠키주의 문건을 들키지 않았다. 물론 무사히 스페인을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이 덕분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행운이 따랐고, 타이밍을 잘 파악했으며, 스페인 사람들의 인간미 넘치는 온정 덕분이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따로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머릿속에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준을 혼자 정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있다. 더구나 그런 기준이 존재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오웰은 이렇게 말한다. “형사들은 침대에는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침대 밑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소련의 비밀경찰이라면 이렇게 했을 리 없다.”
신민당사로 간 YH무역 여공들
1979년 8월 27일 YH 사건에 대한 종합보고서를 발표하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동아DB]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이던 YH무역 여공 190여 명이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위치한 신민당사에 방문했다.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회사 경영 정상화 등을 요구하자 사측은 폐업으로 맞섰고, 이 상황에서 도움을 받고자 야당 당사에 찾아왔던 것이다.
김영삼이 화가 난 이유는 여공들 때문이 아니었다. 이 파업을 막고자 경찰이 투입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는 유신 독재 시절. 헌법은 정지돼 있었고 야당의 존재는 유명무실했다. 하지만 야당 당사에 전투경찰이 투입돼 사람을 두들겨 패고 잡아가려 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한국의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흔히 빠지는 착각이 있다. ‘산업역군’이라는 말을 들으면 남자들의 모습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 전환을 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 수출 산업은 여성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했다. 박정희의 독재가 유신을 거쳐 종말로 향하고 있을 무렵, 정권의 파열음이 여성들의 파업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한 해 전인 1978년만 해도 그랬다. 섬유회사 동일방직의 여공들은 파업을 했다. 진압하러 온 경찰에 맞서 스스로 옷을 벗고 몸에 똥물을 끼얹었다. 옷을 벗음으로써 여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는 사회적 관습에 기대려 한 것이고, 똥물을 끼얹음으로써 더러운 존재에 손을 대지 못하는 인간 본연의 거부감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경찰은 손을 대지 않는 대신 몽둥이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동일방직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YH의 여공들은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곧장 신민당사로 향했다. 야당 당사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농성하는 것이 YH 여공들의 전략이었다. 그렇게 하루의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다음날인 8월 10일 밤 11시가 되자 여공들 사이에서도 피로와 스트레스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11일 새벽 2시, 경찰은 신민당사로 전화를 걸었다. 일종의 최후통첩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진압작전이 개시됐다. 1000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일사분란하게 신민당사로 진입했다. 김영삼은 그 와중에 현장을 지휘 중이던 마포경찰서장과 마주쳤다.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 마포경찰서장이 뭐라 대답했는지는 역사에 기록돼 있지 않다. 어쩌면 대답할 시간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마포경찰서장의 따귀를 올려붙였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이들, 특히 20세기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거나 아예 없을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놀랍고 심지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이다. 야당 총재, 대표가 경찰의 뺨을 때렸다. 그것도 지나가는 순경이 아니라 경찰서장이라는, 굉장히 높은 직급의 경찰이다.
그냥 봐도 황당하지만 당시의 맥락을 고려해보면 더 충격적이다. 박정희 정권 말 유신 독재 시절이었다. 아무리 야당 정치인이라 해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고초를 당하거나 협박을 당하는 일 등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 시절이었다.
김영삼은 그런 현실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경찰의 뺨을 후려치고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항의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썩 꺼지라고 휘둘러댔다. 물론 그것만으로 경찰의 진압 작전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은 김영삼을 체포하는 게 아니라 자택으로 ‘모시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상식이나 도덕 같은 것보다 더 정확한 어떤 개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신 독재 시절의 상식이라면 국가 권력에 정치인이건 누구건 그런 식으로 대드는 게 용납되기 어렵다. 도덕적 차원에서 보더라도 일단 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사람이 대놓고 누군가의 뺨을 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컨센서스, 특히 정치적 컨센서스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그렇게까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김영삼은 어쨌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야당 지도자였고 언젠가는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대통령이 가지는 정치적 위상이라는 것은 사실상 왕과 더욱 가까운 무언가였다. 김영삼은 물론 안 될 수도 있지만 언젠가 그 왕좌에 오를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경찰서장의 뺨을 칠 정도의 권력쯤은 당연히 그에게 있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얽힌 매듭 단칼에 잘라버린 마거릿 대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장실질심사를 하루 앞둔 2023년 9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민주당 검찰독재정치탄압대책위원회 소속 인사들이 회견을 열고 있다. [이훈구 동아일보 기자]
컨센서스의 변화는 정치적 격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당의 오랜 집권 기간이 마무리되고 마거릿 대처가 승리를 거둔 1979년의 상황도 그랬다. BBC의 라디오 프로듀서 필 틴라인은 책 ‘컨센서스의 죽음: 영국 정치의 악몽 100년’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컨센서스의 시기란, 적어도 무엇을 거부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는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현대 영국이 경험했던 지난 컨센서스의 시기는 (정당의 입장차를 불문하고) 적자 예산, 대규모 실업, 인플레이션, 파업 같은 것들은 있을 수 없다는 공통의 이해를 기반하고 있었다. 이런 것이 정치적으로 가능한 일의 한계선을 긋고 있었다. 이를 받아들인 동기는 사람마다 제각각이었다. 누군가에겐 신념, 공감, 또는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상처였지만 또 누군가에겐 그저 정치 커리어를 쌓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컨센서스의 시대는 불편한 타협에 더 가까웠다. (…) 그래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온 사회가 희생을 감수하는 대신, 노동조합원이 일하는 제조업 기업의 세수로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 이른바 ‘복지국가 컨센서스’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정치인들은 기존의 컨센서스에 집착했다. 결국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등장해야만 했다. 기존의 컨센서스를 무시하고, 파괴하며, 얽힌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린 후에야 영국은 새로운 정치 질서와 균형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지금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1980년대의 신보수주의적 변화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다. 정치적 변화란 무엇인지, 그것이 사회적, 정치적 합의인 컨센서스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를 지목하고 있을 따름이다. ‘컨센서스의 죽음’에 대해 서평을 쓴 영국의 정치철학자 존 그레이는 컨센서스와 정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정치에서 컨센서스는 결코 완전하지 않고 늘 갈등을 품고 있어, 어두운 미래가 현실적인 전망으로 다가오면 (또는 그럴 것처럼 보이면) 깨지기 일쑤다. 이런 악몽이 정치가, 언론, 유권자의 상상력을 움켜쥐면서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한계선은 변한다.”
어떤 관념의 탄생
오웰을 쫓던 스페인 경찰은 여자가 누워 있는 침대를 수색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비롯한 오웰의 수많은 걸작은 스페인 남자들의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라는 컨센서스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마포경찰서장은 김영삼을 폭행죄로 고소, 고발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택연금에 처해질 상황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산업화 시대의 정치 리더와 보스가 갖는 정치적 위상은 오늘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어쩌면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누군가를 ‘일개 경찰’이 손대는 일은 불가능했다. 역설적이게도 김영삼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면서도 가장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고방식에, 당시 한국 사회에 당연한 듯 통용되던 컨센서스에 기대고 있던 것이다.
컨센서스는 국내 정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개발도상국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발전의 모델로 삼는다는 ‘워싱턴 컨센서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껏 흔들리지 않고 있다. 반면 ‘전 세계로 퍼진 자유시장 경제가 평화를 보장한다’는 1990년대 탈냉전 이후의 컨센서스인 ‘세계화’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허무하게 파탄을 맞이한 상태다. 지금 우리는 글로벌 컨센서스의 일대 전환기를 경험하는 중이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대한민국이 ‘마약 청정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조폭들이 활개를 치며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없는, 치안 하나만은 확실한 나라라는 사회적 믿음이 있었다. 그러한 엄격한 법의 적용은 신분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는 것으로, 심지어 대통령이라고 해도 전직 대통령이 되는 순간 본인과 가족의 비리에 대해 추궁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러한 믿음들의 구조를 컨센서스의 개념틀로 서술해 보자. 수년 전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저러한 요소들은 모두 ‘민주화 컨센서스’의 구성품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힘을 잃고 국민들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후 벌어진 일련의 정치적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1987년 6월의 여파는 단순히 대통령 직선제의 도입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선거를 통해 당선된 노태우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폭력 조직을 근절했다. 의도야 어찌 됐건 이후로 수십여 년 넘도록 이어진 ‘조직폭력 없는 세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공소시효가 끝났는데도 전두환, 노태우 등 12‧12군사반란 주역들을 법정에 세우고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민주화 컨센서스’의 요체인 ‘아무리 높은 권력자였다 해도 죄를 저질렀으면 (늦게나마) 법의 처벌을 받는다’는 관념은 이렇게 탄생했다.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1996년 8월 26일 ‘12‧12 및 5‧18 사건’ 1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 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동아DB]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변고가 벌어졌다. ‘민주화 세력’은 검찰을 무조건 악마로 몰아가더니, 개인적인 범죄 혐의로 인해 검찰 수사를 받는 와중에도 그것을 민주화 운동처럼 포장하는 집단 착란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2023년의 마지막 날까지 우리가 목격한 한국 정치 속 합의의 실종, 컨센서스의 아노미 현상이다.
‘산업화 컨센서스’는 과거의 유물이 됐다. ‘민주화 컨센서스’는 그 최대의 수혜자들에 의해 형해화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한 논의를 해야 할 우리의 정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을 빌려와 보자. “위기는 정확히 말하면, 낡은 것이 소멸해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새해에는 국민의 뜻을 올바로 수렴하는 정치,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컨센서스를 수립해낼 수 있는, 그런 정치가 실현되기를 소망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