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감독과 ‘밀당’ 하는 사이
영화 볼 땐 뻔뻔해지지 않아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로 초지일관
데뷔 후 처음 장편영화를 연출하는 등 2023년을 어느 해보다 바쁘게 보낸 배우 정우성.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사건 자체는 담담하게 그려졌다. 정의와 불의, 소신과 타협 중 한쪽을 편들도록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12·12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일으킨 쿠데타다. 군사반란이 성공을 거둬 전두환은 대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거쳐 대통령이 된다. 노태우 역시 대장 진급 후 내무부 장관을 거쳐 차기 대통령을 지냈다. 이 밖에 군사반란에 가담한 신군부 인원들도 요직을 차지했다.
김 감독은 실화 사건의 인물을 가명으로 바꾸고 마지막까지 군사반란에 굴하지 않는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극적 긴장감을 높였다. 영화를 본 관객 다수가 전두광(황정민 분)과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정우성 분)이 벌이는 팽팽한 신경전을 놓쳐선 안 될 볼거리로 꼽는다. 정우성은 이 작품으로 또 한 편의 인생작을 선보였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불덩어리 같은 황정민의 저돌적 기세에 눌리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이태신의 묵직한 언행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정우성은 2023년을 누구보다 활기차게 보냈다. 데뷔 이래 가장 바쁜 한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본인의 감독 데뷔작인 ‘보호자’에 이어 ‘서울의 봄’에서 주연을 맡았고, ‘웅남이’ ‘달짝지근해:7510’ ‘거미집’에 카메오 출연했다. 무엇이 이토록 그를 달리게 했을까. 새해를 앞두고 만난 그는 코로나19 여파로 활력이 떨어진 극장가에 힘을 보태고 싶은 영화인의 소신으로 인터뷰의 서막을 열었다.
소신 지키고 신중한 면 닮아
‘서울의 봄’이 흥행에 성공했다. 소감이 어떤가.“작품에 대한 호평을 들으면 기분이 너무 좋다. 배우로서는 좀 부담된다.”
무엇이 부담되나.
“내가 맡은 이태신이라는 인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기에 생긴 부담감이다. 내 연기가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확신할 수 없기에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뻔뻔해지지만 영화를 볼 땐 뻔뻔해지지가 않는다.”
12·12군사반란을 기억하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사태 당시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대성통곡하신 건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12·12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통해 이런 일이 있었구나 정도를 알 뿐이다.”
김성수 감독은 이태신 캐릭터가 정우성의 평소 이미지와 닮아 캐스팅했다고 한다. 진짜 닮았나.
“전혀 안 닮았다. 내가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뉴스에 출연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감독님은 이태신이 그런 모습이길 바랐다. 특정한 이미지보다 인터뷰에 임하는 자세에서 영감을 받은 듯하다. 인터뷰할 때 어휘 선택이나 표현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는 편이다.”
캐릭터 설정을 어떻게 했나.
“이태신을 정의의 화신 같은 인물로 생각지 않는다. 감독님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구도로 설정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아수라’를 만들 때부터 인간 본성을 다루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니다. 이태신도 선의 편에 선 인물이라고 선을 긋고 싶지 않다. 군인의 본분에 충실하자는 소신을 지키며 매사에 신중한 인물로 생각하고 연기했다. 영화는 누구를 응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12·12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 한 장면. 정우성은 군인으로서 소신을 지키는 수경사령관 이태신 역으로 열연했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김성수의 페르소나
정우성은 김성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한다. 페르소나는 영화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특정한 상징을 표현하는 배우를 지칭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 감독은 정우성을 여러 작품에 기용했다. ‘비트’ ‘태양은 없다’ ‘무사’ ‘아수라’에 이어 다섯 번째다. 김 감독을 향한 정우성의 존경심과 신뢰감은 각별하다. “나를 영화인으로 이끈 분”이라고 말할 정도. 둘의 친밀감도 남다르다. 정우성은 평소 김 감독을 ‘성수 형’이라고 부른다. 이런 정우성이 김 감독이 제의한 이태신 역을 여러 번 거절했다는 후문이 들린다.김 감독의 러브콜을 수차례 고사한 것은 의외다. 이유가 뭔가.
“성수 형이랑은 ‘밀당’을 좀 해야 한다.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역사적 사실을 그린 영화에서 이태신은 어찌 보면 감독님과 내가 창조해야 하는 인물이다. 감독님이 7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거절했는데도 감독님이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작품을 엎겠다고 협박하더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영화 ‘헌트’를 연출한 감독이자 배우 이정재의 출연 제의도 수차례 거절한 바 있다. 이정재와 정우성은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아티스트컴퍼니라는 회사도 공동 설립해 함께 운영한다. 연예계 절친일 뿐 아니라 사업 파트너인 셈이다. 정우성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헌트’에 출연해 열연을 펼쳤고 좋은 반응을 얻는 데도 성공했다. 그때도 처음부터 순순히 출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번과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정재 씨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데 나로 인해 생기는 리스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시작할 때는 장밋빛 결말을 확신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감당할 각오가 돼있으면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출연 제의를) 고사한 거다.”
황정민 씨가 연기한 전두광(전두환) 캐릭터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 느낌이 어땠나.
“어색할 줄 알았는데 정말로 저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잘 어울렸다. 분장을 뛰어넘은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그 기운이 부러웠다. 전두광과 대척점에 있는 이태신으로서 어떻게 감당해야 하지, 어떻게 싸우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전두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아야 이태신 캐릭터를 구체화할 수 있을 것 같아 전두광이 등장하는 현장을 자주 찾았다”
영화를 보면 전두광의 기세에 가장 팽팽하게 맞서는 인물이 이태신이다. 황정민 씨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면 당신 나름의 연기 전략이 필요했을 듯하다.
“실제로 전두광과 붙는 신이 거의 없어 전두광의 연기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감독님이 참고 영상을 보내준 것이 도움이 많이 됐다. 영상 속 전두광은 감정이 폭주하는 인물이었다. 그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이태신을 연기할 때는 최대한 이성적 태도를 취하며 차분함을 유지했다.”
지금까지 연기한 인물을 돌아보면 정의로운 캐릭터가 많다. 의도한 선택인가.
“정의로움을 기준으로 배역을 선택하진 않는다. 이태신을 연기할 때도 정의로워 보여야 한다고 의식한 적이 없다. 군인으로서 본분과 소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다. 이태신이 그렇다고 꽉 막힌 캐릭터는 아니다.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의 부끄러움을 대면할 용기가 없어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다.”
정우성의 봄
정우성은 1994년 영화 ‘구미호’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2023년 6월에는 ‘보호자’라는 영화로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보호자’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조연 김남길의 호연이 반짝 화제를 모았지만 관객이나 평단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을 얻진 못했다. 대신 정우성이 연기라는 영역을 감독의 시선으로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영화를 직접 연출한 후 감독의 의중을 더 잘 헤아리게 됐을 것 같다.
“감독 입봉 전에도 김성수 감독을 잘 이해했다(웃음).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의 시선으로 현장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영화 말미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전두광과 대면할 때도 감독님은 이태신이 감정을 절제하고 군인으로서 정당성을 갖고 행동하길 바랐다.”
직접 그렇게 지시했나.
“명확하게 답을 주시지 않는다. 굉장히 애매모호하게 돌려서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굉장히 치열하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대단하다. 어떤 때는 감독님을 발로 저쪽으로 밀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하하하.”
2023년에는 카메오 출연한 작품이 많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거절을 못 해서 그렇다.”
다른 사람하고는 ‘밀당’을 안 하나 보다.
“이제 ‘밀당’ 할 명분이 생겼다. 청룡영화제에 제안해 주면 좋겠다. 카메오 특별상 좀 만들어달라고(웃음). 사실 카메오 연기도 되게 어렵다. 잠깐 나갔는데 전체적으로 영화의 톤 앤드 매너와 맞지 않으면 관객을 영화 밖으로 걷어차는 거나 마찬가지다. 영화로 인연을 맺은 분들이 부탁해 응하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카메오 출연이 실은 조심스럽다.”
충무로 스타들에게 꼭 물어보는 시그니처 질문이다. 데뷔 이후 늘 주연을 맡으며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 배우 인생을 관통하는 나침반 같은 좌우명이 있나.
“예전부터 팬들이 사인을 청하면 왕왕 썼던 말이 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자. 그게 내 좌우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우성의 봄은 언제 오나.
“3월이면 오지 않을까? 하하하. ‘비트’를 만난 20대가 내 인생의 봄이 아니었나 싶다.”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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