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호

왜 우린 한반도 밖 군사개입 不可 원칙에 갇혀 있나

[이근의 텔레스코프] 지금 대한민국엔 강대국 사고방식 필요하다

  •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입력2023-12-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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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는 강대국, 지도층 수준은 약소국 大韓民國

    • 국익 계산 넘어 계산 틀 바꾸는 발상 필요

    • 韓 지속발전 열쇠 =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

    • 국제공조 통한 위협 관리로 강대국 위상 공고히

    2023년 11월 14일 동해상에서 진행된 한미 연합·합동 해상훈련에서 한국 해군 서애류성룡함(DDG)이 사격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2023년 11월 14일 동해상에서 진행된 한미 연합·합동 해상훈련에서 한국 해군 서애류성룡함(DDG)이 사격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강대국이라면 강대국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또 걸맞은 인재를 기용하고, 국가 체계를 수립하고, 정부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자유주의 국제질서하에서 경제, 기술, 문화, 군사, 인적자원 등 다분야에 걸쳐 다른 강대국에 뒤지지 않는 위치에 올라와 있다. G7 국가 가운데 미국을 제외하곤 종합적 국력 면에서 한국이 크게 뒤처진다고 할 나라는 딱히 없다.

    그럼에도 한국이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정부와 지도층이 강대국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거나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무능 아니라 ‘무의지’가 문제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우리가 이미 선진국에 진입해 있었음에도 이를 모르고 오래 지내왔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199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태어난 지금의 젊은 세대는 세계 어디를 가도 여타 선진국의 젊은 세대에 뒤지지 않는다. 반면 개도국 세대인 기성세대는 우리가 선진국에 이미 진입해 있었음에도 이를 제때 자각하지 못해 2000년대 초반 이미 이룩한 ‘선진화’를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뒤늦은 구호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21세기 초반에 태어난 세대는 선진국 세대임과 동시에 강대국 세대다.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한국에 갇혀 있지 않고 이미 세계 곳곳의 개발협력 원조 및 봉사활동에 뻗어 있다. 군사적으로도 이 세대는 한반도를 넘어 세계 주요 분쟁지역에 한국의 군사력을 투사해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고자 한다. 문화적으론 문화영토를 세계 곳곳에 걸쳐 확장한 ‘한류’ 세대다. 기술적으로도 미래의 세계경제가 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첨단기술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세대 및 국가를 끌고 가야 할 지도층이 아직도 20세기적 개도국·중진국 사고와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데 있다. 가장 전형적 예시가 우리가 개도국일 때 선진국으로부터 개발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받은 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 한국군과 한미동맹은 한반도를 넘어서는 지역과 이슈에 대해 군사적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국제정치에서는 가치나 책임보다는 냉정한 국익 계산이 우선이라는 것, 미국과 선진국이 우리 국가 정상에 대해 얼마나 최고의 대우를 해줬는지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것, 미·중·러 등 강대국과 얼마나 오랜 시간 정상회담을 했고 몇 번을 만났는지 등을 홍보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이다.



    기성세대인 지금의 지도층은 아직도 이러한 약소국적 사고와 행동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개도국에 원조를 한다면 그건 받은 걸 갚기 위함이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리하게 형성돼 있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잘 유지하고 발전시키려는 국가전략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그림에서 개발원조 전략을 수립하고 다른 강대국과 협의해 선택·집중·분업하는 것이 강대국의 사고방식이다.

    또 우리가 선진 강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안정을 위해 한반도를 넘어서는 지역에 군사력을 투사하고, 다른 강대국과 함께 질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강대국적 사고방식이자 군사력 운용이다. 근시안적으로 국익 계산만 하기보다는 인류 보편 가치를 수호하고 확산해 더욱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 국제질서를 만드는 노력을 하는 것이 장기적 안목에서 책임 있는 외교를 하는 강대국 외교다.

    국익 계산만 하는 국가는 다른 나라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얻을 수 없다. 약소국은 계산만 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강대국은 계산의 틀을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 인권을 유린하거나, 무력으로 영토를 침탈하거나, 테러 행위를 하거나, 시장을 교란하거나, 환경을 파괴하면 국익에 손해가 날 수 있다는 계산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자칭 진보라고 하는 세력조차 국제사회에서 계산의 틀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계산만 할 것을 요구한다.

    아울러 강대국이 우리를 만나주고,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해 줄 때 기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구상을 가지고 다른 강대국을 그 안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을 때 진정으로 기뻐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겐 강대국의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사이버 공간 및 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Gettyimage]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사이버 공간 및 안보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Gettyimage]

    한국이 강대국답게 사고하고 행동하면 당장 공식적으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설 수 있다. 물론 희생이 따르겠지만 역설적으로 ‘계산 잘하는 사람들’이 항상 얘기하듯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미래 세대에게 강하고 잘사는 좋은 나라와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선 공짜만 밝혀선 안 된다.

    그렇다면 강대국 대한민국이 강대국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책임감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대국이란 국제질서를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구축·유지하며 발전시키는 구상 및 능력을 갖춘 나라를 의미한다.

    현재 국제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열린 세계시장,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공급망,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 공급, 주요 시장에서의 전쟁 억지와 분쟁 방지 및 안정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발전해 왔다. 이 질서에서 한국은 고속 성장했고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우리의 대외 환경일 뿐 아니라 지속 발전·성공을 위한 주요 자산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 단계로 진일보하고 있다. 디지털 국제질서가 기존 질서 위에 병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선 기존의 지리적 공간뿐 아니라 디지털 사이버 공간이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21세기는 이 디지털 사이버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공간이 무너지면 일상생활과 질서가 무너진다. 인터넷이 멈추면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국가와 사회의 운영체계가 짜여버렸다. 즉 현재 국제질서에선 과거의 자연지리 지정학에 더해 인터넷 공간의 지정학인 ‘사이버 지정학(Cyber Space Geo-politics)’이 중요한 국제정치의 동학이 되고 있는 것이다.

    現 시대 강대국이 해야 할 일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래 세계 각국은 촘촘한 공급망으로 이어져 있다. [Gettyimage]

    자유주의 국제질서 아래 세계 각국은 촘촘한 공급망으로 이어져 있다. [Gettyimage]

    이토록 진일보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강대국이 국제공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위협 요인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첫째,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강대국은 촘촘하게 엮여 있는 글로벌 가치사슬, 특히 현대 경제에서 석유에 버금가는 상품인 반도체와 관련한 공급망이 붕괴되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어떤 국가나 세력이 이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핵심 부분을 독점하거나, 무기화해 공급을 교란하지 못하도록 공급망 안보 전략과 국제공조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거의 모든 제조업 상품에 반도체가 들어가는 현대 경제에서 반도체 공급 차질은 막대한 경제 손실로 이어진다. 특히 미래 경제의 핵심기술인 인공지능(AI)에 필요한 첨단 반도체를 적대세력에 의존하는 공급망을 구축해선 안 된다. 과거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통해 아랍 국가들에 의한 석유 공급망 무기화가 세계경제에 얼마나 끔찍한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는 겪은 바 있다. 반도체 공급과 관련해 오일쇼크와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공급망 안보를 확보해야 한다.

    둘째, 적대세력에 의한 사이버 인프라·공간 공격에 대해 확실한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에서 사이버 인프라가 무너지면 시장은 물론 국가 전체가 멈추게 된다. 북한과 대치하는 한국은 전쟁 경험 때문에 다른 선진 강대국 대비 전통적 안보에 비해 사이버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현저히 낮다. 북한은 상당한 수준의 사이버 공격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은 오래전부터 국가안보 제1순위를 사이버 안보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기후변화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넘어 인류의 미래까지 위협하는 사안이다. 선진 강대국들은 이를 도전이자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노력으로 새로운 산업과 시장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래 시장의 핵심은 바로 ‘녹색산업’이다. 화석연료를 태우지 않고 대부분의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새로운 에너지 산업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2차전지라고 하는 배터리다. 그래서 배터리 기술력과 배터리 관련 글로벌 공급망 안정을 확보하는 문제가 강대국의 주요 관리 사안으로 여겨지는 추세다.

    넷째, 전쟁·분쟁·테러에 대한 억지 및 관리 역시 중요하다. 주요 시장과 공급망이 자리 잡은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 혹은 분쟁이 일어나면 세계시장은 일순간에 정지하고 혼란스러워진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만한 혼란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대만이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계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가늠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지역은 핵무기를 가진 호전적 국가들, 중국·북한을 상대해야 하므로 더 심각하다. 이른바 4개의 전선이 동시에 구축될 수 있는 러시아, 중동, 대만, 한반도 등은 전통 안보 분야에서 강대국이 관리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다섯째, 개발협력을 비롯해 개도국에 대한 정치·경제 발전을 지원·유도하는 일이다. 개도국이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돼야 분쟁, 테러, 불법 이민, 난민, 마약, 내전 등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요인들을 제거하고 관리할 수 있다. 개발협력은 과거의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어떤 국가에, 어떤 지원을, 어떻게 얼마나 하느냐에 대한 정교한 전략이 수립돼 있어야 한다. 선심성으로 마구 퍼주는 원조는 혈세 낭비다.

    한국이 강대국답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책임을 지기 위해선 최소한 위 사안들에 대해서 다른 강대국과 함께 어떠한 전략으로 어떻게 공조할 것인지, 그리고 빈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그 공간을 우리가 어떻게 채워 넣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구상, 어젠다, 전략을 개발해 체계적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위 모든 사안에 관련된 국가가 중국이다. 또 중국은 러시아, 북한, 이란 등과 전략적 연대를 구축하고 있어서 이 국가들을 어떻게 상대하고 관리해야 할 것인지가 강대국들의 핵심 이슈가 될 것이다. 이에 다음 호에선 이 문제를 역사적·이론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신동아 1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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