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우리는 단 하루도 정권 놓친 적 없다”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5-04-19 16:0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민정당은 사라졌다. 그러나 민정계는 여전히 살아 있다. 5,6공 시절 정치에 입문한 인사들이 여야 모두에서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실력자 대열에서 한 번도 소외된 적이 없는 민정계의 집단 파워, 그 생존의 비밀은 무엇일까.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사당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우뚝 선 건물이 국회도서관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과 더불어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정보의 메카. 도서관 정문에서 출입증을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면 로비 가득히 정보검색용 컴퓨터가 놓여 있고 오른편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2층 첫 방과 마주친다. 정기간행물 열람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신문열람용 탁자가 죽 늘어서 있고 좌우로는 신문철이 꽂혀 있는 열람대가 버티고 있다. 오른쪽 서가로 발길을 돌리면 해묵은 중앙일간지들과 이름도 생소한 지방일간지들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다.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오래 전에 자취를 감춘 정기간행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 한편 구석, 한 권으로 묶여 있는 신문철이 있다. ‘민정신문’. 11년 전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춘 어느 정당의 당보(黨報)로, 이제는 찾는 이 별로 없는 도서관의 비인기 상품으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보관돼 있다.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줄여서 민정당으로 불렸던 정당이 바로 이 당보를 발행한 주체다. 당보를 펼쳤다. 그나마 81년 창당 첫해에 발행된 1∼3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4호가 첫 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82년 4월3일자였다.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통일’. ‘민정당보’(6공화국 들어 ‘민정신문’으로 제호 바뀜)라는 제호 바로 옆자리에 적힌 민정당 5대 이념은 20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전혀 낯설지 않다. 민정당이 창당이념으로 제시한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게 이뤄지지 않은 현실이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민정당은 ‘도원결의’ 정당

    당보 1면 하단쯤 ‘통일로(統一路)’라는 문패의 칼럼란이 눈에 띈다. 이 칼럼의 이번 호 글 제목은 ‘평생동지(平生同志)’. 글은 당에 대한 개념 설명으로 시작된다.

    “당(黨)이란 같은 동네에 모여 사는 사람들, 이웃집단, 이를테면 동지(同志)집단이다. 서양의 폴리티컬 파티(Political Party)가 정치집단이라는 뜻이라면 당이란 인연과 뿌리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폴리티컬 파티가 이념, 정책중심의 계약 관계로 맺어진 기능집단이라면 우리 민정당은 ‘평생동지’의 도원결의(桃園結義)로 모인 정당이다.”

    ‘이웃집단’ ‘평생동지’ ‘도원결의’… 이해집단이 아닌 1차적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수사들이 나열된 끝에 칼럼은 이렇게 글을 맺는다.

    “평생동지를 자산으로 가진 우리 당은 한 동네 이웃처럼 인간적 유대가 돈독하다.”

    당원들 관계를 한 동네 이웃에 비유한 감각적 표현에서, 이런 논리를 개발해낸 논객들의 만만치 않은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시계추를 뒤로 돌려 97년 7월21일 오후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이곳에서는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선거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가 한창이다. 이회창(李會昌) 김덕룡(金德龍) 이인제(李仁濟) 최병렬(崔秉烈) 후보 등 여당의 용(龍)들로 불리던 후보들이 연단에 올라 대의원들을 상대로 일장연설을 하고 있다.

    대회 중간쯤, 이한동(李漢東) 후보가 등단했다. 그는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정견을 토해냈다. 그리고 연설 사이사이, 그는 청중인 대의원들을 이렇게 불렀다.

    “평생동지 여러분! 우리는 힘을 모아야 합니다.”

    무감각한 사람은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평생동지’란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민정당 출신 신한국당 대의원들에게는 이 표현이 일종의 암호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동지는 민정당의 상징 단어요, 스스로를 민정계로 규정짓는 식별부호가 아니었던가.

    다시 시간을 뒤로 돌려 2001년 3월5일 저녁, 서울 세종문화회관 연회실. 중년의 신사들이 속속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뜻 보기엔 고교 동창회 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행사장 입구에 놓인 화환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화환을 보낸 주인공들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자민련 김종호(金宗鎬) 총재대행, 민주국민당 김윤환(金潤煥) 대표 등이었다. 그 한편에는 직함이 없이 이름 세 글자만 적힌 화환도 있었다. 보낸 이는 이번에도 이한동(李漢東) 총리였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민정당에서 한솥밥을 먹던 의원, 사무처 요원, 중앙위원회 간부 등. 그러니까 민정당의 ‘OB모임’이었다. 행사 이름도 ‘평생동지의 밤’이었다. 언뜻 현역의원들도 눈에 띄었다. 박희태 한나라당 부총재와 무소속의 강창희 의원이었다.

    정호용 전의원이 모두를 대표해 인사말을 했다. 행사중간쯤 박희태 부총재는 축사를 하며 “마치 몇십 년만의 동창회에라도 나온 것 같다”며 건배를 제안했다. 좌중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두 현역의원 외에 채문식 정호용 강선영 권정달 김용태 박준병 권해옥 이치호 김종기 최재욱 이찬혁 김현자 이용택 전의원 등 한때를 풍미했던 정객들도 참석했다.

    이날 참가자는 대략 340여명. 주최측은 500명 이상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전날까지도 참석이 예정됐던 한나라당 민정계 출신 당직자들이 대거 불참해 참가 인원이 줄었다고 한다.

    이날 민정계 인사들은 5월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회장도 정하지 않았고 회칙도 마련하지 않았지만 다음 모임에서는 제대로 골격을 갖추자고 결의도 했다.



    다시 시계바늘을 82년 3월18일 오후로 되돌려 보자. 민정당 총재인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삼엄한 경비 속에 가락동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전대통령은 재임중 유난히 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자주 찾은 인물이다. 거의 매달 한 번 꼴로 연수원에 나타나 연수생들에게 강연을 했다. 때로는 예고도 없이 찾아와 관계자들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아무튼 82년 3월18일 전 전대통령의 중앙정치연수원 강의에는 그의 국회관(國會觀), 국회의원관(國會議員觀), 그리고 정당을 보는 관점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국회의원직을 생활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구시대의 썩어빠진 생각입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려면 국회의원들은 지역구 모든 국민들의 여론과 어려움과 발전시켜야 할 사항을 파악해 당을 통해 정부에 반영시키고, 또 정부의 사정 탓에 이룩될 수 없을 때는 선거구민에게 이해를 시키고 해서 의원들은 정부와 국민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3권 분립의 한 축이자 개개인이 입법기구이기도 한 국회의원을 단순히 정부와 국민 사이의 전서구(傳書鳩)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전전대통령의 정치인 관이다. 전전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정부정책의 홍보요원 내지는 설득요원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한 데는 과거 정치권에 대한 불신감이 결정적 이유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런 궤변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은 당원 상대 교육을 꾸준히 한 정당이었다. 한 인사는 “전두환 대통령의 통치자금 가운데 상당액이 당원교육에 들어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원교육에는 아낌없는 투자가 이뤄졌었다”고 회고했다.

    서울 가락동의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에는 늘 민정당원들로 북적거렸고, 5박6일씩 빡빡한 일정으로 진행되는 군사훈련 같은 연수를 민정당원들은 입에 단내를 풍기며 따라 했다. 새벽구보로 하루를 시작하고 낮에는 외부강사와 핵심당직자들이 강사로 나선 민정당 창당이념과 정책현안에 대한 강연을 들어야 했다. 밤이면 분임 토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정치연수원 교육 뿐 아니라 83년부터 5공정권 내내 거행된 덕유산 평생동지수련대회에도 지역구 핵심당원들이 대거 동원됐다. 민정계의 한 인사는 “이렇게 당에서 실시한 각종 교육프로그램에 참가한 연인원이 100만 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대규모 집체교육을 한 정당은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늘날 중앙정치무대 뿐 아니라 특히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에서 활약하는 인사들 가운데 상당수가 민정당 연수를 거쳐간 것만 보더라도 민정당의 당원교육은 우리 정치사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의원만 300여명 배출

    지방자치단체에서 활약중인 민정계 인사들은 제외하더라도 현재까지 역대 정당 가운데 민정당만큼 많은 수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도 드물다. 민정당적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들과 민정당 출신으로 3당 합당후 민자당, 신한국당, 그리고 현재의 정당구도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을 합하면 대략 300여 명에 달한다는 것.

    통상 정치권에서 민정계라 하면 전두환 전대통령 재임시절인 11대·12대 총선, 노태우 전대통령 재임시절인 13대 총선에서 민정당 공천을 받아 정계에 입문한 정치인들을 가리킨다. 현재 11∼13대 때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도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의원은 모두 23명이다. 이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이 17명이고 나머지는 민주당에 3명, 자민련에 2명, 그리고 민국당에 1명이 포진해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나라당에는 강재섭 김기배 김영구 김일윤 김태호 서정화 신경식 유흥수 이상득 이상희 전용원 정창화 최병렬 하순봉 현경대 의원 등이 아직도 민정계의 맥을 잇고 있다. 민주당에는 강현욱 김명섭 최명헌 의원 등이 민정계 이력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있고, 자민련에는 김종호 이한동 의원 등이 민정계 출신 현역의원들이다. 민국당의 한승수 의원도 13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민정당 출신이다.

    현역의원은 아니지만 정치적 비중을 따져볼 때 현역의원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정치인들까지 포함할 경우 민정계 정치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김중권 민주당대표와 고건 서울시장, 박태준 전국무총리, 이종찬 전국정원장 등 여권의 쟁쟁한 실력자들도 그 정치적 뿌리는 민정계에 닿아 있다.

    범위를 좀더 넓혀 5,6공 시절 행정부 장·차관 이상 관료를 지내며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공유한 인물들 가운데 현역 국회의원을 살펴보기로 하자.

    한나라당의 경우 김용갑 박명환 이상배 의원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의원은 5공시절 총무처장관을 지냈고, 박명환 의원은 민정당 당료 생활을, 이상배 의원은 내무부차관과 환경청장을 지냈다.

    이밖에 민주당의 권정달 자유총연맹 총재, 자민련의 최재욱 총리비서실장 등도 비록 현역의원은 아니지만 5, 6공을 거치면서 정치에 입문한 민정계 정치인들로 여권에서 만만치 않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에서 민정계의 영향력은 산술적인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정치권에서 활약하고 있는 민정계 인사들의 역할은 함량 면에서 웬만한 정치세력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여권을 보면, 한마디로 민정계가 여당의 당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지난해 12월19일 민주당 대표에 취임한 김중권 대표가 그 표본적 인물. 민정당 의원시절 김대표의 최종 직위는 사무차장이었다. 이수담 전의원은 “그때부터 김대표의 조직장악 능력은 대단했다. 그런 김대표가 민주당 대표를 맡는다고 했을 때 당시 김중권 차장 밑에서 당직생활을 했던 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두 달 내에 김대표가 민주당을 장악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고 말했다. 민정계 당료들의 장담처럼 김대표는 민주당 입성 수개월만에 당의 구심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 민주당 정장선(鄭長善) 의원은 84년 민정당 사무직요원 공채 6기 시험에 합격해 당료생활을 시작한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정의원은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일찌감치 경기도의회에 나서 정치적 입지를 넓혀나갔고 민정당 사무처 요원 출신으로는 드물게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자민련은 총재 및 총재대행이 모두 민정계다. 총재이면서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이한동 총리는 11대에 정계에 입문해 민정당에서만 원내총무, 사무총장 등 주요 당직을 두루 거친 인물. 김종호 총재대행은 11대에 정계에 입문해 5공정권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내며 기반을 닦아왔다.

    최근 민주·자민련 공조에 또 다른 세력으로 합세하기로 한 민국당 김윤환 대표도 빼놓을 수 없는 민정계 출신 인사. 만약 3당 공조가 현실화된다면 여권 3당 대표가 모두 민정계가 되는 ‘기현상’도 벌어질 전망이다.

    민정계라는 계보로 분류할 수는 없지만 5, 6공 시절 관료 인맥 가운데서도 현정권에서 한몫 하는 인물이 적지 않다. 진념 경제부총리는 88년에 해운항만청장을 시작으로 관계의 요직을 두루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민주당 전국구 의원인 최명헌 의원도 88년 2월 노동부 장관을 지낸 6공 관료 출신. 서정욱 과학기술부 장관은 6공 중반 과학기술처 차관을 지낸 바 있다.

    한나라당은 사실상 민정계의 ‘법통’을 이은 정당이다.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중심이 이동해온 까닭에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민정계 의원들의 자부심은 만만치 않다. 이들은 “보수정당의 법통을 이어온 세력은 우리”라는 얘기를 공공연히 하고 있다.

    한나라당 민정계 의원들의 자신감은 그들의 당내 위치를 봐도 한눈에 짐작될 정도다. 지난해 5월30일 총재와 부총재 등 당 지도부를 뽑는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한마디로 민정계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이벤트였다. 그 날의 주인공은 총재 재선에 성공한 이회창 총재였지만 민정계 역시 알뜰한 수익을 올렸다. 모두 11명인 부총재단에 무려 6명의 민정계 부총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최병렬(崔秉烈) 김진재(金鎭載) 박희태(朴熺太) 하순봉(河舜鳳) 강재섭(姜在涉) 의원과 양정규(梁正圭) 전의원이 그들.

    총재경선 이후 이어진 당직 인선를 보면 민정계의 위세는 두드러진다. 사무총장에 임명된 김기배(金杞培) 의원은 12대 총선에서 당선돼 의정활동을 시작한 4선의 민정계 중진. 원내총무 정창화(鄭昌和) 의원은 5선의 민정계 중진이다. 국책자문위원장인 이상희 의원도 4선의 민정계 의원. 당3역 가운데 2역을 민정계가 차지하면서 명실공히 한나라당은 민정당 계승자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이들 민정계 중진들이 전진 배치된 최근 1년 사이, 한나라당 정책이 급속히 보수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도 역학구조상 당연한 결과다. 민정계 지도부의 등장은 곧 한나라당내 개혁파의 입지를 줄어들게 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최근 당내 개혁파들이 제목소리를 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면 민정계의 저력은 어디서 비롯될까. 민정당이 창당된 지 20년이 지났고, 그 민정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1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민정계 인맥이 생존해 정치권의 한 세력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의 근거는 무엇일까.

    민정당 출신 당료 능력 두드러져

    이수담 전의원은 이런 민정계 파워의 근거로 “5공 시절 꾸준히 진행해온 당원연수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 노동당에 필적하는 정치세력 양성’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연수원을 운영했는데, 연수원을 거쳐간 민정당원들이 지금까지도 각처에서 우리 사회 건전보수의 주축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그런 저변의 힘이 민정계라는 정치세력을 지탱해준 근거”라는 설명이다.

    이 전의원처럼 사무처에서 정당생활을 시작한 인사들과 달리 현역 민정계 의원들은 의원 개개인의 정치적, 실무적 능력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은 “민정계 의원들은 원래부터 정치인들이 아니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자기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야당과 재야에서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해온 다른 계파 정치인들보다 기본기가 잘돼 있었고 그것이 정치에 입문한 이후 오랫동안 정치생활을 하게 한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의원은 “민정계 출신들 가운데는 그 뿌리가 다른 정당에 가서도 제 역할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원래부터 내실 있게 준비를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정치권 인사는 “당료들의 수준을 보면 그 정치집단의 능력을 알 수 있는데 3당 합당후 민정, 민주, 공화 3당의 당료들이 뒤섞이면서 그 변화를 살펴보니 민정당 출신 당직자들이 다른 정당 출신들보다 한 단계 위였다”며 “그 차이가 결국 현역의원들의 능력 차이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과거 민주화투쟁 시대에는 실력보다는 열정과 투쟁의지가 중요했다면 앞으로는 실력을 갖추지 않은 정치인들이 버티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 민정계는 과연 이대로 있을 것인가. 별도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없을까. 과거 민정계의 영광을 재연하려는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현재로서는 비관적이라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 확실한 구심점이 돼줄 세력이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 특히 민정당 창업자인 전두환(全斗煥) 전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도 문제인데, 현재로는 전전대통령 스스로가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또한 민정계의 독자적 움직임을 가로막는 만만치 않은 장해 요인이다.

    지난 3월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평생동지의 밤’ 행사의 경우, 처음부터 행사 성격을 친목과 단합에 뒀다고 한다. 전전대통령도 이 모임에 대해 애당초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임과 더불어 배성동 전의원 등이 진행중인 당사(黨史)편찬 작업에도 전전대통령은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동지의 밤’ 행사 실무자들이 이 모임의 회장으로 정호용 전의원을 추대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전전대통령은 “정호용이가 움직이면 세상사람들이 내가 움직이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측근을 통해 실무진들에게 “행사를 취소하라”고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이에 실무진들은 연희동을 찾아가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간신히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대신 정 전의원의 회장 취임은 다음 모임 이후로 미뤄 세간에 이는 의혹의 눈길을 피해가기로 했다.

    민정계의 독자행보를 가로막는 또 다른 요인은 이회창 총재와 한나라당의 은근한 견제. 행사 주최측은 3월5일 행사 전날까지도 참석 의사를 밝혀온 한나라당 당직자들이 당일에 연락도 없이 대거 불참한 것이 그 견제의 시작이라고 믿고 있다.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 고위층에서 별도의 지시가 내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 한나라당 소속 인사들이 대거 불참을 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한나라당과 달리 민주당과 자민련은 이번 행사에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민주당은 내놓고 반기지도 않았고 침묵으로 이들의 움직임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민정계 모임 속속 등장

    사실 민정당 출신들의 자발적 움직임은 ‘평생동지의 밤’ 모임이 처음은 아니었다. ‘평생동지의 밤’ 모임이 전직 민정당 사무처와 중앙위원들 주축이었다면, 민정계 의원들 사이의 모임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고 한다.

    민정계는 정치적 격변기나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나름의 자발적 모임을 가져왔다.

    민정계가 처음으로 누구의 지시가 아닌 자발적 모임을 만든 때는 88년 13대 총선 직전. 당시 민정당의 공천권자인 노태우 대통령은 민정당 창당 주역들인 윤길중 이상익 권익현 권정달 정석모 김숙현 김상구 이찬혁 봉두완 박경석씨 등 무려 27명의 현역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이른바 ‘금요일의 대학살’이라 불리는 현직 지구당위원장의 대거 공천탈락 이후 탈락자들을 중심으로 자발적 모임이 결성됐다. 그것이 민우회(民友會)였다.

    이에 앞서 민정당 창당 주역인 이상재 전의원이 초기 민정당 사무처 요원들을 주축으로 만든 ‘민정동지회’라는 모임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임은 3당 합당 후 자연스레 모습을 감췄다. 3당 합당 후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을 장악하면서 민정계만의 모임을 갖기가 어려워졌던 것도 초기 민정계 모임이 소멸한 이유였다.

    김영삼 대통령 당선 후 당 규모 축소로 밀려난 민정계 당직자들은 합당 전 민정당사가 관훈동에 있었던 점에 착안, ‘관훈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든 적도 있었다. 이번 ‘평생동지의 밤’ 행사 준비과정에서 이들도 상당한 몫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의 모임들이 공천탈락자나 당 사무처 요원 중심의 밑바닥 모임이라면, 현역 중진급 의원들이 대거 참여하는 ‘삼목회’라는 민정계 모임도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식사를 하고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는 일종의 친목모임인데, 한 관계자는 “특별한 정치적 뜻은 없으며 그저 모여 잡담이나 하는 게 고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목회라는 이름도 3선 이상의 친목회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최대 정치인맥집단인 민정계는 이렇게 횡으로 종으로, 뜻맞는 사람들끼리 쉬지 않고 모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당사자들인 민정계 정치인들의 경우 “별 뜻이 없는 모임”이라고 강변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정가에서도 민정계 정치인들의 두드러진 약진을 불안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여권의 한 인사는 “굳이 민정계가 아니더라도 제3의 정치세력이 움직인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구도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김대중 정권은 이전의 YS정권보다 약체다. 김대통령이 김중권 대표를 중용한 것은 스스로 약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대안세력이라는 믿음을 주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민정계가 움직일 만한 분위기는 충분히 마련된 것 아니겠나.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대선이 임박할수록 민정계의 결집력은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되는 견해도 있다. 야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민정계가 내놓고 모일 수 있는 조건이 되려면 멀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별도의 세력으로 나서는 것은 민정계 인사들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안되는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란과 관련, 최근 민정계 한 중진의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현정권의 요직이 다 우리 사람이에요. 여당 대표가 그렇지, 총리 그렇지. 하하… 웃기지 않아요!”

    민정계가 나서지 않아도 이쪽 저쪽에서 민정계를 자기편으로 끌어안으려는 지금의 상황을 즐기면 될 뿐 굳이 나서서 세력화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이 인사의 판단인 듯했다.

    이들 민정계 정치인들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민정계는 탄생 이후 지금까지 어쩌면 단 하루도 정권을 잃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이들과 손잡으려는 정치세력이 있는 한 어쩌면 이들의 집권은 영원한 것은 아닐까.

    다시 ‘민정신문’ 속으로 들어가 보자. 89년 11월17일자(93호), ‘주장(主張)’이라는 문패를 단 사설이 눈에 띈다. 제목은 ‘3김(金)시대 이제는 청산되어야’다. 요즘에도 일부 정치세력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10여 년 전에도 3김청산은 정치권의 유행어였던 셈이다.

    주장의 내용은 ‘여소야대 정국을 악용한 3김씨가 과거청산문제를 예산안 심의와 연계해 예결위 구성을 지연시키는 등 구태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민정당의 여소야대 피로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당보도 그런 당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89년 12월23일자(94호) 당보에서는 돌연 ‘희망의 90년대를 창조하자’는 기대에 찬 사설이 실렸다. 이듬해인 90년 1월19일자(95호), 민정당 창당 9주년을 알리는 기사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민정당이라는 정당은 이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민정당이 사라지던 그 순간 ‘민정계’라는 또 다른 거대한 생명체는 이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민정당의 그림자이면서 자생력을 가진 또 다른 집단, 그 민정계가 어느새 우리 정치 한가운데에 자리잡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