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권노갑총재 김명윤이사장도 당했다”

희대의 사기사건 방정환재단 스캔들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ades@donga.com

    입력2005-04-20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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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선생.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제창한 어린이 운동의 선각자. 저승의 소파선생이 요즘 피곤하다. 그를 기린다며 설립된 한국방정환재단을 둘러싸고 잡음이 그치지 않고 있다. 수억원의 기부금이 들어오는가 하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있다. 재단 창립자를 자처하는 인물이 전횡을 일삼고 있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유족들은 당장 재단을 해체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처투성이 방정환재단의 내막을 들여다보았다.
    3월9일 저녁, 서울 종로경찰서 수사계 조사실 한편 구석. 40대 초반에 정장차림인 한 사나이가 조사형사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함께 근무하다 최근 이 남자에 의해 해직된 여직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담당형사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이종찬(李宗燦). 올해 41세로 지난해 한국방정환재단 창립과정에 결정적 구실을 했고 지난해에는 재단 이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선생은 어린이운동을 일으킨 선각자. 방정환재단은 방정환 선생의 뜻을 기려 애국·애족 사상과, 어린이·청소년사랑의 실천정신을 추모·선양·계승할 목적으로 99년 문을 열었다.

    그런 단체의 창립에 기여한 인물이 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앉아 있는 광경부터가 어딘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기자임을 확인한 이씨는 “할 말이 무척 많다. 기회가 되면 모두 얘기하겠다. 못할 이유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당장은 경찰 조사 때문에 길게 얘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현대판 ‘가짜 이강석 사건’



    이씨는 2000년 12월7일 ‘세계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탑’건립 사업 명목으로 삼성생명에서 받은 2억원과 마사회에서 받은 2000만원, 도합 2억2000만원의 사업비 가운데 1억여원을 허위 지출 등의 방식으로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에 앞서 이씨는 지난해 8월 ‘소파 방정환문집(전2권)’ 5400질을 전국 초등학교에 무상기증하는 사업을 위해 한화그룹이 문예진흥원을 거쳐 지원한 3억원의 사업비 가운데 1억5000만원 가량도 횡령, 착복 및 유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 사실을 적시해 이씨를 경찰에 고소한 방정환재단의 이억순 상임부총재와 황인환 사무총장 등에게 소 취하를 목적으로 친인척과 측근들을 시켜 협박한 혐의도 받고 있다. 한마디로 어린이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재단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기 힘든 혐의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 사건이 눈길을 끄는 것은 방정환재단과 관련해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정계, 재계, 학계, 연예계, 체육계, 문화계 등 이름 석자만 대면 누구나 알 유명인들이 이 사건의 피해자로, 혹은 가해자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종찬씨는 이들 유명인들의 한가운데에 서서 이들의 명성을 활용해 마음껏 재단을 움직이고, 돈을 움직이며 비리 혐의가 있는 사건들을 저질러왔다. 한마디로 1960년, 전국의 관공서에 출몰해 당시 정계 실세였던 이기붕의 아들이라며 기관장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사라졌던 ‘가짜 이강석 사건’을 연상케하는 사건 얼개를 갖추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방정환재단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대판 ‘호가호위(狐假虎威) 사건’을 살피기에 앞서 사건의 온상인 방정환재단의 생성과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방정환재단의 ‘출생의 비밀’을 보노라면 이번 사건의 성격이 한눈에 드러난다.

    사건은 소파선생이 생전에 만든 어린이운동 단체인 색동회에 이종찬씨가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색동회는 1923년 일본유학중이던 소파선생이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마해송 정인섭 최진순 이헌구 윤석중 이헌구 최영주 등 소파와 뜻을 같이하던 초기 어린이운동가들이 이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색동회는 본격적인 어린이운동을 일으키는 전초기지 노릇을 한 곳으로 지금도 아동문학가 및 어린이운동가들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그 색동회에 이종찬씨가 얼굴을 나타낸 때가 1986년. 이씨는 동요 ‘반달’의 작곡가인 윤극영 색동회 창립동인 중앙위원 댁을 방문, 선생의 평생 숙원사업인 동심문화원을 설립해주겠노라고 자청했다. 이에 윤극영씨는 화선지에 반달 작시휘호를 대량으로 그려줬고 이씨는 이를 표구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등 색동회 관계자들에게 여러 가지 사업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접근했다.

    그러나 호언장담과 달리 실제 이뤄지는 일은 없었고 이씨를 둘러싼 나쁜 소문만 확산됐다. 그러던 1992년 5월 이종찬씨는 ‘대한민국 어린이헌장비’ 건립사업을 한다며 어린이 관련 단체들 사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이씨의 명함에는 ‘한국청소년기금 총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그 해 8월9일 색동회 산하기관으로 ‘소파탄생100주년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이와 별도로 이씨는 96년에 “방정환선생의 장남인 방운용옹의 승인을 받았다”며 훗날 한국방정환재단의 모태가 된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그 해 6월7일 김명윤 의원을 고문으로, 이수성 국무총리를 명예회장으로 하고 이씨 자신을 회장으로 한 조직구성을 마쳤다.

    96년 이씨는 탁월한 ‘네트워킹’ 능력을 발휘해 소파선생 관련 단체 여러 개를 잇따라 만들어냈다. 그 해 11월에는 김수남 색동회 회장(97년 작고)과 ‘소파방정환선생기념관건립위원회(건립위원회)’를 창립하기로 합의한 후 주비위원을 선정했고 이와 별도로 ‘장한나 후원회’(회장 김명윤)를 만들어 천재 첼리스트 장한나양에게 고가의 첼로를 구입해주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이씨 자신이 소장을 맡아 ‘한국방정환연구소’라는 조직도 만들었다.

    장한나후원회는 동아그룹의 지원을 받아 7억원 상당의 첼로를 장양에게 사주며 기증식을 갖기도 했는데, 실제 장양에게 건네진 첼로의 정확한 가격은 이종찬씨만 알고 있을 뿐, 후원회장인 김명윤 의원도 내막을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사업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96년은 이렇게 ‘방정환 비즈니스’를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각종 소파관련 조직 구성도 의미가 있지만 96년 이후 방정환 비즈니스에서 두고두고 이씨 자신의 ‘기득권’ 주장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계약도 마쳤다. 96년 5월 이씨는 소파의 아들인 방운용옹과 별난 ‘양도계약’을 체결했다.

    ‘양도증서(讓渡證書)’라는 제목의 이 계약서는 방운용옹이 이씨에게 “소파선생의 함자(銜字)와 아호(雅號) 사용의 권리를 양도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오늘부터(계약일인 5월1일)는 1996년 6월7일 창립되는 ‘소파방정환선생기념사업회’만이 고(故) 소파 방정환의 유업계승 및 기념사업, 추모사업, 연구사업 등 기타 제반사업을 할 수 있다”고도 돼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부터는 국내·외의 단체(법인 포함)나 개인이 부친 고(故) 방정환의 함자와 아호를 어떤 용도로든 사용(이전에 사용하던 일들의 재추진도 포함)하고자 할 때에는 법률적 사용권리자인 이종찬 선생께 사전 승낙을 받아야만 문제가 없음을 밝혀둔다”고도 기록돼 있다. (사진 참조)

    ‘방정환 비즈니스’를 시작하다

    이 양도증서에 양도인으로 등장한 방옹은 “몇날 며칠을 집에 찾아와 떼를 쓰는 통해 마지못해 서명을 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이 아버님의 유업을 잇겠다고 하니 반갑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사망자의 고유명사를 독점 사용할 수 있는지의 법적 해석과 관계없이 이씨는 그 후 승승장구, 방정환 비즈니스를 ‘독점적’으로 벌여나갔다. 97년 1월29일 ‘건립위원회’ 창립 주비위원회를 발족했는데 주비위 명예위원장에 이수성 전총리, 위원장에 김명윤 의원, 사무총장에 탤런트 박규채씨를, 홍보실장에 김순 전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회장, 자료실장에 김석득 전연세대 부총장, 재정부장에 이학래 한양대학생처장 등을 각각 앉히고 이씨 자신은 기획실장이 돼 전체 업무를 총괄했다.

    6월7일에는 김수남 색동회장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기념사업회’ 수석부위원장에 성악가 조수미씨를 임명했다. 또 신임 부회장에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씨를 임명했다. 7월에는 프로기사 이창호 9단을 새로운 부회장에 임명했다. 이후 방정환재단의 모체가 될 ‘기념사업회’ 는 이때부터 이미 화려한 스타군단으로 세상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종찬씨의 독단적 조직운영에 불만을 느낀 유명인사들이 속속 모임을 박차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7일 ‘건립위원회’ 박규채 사무총장이 이씨의 언행에 불만을 품고 사무총장직을 사퇴했다. 이듬해인 98년 3월 김명윤 의원을 대신해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이수성 전총리도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이전총리의 사임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방운용옹은 “97년 12월말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당선자를 모시고 프레스센터에서 ‘방정환 문집’ 헌정식을 가졌는데 대통령 당선자가 나온다고 그래서인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들과 재벌총수들, 기업인들이 70∼80명 이상 찾아왔다. 대통령 당선자까지 참석한 이날 행사는 전적으로 이수성 전총리의 덕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 날 찾아온 손님들이 저마다 봉투 하나씩을 내미는데 나와 이전총리는 인사하느라 돈이 얼마나 들어왔는지 확인도 못했다. 이종찬에게 물어보니 ‘이전총리에게 보고를 했다’고 그러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전혀 업무보고를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이 전총리가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 날 문집 헌정식에서 얼마의 성금이 걷혔는지 정확히 아는 행사 관계자는 없고 이씨가 전적으로 자금을 관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게 돈 문제로 서서히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98년 11월 ‘기념사업회’가 ‘한국방정환재단’으로 공식 출범하면서 돈을 둘러싼 잡음들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방정환재단 초대 이사진에는 정치인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98년 12월 재단 창립 당시 초대 이사장에는 이동원 의원이, 이사에는 이종찬 자신을 비롯해 정희경·이경재 의원, 이종민 MBC재단이사, 정희자 힐튼호텔회장, 연극인 윤석화, 성악가 조수미, 야구선수 선동열, 유족 방운용, 전탁구선수 현정화, 전마라톤선수 황영조씨(이상 98년 당시 직위) 등이 임명됐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날의 재단 이사진 구성에 대한 이종찬씨 본인의 생각이다. 이씨는 자신이 편저한 ‘소파방정환문집’ 연표에 “‘한국방정환재단’ 이종찬 회장은 초대 이사장, 이사, 감사를 임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씨는 또 연표 곳곳에 등장하는 자신의 이름 뒤에 ‘한국방정환재단 창립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씨가 재단의 실질적 주인행세를 하게된 배경에는 앞서 유족이 써준 ‘양도증서’가 있다는 게 이번 사건에 관련된 이들의 대체적 의견이다. 재단을 설립하면서 아버지 이재창씨 이름으로 1억4000만원 상당의 부동산을 재단에 출연했다는 것도 기득권을 주장하는 근거. 그러나 이 부동산은 타인소유로 이재창씨가 채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압류를 해놓은 상태라 사실상 재단 재산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사정과 관계없이 이씨는 재단법인 형태로 전환됐더라도 방정환재단은 자신이 만든 재단이며, 따라서 자신에게 이사장과 이사, 감사 등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창립 이후 이씨의 재단 운영 행태를 보면 그런 이씨의 믿음은 두드러진다. 이씨는 창립 이후 이경재 전의원 등 “재단 운영실태를 보고하라”고 요구하는 이사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나타내곤 했다.

    이전의원은 “이종찬과는 광주이씨 종친회인 광문회에서 만났는데 나를 ‘대부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 뒤 방정환 재단을 한다며 이사로 참여하라고 권했고, 좋은 뜻의 재단이라 생각해 이동원 의원과 정희경 의원, 그리고 평소 알고 지내던 정희자 힐튼호텔회장 등을 이사에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평소 공손하던 이씨의 태도가 변한 것은 ‘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탑’건립을 위해 이전의원의 알선으로 한국마사회로부터 2000만원을 지원받은 직후. 이전의원은 이종찬씨에게 돈의 사용처와 사업내용을 보고하라고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재단 직원이나 유족 명의의 각종 협박성 내용증명이었다. 내용은 주로 ‘이경재 의원이 재단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인데, 심지어 지난해 4·13총선 때는 이전의원의 지역구에까지 이전의원을 비방하는 유인물이 뿌려지기도 했다.

    유인물에는 ‘이경재 의원의 만행(국회의원의 권력을 이용, 재단을 빼앗으려 했다는)으로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장남인 방운용옹(83세)은 몸져 누웠고, 이 사실로 천도교, 온양방씨 종친회(조선일보 포함), 경기·인천지역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몹시 경악해 있는 상태’라고 적혀 있었다. 유인물에 등장하는 방운용옹은 “나중에 그런 유인물이 ‘광명시 독립유공자 유가족 일동’ 명의로 뿌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하도 기가 차 이종찬이를 불러 야단을 쳤다”고 말했다.

    ‘이종찬 이사장’ 시대

    이종찬씨의 권유로 재단일에 관여한 연예인들도 적지않은 곤욕을 치렀다. 연극인 윤석화씨는 99년 3월 이씨에 의해 반강제로 떠밀려 ‘남나리후원회’ 회장직을 맡았는데 그후 “회장이 한일이 뭐냐”는 이씨의 공박에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개그맨 서세원씨도 99년 재단후원회장을 맡으며 이씨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99년 8월에는 재단 총재를 맡기도 했다. 서씨는 2000년 4월 이씨와 함께 소파상 관련 이벤트를 준비하다가 행사를 치르지 못하고 적지 않은 돈만 날리는 곤욕을 치렀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2000년 5월4일 서씨는 이사직을 사임하고 재단과 인연을 끊었다.

    이경재 전 의원과 이종찬씨 측의 갈등은 이전의원 측 이사들인 이동원, 정희경, 정희자씨 등이 재단이사직에서 사퇴하고, 이전의원은 이사직에서 해임당함으로써 일단락됐다. 그리고 99년 8월, 이종찬씨가 이사장을 맡아 사실상 재단을 좌지우지하게 됐다. 정·재계 인사들을 제외하고 새로 편성한 이사진을 보면 윤석화, 조수미, 선동열, 현정화, 황영조, 서세원 씨 등 연예계와 스포츠계 유명인이 대부분이고 이씨는 자신은 재단이사장에 취임해 재단을 대표하게 된다.

    이듬해인 2000년 5월 이씨는 공금횡령 혐의로 구속된다. 앞서 99년 7월 문예진흥원을 통해 받은 마사회 기부금 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수배된 뒤 2000년 5월 서울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긴급 체포됐다. 재단법인에 대한 기부금은 기부자가 정한 목적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는데 이씨는 어린이운동 발상지기념탑 건립을 위해 기부된 이 돈을 개인의 부채를 갚는데 쓰는 등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경찰에 적발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 해 7월 서울지방법원 형사단독 12부에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이씨는 형량을 줄이기 위해 문예진흥원에 2000만원을 환급했다.

    횡령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뒤 이씨는 재단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사장은 물론, 이사직에서도 물러나 사실상 재단 업무에 아무런 책임과 권한이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이씨의 본격적인 재단관련 비리의혹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된다.

    2000년 7월14일 제4차 이사회에서 이종찬 이사장과 서세원, 선동열, 황영조, 이상엽 이사가 사임하고 새로이 김명윤 한나라당 상임고문, 권노갑 민주당최고위원, 조승형 변호사가 이사진에 합류한다. 또 8월에는 김순 이사가 사임하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주영 한나라당의원, 탤런트 최불암씨 등이 새 이사로 재단에 가세한다. 면모일신, 정·재계의 실력자들이 가세해 방정환재단은 힘있는 사회법인으로 재탄생하는 듯했다. 이사장은 김명윤 고문이 맡았고 권노갑 고문은 재단 총재직에 취임했다. 이후 재단의 공식 문서에는 이들 두 정계 거물들의 이름과 직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재단에는 기업들이 기부한 거액의 현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이종찬씨는 재단 관련 공식직함은 없이 자신을 김명윤 전의원의 비서로 소개하며 재단사무실에 상근하고 있었다. 2000년 6월부터는 언론인 출신 이억순씨가 사무총장으로 영입됐고 11월에는 이씨가 상임부총재로 자리를 옮기고 대신 역시 언론인 출신인 황인환씨가 새사무총장으로 영입됐다. 그러나 사무총장의 존재와 상관없이 기부금 관리 등 재단운영은 아무런 공식직함이 없는 이씨가 맡고 있었다. 이억순 부총재는 “지난해 6월 재단에 들어온 이후 명색이 사무총장이었지만 이종찬씨가 사실상 재단의 통장과 이사장 인감 등을 관리하며 재단을 운용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2000년 8월31일, 한화그룹은 문예진흥원을 통해 방정환재단에 ‘소파방정환문집’ 증보발간 비용으로 3억원을 지원했다. 전국 5400개 초등학교에 무상으로 소파문집을 기증하는 이 사업의 기간은 2000년 9월27일∼10월26일까지였다.

    문예진흥원을 통해 지원된 돈은 감독관청인 문예진흥원의 엄격한 통제를 받게 돼 있다. 문예진흥원을 통해 기부금을 받은 재단은 사업진행과정과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해야 한다. 그러나 2001년 1월이 되도록 방정환재단은 문예진흥원에 결과보고를 하지 않았다. 문예진흥원측은 방정환재단의 전·현직 사무총장인 이억순, 황인환씨 등에게 이 사실을 통보했고 결과보고를 하라고 재촉했다.

    황 총장은 “문예진흥원으로부터 독촉전화를 받고서야 ‘이거 큰일났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사무총장을 처음 맡은 뒤 이씨에게 ‘재단 기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더니 ‘7만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올 1월에 문예진흥원이 3억원에 대한 결과보고를 요구한 것은 결국 그 돈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밖에 더 되느냐”고 말했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건립을 목적으로 삼성생명에서 2억원의 지원금을 받아 그 이전에 마사회로부터 받은 기금 2000만원을 포함, 총사업비 2억2000만원을 들여 12월20일 천도교 수운회관 자리에 기념비 제막식행사도 마쳤는데, 이종찬씨 혼자서 예산을 주무르는 상황이었으니 그 돈마저 제대로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부총재와 황총장은 그 길로 김명윤 이사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올 1월10일, 이씨의 전횡과 부정을 막자는 뜻에서 김이사장은 재단 사무실을 예고없이 방문해 재단인감과 통장 등을 회수해갔다.

    김이사장은 “지난해 12월20일에 이사회를 했는데 당시 이종찬이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6300만원의 예산이 남아 있는 것으로 돼 있었다. 얼마 뒤엔가 장부를 보니까 천몇백만원인가가 있고 그 후로는 장부정리가 제대로 안 돼 있었다. 그래서 ‘6300만원 있다더니 어찌됐느냐’고 물었더니 이종찬이 ‘나중에 보고하겠다’고 그랬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부총재와 황총장이 달려와 ‘돈이 어디론가 새고 있다’고 해 1월10일 예고도 없이 재단을 찾아가 통장과 이사장인감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업무보고를 받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이사장은 또 “평소 이종찬이가 돈이 들어오는 것은 얘기했지만 어디다 썼는지는 일절 보고하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재단 인감과 통장을 이씨로부터 회수한 뒤 상황은 급진전됐다. 지난 2월10일 이부총재와 황총장은 이종찬씨를 공금횡령 및 절도, 사기 등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고소했다. 그리고 지난 3월12일은 한 달여 동안 고소인과 참고인 및 피고소인 조사를 마친 상태, 경찰은 조만간 이씨의 구속영장을 청구할 계획이다.

    이번 경찰 조사에서 드러난 이씨의 횡령혐의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3억원 예산의 방정환문집 발간 및 초등학교 기증사업에서 최소한 1억5000만원 가량을 횡령했다는 의혹이다. 또 하나는 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 건립과 관련, 공사대금 조작 등으로 5500만원 가량을 착복한 혐의다.

    사라진 2억원의 행방

    먼저 방정환문집. 방정환 문집 발간사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97년에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등을 초청해 거창한 문집 발간행사를 벌인 바 있는데 이번에 전국 초등학교에 배포하기로 한 문집은 당시의 문집에서 오·탈자를 수정하고 일부 내용을 보충해 발행한 것이었다.

    이 문집발행을 위해 재단측은 한화그룹에 자금지원을 요청했는데 당초 요청금액은 5억9000만원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교 대학에까지 문집을 기증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화 측은 6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부담스럽다며 초등학교에만 한정해 기증하자고 제안을 했고, 그 예산으로 3억원을 문예진흥원을 통해 지정 기탁했다.

    문예진흥원으로부터 3억원의 현찰이 재단통장에 입금된 뒤, 이씨는 이 사업을 자기가 주도하겠다며 제작비 3억원을 인출해갔다. 문집을 출판한 곳은 하한출판사인데 이 회사 대표는 이씨의 아버지 이재창씨였다. 아버지 이씨는 경기도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내고 있어 출판사에는 걸음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하한출판사는 사실상 이씨가 운영하는 또다른 사업체인데 소재지도 방정환재단 사무실이 있는 종로구 청운동 108의21번지 지하다.

    3억원을 인출해간 뒤 이종찬씨는 출판사에서 재단에 기부하는 이익금이라는 명목으로 2000년 9월6일에 1억원, 9월22일에 5000만원, 9월30일 5000만원 등 3회에 걸쳐 2억원을 재단 통장에 입금했다. 그리고는 얼마 뒤 재단경리직원을 통해 1회에 5000만원씩 4회에 걸쳐 2억원 전액을 찾아갔다.

    이렇게 찾은 돈으로 이씨는 에쿠스, 다이너스티 등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다. 이 가운데 에쿠스는 김명윤 이사장이 사용하고 있고 다이너스티는 최근까지도 이종찬씨가 운전기사를 두고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씨가 실제 방정환 문집 제작에 사용했다는 1억원도 과다지출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97년에 조판이 된 내용을 일부 수정하고 인쇄만 한 까닭에 5000만원 가량이면 5400질 제작이 가능하다는 게 견적을 내본 인쇄업계 관계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실제 인쇄한 문집이 예정된 5400질에 크게 못미치는 3000질 밖에 안돼 그나마 문집발간에 5000만원도 채 들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지난 2월말 방운용옹은 2월22일자 증명도장이 찍힌 하한출판사 이재창 사장 명의의 내용증명 서신 한통을 받았다(사진 참조). 이 서신에는 “저희 출판사는 1997년 12월말 발행한 ‘소파방정환문집’을 표지디자인 및 일부 내용의 교체와 수정을 조건으로 2000년 9월 방정환재단과 5400질 판매계약을 체결하였고 이에따라 1차분 3000질을 2000년 10월에 납품한 사실이 있다”며 “이와관련, 방운용 선생께서는 문집의 일부내용 교체 및 누락에 대해 거센 항의를 해왔다”고 경과를 소개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이미 납품된 3000질은 회수할 수 없으나 미납품 잔여분 2400질에 대해서는 방정환재단 측에서 수정요청이 있을 경우 재편집하여 인쇄하고 납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이 서신에 따르면 지난해 10월27일을 기한으로 못박고 지원된 한화그룹의 문집 발간사업이 2001년 2월 현재까지 실제 인쇄한 책이 3000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하한출판사 스스로 공개한 것이다.

    황인환 총장은 “만약 3000질밖에 인쇄하지 않았다면 이씨가 횡령한 액수는 더욱 늘어날 공산이 크다”며 “최소한 문집 인쇄 사업에서만 1억5000만원 이상의 돈이 공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20일 제막식을 가진 ‘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사업에서도 적지않은 돈이 사라진 사실이 확인됐다. 이 사업을 위해 재단에 들어온 돈은 모두 2억2000만원. 이씨는 이 돈 가운데 기념비 조각가인 임아무씨에게 계약금조로 1000만원을 주고, 그후 두 차례에 걸쳐 총 9500만원을 지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근 경찰조사 과정에 조각가인 임씨는 “실제로 이씨에게서 받은 공사대금은 4000만원이고 5500만원을 이씨에게 되돌려줬다”고 진술했다. 이 수치는 그나마 사용처가 드러난 경우. 재단 통장에서 빠져나간 2억2000만원 가운데 임씨에게 건네졌던 950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1억2500만원은 아직까지도 사용처가 오리무중이다.

    지난해 7월 재단 이사진을 다시 구성한 뒤 6개월 남짓 지나는 동안 기업 등 독지가들로부터 5억3000여만원의 지원금이 재단통장에 입금됐다. 그러나 김명윤 이사장이 이씨로부터 통장을 돌려받은 뒤 현재 통장에 남은 돈은 고작 700만원. 거물급 정치인들이 이사진에 포진한 재단, 그것도 어린이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재단의 허술한 돈 관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서 원론적인 의문이 하나 제기된다. 도대체 이종찬이라는 인물이 누구기에 이런 파행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보통사람과 다른 그만의 자기관리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씨는 1961년 1월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2000년 4월 이후 그의 본적은 경기도 수원이 아니라 경북 울릉군 도동리로 바뀌었다. 이름도 한 차례 바꾼 경력이 있다. 원래 이름은 이종삼이었는데 현재 거주지인 종로구 청운동으로 옮겨올 무렵, 이종찬으로 바꿨다. 종로구 청운동에 사는 이종찬이라고 하면 얼핏 이 지역 출신 거물 정치인인 이종찬 전국정원장을 연상케 되는데 그의 행적을 추적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런 효과를 은근히 노리고 개명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평소 그는 사람들에게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전문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90년대 초반 그는 자신을 ‘한국루쉰학회 회장’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또 중국 연변대를 졸업해 중국에 지인(知人)이 많다는 점을 자랑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씨 주변에는 그의 학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씨의 이력과 관련, 재미있는 대목은 그가 ‘한중우호교류기금’이라는 단체의 회장을 지냈다는 점. 그런데 이씨와 한글 이름이 같은 이종찬 전국정원장도 ‘한중문화협회’라는 단체의 회장직을 지낸 바 있다. 우리나라에 대중국 관련 단체가 많지 않은데 이씨가 유독 중국분야에 관심을 둔 점도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권노갑 영입에 집착해

    2000년 7월, 마사회 지원금 유용혐의로 징역8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이씨가 지난해 12월말과 올해 1월초에 걸쳐 중국을 다녀온 사실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통상 집행유예중인 자의 해외 출입국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는지, 또 무슨 일로 다녀왔는지도 의문이다. 당시는 이부총재와 황총장 등 재단 관계자들이 이씨의 돈 씀씀이에 강한 의혹을 갖고 있던 때다.

    이씨는 자신을 광주 이씨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수성 전총리, 이경재 전의원, 이억순 재단상임부총재 등은 광주 이씨 종친회를 통해 알게 된 인사들이다.

    이처럼 이씨는 자신의 ‘방정환 비즈니스’를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연고를 동원해 유명인사들에게 접근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권노갑 국민회의 고문을 영입하기 위해, 평소 권 고문과 잘 알고 지내는 이억순씨를 재단에 끌어들인 것이 그 대표적 사례. 이씨의 권유로 권 고문이 재단 총재직을 맡은 것은 지난해 7월이지만 여권 실세인 권 고문을 끌어들이기 위한 이씨의 노력은 오래 전부터 끈질기게 계속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경재 전의원은 “재단 설립 초반엔가 이씨가 나더러 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 건립위원장으로 권노갑씨를 재단에 영입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권노갑씨가 워낙 바쁜 사람이라 쉽지 않을 거라며 대신 김상현 전의원을 소개해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일반인과 달리 일찌감치 체득한 경험법칙은 유명인일수록 이름을 드러내기 좋아하면서도, 피해를 입을 경우 쉬쉬하는 속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씨의 사기행각에 피해를 본 사람은 최근 10년 사이에 1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도 있었고 연예인, 유명 학자도 있었다. 일부 인사는 수천만원대의 돈을 갈취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외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릴 뿐 아니라 기억하는 것조차 싫어했다. 한 인사는 “이씨는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로 나오다가도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각종 협박을 하는 통에 이종찬 이름만 들으면 치를 떠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유명인들의 소극적 행동이 사건을 키우는 결정적 빌미가 됐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실제 권노갑 고문의 경우 주위 여러 사람이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냈음에도 재단 총재직을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인사는 “재단 총재를 한다기에 권 고문의 측근인 김희완씨에게 ‘이종찬이는 위험한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그뒤에 보니까 여전히 총재직을 맡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했다” 말했다. 방운용옹도 권 고문이 재단 총재직을 맡았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직접 권 고문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조심하라”는 경고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희완씨는 “권 고문에 그런 우려를 전달했는데 그뒤 권 고문으로부터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며 “재단일은 이사장 등이 알아서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반면 주위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재단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 망신을 피한 인사도 있다. 이종찬 전국정원장이 그 대표적 인물. 이전원장은 한때 재단 이사장 취임을 수락하고 관련서류까지 준비했다가 주위의 경고를 듣고 막판에 이를 철회했다. 정대철 의원도 주위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 이씨를 피해갈 수 있었다.

    경찰은 3월13일 오후 4시까지 이씨에게 경찰서에 출두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14일 오전 11시까지 다시 출두하라고 했지만 이씨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것이다. 이씨는 이에 앞서 종로구 청운동 방정환재단 사무실에 들러 자신의 물품을 챙겨 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가 떠난 자리, 서랍 속에는 이씨가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50여 개의 도장이 남아 있었다. 이 가운데는 주인이 누구인지 불분명한 도장도 상당수였다. 그 도장들 속에는 주위사람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종찬씨만의 재단활동이 숨겨져 있었던 셈이다.

    3월15일 현재, 이씨는 행방불명이다. 그의 휴대폰에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이 없었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일까. 유족일 수도 있고 이종찬씨의 비리를 일찍부터 파헤치다 반대로 위협을 당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또 괜히 재단 이사에 이름을 올렸다가 망신을 당한 일부 유명인사도 중요한 피해자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자는 누가 뭐래도 고인이 된 지 100년이 지난 소파 방정환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어린이운동의 창시자인 그의 이름이 공금 횡령과 명예훼손이 어우러진 사건의 한가운데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부터가 치명적 명예훼손이라는 것이다.

    소파는 서울 토박이로 1899년 11월9일 야주개, 즉 지금의 종로구 당주동 로얄빌딩이 있는 자리에서 어물전과 미곡상을 하던 방경수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미동보통학교(현재 서울 서대문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한 소파는 가정형편 때문에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정보고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그나마 졸업도 못하고 2년 뒤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소파가 처음 몸담은 직장은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이었다. 그때 나이 열일곱살. 이즈음 천도교를 알게 됐다. 개화파 청년들에게 종교라면 기독교가 가장 으뜸으로 꼽히던 당시 천도교는 민족적 자각과 역량을 갖게 하는 색다른 종교였다. 천도교에 몸담으면서 소파는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를 알게 됐고 그의 사위가 됐다.

    1919년 3·1운동이 나던 해 소파는 스물한살의 청년이었다. 한때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이어 보성전문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 교장인 윤익선은 ‘독립신문’(서재필의 독립신문과는 다른 매체임) 사장이기도 했다. 3·1운동이 나자 경찰은 이 신문사를 수색하고 사장 윤익선 사장을 체포했다.

    당시 이 신문은 천도교 안에 있는 보성사인쇄소에서 찍었는데 윤사장이 구금되면서 ‘독립신문’ 인쇄도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신문사 관계자들은 등사판으로 신문을 찍고 이를 비밀리에 돌렸는데 당시 등사 책임을 맡은 이가 바로 소파 방정환이었다.

    소파는 3·1운동의 아픈 상처를 뒤로 하고 현해탄을 건넌다. 일본 유학시절, 소파는 민족문제를 다시 보게 됐다. 무력 앞에 맨손으로 저항한 결과 수많은 동포가 고통받고 죽어갔다. 3·1운동의 정신은 숭고하지만 그 정신에 비해 얻은 것은 미미하다는 반성도 하게됐다.

    이 무렵, 소파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게 됐다. ‘아이들을 위한 운동’ 그것이었다. 우리의 아이들을 바르고 아름답게 기르는 운동, 아이들을 단순히 부모들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운동, 이 불행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제2세 국민을 씩씩하고 진실한 인간이 되게 하는 운동이야말로 민족을 구할 운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1921년 방학을 맞아 고국에 돌아온 소파는 곧장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었다. 그 즈음 일부 선각자들이 일부 지방도시에 소년회를 만들었는데 서울하늘 아래 소년회를 만든 사람은 소파가 처음이다.

    소파의 어린이 사랑

    3·1운동 후 청년운동이 한창 일어나던 터라 소파의 소년회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호응도 대단했다. 소파의 소년회는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건강한 정신과 민족적 자각을 길러가는 단체였다. 이런 소년회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서 소파 자신도 전국순회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잘 살기 위하여’였는데, 단순히 생활개선보다는 낡은 생각을 버리고 어린이를 인격적 존재로 존중하는 것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설파했다.

    이 무렵 소파는 그후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삶을 한 단계 높이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바로 ‘어린이’라는 말이다. 어른에게 공대하는 것만 가르쳤지 어린 사람을 인간으로 대접하는데는 인색했던 유교적 관습이 더 이상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소파의 생각은 뜻있는 사람들 사이에 큰 공감과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소파의 어린이 사랑이 구체적으로 결실을 맺은 것은 1923년 3월1일 창간된 월간 잡지 ‘어린이’였다. 타블로이드(신문 절반 크기)판형에 조그만 신문 같은 이 잡지를 받아든 사람들은 누구나 예쁜 편집과 아름다운 얘기가 가득한 기사에 정신을 빼앗겼다.

    ‘어린이’ 창간과 함께 소파는 어린이 문제연구단체로 ‘색동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 해 5월1일(그뒤 5월5일로 변경)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서울에서 첫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했다.

    1923년 소파의 나이 스물다섯, 식민지 청년으로 고단한 일본유학생 신분이지만 불행한 민족, 그중에도 더욱 불행한 어린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야만 민족의 미래가 밝다는 그의 믿음은 주위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마해송 정인섭 최진순 이헌구 윤석중 이헌구 최영주 등의 동지들이 그를 돕겠다고 나섰다.

    어른들도 울린 소파의 동화구연

    소파는 어린이운동에 딱딱한 이론을 앞세우지 않았다. 소파 스스로 동화구연가(口演家)를 자처한 것도 이론보다는 실제 어린이들을 즐겁게 하고 그들의 친구가 돼야 한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어린이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소파는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화회와 강연회를 열었는데, 특히 그의 동화구연은 얼마나 훌륭했던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웃고 울며 동화의 세계에 빠져들어가곤 했다.

    심지어 동화구연회가 불온한 집회는 아닌지 감시하러 나온 일본경찰마저 눈물을 글썽이며 소파의 구연동화를 듣고 나서는 소파를 깍듯이 대접했다는 일화는 두고두고 어린이 운동가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룬 소파의 구연동화 ‘산드룡의 유리구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잡지 ‘어린이’를 편집하고 전국을 돌며 강연과 구연동화로 어린이운동의 물결을 일으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던 소파는 일상적인 피로와 초조로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말았다. 신장염과 고혈압 증세로 쓰러진 소파는 1931년 7월23일 저녁 6시54분, 서른세 살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운명하기 전날 저녁 잠깐의 미몽에서 깨어난 소파는 곁에서 간호하던 처조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야겠어, 문간에 마차가 왔군.”

    “마차라뇨? 무슨 마차가?”

    “흑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

    “그건 괜한 환상입니다.”

    “아니야. 말도 새까맣고 마차도 새까매. 나는 저 마차를 타고 가야 해.”

    이 말을 마치고 소파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주치의는 임종을 꼭 지켜야 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소파는 갔다. 새까만 말이 끄는 새카만 마차를 타고 영원한 동화의 나라로….

    이번 사건을 지켜본 한 인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소파의 정신을 전혀 모르는 인물이 주도한 엉터리 방정환재단이 활개를 치던 지난 2년 동안 가장 눈물을 흘렸을 사람은 서로 반목하며 다투던 사람들이 아니라 어쩌면 지하에 계신 소파선생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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