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월왕 구천의 복수와 오왕 부차의 몰락

‘와신상담’앞에 무너진 ‘2세 심리’의 부조리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9-09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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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려왕의 뒤를 이어 오나라 군주가 된 부차왕은 후계자의 지위를 확보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다. 그의 허영심은 아버지의 원수인 월나라 구천왕에게까지 인자하다는 명성을 얻으려 할 만큼 지나친 자아 현시욕으로 이어져 결국 망국을 부채질했다.
    월왕 구천의 복수와 오왕 부차의 몰락
    오군이 수도를 점령하자 혼비백산한 초나라 소왕(昭王)은 변장·변성명하여 여기저기로 벽지를 찾아 숨어 지냈다. 그런대로 시간이 흐르자 최초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졌던 패잔병들도 비록 소단위로 분산된 형태이긴 했으나, 오군의 만행 소식을 듣고는 다시 뭉치려는 기색을 보였다.

    하루는 소왕의 소재를 찾아 헤매던 중신 신포서(申包胥)가 남루한 옷을 걸친 채 만나러 와 구국방안을 건의했다. 자기가 서북방의 강대국인 진(秦)나라를 방문해 공식적으로 지원요청을 하고, 그 나라 대군을 빌려 국내에서 재편 중인 저항세력과 합세하고 싶으니 재가해달라는 것이다.

    소왕은 즉각 허가했다. 신포서는 증명서류를 휴대했을 뿐 마차 같은 최소한의 준비조차 없었다. 하여튼 신포서는 진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진왕 애공(哀公)에게 초국 소왕의 애절한 지원요청을 전달했다.

    신포서 : “지금 잔인무도한 오군이 초나라 수도를 점령하여 학살과 약탈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탐욕스러운 오나라가 초나라를 완전 평정해 귀국과 접경하게 되면 귀국에도 적지 않은 외환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위급한 시각에 즈음하여 말씀드리건대, 초나라는 절대로 전 영토를 오나라에 탈취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바엔 자모님의 출신국인 귀국에 헌상하고 싶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하루 빨리 출병하셔서 이 영토를 차지해주십시오. 만약 대왕께서 오군을 격퇴한 후 거룩하신 인자함으로 초나라의 존립을 허락해주신다면 초나라는 대대손손 대왕님의 속국이 되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春秋左傳, 定公 四年).

    애공 : “말씀을 경청했소이다. 특사께서는 우선 숙소로 가셔서 휴식하시오. 생각해보고 협의한 후 회답하리다.”



    신포서 : “소신의 주군께서는 지금 유랑하는 신세로 몸을 편히 쉴 장소마저 없으신데, 소신이 어찌 숙소에서 안락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벽에 기대어 통곡했다. 울음소리가 밤낮을 이었는데 7일간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진나라 애공은 신포서의 일편단심 순정에 감동해 출병을 결심했다. 전차 500승에 병사 약 5만명을 출동시켰다.

    형세 역전과 오군의 철수

    한편 오왕 합려는 이 정보를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충격은 이것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본국에서도 지급 경보가 날아든 것이다. 이웃한 월(越)나라 윤상(允常) 왕이 오군 유수 병력의 허약함을 틈타 대거 침입해 약탈·교란 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오군의 급선무는 당장 눈앞에 출현한 진나라 대군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양군은 직(稷)에서 격돌했는데 오군이 크게 패했다. 이때 선본대를 이끌고 돌진하던 왕제 부개까지 참패했는데 그는 면목이 없었던지 본영으로 복귀하지 않고 본국으로 무단 귀국했다. 게다가 자립해서 왕위에 올랐다. 누군가 국왕이 초나라 원정으로 출타 중이니 왕위를 비워둘 수 없다고 꼬드긴 모양이었다.

    더하여 오나라의 동맹국 중 당나라가 초군의 급습으로 수도를 빼앗기고 그 군주가 살해당했다. 또 다른 동맹국인 채나라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궁지에 처한 오왕 합려는 대책회의를 거쳐 귀국을 결정했다. 대신 오자서와 손무, 백의 등을 초나라 땅에 남겨두고 뒷수습을 감당케 했다. 귀국한 합려는 부개를 토벌했다. 쫓기던 부개는 어제의 적이던 초나라로 망명하여 항복했다. 초나라는 그를 받아들여 보호하는 고등 정책을 썼다.

    한편 오자서와 손무 등이 지휘한 잔류 부대는 전선을 축소했다. 수도 영을 포기하고 동정호 동쪽의 소택지대를 사이에 두고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나 본국 지리에 밝은 초군이 우회해 화공으로 엄습해왔다. 오군은 거듭 대패해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합려는 초나라의 태반을 일시 점령할 수 있었으나, 전면철수로 마침표를 찍은 꼴이다. 오직 오자서만이 전쟁국면을 이용해 개인적 복수를 했을 뿐 합려는 대전략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원인은 우선 후고(後顧)의 염려를 국내와 국경에 남겨둔 채 원정에 나섰다는 데 있었다. 다음으로는 점령정책과 개입예방 대책의 부재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합려가 강대국인 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위세와 권위의 후광이 국내외에 걸쳐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역할 분담에 바빠 한때 흩어졌던 오자서와 손무 등 두뇌집단(싱크 탱크)이 많은 경험을 쌓고 다시 밤낮으로 일당에 모여 앉게 된 강점이 있었다.

    초군이 보복에 나서자 오군은 수륙 양쪽에서 맞받아쳐서 이를 격파했다. 공포에 질린 초나라는 후퇴해 수도를 200km나 떨어진 곳으로 이전시켰다.

    한편 북방의 제나라가 비우호적인 동향을 보이자 합려는 정벌 계획을 세웠다. 역시 공포에 질린 제나라는 화친정책으로 전향했다.

    그러한 위세를 믿은 합려는 노경에 접어들면서 사치스러운 유락생활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동안 태자 파(波)가 병사했다. 왕실의 급선무로 새 태자 선정 문제가 부각됐다.

    후계자 문제와 ‘2세 심리’

    계승 순위의 상식으로는 죽은 태자의 동생인 부차(夫差)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합려의 눈은 달랐다. 부차는 ‘우둔한 편이고 착하지도 않다(愚而不善)’고 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민이 우러러보며 따르지도 않을 것이고, 국가 유지가 곤란하리라고 걱정한 것이다.

    합려의 견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정확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주 또는 집권자의 자질로는 ‘슬기롭고 착하다’면 그만이다. 경력이니 학력이니 모친이니 업적 등을 따져봤자 ‘지도자 선출의 오류’로 연결될 따름이다. 국민의 불행과 정치에 대한 불신을 초래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기야 슬기롭지 못하고 약간 ‘우둔한 편’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라도 자위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대처하려 한다. ‘눈치보기’의 능력만은 나면서부터 갖추고 있다. 부차도 부왕이 후계자 지명, 즉 태자 옹립에 관해 자기를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느끼자 대책 마련에 나섰다. 부왕을 수시로 만나고 신임도 두터운 오자서에게 아부해 도움을 얻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단순한 부탁이 아니라 자기가 태자가 될 수 있도록 진언해주면 일생 그 은혜에 보답하겠다느니, 나라의 절반을 할애해도 좋다느니 하며 백방으로 오자서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침내 오자서는 그 결사적인 열의와 정성에 지고 말았다. 오자서야말로 군주나 그 유망주의 호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하루는 합려왕의 자문이 떨어졌다. 오자서가 부차를 천거했음은 물론이다.

    합려 : “부차는 총명하지 못한 데다 착하지도 않다. 그가 국왕으로 등극하면 국운이 위태로울까 걱정이다.”

    오자서 : “황공하오나 혹시 성급하게 사려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현명하고 인자하십니다. 그리고 예부터 후계자 선정을 에워싼 분규를 예방하려면 순서를 고려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합려 : “경의 진언을 경청하는 뜻에서 재고해보지.”

    합려는 뾰족한 대안도 없는 터라 결국 오자서의 건의를 수용하고 만다.

    이 경우 합려의 오판은, 비록 부차에게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오자서를 비롯한 중신들이 호의를 갖고 보좌하면 큰 탈이 없을 거라는 헛된 희망으로 요약된다. 새 군주와 중신 사이의 모순, 중신 상호간의 암투 가능성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오자서는 2세 후계자의 심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부차가 국왕이 되면 그를 천거해준 자기의 은혜를 깊이 명심하여 행동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2세 심리’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후계자 경쟁을 뚫고 집권한 2세는 자기의 등극은 자신이 우수하거나 최소한 운세가 좋아서 이뤄진 것이지, 결코 어느 누구의 은혜나 덕분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는 권력의 자체 확인, 그리고 집권 후에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압박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심리다. 요컨대 ‘2세 심리’에서 은혜란 명심 대상이 아니라, 망각 대상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심리적 편향을 극복하는 힘은 오직 슬기로움에서 샘솟을 따름이다. 부차는 바로 그러한 지혜가 모자랐다. 합려가 일찍이 걱정한 바와 같다. 그러한 결함이 망국(亡國)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애병필승(哀兵必勝)의 도리

    그 무렵 이웃 월나라에서는 국왕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句踐)이 왕위에 올랐다. 한편 오왕 합려는 이에 편승하여 월나라를 정벌코자 수만 대군을 동원했다. 소식을 듣고 격분한 구천은 오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취리라는 곳에서 양군이 격돌했는데 결과는 오군의 참패였다.

    전투의 와중에 월나라의 한 대부(大夫)가 오군의 본영을 습격, 세모창으로 합려왕의 신발을 뚫고 엄지발가락을 잘랐다. 합려는 아픔을 참으며 수도 가까이로 후퇴했다. 겨우 전투대형은 재정비했으나, 부상이 악화된 합려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새 태자인 부차를 머리맡으로 불렀다.

    합려 : “월군이 아버지를 살해했음을 잊지 말아라.”

    부차 :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3년 안에 꼭 복수하겠습니다.”

    월왕 구천의 복수와 오왕 부차의 몰락

    월왕 구천은 오나라 수도 고소성(지금의 쑤저우·蘇州)을 점령, 옛 치욕을 갚았다. 사진은 쑤저우의 4대 정원 중 하나인 줘정위안(拙政園).

    부차는 장례를 마치자 곧 복수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군사력 강화에 전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백비(伯?)를 태재(太宰·국무총리)로 임명해 내정을 맡겼다.

    그러한 정보를 접한 월나라엔 위기감이 감돌았다. 구천왕은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월나라엔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이른바 가문이니 지방색이니 출신국이니 벼슬·경력에 구애하지 않는 대담하고 개방적인 인사정책 덕분이었다. 예컨대 지능과 통찰력이 뛰어난 범려와 조직 구성에 탁월한 문종은 초나라 출신이다. 또 박식하여 모르는 것이 없고 계획 수립에 유능하다고 알려진 계연은 진(晉)나라 출신이었다. 회의 벽두에 구천왕은 말한다.

    “오나라 부차왕이 우리나라를 치고자 전쟁준비에 몰두하고 있다는 정보다. 앉아서 침략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제공격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유리하리라 생각한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에 대해 범려는 개전 시기가 적당치 않다고 신중론을 폈다. 현재 적은 아군이 그들의 선왕 합려를 죽였다고 적개심에 불타 일치단결해 있으니, 아군의 선제공격은 적군의 적개심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적 진영에 모순이 발생하고 적개심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감이 넘치는 월나라 구천왕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는 선수를 쳐야 한다며 출병을 명령했다. 이 작전회의는 한편으로 선제공격론과 다른 한편으로 애병필승(哀兵必勝) 및 모순발생(矛盾發生)을 위한 대기론 등 모든 지혜를 짜낸 것이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로 이를 밀어붙였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원래 선제공격론은 준비로 무준비 상태의 상대를 치고 싸움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희생을 극소화하고 전과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 오군은 이미 패퇴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투대형을 재정비했으며, 오직 전력증강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국왕의 전사를 복수하려는 단결심과 적개심으로 일치단결했다.

    애병필승의 도리는 춘추시대 철학자 노자(老子)가 갈파한 군사 상식이다. 즉 대등한 병력으로 싸울 때는 비장감과 정의감, 분노심 내지 위기의식으로 충만한 측이 이긴다는 것이다(老子, 69장). 철학자도 그토록 군사에 달관했는데, 정치인이 모른다면 말이 되겠는가.

    생존을 위한 최악의 항복

    양군은 부초(夫椒)에서 격돌했는데, 결과는 오군의 대승과 월군의 참패였다. 구천왕은 패잔병 5000명을 수습해 자국 수도에 가까운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한숨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오군이 곧 추격해와 회계산을 포위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구천왕은 범려에게 호소한다.

    구천 : “경의 진언을 듣지 않다 이 궁지에 몰렸다. 어쩌면 좋을까?”

    범려 : “앞으로 군심(軍心)과 민심(民心)을 얻어 운명을 새로이 개척해야 합니다. 당장은 오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왕에게 특사를 파견해 예의를 높이고 자세는 낮추고 예물을 바치면서 탄원해야 합니다. 만약 오왕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대왕께서 몸소 신하가 되고 부인께서 오왕의 비첩이 되겠다고 애원해야 합니다. 그렇게까지 나가면 결국 오왕이 허용할 것입니다.”

    월왕 구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특사의 적임자로 대부(大夫)인 문종을 불러 사명을 설명하고 오왕 부차의 본영으로 보냈다. 문종은 오왕 부차에게 푸짐한 헌상품을 바치면서 구천왕 부처가 신(臣)·첩(妾)이 되길 원하니 항복을 허가해달라고 애원했다. 부차는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나, 옆에 있던 오자서가 부차에게 강한 눈짓 신호를 보내 문종을 일단 자리에서 뜨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월나라를 대왕께 주시는 형세입니다. 예부터 하늘의 뜻을 어기면 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부차왕은 특사 문종을 다시 들어오게 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문종이 절망과 낙담 끝에 돌아가서 보고했더니 구천왕은 흥분해서 ‘필사적 반격’으로 인생 최후를 빛내겠다고 외쳤다.

    문종은 범려와 거듭 의논했다. 오나라 부차왕의 측근 태재(수상 격) 백비가 부패한 간신이니 그를 이용해보자는 데 합의했다. 구천왕의 묵인하에 문종이 다시 오왕 본영을 찾아갔는데, 이번엔 고귀한 보물과 더불어 동행한 미녀들을 백비에게 고스란히 바쳤다. 백비의 주선으로 다시 오왕을 만날 수 있었다.

    “저의 주인 구천을 용서해주십시오. 월나라 왕실의 모든 보물을 헌상하고 스스로 오나라로 가서 신하가 되어 기꺼이 인질 노릇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용서하지 않으시면 모든 보물을 불태우고 처자를 죽인 뒤 결사대 5000명으로 돌격하겠다는데, 그 경우엔 대왕께서 승리하셔도 손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은 그 점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백비도 말을 보탰다.

    “구천이 항복해서 신하가 되겠다니 차제에 인덕을 베푸셔서 천하에 대왕의 명성을 떨치시는 것이 장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한 사태 진행을 뒤늦게 전해들은 오자서가 달려와서 외치듯 강조했다.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후회막급의 엄청난 사태가 도래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군이고 그 신하 문종과 범려는 뛰어난 양신(良臣)입니다.”

    찌푸린 얼굴을 하고 오자서의 말을 듣던 부차왕의 표정에 혐오와 증오의 빛이 완연했다. 드디어 선언했다. “나의 결심은 확고하다. 구천을 용서한다”고. 구체적으로는 구천의 조명(助命)과 월나라의 존속이었다. 조건은 구천이 몸소 오나라 왕실에 와서 신사(臣事)와 인질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부차왕의 그러한 결심은 권력세계의 이른바 ‘2세 심리’ 분석의 제2단계에 해당하는 허영심과 자아 현시욕의 발로다. 아버지의 원수인 적국의 왕에 대해서까지 인자하다는 명성을 천하에 퍼뜨리고 싶은 것이다.

    제1단계는 후계자 지위 확보를 자신의 능력과 천운으로 돌리면서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번은 제2단계다. 제3단계는 거들먹거리는 원로, 공신의 배제(내지 숙청)다. 끝장을 보는 제4단계는 독자적인 신경지 개척의 시도다.

    여기서 2단계인 허영심과 자아 현시욕을 평가한다면 한마디로 어리석다. 명성이니 위신은 남이 세워줘야 가치 있는 것이지, 스스로 세워보려고 연출하다간 가련한 멸시나 초래할 뿐이다. 끝내 멸망으로 이어지고 만다.

    와신상담의 ‘시범 케이스’

    오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마자 월왕 구천은 항복 조건의 이행에 착수했다. 구천왕은 지능이 우수하고 성질이 각박했다. 따라서 의지력이 강했으며 인내력이 비상했다. 이러한 인격구조라면 반드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법이다.

    구천은 문종을 유수로 본국에 남기고 국내정치를 맡겼다. 구천왕 부처는 군사와 병법에 능한 범려를 대동하고 오나라로 갔다. 목표는 전면적인 굴종과 적극적인 봉사로 부차왕의 신임과 안심, 동정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마구간에서 일할 때는 청소까지 즐겼다. 목장으로 옮겨지자 역시 일을 찾아하며 막노동하는 데도 모범을 보였다. 보통 사람들이 꺼리는 불결한 뒤처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부차왕은 감동하고 안심하여 2년 후 구천왕이 월나라에 귀환해도 좋다고 허가했다. 그러나 구천은 마음속 깊이 숨긴 복수의 일념에 불타는 동시에 방심하지도 않았다. “회계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다짐과 함께 평소에 섶나무 침대 위에서 잤다. 또 곰쓸개의 쓴맛을 핥으며 고생한 과거를 되새겼다. 이 유명한 고사에서 유래한 성어가 바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구천은 패전의 아픔을 딛고 국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에 주력했다. 국방·외교 정책은 오국을 자극하지 않는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축소 조정했다.

    오나라 군신의 환심을 사고 그들이 경각심을 갖지 않도록 계속 조공·뇌물 공세를 폈다. 부차왕이 궁궐을 증축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자 수천명의 기술자를 동원해 전국의 명목(名木)을 베어 헌상했다. 미녀들을 선발해 예의범절을 가르친 다음 부차왕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오나라 왕실에서는 오자서가 부차왕에게 간하여 경각심을 환기하고자 애써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자서를 보는 부차왕의 눈빛은 혐오에서 증오로 변해갔다. 나아가 부차왕은 자신의 위력과 덕망으로 하여 후고의 염려가 없어졌다고 정세를 오판해 북방 진출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요컨대 오나라 부차왕의 꿈은 천하의 패권장악으로 부풀어올랐던 것이다. 필요한 것은 군사적 위력이고, 더하여 대의명분이 요구됐다. 그런데 약소 제후국들은 본시 위세에 눌리고 기회주의에 좌우되니 그다지 문제될 바 아니지만, 라이벌 강대국인 제(齊)나라는 달랐다.

    제나라의 왕족과 중신 간에 추잡한 파벌이 형성되어 거듭 국왕이 시해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는 부차왕으로 하여금 제나라로 출병해 군신(君臣)의 분수를 바로잡고 질서를 회복한다는 춘추시대적 대의명분을 부여하는 꼴이 됐다. 드디어 부차왕은 기원전 488년 제나라 토벌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오자서의 비극

    오자서는 부차왕의 중원 진출에 반대했다. 배후에 복수를 노리는 월나라라는 후고의 염려를 남겨둔 채 대군을 북방으로 진출시키다간 커다란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부차왕은 이를 듣지 않고 출정하여 대승을 거뒀다. 그후 기원전 486년과 485년에도 다시 중원으로 출병했는데 연전연승이었다. 개선하면 월나라에서 축하의 특사가 찾아오곤 했다. 부차왕은 더욱 자신을 굳히면서 오자서를 불신하고 증오했다.

    그후 부차왕은 오자서를 제나라에 특사로 보냈다. 오나라엔 영토적인 야심이 없고 오직 대의명분만이 관심처라며 영향력을 확대할 것, 그리고 제나라의 국정을 현지에서 파악해올 것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오자서는 제나라로 출발하는 사절단 일행에 자기 아들을 데려가면서 말했다.

    “나는 여러 차례 부차왕에게 간언했으나 듣지 않으니, 머지않아 오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나 자신은 오나라와 운명을 같이할 의리가 있다. 그러나 너에겐 그러한 의리가 없다. 무익한 죽음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가문이라도 존속시키자.”

    그러고는 제나라에 가서 그곳의 대원로인 포숙(鮑叔)에게 아들을 맡기고 보살펴달라고 부탁한 뒤 돌아왔다.

    한편 백비는 사절단에 붙여둔 밀정에게서 그 사실을 보고받자 얼씨구나 하면서 부차왕에게 밀고했다. 오자서는 통적(通敵)으로 단정됐다. 부차왕이 오자서에게 단도를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부차여! 너의 부친의 쿠데타를 도와 즉위시킨 사람은 바로 나다. 너 또한 나의 천거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느냐. 그런데 간신의 말만 듣고 나를 죽이니 배은망덕 아니냐.”

    오자서는 격정적인 성격 그대로 과격한 말을 남기고는 자살했다.

    그후 기원전 482년, 부차왕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황지(黃池)라는 곳에 제후들을 회합시키고 숙망의 패주(覇主)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본국에 남겨둔 수비군은 매우 미약했다. 바로 그때였다. 월나라의 구천왕이 전국의 병력을 총동원해 오나라의 후방으로 침입하고는 수도 고소(姑蘇)성을 점령하며 태자와 수장을 죽였다.

    회계산의 치욕을 갚다

    부차왕의 황지 본영에 급보가 도달했다. 부차왕은 그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 불리하다고 보아 무고한 보고자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인정머리 없는 이러한 잔인성과 전우애의 결핍은 후일 정세가 불리한 것이 알려지면서 오나라의 사기를 일거에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여튼 정보를 은폐하는 수법으로 패주 자리에 올라선 부차왕은 급거 회군했다. 그러나 국력은 소진됐고 민력은 피폐했으며 사기는 추락하여 도저히 월군을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알게 됐다. 하는 수 없이 앞으로 월나라의 주권을 존중하겠다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월군도 귀국한 오군의 주력을 단번에 섬멸할 수 없음을 알고 강화에 응해 일단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2년 후인 기원전 473년 다시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침범했다. 오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했다. 부차왕은 양산(陽山)에 도피했다가 월왕에게 항복을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월왕 구천은 불쌍하게 여기고 허용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범려가 간했다.



    “지난날 회계산의 치욕을 회상합시다. 지금은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셨습니다. 역사적 교훈을 망각할 수 없습니다.”

    강화가 거부되자 부차왕은 앞서 죽은 오자서에게 면목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자살했다. 월군은 부차를 매장하고 간신 백비를 처단했다(史記, 越王句踐世家).

    오나라의 멸망은 후계자를 잘못 선출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말해준다. 동시에 2세 심리의 부조리가 빚는 비극을 되씹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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