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학생 질문에 다른 학생이 답하도록 하라”

‘교수 가르치는 교수’ 趙壁의 명강의 비법

  • 조 벽 < 美 미시간공대 교수 > peckcho@mtu.edu

    입력2005-04-20 15: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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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교수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상을 가르칩니다. 부교수는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정교수는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치지요. 전임강사는 무엇을 가르치느냐고요? 아무도 모르는 것을 가르칩니다.”
    • 2월20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교수법 특강 시간.
    • 300여 명의 교수들이 강사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강사는 미시간 공대 기계공학과 조벽 교수(趙壁·45). 그는 1996년 미국공학교육학회(ASEE) 교육자상을 받는 등 교수법 분야의 권위자다. 이 글은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교수들을 상대로 ‘명강의하는 법’을 강의해온 조벽 교수의 지상(誌上) 강연이다. <편집자>
    여러 일간지에 ‘교수들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소개된 뒤부터 나는 교수법을 강연하는 데에 부담을 느끼게 됐다. 일반적으로 명강사라고 하면 말 잘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기 쉬운데, 나는 혀가 짧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달변의 명강사라는 이미지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교수법을 강연하는 데에는 부담이 하나 더 있다. ‘교수법’이라는 주제 자체가 교수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최고 지위인 교수님들에게 감히 교수법을 가르친다고 하니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더구나 교육학과는 거리가 먼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교육과 교수법에 대해서 강연을 한다니 ‘구경’삼아 특강에 참석한 교수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이미 언짢거나 뒤틀린 참석자의 마음을 강연하는 동안에 우호적으로 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어느 대학에 특강하러 갔던 날 강의실로 가는데 바로 앞에 교수 세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 강연 주제가 ‘새시대 교수법’이라지.” “허, 참. 바빠 죽겠는데…. 들어주러 가야지요.” 그렇다. 며칠 전부터 텐트까지 쳐가며 줄서서 열광한다는 HOT 관람객과는 달리 교수법 강연에는 마지못해 참석하는 교수들도 있다.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이, 선심 쓰는 기분으로 오는 교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나로서는 강연의 첫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단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 서두에 ‘시험용 티셔츠’를 꺼내 보인다. ‘시험용 티셔츠’는 미국의 우리 대학 학생들이 시험볼 때 입는 옷으로, 앞면에 온갖 수학공식이 빽빽히 적혀 있다. 티셔츠를 입고 내려다보면 제대로 보이게끔 공식들이 위아래가 뒤집혀 적혀 있다. 이때 청중이 이 티셔츠에 얼마큼 관심을 보이고 호응하는가에 따라 그날 교수법 강연의 성패가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티셔츠는 지식기반시대의 학생들에게 이런 공식을 달달 암기해서 시험을 잘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새 시대에는 정보와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 여러 지식을 연결시켜서 새로운 지식으로 발전시키는 능력,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분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고개를 끄떡이는 교수가 눈에 많이 띄면 일단 마음이 놓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식기반시대에는 교수가 자신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조금씩 떼어주는 ‘지식 중간도매상’ 노릇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사실 한때 우리 학생들은 학력(學歷)을 추구하는 ‘지식소비자’였다. 졸업장은 지식을 얼마나 소비했는가를 보여주는 계산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학력(學力)을 지닌 ‘지식생산자’로서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시대가 왔기 때문에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전문대를 다시 다니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낭비를 막기 위해서 새 시대의 교수는 학생들에게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를 하지 말고 응용력·종합력·판단력을 키워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고 나서 새 시대 구호 중 하나인 ‘윈(win)-윈(win)’의 참뜻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나간다.

    “새 시대에는 팀워크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티셔츠의 뒷면에도 수학공식이 적혀 있습니다. 티셔츠 입은 학생 혼자 혜택을 누리지 말고 뒤에 앉은 친구도 보라고요. 그래야 윈-윈 아닙니까?”

    그렇다. 한국에서는 경쟁력이라는 개념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경쟁력 강화를 위해 모든 조직은 구성원들끼리 경쟁을 시키려고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모이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한국적인 정신을 왜 스스로 차버리는지 모르겠다.

    경쟁력이라는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은 윈(win)-루즈(lose)가 생기는 경쟁이 아니다. 구성원들이 협력해야 한다. 경쟁력은 결과, 방법은 협력이다.

    이 정도의 서두로 교수법 강연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새 시대 교수법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중 첫째는 효과적으로 강의하는 ‘기술’을 다룬다. 이 내용은 반드시 교수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교수법은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대인관계 기술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이런 기법은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매주 보내는 무료 전자주간지 ‘새 시대 교수법’은 초·중·고 교사, 목사, 학원 강사, 회사원들도 구독하고 있다.

    비디오 촬영을 통해서 자신의 강의 기법을 개선하는 방법도 소개한다. 연구 중심 대학 중에 최고라고 하는 하버드 대학에서도 매해 200명 이상의 교수가 자발적으로 강의기술 향상을 위해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자문을 받는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예는 연구 실적을 높이려면 강의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는 통념을 무참하게 깨버린다. 한국 대학도 ‘연구 아니면 강의’라는 상호배타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야만 강의와 연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뛰어난 강의 기술이 있으면 강의 준비에 적은 시간을 들이고도 더 큰 효과를 보게 되니 연구에 들일 시간이 더 많아진다. 강의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 오늘 몇 시간을 투자한다면 두고두고 몇 백, 몇 천 시간으로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30분짜리 강의를 준비해서 한 시간으로 늘려서 강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겪어본 이는 다 안다. 이런 정신적 고통을 은퇴할 때까지 느낄 것인가?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교직의 장기전략에는 교수법 기술 향상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유능한 교육자의 특성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학생에 대한 배려, 강의 준비와 열의,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 흥미유발, 전문지식, 토론을 장려하는 것 등이다. 명강의는 강의 시간을 몽땅 선생님의 목소리로 메우지 않는다. 학생의 목소리가 많이 들려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내가 즐겨 쓰는 말이 있다.

    “선생님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강의는 최하급 강의. 선생님이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면 조금 발전한 강의. 학생이 한 질문에 선생님이 답하면 바람직한 강의. 최상급 강의는 학생이 한 질문에 다른 학생이 답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학생 중심 교육의 기본이다. 학생의 참여도를 높여서 학생이 자신의 교육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이끄는 것이다. 학생 중심 교육이란 학생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자신의 교육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이것이 평생교육의 기본이다.

    새 시대 교수법 강연 끝에 자주 나오는 질문이 있다.

    “명강사는 타고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강의 실력은 선천적인 능력이니까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런 말은 종종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불필요하게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는 엉뚱한 결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는 자기방어 논리와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식이 숨어 있다. 유능한 교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 있으며,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미국 교수들은 한 학기에 한두 과목만 가르치지만 기본적으로 서너 과목을 가르치는 우리 한국 대학의 현실에서 본다면 강의 준비를 잘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은 주로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교수에게서 나온다. 그렇다. 한국 유학생은 미국의 수많은 대학 중에서도 교수가 한 학기에 한 과목만 가르치는 대학에서 주로 공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학은 미국에서도 200개 안팎이며, 3800개가 넘는 미국의 대학 중 톱 5%에 속하는 대학이다. 미국에서도 교수가 한 학기에 네 과목 이상 가르치는 4년제 대학이 40%가 넘는다. 이렇게 보면 미국 대학의 실정이 한국에 상당히 왜곡되어 알려져 있는 셈이다.

    그뿐 아니다. 교수들의 시간 활용도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미국에서는 연구 중심 대학의 교수들마저 연구보다 오히려 교육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평균적으로 연구에 32%, 교육(강의)에 40%를 쓴다고 한다.

    새 시대 교수법의 둘째 목적은 이처럼 왜곡된 정보와 개념을 바로잡는 일이다. 예를 들어 교육개혁의 구호인 ‘다양화·특성화·자율화’가 유행어처럼 되었지만 이것들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가를 설명한다. 우선 다양화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에서는 유사한 학과를 통폐합하여 교육의 효율과 품질을 높이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기 위해 학부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학부제는 폐쇄적인 학과의 벽을 허물어 다양한 인접 학문, 다학문이 번창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결국 학부제는 학문과 학생의 다양화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다양화는 새 시대가 지향하는 패러다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학부제 시행을 둘러싼 잡음이 왜 이토록 많은가. 일부에서는 교수들의 치졸한 영역 싸움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기존 체제를 뒤흔들어 불안하게 해놓고, 그 정도 반발에 고개를 내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학이 학부제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는 이유는 보수파 교수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다양화를 추구하는 학부제를 획일적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효과보다 부작용이 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적과 방법이 일치하지 않았다. 학부제를 하는 대학이 있으면 안 하는 대학도 있고, 한 대학 안에 학부제를 시행하는 단과대학과 학과가 있으면 그렇지 않은 단과대학과 학과도 있어야 진정한 다양화 아닐까?

    다양화는 대학사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역에 걸쳐서 반드시 필요한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다양화는 정부가 주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자생적 현상이어서 각자의 개성을 존중해주면 저절로 나타난다.

    그래서 특성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성화는 다양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이지만 한국에서는 특성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이 산업화를 이룩하는 동안 선진 외국을 많이 베껴왔는데, 이것이 그만 타성이 되어 서로 눈치보며 베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특성화의 결과를 두려워하거나 정서적으로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왜냐하면 특성화는 서열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양화와 특성화는 서로 다를 뿐인 수평적 구조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그 ‘다름’과 ‘뛰어남(특성)’이 상대 비교되어 우열로 구분되고, 소위 수직적 서열화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특성화의 당연한 결과를 인위적으로 막으려고 하니 특성화를 위한 개혁 정책은 항상 우왕좌왕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서열화가 나쁘니 없애야 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에 서열 없는 사회가 어디 있으랴. 평등 개념이 ‘기회의 평등’에서 ‘결과의 평등’으로 변질되는 것은 곤란하다. 모두가 성공을 보장받는 ‘결과의 평등’은 항상 실패를 평등하게 나눠 가지게 해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공산국가는 결국 자멸하지 않았는가?

    한국 교육의 서열화는 ‘계급화’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특수고에 들어가서 명문대에 입학하면 평생 상위계급의 특권을 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멋모르는 사춘기 때 공부하기를 싫어해서, 혹은 수능시험 점수 1,2점 차이로 이류 대학에 입학하면 훗날 아무리 열심히 해도 평생 이류 인생의 딱지를 면치 못한다. 따라서 계급화된 서열화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 외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은 좋은 교육 여건을 찾아서 가는 것만은 아니다. 사교육비가 문제라면 미국에서 들일 교육비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평생 따라다닐 ‘이류’라는 계급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국 실정도 모른 채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서열화가 반드시 계급적일 필요는 없다. 시작이야 어떻든 노력 여하에 따라서 위아래로 이동이 자유로운 ‘계층적’ 서열화를 추구해야 한다. 나는 이 개념을 두고 ‘지식유통개혁’이라고 말한다. 새 시대에는 정보와 지식만 자유롭게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는 모두가 원활히 유통돼야 성장할 수 있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지식유통개혁’이야말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주도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자율화라는 개념 역시 뒤범벅되어 있다. 다양화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 특성화라는 방법을 동원하려면 자율화라는 밑거름이 준비돼야 한다. 그러나 자율이 타율의 반대말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타율’이란 명사의 반대어는 ‘자유’지 ‘자율’이 아니다. 자유는 외부와의 투쟁해서 얻을 수 있지만, 자율은 내부로부터 얻어내는 것이다. 자율이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liberty와 freedom의 차이

    자유라는 개념 또한 매우 잘못된 뜻으로 확산되어 있다. 영어에는 자유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 두 가지가 있지만, 한국어로는 똑같이 ‘자유’로 번역되기 때문에 혼동을 초래하고 있는 것 같다. ‘freedom’은 아무런 규제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만, ‘liberty’는 비윤리적 또는 부당한 규제로부터 해방됨을 뜻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규제는 있어도 된다는 뜻을 지닌 ‘liberty’는 타율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가 생존하기 위해서 국민이 추구해야 하는 자유는 liberty지 freedom이 아니라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내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의 영문은 ‘liberty, equality, fraternity’였다. 미국 헌법도 국민의 liberty를 보장했지 국민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freedom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간섭과 규제로 통제받는 타율에 지쳐 자율을 외치지만, 자립 능력이 없는 상태의 자율은 타락과 방종으로 치닫기 쉽다.

    이외에도 대학사회에 연봉제, 계약고용제 등 외국 제도가 속속 수입되고 있다. 특히 연봉제는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여겨지고 있다. 연봉제는 비상시에 매우 효력있는 약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장기복용시에는 위험한 부작용을 가져오는 극약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자율화가 중요하다고 자처하는 교육기관에서마저 교원을 타율로 끌고 가는 수단으로 연봉제를 채택했으니 그 결과가 뻔할 수밖에 없다.

    학생 중심 교육이라는 귀중한 교육이념이 소비자 위주의 시장경제원리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장경제 체제에 걸맞은 경영기술이 마치 기업체의 영업기술인 듯 아무 생각없이 적용되고 있다. 지식기반시대라고 해서 지식인을 산업시대의 노동자처럼 취급하는 것은 아직도 행정이 산업시대의 경영 철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새 시대의 인력을 구시대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지식인들이 노조를 설립하려는 움직임 또한 산업화 시대의 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대응책이다.

    교원 연봉제는 교육 부실로 이어질 수 있으며, 노조의 등장은 집안 싸움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학생을 위한다는 교육개혁에서 자칫 학생만 피해를 보게 될 수도 있다. 앞날이 암담하다.

    하지만 한국에 절망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단점과 선진국의 장점을 비교한다면 한국은 분명 몹쓸 나라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선진국의 단점과 한국의 장점을 비교해서 한국이 좋은 나라라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막연한 희망으로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지난 6년간 한국을 29차례 방문했고, 40여 대학에서 교수법을 강연했다. 내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 교육에는 희망이 있었다. 한국의 현실이 좋았다는 게 아니라 잘될 가능성을 보았다는 말이다.

    한국은 일단 개혁의 방향과 방법을 정하면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엄청난 추진력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단시일에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나라다. 한국에는 반일, 반공, 반정부라는 대단히 귀중한 반발의 역사가 있지만, 이제는 지양보다 지향의 이념을 가질 단계다. 그래서 새 시대 교수법의 마지막 부분에는 희망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나는 교육개혁의 핵심요소를 학생, 교육내용, 교육기관의 구조 및 행정 등 네 가지 차원에서 생각한다. 일단 학생을 교육의 산물로 인식하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려면 교육을 학생 중심, 즉 학생의 자아실현으로 옮겨가야 한다. 교육 내용은 두뇌의 여러 영역을 고루 발달시키되 특히 여태껏 소외돼온 창의력 계발에 주력해야 한다. 교육기관은 지식과 지식인의 ‘열린’ 유통구조로 재조정돼야 하며, 행정은 새 시대에 걸맞은 행정 기술로 이행돼야 한다.

    이 네 가지 중 교육행정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 먼저, 교육기관과 교원을 상벌(賞罰)로 좌지우지하려는 행정은 없어져야 한다. 벌(罰)은 무지몽매한 백성을 다스리는 농경시대의 방법이다. 상(賞)은 자본이 판치는 산업시대에나 큰 효과를 낸다. 하지만 정보화시대, 지식기반시대라고 하는 새 시대의 설득력은 정보와 지식에서 비롯한다.

    사람을 꼭 돈(임금)으로 다스리겠다면, 그리고 (경제적) 선진 외국의 제도를 배우겠다면,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지 말고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예들 들면, 오랫동안 산업화 과정을 지내온 미국에서는 사회 곳곳에 연봉제가 뿌리깊게 박혀 있지만 지식기반사회를 지향하는 앞선 기업에서는 지금 연봉제를 버리고 있다. 연봉제 대신에 회사 지분을 주는 방법도 널리 채택되고 있다. 지분은 단지 돈으로 환산되는 어음이 아니다. 고용자(회사)와 피고용인이 미래를 공유하게 만들어주는 멋진 방법이다. 회사에 충성심을 가지게 만든다는 평생고용제는 육체적(하드웨어) 결합이다. 그러나 회사 지분 분배는 비전(미래)의 결합이다. 희망을 나눠 가지는 것이며, 서로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게 한다. 그런 점에서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새 시대의 방법이다.

    한국에서 개혁이 힘든 이유는 비전을 나눠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전이란 손에 쥔 것을 놓으면 더 좋은 것을 쥘 수 있다는 믿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믿을 수 없으면 손에 쥔 것이 아무리 썩은 것이어도 더 꽉 쥐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따라서 사람을 움직이려면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혁은 희망을 가질 때 비로소 성공한다.

    우리는 지난 30년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한국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없는 성장을 한 이유는 모두가 정말 잘해왔기 때문이다. 획일적 체제순응형 인력을 배출한 교사도 잘했고, 지금은 연구 실적이 없어 홀대받는 원로 교수들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잘 해냈기 때문에 이만큼 온 것 아닌가. IMF가 터진 직후 쓴 ‘한국인이 반드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필자와 최성애 교수의 공저)라는 책에서 내가 설명했듯이, 한국 교육은 산업화를 위한 최선의 교육이었다.

    나는 지난 십수년간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구석구석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눈에 띈다. 예전에 교육부에서 강연할 때 졸던 관리는 이제 보이지 않고 무척 노력하는 자세가 보인다. 교수 연구실에 버젓이 놓여 있던 바둑판도 어느덧 치워졌고, 대신에 개혁 방안과 계획 차트가 빽빽히 걸려 있다. “교수법 강연 들어주러 가야지” 하는 교수 대신 필기도구를 준비해 들어오는 교수도 한결 많아졌다. 그렇다. 이런 노력의 효과가 당장 나타나지는 않지만 곧 눈에 보일 것이다.

    한국이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것은 성실하고 근면한 한국인의 장점을 살렸기 때문이다. 한국이 정보화에 성공할 수 있는 힘 역시 한국과 한국인의 장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내가 아는 한국인의 장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톡톡 튀는 개성, 강인한 정신력, 알쏭달쏭함(퍼지)에 대한 소화력, 불타는 교육열, 다차원 네트워크(학연, 혈연, 지(地)연에 앞으로는 지(知)연을 반드시 추가해야 할 것이다), 혁신의 습관화, 변화에 대한 적응력,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하는 순발력, 용감무쌍한 추진력, 인간의 본분을 지키게 하는 가족 중심의 가치관, 건강식 음식문화…. 끝없이 나열할 수 있는 이 모두가 새 시대 패러다임에 환상적으로 매치될 수 있는 자원이다.

    그렇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서로 무엇을 잘못했느니 하는 비판이 아니다. 그럴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제는 서로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자. 한국인의 장점에 한국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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