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차세대전투기 FX사업 각본대로 미국행

흔들리는 10조원대 무기구매프로젝트

  • 김종대 < 군사평론가 >

    입력2005-04-20 13: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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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토퍼 본드, 리차드 게파트 의원의 청와대 예방
    • 김대통령 방미 수행한 ‘3인방’ 정체
    • 청와대가 직접 챙긴 2001년 국방예산
    • 기무사의 아파치 헬기 도입반대 건의
    • F15 구매강요는 보잉사 재고처리 목적
    • 미국 무기에 맞춘 ROC(군 요구성능)김종대군사평론가
    예일대를 나온 시애틀의 목재업자 윌리엄 보잉이 1916년에 세운 보잉사는 미국에서 대표적인 군산복합 기업으로 꼽힌다. 제1·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을 승전국으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에 조립산업이라는 특성상 많은 일자리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 ‘국민기업’으로 대접받고 있다.

    보잉의 위력은 중국의 무역상 최혜국대우(MFN) 연장 문제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보잉은 라이벌 제작사인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프랑스를 앞세워 중국과 ‘밀월관계’를 맺으려 하자 시한이 만료된 MFN을 연장하도록 미 의회와 클린턴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후 중국은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미에 앞서 보잉항공기 50대(25억 달러 상당)를 포함해 총 42억6000만 달러어치의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보잉사가 최혜국대우 연장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점을 인정하고 그 대가를 지불한 셈이다.

    햇볕정책 지지 대가

    지난 3월 초순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3년 전 방문과 비교해 유사한 점이 많다. 1998년 6월 미국 방문 때는 대한항공이 보잉사의 737여객기를 20대 구매한 데 대해 클린턴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번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공군이 4조3000억 원을 투자해 올해 착수하는 차세대전투기(FX) 도입 사업과 2조1000억 원을 투자하는 육군의 차세대 대형 공격헬기(AH-X) 도입사업의 기종 결정이 임박한 시기에 이뤄졌다. 그런데 두 사업의 가장 유력한 기종인 F-15K 전투기와 아파치 롱보우(AH-64D) 헬기가 모두 보잉사 제품이다.



    미국의 경영자문기관인 틸 그룹은 지난해 3월 싱가포르 에어쇼에서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보잉사가 F-15K로 한국의 차세대전투기사업을 수주하지 못한다면, 지금은 전세계 전투기 시장의 40%를 점유하고 있지만, 2009년에는 이 기종의 생산중단 및 감축으로 무기시장 점유율이 16%대로 하강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보잉사는 3년 전 한국이 미국의 구제금융 지원에 대한 감사 표시로 자사의 여객기를 사준 사실을 떠올리면서, 이번에는 미국의 햇볕정책 지지 대가로 한국 정부가 자사의 전투기와 헬기를 구매할 것이라는 달콤한 기대로 김대통령을 맞이했다.

    이와 관련해 눈에 띄는 것은 이번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 일행에 조영길 합참의장, 차영구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상훈 전 국방장관(현 재향군인회 회장)이 포함됐다는 사실. 이들은 미 국방부 관계자들과 막후 군사접촉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군 고위인사 3인방의 행적에 관심이 집중된 이유는 정상회담 기간에 한미 군사 관계자들이 한국군의 차세대 군사력 건설과 관련해 대화를 나눌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영길 합참의장은 무기도입, 전력건설 분야에만 20여 년을 근무한 ‘전력통’이다. 국방부 정책기획관인 차영구 육군 소장은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군 측 고위인사와 친분이 두텁다. 노태우 정부에서 국방부장관을 지낸 이상훈 재향군인회 회장은 언론에 알려진 바와 같이 노정권 최대 의혹사업으로 꼽히는 한국형 전투기사업(KFP)의 주무장관으로서 국회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이 3인방은 보잉사나 미 정부 쪽에서 보면 가장 ‘말이 잘 통하고’ 지명도 높은 인물들이다.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과 한국군의 차세대 무기도입이 깊은 관련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보잉사의 가공할 로비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에 대한 보잉사의 사전 준비는 매우 치밀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 직전인 3월4일 보잉사 사장단과 군수담당 실무자들이 방한했다.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사전정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보잉사 회장단은 대담하게도 김대통령 면담을 신청했으나 청와대 측은 민감한 시기라는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F-15 생산공장이 있는 미주리주 출신으로 보잉사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크리스토퍼 본드 상원의원은 이미 1월말 리차드 게파트 하원 부총무와 함께 내한해 김대중 대통령과 이정빈 외교통상부장관을 면담했다. 2월에 또 한 차례 방한한 크리스토퍼 본드 상원의원은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관의 주선으로 조성태 국방부장관을 면담해 노골적으로 F-15 구매를 요청했다.

    보잉사는 이미 1월 말 대니얼스 사장을 한국에 보냈다. 대니얼스 사장은 각군 참모총장을 만나 차세대무기 도입과 관련, 자사 제품 구매를 요청했다. 또한 마이클 마이크 군용기 담당 부사장은 3월6일 연세대에서 열린 ‘차세대전투기사업과 한국 공군의 미래’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F-15K 홍보활동을 폈다.

    이렇듯 미국 업체와 정치권 행정부가 동원돼 총력 로비를 전개하던 시기인 2월28일 김대중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한·러 공동성명을 통해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조약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한국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국가미사일방어계획(NMD)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도했다.

    국방부 주변에서는 보잉사 고위층의 잇따른 방한을 NMD 파동에 따른 한·미간 갈등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한국에 무기를 팔아야 하는 보잉사는 한·미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자칫 7조 원대에 이르는 이권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보잉사는 미 의회와 행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내 친미 인맥을 총동원해 한·미 양국 정부의 갈등을 봉합하려고 애썼다. 그 때문인지 한·미간에 조성된 긴장은 한국 정부의 발빠른 수습과 미 고위관리의 우호적인 양해 발언으로 3일 만에 해프닝으로 끝났다.

    우리 정부나 언론이 한·미 공조 복원을 외치며 대미외교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안 보잉사의 최대 라이벌이며 라팔 전투기를 생산하는 프랑스의 닷소사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국제외교에서 미국과 수시로 부딪치며 팍스 아메리카나(Pax-Americana)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표출해온, 자존심 강한 프랑스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방관했을 리 없다.

    프랑스는 지난해 한국형 차기잠수함사업(KSS-Ⅱ) 수주경쟁에서 독일에 패배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 때마침 한국을 방문한 프랑스군 합참의장 피에르 앙드레 켈쉬 육군대장은 김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틀 전인 3월5일 프랑스 대사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유럽은 사안에 따라 미국의 개입 없이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유럽은 이제 경제적 통합에 이어 독자적으로 군사임무를 수행할 만큼 성장했다”는 요지의 반미 발언을 한다.

    프랑스 합참의장이 이역만리 한국에 와서 내뱉은, 느닷없는 반미 발언은 프랑스가 한국의 차세대전투기사업을 놓고 미국과 강도 높은 정치·외교전쟁을 시작했음을 뜻한다. ‘프랑스의 자존심’ 라팔 전투기를 한국에 팔려는 프랑스 정부의 로비 시점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편 러시아도 꺼져가는 항공산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한국 시장 공략에 나섰다. 1998년 서울에어쇼에서 코브라 비행으로 한국민을 매료시켰던 첨단 전투기 수호이(SU-35)를 내세워 파격적인 가격조건과 기술이전을 제의했으나 한국 국방부는 이를 선뜻 수용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러시아제 무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남아 있는데다 첨단 군사기술을 소화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군의 차세대전투기사업을 둘러싸고 미·프·러 등 열강이 자존심과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북한 미사일, 김정일 위원장 답방, NMD, 한·미 공조 문제 등이 얽히고 설켜 한반도 정세는 심하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김대중 정부의 집권 후반기 외교정책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강대국들간 뜨거운 경쟁을 일으킨 한국군의 차세대무기도입사업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지난해 10월 약 101조 원에 이르는 정부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되기 앞서 민주당 당사에서는 각 정책조정위원회가 예산안에 대한 당정협의를 하느라 분주했다. 그러나 2001년 국방예산안을 심의해야 할 민주당 제1정책조정위원회는 뜻밖에 한산했다. 당정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제1정책조정위원회가 법안처리를 위해 국방부와 당정협의에 들어간 것은 다른 위원회들이 새해예산안 당정협의를 끝낸 후였다. 그 자리에서 차관 기획관리실장 등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은 민주당 국방위원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호통을 들었다. 매년 관행적으로 여당에 보고하던 새해 국방예산안에 대해 국방부가 사전에 전혀 협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여당 국회의원들조차 그 내용을 모른 채 국회에 제출된 2001년도 국방예산은 ‘단군 이래 최대 규모 군사력 증강’으로 불릴 만큼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한국군의 무기 수준을 한 차원 높이는 네 건의 ‘제4세대급’ 무기도입사업. ▲육군의 차기공격헬기(AH-X) 36대(2조1000억 원) ▲공군의 차기유도무기(SAM-X) 2개 대대(2조3000억 원) ▲공군의 차기전투기(F-X) 40대(4조3000억 원) ▲해군의 이지스급 구축함(KDX-Ⅲ·9200억 원)이 그것이다. 그 밖에 사업비 1300억 원의 지휘헬기(VH-X), 1500억 원의 무인정찰기(UAV), 6400억 원에 이르는 러시아 방산물자 도입사업까지 예산에 편성돼 총사업비 10조5000억 원에 이르는 7개 사업이 올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군은 1950∼1960년대형의 재래무기로 오직 북한 위협에 국한해 대응하던 틀을 깨고, 주변 위협에 대해 보복·응징할 능력을 갖춘 전략군이 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각군이 동시다발적으로 사업에 착수한 점이나 그 규모의 방대함을 감안하면 이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탈바꿈하는 것에 비견되는 도약이다.

    미국에 일자리 8만3000개 제공

    그에 따라 국방예산 팽창도 불가피해졌다. ‘중기국방계획’에 따르면 향후 5년간 전력투자비 명목의 무기도입비로 34조5000억 원, 70만 대군의 운영유지비로 57조4000억 원 등 총 91조9000억 원의 국방비를 지출하게 된다. 국민 1인당 204만원, 한 가구당 700만 원의 국방비 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드러난 액수일 뿐이다. 국방부 실무자들조차 차세대 무기도입 사업이 본격화하면 국방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2월5일 조성태 장관이 국방부와 각군 본부에 인건비 10% 감축안 마련을 지시한 것도 현 추세라면 예산의 급격한 팽창으로 국방경영이 파탄에 이를지 모른다는 절박함을 반영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무기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10조 원대 무기구매 계획이 확정된 올해 국내 실업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미국 군수조달협회에 따르면 10만 달러어치 무기를 수출하면 미국에 1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만일 우리가 10조 원대 무기를 미국에서 직구매한다면 미국에 총 8만3000개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셈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대북경협에 지출된 1억9000만 달러의 약 4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지난 10년간 한국은 약 97억 달러어치의 미국 무기를 사들였으나 미국은 한국 무기나 방산물자를 단 1억 달러어치도 구매하지 않았다. 미국이 1990년대 초 구소련제 무기를 주로 사용하는 이집트와 ‘상호구매 양해각서’를 체결해 이집트 방산물자를 다량 구매해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거리에 실업자와 노숙자가 넘쳐나는데 북한에 퍼다줄 돈이 어디 있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실업자가 넘쳐나는데 미국 퍼줄 돈은 어디 있느냐는 비판은 왜 하지 않았을까?

    더 중요한 문제는 10년 후 한국군의 주력이 될 첨단무기 도입이 어떤 예측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또한 국가의 장기적인 국방전략이 무엇인지 청사진을 제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번 무기도입은 단순히 탱크나 함정을 구매하는 사업이 아니다. ‘국방기본정책서’에 명기된 한반도 주변 영역에 대한 절대방위권 수호와 장차 주변위협에 대한 보복응징전략으로 고도의 작전요구성능을 충족하는 미래형 전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선진군을 건설하는 것은 국방목표에도 분명히 명기돼 있고 국민 모두가 이해하고 지원해야 할 일이다.

    왜 그토록 서두르나

    그러나 무기 도입만으로 선진 정예군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무기를 들여오면 이를 사용할 부대를 증·창설해야 하고, 그 병력을 갖추려면 기존 부대와 장비를 감축해야 한다. 각군의 정원을 재조정해야 하며 군사전략도 바꿔야 한다.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 새로운 중장기 군사기획을 준비해야 하는데,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군으로 변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사항은 변화하는 한반도 정세와 미래 위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민족안보를 향한 확고한 전망과 비전을 갖고 추진해야 할 사안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공감과 합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국방부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은 뒤로 한 채 초고속으로 다량의 무기도입사업을 강행하려는 조급함을 드러내면서 말썽이 일고 있다. 애초 국방부는 올해 안에 주요 무기도입사업의 뼈대를 갖추려는 의욕을 내비쳤다. 차기전투기는 7월, 차기공격헬기는 9월, 차기유도미사일은 10월까지 도입방법과 기종을 결정하겠다는 일정을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명백한 과욕이었다. 결재서류 들고 다니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3개 사업 8조7000억 원에 이르는 무기도입사업의 세부계획을 모조리 확정하겠다는, 상식을 벗어난 조치에 국방부 실무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나다를까. 2월 말 국방부는 애초 방침을 바꿔 도입방법과 기종결정 시기를 올 연말로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지키지도 못할 일정을 제시하고 수시로 계획을 바꾸는 국방부의 행태를 보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안보정책이 합리적인 계획이 아닌 즉흥적 판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환란위기를 맞아 온 나라가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든 1997년 말, 임기만료를 코앞에 둔 문민정부의 국방부는 동부전선전자전장비사업 등 무기도입사업의 가계약금과 중도금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금싸라기 같은 달러를 한꺼번에 써버렸다. 혹시라도 국방부가 사업 일정을 서두르는 것이 이 정부의 남은 임기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1999년 3월에 시작된 코소보 전투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아파치 롱보우 헬기를 유고 전장에 투입하자 많은 나라들은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78일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파치 헬기의 활약상은 단 한 줄도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산악지형에서 세르비아군의 지대공 요격능력에 대한 아파치 헬기의 생존성이 보장되지 않아 한 대도 출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무를 대신한 것은 값싼 무인항공기였다. 코소보 전투는 역사상 무인항공기를 가장 많이 활용한 전투가 됐으며, 거기서 활약한 프레데터, 헌터로 불리는 무인항공기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아파치 롱보우는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아파치 롱보우가 성능이 우수한 공격헬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제는 걸프전도 옛말이 됐고 싸우는 방법도 달라졌다. 걸프전이 옛날의 환상이요 신화라면, 코소보전은 현실이다. 사막의 개활지에서 벌이는 전투는 과학일지 모르나 산악전투는 철학이다.

    미래 전쟁에서 값비싼 첨단무기보다 값싼 단순장비가 더 유용할 수도 있다는 유연한 관점 없이, 군사력 증강이 곧 최첨단 외국무기 보유라는 강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한국 상황에 걸맞은 창의적 군사력 건설은 요원해진다. 과학은 있을지 모르나 철학은 없는 국방이 되는 것이다.

    아파치급 공격헬기 도입이 국방중기계획에 처음 반영된 1996년, 한국국방연구원은 아파치의 롱보우 레이더가 한반도 산악지형에서는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마치 코소보 전투를 정확히 예견한 듯한 이 보고는 산악지형과 악천후 때 아파치 헬기의 피아식별력, 즉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능력이 제한되며 북한군의 지대공 공격으로부터 생존성을 보장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재미있는 것은 미 의회에 보고된 미 합참의 ‘코소보 전쟁시 동맹국 작전 사후검토 보고서’가 작년 초 한국군 합참 전산망에 게재됐다가 하루 만에 삭제된 일이다. 이를 두고 국방부 주변에서는 아파치 헬기를 구매하는 데 불리한 자료를 치워버린 것 아니냐는 뒷말이 돌았다.

    아파치 헬기 도입에 대해서는 일찍이 국군 기무사령부도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기무사는 지난해 국방예산이 확정되기 전 조성태 국방부장관에게 “경제성에 문제가 있고 운영비가 과다하며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므로 아파치 헬기 도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아파치 헬기는 1991년 걸프전 이후 한국에 배치된 무기다. 미군 장비가 한국에 배치되면 한국이 방위비 분담 차원에서 운영비 일부를 부담하므로 미 본토에 배치하는 것보다 유지비가 적게 드는 점도 고려됐다. 미군측은 수원·오산 비행장을 방문하는 한국 국민과 언론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공개하는 한편, 아파치 헬기를 한국군 장교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배치했다. 우리의 낡은 헬기에 비해 아파치 헬기의 위용은 한국군 장교들을 기죽게 했으며, 하루속히 미군과 같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 다시 말하면 ‘미국 무기 중독증’에 걸리게 했다.

    미군무기 중독증

    한국군 장교들이 미국 무기 중독증에 빠지는 또 하나의 요인은 주한미군이 강조하는 무기의 ‘상호운용성(Interability)’이다. 전시작전권을 가진 미국이 유사시 한·미간 연합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지휘통신, 통제, 정보전달, 컴퓨터시스템 등에서 소통이 잘 되는 미국 무기를 한국이 보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는 조기경보기, 정찰기, 레이더, F-16과 합동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미사일체계, 통신체계와도 연동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투체계와 차세대 전투기가 합동작전을 하도록 체계를 통합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만일 미국제 전투기를 구매하지 않을 경우 작전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비록 성능과 가격에서 유리하다 할지라도 다른 나라 무기를 구매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육군이나 공군장교들은 이미 미국제로 결정된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뿐만 아니라 기종 결정을 눈앞에 둔 전투기와 대형 공격헬기도 이미 미국제로 결정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이 전시작전권을 가진 현실에 발목잡혀 기종 결정 또한 ‘미국화’ 논리에 끌려가는 데 대해 러시아나 프랑스 같은 미국의 경쟁국들은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서슴없이 비난한다.

    애초 군에서는, F-X사업은 ‘F-15급 전투기사업’으로, AH-X사업은 ‘아파치급 공격헬기 사업’으로, SAM-X사업은 ‘패트리어트급 대공미사일사업’으로 불렀다. 사업명칭에서도 드러나듯 미국 무기를 모델로 삼고 그에 걸맞은 전력증강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무기 선정 기준인 군 요구성능(ROC)도 미군 무기의 작전성능과 구성품 규격을 보고 베낀 것이다.

    공군이 요구하는 성능은 기종 결정에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차기전투기 및 헬기 성능의 기준은 미국제 무기다. 작전반경, 무장능력 등 작전요구성능은 물론 엔진, 날개, 동체 등 구성품의 중량, 출력과 같은 하드웨어 요구성능도 미국 무기의 제품설명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국방부는 기종경쟁의 공정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달리기 경주에서 총소리가 나면 똑같이 출발시킨다는 뜻일 뿐이다. 이미 미국제 무기의 출발선이 앞당겨져 있는 불공정성을 없애겠다는 의지는 아닌 것이다.

    불공정한 기종 경쟁

    미국은 마치 훈련을 하듯이 전세계에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다. 냉전 이후 걸프전, 코소보전, 최근 이라크 폭격 등에서 볼 수 있듯 정기적으로 잉여무기를 처분하고 다음세대 무기로 나아가기 위해 전쟁을 할 필요가 있다. 평시에도 전세계 전쟁 지역을 파악하고 모의 전쟁연습을 하다가 기회만 오면 곧바로 전투를 결행한다. 미국의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공군부대에서는 한반도전쟁 시뮬레이션이 펼쳐진다. 여기서는 매일 한반도전쟁을 연습한다.

    미국 경제가 하강기에 접어들면 미국은 기술 혁신, 기업 혁신, 경쟁력 혁신을 추구하는데, 그 자금을 신무기 개발에서 찾는다. 신무기 개발에서 얻어진 고급 과학기술은 민간에 파급(spin-off)되어 미국 상품의 대외경쟁력을 혁신적으로 높인다. 이 막대한 연구개발예산을 미 정부가 부담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전쟁과 새로운 무기개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것이 50년 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퇴임하며 자국 국민에게 경고한 군사경제, 즉 군산복합체의 생존방식이다.

    부시 행정부가 국가미사일방어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2001년 예산에 10억 달러의 연구비를 편성하고 약 600억 달러를 투자해 F-22전투기를 개발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코소보 전투에서 잉여무기를 대량 소비함으로써 기존 무기의 수명을 줄이고 신무기 개발을 위해 국방비를 늘릴 명분을 얻었다. 생산수명이 다한 무기 창고를 정리할 시점이 온 것이다.

    결국 한국이 지금 F-15를 구매하는 것은 미 군산복합체의 군사·경제 사이클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 때 공군은 애초 작전반경도 짧고 비교적 소형인 F-16이나 F-18을 도입하는 것보다 작전반경도 넓고 대형인 F-15를 기술도입 생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당시 일본이 F-15를 보유하며 주변국을 호령하던 위치에 올라섰음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F-15가 독수리라면 F-18이나 F-16은 꿩이나 닭에 비유된다. 국방연구원은 소량의 F-15 기술도입생산과 다량의 F-16 또는 F-18 도입의 장단점을 비교할 경우 비용 대 효과 면에서 비슷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와 관련, 국방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1987년 F-15 도입계획이 갑자기 사라지고 후보 기종이 F-16 또는 F-18로 바뀐 것이 로비의 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질’보다 ‘양’을 선택한 배경에 청와대 국방관계자, 삼성항공 고위 직원 등이 동원된 로비와 압력이 있다는 주장이다.

    F-15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이번엔 F-18과 F-16을 두고 갈등이 생겼다. 공군은F-18을 선호한 반면 청와대와 국방부는 F-16을 밀어붙였다. 이렇듯 공군과 청와대·국방부가 격렬하게 대립한 사실만이 한국형 전투기사업 의혹의 전부인 양 굳어지자 ‘로비의 몸통’은 자연스럽게 은폐됐다.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98년 당시 국민회의 박상규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국방부 비자금을 폭로하면서. 박의원은 제보를 토대로 “한국국방연구원(KIDA)에 거액의 비자금이 조성돼 있는데, 이 자금은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조성된 ‘F-16 로비자금’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이던 고석 중령이 그 사건을 조사했다. 조사결과 자금 규모는 50억 원대이며 관리자는 노정권에서 국방부 전력증강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고 김영삼 정부에서 국방장관과 안기부장을 역임한 권영해씨로 확인됐다. 아울러 자금 조성시점은 5공 말로 드러났다.

    당시 정황을 종합해볼 때 미국-청와대-국방부로 연결된 로비 라인이 가동된 시점은 도입기종이 F-18에서 F-16으로 바뀐 1991년이 아니라 F-15 도입계획이 수정된 5공 말이다.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 국방담당 고위인사, 삼성항공 관계자가 국방연구원 밖에 아예 캠프를 차려놓고 무기체계를 평가하는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각종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면 당시 미국은 왜 한국이 F-15를 도입하지 못하게 했을까? 한국 해·공군의 작전능력을 제한하려는 미국 내 보수파의 입김이 거센 시기에 미국 정부가 압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미 의회에는, 한국에 대한 전투기 판매가 미국의 항공기 시장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일본(One another Japan)’을 극동에 허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론이 무성했다. 그 탓에 일본이 운용하는 F-15를 한국에 허용하기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현재 공군이 추진하는 F-X사업은 10여 년의 긴 여정을 거쳐 다시 1980년대 말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애초의 F-15 도입계획을 끝까지 추진했더라면 지금의 계획은 불필요한 것이다.

    미국의 경기하강에 따른 군산복합체에 대한 새로운 대규모 투자와 기술혁신 필요성, 이를 위해 적당한 규모의 전쟁을 항상 필요로 하는 군사경제의 속성이 한국군 무기도입과 맞물려 한·미 외교관계에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5공화국 시절부터 전투기 도입과 관련된 국제로비와 반대자에 대한 가차없는 숙청, 군부 내의 갈등, 자국의 입맛에 맞게 한국의 대북정책과 국방정책을 흔들어온 미국의 행태를 돌이켜볼 때, 어떤 압력에도 굽히지 않는 자주적인 국방정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미국 무기를 구매하게 되더라도 얻을 것은 얻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미국과 주변국의 경쟁을 유도해 어부지리를 얻는 ‘광해군식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무기도입 과정에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획득방식이다. 이는 자동차를 살 때 일시불로 할 것인지, 할부로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과 같다. 이사하는데 전세로 살 것인지 집을 살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고 무턱대고 집부터 고른다면 입주할 때쯤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도입 역시 기술도입 형태로 국산화할 것인지 아니면 해외 직구매로 할 것인지 도입방식이나 조건을 결정하지 않으면 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획득방식은 국가의 과학기술정책, 산업정책과 연계해 범정부 차원에서 검토한 후 결정해야 한다. 2001년 국방예산은 집권여당 의원들도 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책정됐다. 대규모 무기도입사업에 대한 범정부적 협의기능이 전혀 발휘되지 않은 것이다. 1998년 국방부는 국방개혁안을 통해 “앞으로 대규모 무기도입사업은 국책사업화해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지난 2월 국회 국방위에서 조성태 국방부장관은 “타 부처에는 전문성이 부족하고 국방부 무기획득절차가 개선됐기에 범정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고 답변했다. 개혁정신과 어긋나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만일 그 답변대로라면 과학기술부나 외교통상부보다 더 전문성이 없는 청와대의 결재는 왜 받아야 했을까.

    직구매 징후들

    국가 차원의,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과정 없이 각군-국방부-청와대로 이어지는 정부내 오프 라인(Off-Line)이 모든 의사결정 기능을 독점하고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 각종 로비설, 압력설을 증폭시키는 이유 중 하나다. 또한 비공개로 무기도입계획을 수립한 결과 국가 정책기조도 크게 교란됐다.

    정부는 1999년 4월 ‘항공우주산업 기본계획’을 수립해 “2015년까지 세계 10대 항공국가로서 중소형 항공기, 전투기, 차세대헬기를 개발하는 체계종합능력을 확보하겠다”고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이것은 당시 구조조정을 통해 대우, 삼성, 현대 3사의 항공 부문이 단일 법인화한 한국항공(주) 출범과 더불어 장차 국가 우주항공산업의 발전과 도약을 예견케 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계획은 과거 항공산업의 비효율성을 없애는 한편, 해외 직구매가 아닌 기술도입생산이나 공동생산을 통해 항공기를 국산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올 국방예산을 통해 드러난 무기도입계획엔 국산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이는 해외 직구매를 추진하기 위한 ‘준비된 각본’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육군에서 구입할 공격헬기 36대. 그중 18대를 2004년까지, 나머지를 2006년 이후 도입한다는 계획은 그 물량이나 도입시기에 비춰 국산화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판단된다. 총 40대를 도입하는 차기전투기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10대씩 전력화한다는 계획인데, 앞으로 4년 이내에 국내생산을 위한 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공격헬기나 차기전투기는 이렇게 적은 물량으로 단기간에 끝낼 사업이 아니다. 도입기간을 늘려서라도 충분한 물량과 국산화계획이 뒷받침될 때 낡은 항공기 도태에 따른 전력 공백도 메울 수 있고 국내 항공산업도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차기전투기의 경우 공군은 애초 120대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70대로 수정됐고, 마지막에는 40대로 줄어들었다. 아파치급 공격헬기 역시 육군이 처음 요구한 분량은 4개 대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 계획에서 2개 대대분으로 절반 가량 줄어들었다. 해외 직구매를 위한 최소물량만 정확히 반영된 것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첫째, 정부가 국가 산업발전, 특히 항공우주산업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산업·경제논리를 배제하고 군사적 필요성만 인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30년 동안 외쳐온 자주국방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자력안보 기반을 무너뜨리고 외국업체에 완전히 종속되는 위탁안보에 기대는 것이다. 둘째, 국산화를 추진할 경우 사업비 증가를 우려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전투기를 확보하고 싶은 공군은 직구매 방식을 선호한다. 국가 항공산업 발전에 필요한 비용은 정부가 따로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공군의 주장이다.

    ‘3배 비싸도 국산무기를 쓴다’는 일본의 방위정책이 돋보이는 것은 경제와 안보를 따로따로 생각하지 않고 유기적 관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부처 이기주의, 조직 이기주의를 견제해야 할 국방부 획득실이나 기획예산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은 이번 항공기사업에서 과연 무엇을 고민하고 검토했는지 의심스럽다.

    그 동안 한·미간에 일반화돼 있던 FMS(정부 대 정부 구매) 직구매 방식으로 또다시 전투기와 헬기, 미사일 도입을 추진한다면 1996년 백두 정찰기 도입사업과정에 나타난 파행과 부실이 그대로 재연될 것이다. 한국은 미 보잉사로부터 아파치급 헬기와 F-15를 구매할 가능성이 있는 마지막 국가다. 보잉사는 한국이 구매를 완료하는 즉시 생산라인을 폐쇄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리부속 등 후속군수지원에 상당한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항공기의 항법체계를 비롯한 소프트웨어를 공급국에 의존함으로써 모든 작전이 노출되고 작전능력도 종속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첨단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외치면서도 국가 차원에서 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음에 대해 정부는 반성해야 마땅하다. 국방 관련 기업체나 연구기관의 책임도 크다.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치졸한 국산화 논리를 고수하느라 고등훈련기 개발사업 의사결정을 3년이나 늦춘 탓에 ‘단계전환사업비’라는 명목으로 300억 원의 국가예산을 낭비한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튼 국산화냐 직구매냐를 선택하는 곳은 각군 본부 전력기획참모실도 아니고 국방부 획득실도 아니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도 아니다. 그것은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다. 사업 욕심에 눈이 어두워 국가를 생각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국방정책이라 할 수 없다.

    아파치급 헬기의 운용유지비는 또 다른 논란거리다. 지난 2월 국회 국방위가 공개한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아파치 헬기의 대당 연간 운용유지비는 11억8700만 원이다. 국방부 계획대로 36대를 도입할 경우 총운용유지비는 427억3200만 원에 이른다. KF-16기의 대당 가격 350억 원을 훨씬 넘어서는 비용이다. 비싼 탄약과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KF-16기의 대당 운영비가 연간 6억 원대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공격형 헬기의 유지 운영비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 자료 또한 허위로 계산된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운용유지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도입 직후의 초기연도비용만 계산한 것이라는 문제가 있다.

    한국국방연구원에서 보잉사 자료를 참고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대형 공격헬기의 수명을 20년으로 잡을 경우 그 기간의 총운용유지비는 최초 도입비용의 3∼5배에 이른다. 만일 아파치급 헬기를 대당 300억 원에 들여온다면 대당 유지비용은 최소 900억 원, 최대 1500억 원에 이르는 것이다. 36대인 경우 총유지비용은 최소 3조2400억 원, 최대 5조4000억 원에 이른다. 이 비용은 현재 36대 도입비로 책정한 2조1000억 원 속에 극히 일부만 포함돼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 활용해야

    국방연구원은 비용 대 효과 분석을 통해 아파치급 헬기도입사업을 경제성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더구나 아파치 롱보우 헬기는 레이더와 장착 미사일에 따른 부수장비가 많고 그 운용에 막대한 비용이 수반된다. 이 때문에 운행을 하지 않고 그냥 놀려도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그런데도 이 헬기사업이 1996년부터 중기계획에 계속 반영된 배경에는 미국측 로비가 있었다는 게 관계자의 증언이다. 특히 국방연구원의 비용 대 효과 분석을 아파치 헬기 구매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육군본부가 국방연구원에 유무형의 압력과 로비를 행사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외국무기를 도입하는 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우리 군의 운용능력이다. 정보·과학 기반을 충분히 확보해 장비를 경제적으로 운용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특히 가장 우려되는 것은 모든 무기에 내장된 컴퓨터 시스템을 과연 우리가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2004년부터 전력화할 차세대전투기의 대당 도입비용은 1000억 원이 넘는다. 공군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KF-16 전투기 값이 대당 350억 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비싼 항공기임을 알 수 있다. 지난 유고전쟁에서 추락한 F-117 전투기 한 대 값은 540억 원으로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비싸다. 미국이 새로 개발하고 있는 F-22 전투기는 1억5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8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 3배 이상 비싼 항공기다.

    이처럼 갈수록 전투기 값이 치솟는 까닭은 전투기에 내장된 컴퓨터 시스템 때문이다. 예컨대 휴대폰 단말기가 처음 출시될 무렵 단말기 값의 90%는 기계, 즉 하드웨어가 차지했고, 기능, 즉 소프트웨어 값은 10%에 불과했다. 최근 출시되는 휴대폰은 그 반대다. 하드웨어 값은 전체 가격의 10%에 지나지 않는 반면, 음성인식, 데이터 전송, 사서함, 일정관리 기능 등 새로 개발된 소프트웨어 값이 90%를 차지한다.

    전투기의 사정도 비슷하다. F-16, F-18의 경우 전투기 가격의 80%, F-22의 경우에는 90%가 소프트웨어 값이다. 반면 엔진, 날개, 동체 등 하드웨어 값은 F-16이나 F-15나 F-22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전투기를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항공전자, 컴퓨터 기능의 활용이다. 이를 통해 항공산업이 국내 벤처기업에 풍부한 일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 그것은 국가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지렛대가 될 것이다.

    무기도입사업에 대한 국방부 획득본부나 사용군의 태도를 보면 여전히 하드웨어 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탓에 초현대식 무기 운용에는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항공기 가격의 90%에 이르는 고급기능을 군의 전력으로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10%에 불과한 하드웨어 기능에 치중해 전력발휘 수준을 스스로 제한할 것인가?

    국방부의 안보불감증

    그 답은 우리 군이 정보·과학 기반을 얼마나 갖추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첨단 무기도입은 그렇게 서두르면서 무기 운용에 필요한 기반을 갖추는 일에 소홀한 군대는 선진군으로 나아갈 수 없다. 천문학적 무기도입비를 지출하면서도 정보전력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해 중기계획에 반영된 정보전력 비중은 3%도 안 된다. 이런 상태로는 내일의 국방을 설계할 수 없다.

    이렇게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기를 도입하고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무기도입에만 정신을 쏟다보니 정작 미래 전투력 발휘를 위한 준비에 소홀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국방부의 안보불감증 아닌가. 만일 당장 내일 전쟁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면 이처럼 게으르고 무책임한 국방정책을 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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