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호

유럽역사기행

‘문명의 꽃’ 피운 그리스

아크로폴리스에서 ‘동병상련’을 느끼다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9-01-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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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멀리 떠남으로써 도리어 가까워진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우선 꼭대기에 올라갈 일이다. 그곳에 서면 언덕과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손금처럼 환히 드러난다. 아테네로 떠날 때 내 심정도 그랬다. 이 세상의 복잡함과 어수선함에서 벗어나려면 아득히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3년 전 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인천공항을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거쳐 아테네로 날아갔다. 아테네 국제공항은 규모도 작고 편안한 느낌을 줬다. 그런데 그리스의 관문은 예상 밖이었다. 허술하다 못해 허망할 정도였다. 입국 수속 같은 것도 없었다. 2010년부터 그리스는 이미 여러 해 동안 경제위기로 고난을 겪었다. 물론 현재는 국제사회로부터 경제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활기는 없다. 몇 년 전이나 마찬가지다. 공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탔을 때, 시민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시무룩하고 우울해 보여 깜짝 놀랐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아테네는 단연코 세계적인 관광 명소다. 북적이는 관광객들과 달리 시민들의 어두운 표정은 관광지 곳곳에서 그로테스크한 흑백의 대조를 연출했다. 또 하나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날마다 수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드는 관광대국임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의 구미에 맞추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문으로 쓴 번듯한 입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좋게 말해 그리스 사람들의 당당함이라고 할까. ‘이 나라의 거리를 활보하고 싶으면 그리스어 알파벳쯤은 당신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전국 어디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총동원해 사소한 지명까지도 일일이 표기한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사실 당시의 나로서는 아테네 사람들의 무신경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외부인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 또는 약간의 불친절이 도리어 고마웠다. 덕분에 그곳에 머문 2주일 동안 아테네는 내게 친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선 친구처럼 다가왔다.


    그리스 철학자는 전 세계 만인의 스승

    한국과 그리스의 교류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교역량도 볼품없이 적고 교민이나 유학생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그리스는 우리의 친근한 벗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글을 막 깨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책이 ‘이솝우화’였다. 이솝은 노예 신분이었으나 누구보다 재치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시공을 초월해 세계인에게 가장 친근한 벗이리라. ‘그리스신화’ 역시 어린 시절부터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처럼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싸운다. 그 모습에 반해 나는 몇 번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되풀이해 읽었다.

    소년 시절의 한 기억이 떠오른다.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늠름한 황소를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저 소가 파시파에, 즉 크레타의 왕비가 사랑한 황소의 후예는 아닐까’ 생각했다. 그 왕비는 파시파에와 관계를 맺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너무 유명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이 시작됐다는 사실, 델포이의 신전에서 온갖 종류의 신탁이 거래됐다는 점도 유명하다. 고대 민주주의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도, 서양의 과학과 철학, 학문과 예술의 뿌리가 그리스에 있었다는 사실도 많은 이가 안다. 그런 점에서 고대 그리스 문화는 우리 것이기도 하다. 현대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오래전 특정한 민족, 영토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세기 전에 그리스를 벗어나 서구로 갔고, 새 사람들과 어울려 새로운 문명을 만든 것입니다. 이제 그분들은 자신들을 이해하고 존경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또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이렇게 그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옳은 말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옆구리에서 서구 문명이 탄생했고, 또 이것이 오늘날에는 지구를 지배하는 현대문명이 됐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인(哲人)들은 우리의 스승인 셈이다.


    아테나이가 아테네 수호신인 이유

    오늘날의 그리스는 가난하다. 아테네 길거리에도 군데군데 빈민 무료급식소가 눈에 띈다. 어느 책에서인가 나는 그리스 문제의 중심에 ‘지리적인 약점’이 있다고 기술된 것을 읽었다. 이 나라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악지대다. 따라서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다. 또 산맥에 가로막혀 국토를 종횡으로 연결하는 도로망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리 기억 속에는 낭만적이기만 한 고대 그리스 역시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좀 심한 말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고대에는 사실 그리스란 나라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언어와 신화, 역사와 전통을 공유하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비잔티움 등 수십 개의 도시국가가 때로 연대하고 때로 갈등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나라는 날씨도 덥고 건조하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급자족이 어려워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지중해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도시국가 가운데 비교적 조건이 좋은 것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의 들판은 넓고 토질도 비옥했던 만큼 폐쇄적이었다. 그 밖의 나라들은 독립적으로 생존할 조건이 못 돼, 비탈진 산기슭과 토질이 척박한 평원에서도 잘 견디는 올리브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은 앞다퉈 국제교역에 뛰어들었다.

    그리스반도 최고의 항구는 피레우스였다. 이 항구를 끼고 발달한 아테네가 역사의 중심에 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테네는 피레우스를 발판 삼아 일찍부터 지중해 무역에서 성과를 냈다. 그들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정성껏 섬기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막상 아테네 사람들이 도시의 수호신을 정할 때가 되자 시민들은 포세이돈이 아닌 아테나이를 선택했다. 오랜 전설에 따르면 아테나이 여신은 아테네 시민에게 올리브나무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올리브 기름과 올리브 향수가 아테네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면 아테나이가 준 올리브나무의 후손이 아직 건재한 모습으로 서 있다.

    오늘날 그리스 사람들은 고뇌한다. 그들은 고대의 올리브에 해당하는 출구전략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다. 그들은 조상이 남긴 유물유적에 기대어 사는 형편이다. 피레우스 항구의 소유권도 수년 전 중국 수중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피레우스를 유럽연합(EU)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삼아 한창 세를 불린다.


    파르테논신전에 녹아 있는 역사의 상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아테네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역사적 굴곡을 웅변하는 유적이 있다. 파르테논신전이다. 신전에는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이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모셔졌다. 그러나 주역은 아테나이 여신이라서, 사람들은 피레우스 항구가 보이는 신전의 안쪽에 거대한 아테나이 신상을 세웠다.

    이 신전이 완성된 것은 고대 그리스의 황금기였다. 그때 아테네는 델로스동맹의 주축으로서 지중해의 패권을 쥐었다.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파르테논신전을 건축하기 위해 동맹의 방위자금을 꺼내 썼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신전이 델로스동맹의 중앙은행에 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페리클레스가 신전의 건축비를 자의적으로 집행한 것은 월권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파르테논신전의 운명도 순탄하지 않았다. 지중해의 패권이 바뀔 때마다 그리스는 몸살을 앓았다. 그 역사적 굴곡 앞에 신전도 무릎을 꺾어야 했다. 그리스반도 역사는 한국 역사와 닮은꼴이다. 이것이 두 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일까.

    기원전 2~3세기, 신생국가 로마가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했다. 카르타고를 무찌른 로마가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자 해양국가 아테네의 운명이 막을 내렸다. 기원전 146년, 성장일로의 로마제국은 그리스를 정복했다. 그 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포하자, 파르테논신전은 신상을 밀어내고 가톨릭교회가 됐다.

    4세기 말에는 또 한차례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에서 비잔틴제국이 갈라져 나오고 그리스정교회를 국교로 채택하자 파르테논의 운명이 달라졌다. 이후 1000년 동안 파르테논은 그리스정교회의 사원이었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주인이 또 바뀌었다. 이슬람국가 오스만튀르크가 새 지배자였다. 이후 350년 동안 그리스란 나라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파르테논도 모스크(이슬람 사원)가 됐다.

    파르테논이 제 모습을 되찾은 것은 19세기였다. 오랜 독립운동 끝에 그리스는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832년에는 드디어 그리스 왕국이 부활했다. 그리스와 터키는 지금도 앙숙이다. 그리스 역사의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의 히틀러가 지중해의 요지 그리스를 강제 점령했다. 이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지긋지긋한 그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소련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스의 좌익과 우익은 수년간 내전을 치렀다. 한국전쟁에 버금가는 그리스 내전이었다. 파르테논신전은 침묵 속에서 후손들의 구겨진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신전의 복원작업은 아직도 느린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쾌청한 날씨 덕분에 나는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파르테논의 웅자를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감탄을 연발하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리스 역사의 쓰라린 장면들이 떠올랐다. 파르테논신전. 이는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후세에 전하는 금자탑이요, 비참한 운명에 끝내 굴복하지 않은 아테네 시민들의 용기와 지혜를 상징한다. 머지않아 그리스는 그들을 괴롭혀온 극심한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다시 비상하기를 빈다.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수,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그리스의 장점은 군사력이 아니라 세련된 문화에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이름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비롯해 화가 야니스 쿠넬리스와 조각가 게라시모스 스클라보스 등이 이름을 떨쳤다. 가수 나나무스쿠리의 흥겨운 노랫가락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문화는 고대 황금기에 더욱 찬연했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 예술의 정수가 한데 모여 있다.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조각품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기원전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술품들도 있다. 3600년 전에도 그리스 사람들은 뛰어난 색채와 조형미를 과시했다. 그때 그들은 지중해 최남단에 있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았다. 지중해를 무대로 자유롭게 활동한 그리스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페니키아 및 페르시아 등과도 폭넓게 교류했다.

    그리스의 예술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기원전 6세기부터다. 박물관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 시대의 조각품들은 비할 데 없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완벽한 균형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육체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처럼 곡진하게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때부터 그리스 예술가들은 특유의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리스가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까지도 한동안 그 전통이 이어졌다. 그리스 고전 시기를 대표하는 예술품 한 가지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상일 것이다. 참으로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다.

    그 무렵에 제작된 남성상에는 긴장된 근육미가 실감나게 표현돼 있다. 제우스상 또는 포세이돈상이라 하는 조각품에 그런 특징이 보인다. 이 조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어찌 보면, 번개를 내리는 찰나의 제우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머리 모양으로 말하면 영락없는 포세이돈이다. 어쨌거나 고전 시기를 대표하는 명작인 것은 분명하다.

    내친김에 청동으로 만든 기마 소년상도 간단히 소개해야겠다. 말과 소년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인데, 나는 이 기마상 앞에서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말의 긴장된 근육이며 소년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앞으로 뛰어나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의 문화적 업적을 높이 평가한 로마제국은 언제까지나 아테네의 학문과 예술을 본받으려 애썼다. 로마인은 그리스의 신들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스의 제우스 신이 로마제국 때는 주피터 신으로 거듭났다.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 문명의 정통성을 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활동이 특히 인상적이다. 황제는 아테네에 하드리아누스의 문을 세웠다. 문의 남쪽에는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신들의 우두머리 제우스의 신전은 바로 그곳에 자리 잡았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목에도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기념하는 도서관을 지었다.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그 건물은 허물어졌으나, 아직 남아있는 건물 기둥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단한 규모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로마의 지배 아래서 그리스 예술은 점차 퇴락했다. 어느 사회든 나라가 망하면 문화 예술도 타격을 받기 마련이다.

    사족 한 마디를 덧붙인다. 기원전 10세기경의 그리스 조각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도리어 현대적인 느낌이 난다는 걸 알 수 있다. 뭉크의 ‘거인’ 같은 작품도 아마 그 시절의 조각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기원전 4~5세기의 조각상 앞에 서면 불현듯 석굴암에 정좌한 석가모니불이 연상된다. 알다시피 헬레니즘이 인도에 전파돼 간다라미술을 낳았다. 그 기법이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신라의 부처와 보살로 형상화되었다니 신기하다.


    맛있는 음식과 흥이 넘쳐나는 아나피오티카

    아나피오티카 전경.

    아나피오티카 전경.

    관광객의 발길은 플라카로 쏠린다. 기념품 가게가 즐비한 곳이기 때문이다. 값비싼 장신구와 최신 패션의 멋진 옷들이 화려하게 선보이는 곳이기도 하고, 최고급 식당과 풍미가 뛰어난 과자와 케이크를 살 수 있는 가게도 수백은 될 것이다. 그 동네에서 한 잔의 진한 커피를 마시며 달콤한 케이크를 맛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낭만이 더욱 넘친 거리는 아나피오티카였다.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펼쳐진 곳이다. 아크로폴리스로 안내하는 좁은 계단에 진을 치듯 늘어앉은 고양이들이 귀여웠다.

    밤이면 거리의 악사가 넘쳐났다. 카페와 주막에서 그리스의 포도주를 마시고 특유의 그리스 소주 우조를 들이켜며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동네에서 나는 맛있는 그리스 요리를 마음껏 즐겼다. 그리스의 대표 음식으로 거론되는 꼬치구이, 특히 양고기 수블라키가 맛있었다. 고기를 약한 불에 조금씩 구워가며 잘라낸 기로스도 훌륭했다. 올리브 절임도 일품이며, 양젖과 염소젖으로 만든 페타 치즈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페타 치즈와 올리브를 곁들인 그리스 샐러드 역시 상큼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리스가 아직도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아테네는 언제까지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인상을 주는 특별한 곳이다.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그리스의 운명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문명은 절정에 이르렀으나, 그 뒤 갖은 고난을 겪었다. 아직도 그리스는 갈 길을 잃고 헤매는 셈이다.

    그리스와 한국의 처지에는 엇비슷한 점이 있는데, 강대국들과의 복잡한 관계가 특히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내게는 아테네가 더욱 안쓰럽고 정겹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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