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성공학 특강

“오래 살려면 笑盲부터 치료하라”

유머達人 4인의 웃음철학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황일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shamora@donga.com

“오래 살려면 笑盲부터 치료하라”

2/4
“일상을 발칵 뒤집어보라”

올해 마흔 한살의 소설가 성석제씨는 문학계에서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거침없는 입심의 소유자, 너스레의 달인으로 불린다. 그의 글은 서사와 우화, 상상과 실제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며 생생한 돌발상황을 끊임없이 촉발함으로써 ‘소설=고상’이라는 관념을 여지없이 전복(顚覆)시킨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에 따르면 그는 “서사라는 행위에 잠재된 장난을 능청맞게 연출”하며 사람들을 홀린다. 이런 재주는 그의 독특한 유머철학에서 나온다.

“유머는 간단치 않습니다. 특유의 고집스러운 정서가 있어요. 예를 들면 ‘기쁘다’는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하다’는 더 깊고 포괄적인 감정상태를 내포합니다. 유머는 바로 후자와 닮았죠. 엄숙함과 강함이 풍자로 무너지는 데서 촉발되는 게 유머입니다. 그러나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대상을 형편없이 만들면 그건 공격이지 유머가 아닙니다.”

성씨는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눈다. 모든 사물과 상황을 진지하고 엄숙하게 바라보는 부류가 있는 반면, 가볍고 집착이 별로 없으며 낙천적인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후자가 전자에게 농담을 거는 것이 그가 말하는 유머다. ‘유머’를 둘러싸고 이렇듯 전혀 유머러스하지 않은 대화가 몇 마디 오가자 갑자기 그가 자세를 바꾸며 말머리를 돌린다.



‘월급쟁이 K는 아침이면 출근해 회사에서 일만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텔레비전을 보다 잠드는 게 하루 일과다. 예외가 거의 없다. ‘1’부터 ‘12’까지 적힌 숫자판을 365일 멈추지 않고 제자리 돌기 하는 시계바늘처럼 틀에 박힌 생활에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K에게 얼마 전부터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출근하기가 무섭게 인터넷에 접속해 새로운 유머를 체크하는 일이다. 왜? 요즘 사람들은 유머러스한 남자를 좋아한다니까.

방송국 PD인 L은 자타가 공인하는 Y담의 대가다. 회사 복도든 술자리에서든 그와 마주치면 누구도 Y담을 듣지 않고 지나칠 수 없다. L의 주머니에는 늘 손바닥만한 수첩과 볼펜이 들어 있다. 수첩을 들춰보면 깨알 같은 글씨의 Y담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일상의 전복(顚覆)이 주는 웃음

성씨는 “유머러스해지려고 매일 유머를 체크하고 수집하는 상황, 바로 이런 상황은 그로테스크할 뿐 아니라 유머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작 그의 유머감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너나 없이 가난하던 60∼70년대 시골마을. 그 시절 ‘상이군인’ ‘거렁뱅이’ ‘문둥이’ ‘미친 여자’는 어느 마을에서나 마치 풍경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초등학생인 성씨에게 상이군인은 ‘왜 팔에 쇠갈고리를 달았을까. 나 같으면 방울을 달 텐데’ 하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실 때 상이군인이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평소 깡통 밥이 너무너무 맛있게 보여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더군요. 그래서 툇마루에 상이군인과 마주앉아 도란도란 깡통 밥을 먹고 있는데 부모님이 돌아오셨어요. 상이군인은 당장 쫓겨났고 저는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문득 그의 소설 ‘순정’에 나오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주인공 이치도의 얼굴과 그의 얼굴이 슬며시 겹쳐진다.

걸핏하면 악다구니를 퍼붓는 술집 주인 어머니와 허구한 날 술주정에 싸움질을 일삼는 한심한 땜장이 아버지를 둔 이치도는 온갖 욕설과 몽둥이 찜질에도 끄떡없이, 꿋꿋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느 날, 아버지의 장례식이 벌어지고 있던 집에서 어린 이치도는 슬그머니 소주병을 챙겨들고 나와 엿장수에게 간다. 나중에 엿장수는 이렇게 말한다.

“제 애비가 됫병짜리 소주병에 담긴 석유를 먹고 죽었다는데, 얘가 그 병을 들고 와서 엿을 바꿔 달라더라구. 내가 보는 앞에서 눈도 깜빡 안하고 엿을 쪽쪽 빨아먹는데, 공동묘지에서 여우가 해골을 빠는 것 같더라니까. 내참 기가 차서….”

성씨는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각자의 대처방법에 따라 유머러스할 수도 있고 평범할 수도 있다”며 “돌발적으로 솟구쳤다 사라지며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생생한 현실 상황,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켰다가 그걸 한번 탁 꺾어서 예상을 여지없이 빗나가게 하는 기지(奇智), 무안하거나 민망한 기색 없이 천연덕스러운 행동이 빚어내는 유머를 좋아한다”고 유머관(觀)을 들려준다.

그는 힘들고 우울한 상황에도 낙천적이고 엉뚱한 짓을 곧잘 저질러 웃음짓게 만드는 사람에게 애정을 느낀다. 때문에 다소 엉뚱하고 불성실해 보이는 이치도 같은 인물이 그에게는 편안하고 익숙한 존재로 다가선다. 일반인의 눈으로 볼 때 황당하고 어이없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통해 일상의 전복을 꾀하는 성씨의 유머는 그래서 유쾌하고 즐겁다. 그의 유머에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조롱이나 희화화, 가시가 없다.

“주변에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유머러스한 친구들을 세 유형으로 나눠볼까요? 우선 ‘교향곡 스타일’이 있어요. 이 친구는 말을 할 때 적당한 속어나 비어에 박력있는 행동까지 가미하죠. 또 다른 유형의 친구는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뛰어나 말 자체를 재미있게 합니다. 나머지 한 친구는 온몸으로 인생을 사는데, 그의 삶 자체가 유머로 가득합니다. 생김새도 좀 싱거워 보이지만, 자신은 매우 진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보고 있어도 웃음이 나옵니다.”

잘 웃기는 친구들과 자주 술자리를 갖는다는 성씨는 그들의 말투와 몸짓, 눈빛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서 소설 재료로 삼는다.

쓰라리고 슬픈 ‘ 진짜 유머 ‘

즐거운 대화와 유머러스한 상황을 즐기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성씨의 소설에 등장하는 배경은 대부분 60∼70년대의 도시 변두리나 시골 읍내 등 서민들의 공간이다. 그는 왜 이미 흘러간 지난한 삶에 끈질기게 매달릴까.

“어린 시절 제가 익숙하게 보아온 광경이고 삶이기 때문에 일단 그리기가 편안해요. 또한 팍팍한 시대를 살아온 작가로서 자기 시대에 대한 방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월급쟁이든 사장이든 제 또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난한 어린 시절의 상처 하나쯤은 가슴에 간직하고 살 겁니다. 그렇게 살아온 시절을 잊지 말자는 마음에서 그때 이야기를 자꾸 쓰게 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는 부부싸움, 술주정꾼의 고함소리가 담벼락을 흔들고, 먹고 살기 위해 악을 쓰며 부대끼는 사람들 속에 능청맞고 엉뚱하고 황당한 주인공을 슬쩍 끼워넣어 눈물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게 성씨 특유의 유머감각이다.

“그 시절 고달픈 서민들의 삶은 그 동안 많은 작가들이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저는 같은 시대를 조금은 덜 어둡고 덜 우울하게 전달하기 위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인물을 내세워 유머러스하게 끌고 갑니다.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죠.”

영국 총리를 지내고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처칠은 “유머의 가장 심오한 요소는 쓰라림과 슬픔이다. 그것은 내면적으로는 아픔으로 작용하지만 외적으로는 즐거운 표정을 짓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작품을 통해 표출되는 성씨의 유머는 바로 이 점을 관통하기 때문에 결코 가볍지 않다.

“요즘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가고 그 틈에서 사람들 역시 바쁘게 사니까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늘 있는 그대로, 사실적이고 진지한 이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생기를 잃게 될 것입니다. 유머는 바로 그런 상황을 깨뜨리며 윤활유 노릇을 합니다.”

한국에서 유머가 주는 위험은 자칫 ‘실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데 있다. 사람들을 일부러 웃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인터뷰 말미에 성씨가 눈빛을 빛내며 들려준 경험담 하나.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친구의 차를 타고 가다 횡단보도에서 신호에 걸렸어요. 옆에 나란히 와서 선 차가 하필이면 경찰차였습니다. 순간 찔리는 구석이 있던 친구가 슬쩍 곁눈질을 하다 경찰관과 눈이 마주쳤어요. 직업적인 감각이 발동했던지 경찰관이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요. 결국 친구는 경찰관에게 50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건네주고 위기를 모면했어요.

경찰관이 돌아간 후 친구에게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줬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 친구, 덤덤한 표정으로 ‘괜찮아, 부도난 수표야’ 하는 겁니다. 경찰관한테 봐달라고 찔러준 돈이 부도수표라니…그제서야 둘이서 한참 웃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생생한 유머다 싶어서 소설 쓸 때 당장 써먹었죠.”

“과도한 비탄의 강요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유머의 힘”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박은경 자유기고가

2/4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황일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 shamora@donga.com
목록 닫기

“오래 살려면 笑盲부터 치료하라”

댓글 창 닫기

2023/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