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반칙왕, 강호를 평정하다

영화전문 MC 홍은철의 송강호論

  • 입력2005-04-22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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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투박한 웃음 저 안쪽엔 ‘칼날’이 숨어 있다. ‘나’을 벼리고, ‘내 역’을 벼리고, 그리하여 마침내 관객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감동의 칼자국 하나 주욱 그어 새기는.
    송강호가 누구냐고 ? 질문자가 30대 중반이 넘었다면 용서할 수 있는 질문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영화’ 같은 배부른 소릴랑은 아예 집어치우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 땅의 조로한 중년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내심으로 답한다.

    송강호는 스타다. 아니, 그 이전에 진정한 ‘배우’다.

    우리 근대사만큼이나 곡절이 많은 것이 한국 영화사다. 그나마 식민지 속국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근근이 이어져 온 한 줌의 예술혼이 이 땅에 ‘활동사진’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한때는 전쟁과 가난의 시름에 젖은 이 나라 백성에게 유일한 위안거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독특하고 예술성 짙은 작가의 세계를 보여준 감독이 많지 않은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할 만큼 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휘황찬란한 광채가 전세계 영화팬의 공통된 추억거리로 명멸하는 와중에도 ‘우리별’ 1호, 2호가 꾸준히 그 순번을 이어간 결과이기도 하다. 역시 대중에게는 연기자를 통해 기억되는 영화가 더 많은 법이다.

    “배…배…배신이야,…배신!”



    김승호, 김진규, 최무룡, 신영균, 최은희 등등…. 이 추억의 이름들이 그 주인공이다. 후에 신성일, 엄앵란,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인 문희, 윤정희, 남정임에 이르기까지. 변두리 극장 땀냄새 가득한 만원 버스 같은 공간마저 반기게 했던 이름들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한국 영화 스타들의 그 명예로운 이름 앞에 ‘촌스러운’이란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진행된 정체와 퇴보의 망령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이라도 되는 양 절망적인 상황을 불렀다. 1960∼80년대 억압적인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총체적 무기력증은 무책임한 제작자와 안일한 연출자, 넋이라곤 없는 배우를 양산했다. 급기야 전문가 집단인 그들이 오히려 관객들의 눈높이에 한참이나 뒤진 채 질시와 조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한국영화의 암흑기는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한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반전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꺼져가던 불씨가 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름하여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다소 호들갑스럽고 섣부른 우쭐함이 우려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운은 분명 세차고 성과도 적지 않다. ‘은행나무 침대’, ‘접속’, ‘초록물고기’, ‘넘버3’,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등. 재기와 패기가 넘치는 흥행작에, 작가주의 영화까지 등장하는 이 신선한 바람은 정말 기적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로 이어지는 이 기세는 적잖은 졸작과 함께 진행되고 있지만, 결국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라는 대형 화제작을 내놓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송강호가 있다.

    한국영화사상 최고 흥행작인 이 두 편의 영화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억세게 운 좋은 배우? 아니면 작품을 고르는 기막힌 안목? 그에게는 이 둘이 모두 해당된다. 우선 그의 출연작을 살펴보자.

    데뷔작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다. 맡은 역할은 작았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우리 영화사에 홍상수라는 이색적인 작가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거기에 이름을 올린 송강호 역시 의미 있는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독특한 화제작에서 조그맣게 데뷔전을 치른 그는 또 한 편의 걸출한 한국영화에 얼굴을 내민다. 바로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1997)다. 야비한 웃음을 흘리는 폭력조직의 행동대원 역. 아직 단역이었지만 한석규의 징그러우리만치 뛰어난 연기력을 받쳐주는 그의 몸 동작 하나하나는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필생의 역작이 그 이름도 유명한 불사파 두목 역을 맡은 ‘넘버3’(1997). 송강호의 연기가 던진 충격은 가히 ‘경천동지’의 수준이었다. 특히 부하 조직원을 훈계하는 두 시퀀스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인상적인 연기력이 표출된 순간이었다. 수많은 패러디와 함께 유머의 단골 메뉴가 되면서 오히려 가치가 퇴색된 바 없지 않지만, 보면 볼수록 그 숨결 고른, 치밀하고도 미세한 감정표현은 걸맞은 감탄사를 찾기 힘들 정도다. 무식한 폭력배가 자신이 맹목적으로 영웅시하는 한 무술가의 무용담을 부하들에게 침 튀기며 전하던 장면, 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쯤은 얼마든지 참고 견뎌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하는 장면.

    임춘애와 현정화를 헷갈리는 실수를 부하들에게 들키자 모멸감에 치를 떨던 그는 지적인 웅변가에서 갑자기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는 3류 인간으로 돌변한다. 광기를 부린 후에도 여전히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낮은 신음소리(사실 이 부분이 예술이다)까지 섞어가며 말을 더듬던 그 대사를 팬들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배…배…배신이야, 배신! 배…배반!

    이어 출연한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에서도 그는 예의 코믹 연기를 보여준다. 엽기적인 분위기의 황당극이 주는 붕 뜬 분위기에서도 그는 자기만의 색깔을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다음 작품에서 그는 비중 있는 역을 맡으면서 진지한 캐릭터로 변신한다. ‘쉬리’. 한석규와 짝을 이룬 그는 대테러 비밀조직의 요원으로 이제껏 보여준 코믹한 분위기를 탈피해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전작들의 여운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이 역은 ‘낯선 느낌’을 주었고 이는 본인도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당시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에서 그만한 비중의 역을 소화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의 영화인생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그에게 단독 주연의 기회가 찾아온다. ‘반칙왕’. ‘조용한 가족’에서 이미 그의 숨겨진 가능성을 낱낱이 읽어낸 김지운 감독은 한 무기력한 은행원이 프로레슬러로 변신하는 현대판 우화 한복판에 송강호를 내세운다. 마치 평생을 기다려온 듯, 송강호는 그 역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가 뒤범벅된 링 격투장면에서 보여준 처절한 열연은 출중한 것이었다.

    단독비행에 멋지게 성공한 그는 더욱 성숙한 선구안을 발휘해 차기작을 골랐다. 바로 ‘공동경비구역 JSA’(2000)다.

    한국 영화사에 새로운 흥행기록을 세운 문제작. 분단 현실과 그로 인한 비극에 가장 인간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은 뛰어난 작품성. 탄탄한 각본과 연출력을 바탕 삼아 박찬욱 감독이 화려하게 재기한 의미도 크지만, 연기자 송강호에겐 말 그대로 강호를 평정한 작품이 ‘…JSA’다. 이병헌, 이영애, 신하균, 김태우 등과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영화의 한복판에 버티고 선 그의 중량감은 전적으로 그의 선천적인 감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감독의 얘기다.

    필자는 확신하건대 배우의 연기도 감독의 몫이라 생각한다. 같은 배우라도 어떤 감독과 일하느냐에 따라 역량 차이가 크다. 그러나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송강호 같은 연기자가 있기 때문이다.

    촬영 현장에서는 가끔 엉뚱한 즉흥적 감에 의존할 줄도 아는 배우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사전 캐릭터 분석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이가 바로 송강호다. 왠지 투박하고 소탈할 것 같은 그의 이미지 안에 감추어진 그 세밀한 결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과정을 거쳐 그는 매번 ‘송강호’를 버리고 새로운 배역으로 재탄생한다.

    한국영화가 새로운 도약대에 선 이 시점에 진정한 연기자의 전형을 기대할 수 있게 해준 그는 정말 고무적인 존재다.

    송강호는 스타다. 아니 진정한 연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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