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요즘이다. 칸영화제 등 각종 세계 영화제 진출, 일본·중국 등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미국까지 넘나드는 해외시장 개척, 튼실한 작품의 질을 담보하는 젊은 작가군의 등장. 분명 상승세다.
‘공동경비구역JSA’가 ‘쉬리’의 신화를 깨고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을 세운 것도 상징적인 사건이다. 일본 영화산업이 1960년대에 상업적 측면에서 정점에 도달한 뒤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그려온 것과 비교해 볼 때 한국영화의 질적·상업적 수준은 ‘기묘하다’는 단어를 써도 좋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무엇이 한국영화라는 토지를 이처럼 비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최근 한국영화는 어떤 양상을 보이며 전진하고 있는 것일까.
스타 기용, 장르영화로 승부
영화진흥위원회가 결산한 2000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정상은 단연 ‘공동경비구역JSA’. 이 영화는 작년 한 해 동안만 서울 관객 244만 명 동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수립하며 국내시장에서 한국영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그 뒤를 ‘반칙왕’(81만 명)과 ‘비천무’(73만 명), ‘단적비연수’(63만 명), ‘리베라메’(54만 명)가 따르고 있다.
이 영화들은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쉬리’에서 정점에 달한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근본적인 차별성을 보여주기보다 일종의 변형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량공세 측면에서는 아직 많이 처진다. 그러나 영화의 ‘볼거리’를 강조하면서 능란한 스타 시스템 구사를 보여주는 최근 경향은 ‘비천무’ ‘단적비연수’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나름의 관객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아울러 위에 언급한 다섯 편의 영화는 모두 무협, 액션, 스릴러 등 장르영화의 틀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나름의 팬을 거느린 스타를 영화의 ‘간판’으로 내세워 안정적 흥행을 꾀한다. 이와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양상은 평단에서 ‘드라마의 부재’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2001년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다소 주춤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제작 패턴이 한국영화 산업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흥행 순위 6~10위는 ‘가위’(34만 명), ‘동감’(32만 명), ‘거짓말’(32만 명), ‘박하사탕’(31만 명), ‘시월애’(25만 명) 등의 영화가 차지했다.
이 작품들은 최근 경향 그대로 ‘현재’에 대한 영화적 관심을 노출하고 있다. 과거 인물과 현재 인물이 특정 통신수단을 매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한 인물의 현재로부터 과거 행적으로 거슬러 오르는 기법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한국영화가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현재, 혹은 미래 지향의 문제의식을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통점을 지닌 작품들이 관객과의 의사소통에 성공했다는 것, 그를 통해 흥행 결산에서 수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영화인들이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같은 작품, 다시 말해 현대성에 연연하기보다 과거에 고착돼 있는 고전 작품들은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 평단에서 주목받았다.
이런 유의 작품에 대한 서구 관객의 호기심은 역설적으로 최근 한국영화의 ‘현재’에 대한 집착이 과다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한국영화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산업적 이해득실로 인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온다면 이는 분명 불행한 일일 것이다.
똑 떨어지는 기획영화 ‘…JSA’
‘공동경비구역JSA’의 엄청난 성공은 분명 ‘사건’이었다. 송강호와 이병헌, 이영애라는 스타를 총동원한 작품이지만 관객을 이처럼 기록적으로 불러 모으리라곤 제작자조차 예상치 못했다.
영화에는 미스터리적 요소가 적극 도입돼 있다. 판문점 북측 초소에서 총격사건으로 북한 초소병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남측 초소병이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당시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다. 이를 위해 파견된 중립국 스위스 정보단 소속 한국계 여소령 소피 장은 의외의 사실을 밝혀낸다. 민족의 동질성 앞에 총을 버린 군인들이 어깨 겯고 앉아 술잔을 기울였음을.
‘…JSA’는 똑 떨어지는 기획영화다. 내러티브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 특히 국내 관객이라면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백하며 캐스팅 역시 적절했다.
영화엔 유머가 짙게 배어 있는데 이러한 설정은 남북한 병사의 우정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상쇄하며 흥행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영화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소재나 주제 자체가 워낙 묵직한 편이라 요소요소에 웃음이라는 장치를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평단에서 지적하듯 ‘…JSA’는 치밀한 완성도를 과시하는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미스터리는 논리적 인과관계가 다소 허술하고, 결말 역시 연출자의 감정 과잉의 결과인 듯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민족적 휴머니즘을 전면에 내세워 모든 갈등을 풀어나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쉬리’가 로맨스를 바탕으로 분단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였다면 ‘…JSA’는 민족의 형제애를 우위에 놓아 더 이상의 분단논리와 반공 이데올로기가 무의미함을 역설한다. 영화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현실적 이슈와 맞물리면서 괴력을 발휘해 흥행가도를 질주했다.
이렇듯 ‘현실과의 부단한 소통’이라는 대중영화의 ‘기본’을 착실히 구현한 ‘…JSA’에는 ‘충무로’라 약칭되는 한국영화계의 현주소가 정확히 반영돼 있다. 아울러 요즘 붐을 이루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외양을 띠고 있으면서도 스펙터클에 의존하기보다 국내 영화 관객층의 기호를 정확히 파악해 적절히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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