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별책부록과 표지화로 채워간 지성의 보석상자

  •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입력2005-03-21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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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채무’라는 말이 있다. 여느 채무처럼 갚지 못한다 해서 법정에 서야 되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는 잊어버려도 빚진 사람은 갚을 의무를 마음 속에 새겨두는 빚이다.

    70년 동안 ‘자유로운 사상의 공개시장’인 신동아에 빚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필자도 그중 한 사람으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몇가지 자연채무를 밝혀야겠다.

    필자가 대학생이던 시절은 매스미디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갓 진행중이었으니 물자도 풍족하지 않았고 문화는 경제개발에 우선순위가 밀렸다. 신문의 지면 또한 지금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 좋은 글을 읽고 싶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공간을 신동아가 대신했지 싶다. 가난한 대학생에겐 잡지 한 권 사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해를 기다리는 연말이면 이번엔 신동아의 신년호 별책부록이 어떤 기획일까 며칠을 기다리며 가슴 설레곤 했다.

    지금은 주요목차를 표지에 등장시켜 공격적으로 드러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해도 신동아의 표지에는 한폭의 서양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매월 명화 한 편씩을 지성의 보석상자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다. 한국 화단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작가들을 초대한 작품들로, 내게는 곧 그림에 대한 개안(開眼)이었다. 특히 신년호는 금색 바탕 위에 이 그림을 앉혀서 새해에는 좋은 일이 있기를 기원하는 덕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를 정성들여 모아 지금쯤 ‘신동아 갤러리’라는 이름의 공간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신년호를 기다리는 데는 또 다른 나만의 가슴 설렘이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1966년부터 단행본에 필적하는 방대한 분량과 탁월한 기획력이 돋보인 신동아 별책부록 ‘근대 한국 명논설’ 66편을 2년에 걸쳐 읽을 수 있었다. 개화기부터 해방전까지 한국사회의 큰 고비마다 올곧은 역사의 방향을 제시해준, 혜안을 가진 선각자들의 육성을 듣는 듯한 기쁨속에 공부할 수 있었다.



    1968년의 ‘세계를 움직인 100권의 책’과 다음해 ‘한국고전 100선’은 지성의 열풍에 휩쓸렸던 대학생활 동안 책 속에서 길을 찾게 해준 나침반이었다. 서양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들과 맞설 수 있으며, 안으로 지적 전통의 계승을 위해서는 이 책들을 모두 읽어내겠다는 젊은 뜻을 세우게 했다.

    이를 기획한 편집자들과 각 책의 해제를 쓴 선생님들은 제도교육에서 배울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게 제시해 준 ‘사상의 은사’들이었다. 자연과학까지는 욕심을 내지 못했지만 해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책을 구해서 한 권씩 읽어나갈 때마다 한 단계씩 성장하는 듯한 자신에 대해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휴전선 철책에서 보초를 서는 고달픈 군대생활도 별책부록 ‘한국 근대인물 100인선’, ‘현대의 사상 77인’, ‘한국 현대 명논설집’과 함께 했기에 견뎌낼 수 있었다. 태고의 음향밖에 없는 산골짜기 석유등잔 밑에서도 신동아에 빚을 지면서 지적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다.

    ‘당신들의 천국’이 상징한 것

    소설 읽기에 대한 개안도 신동아의 도움이 컸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꽉 막힌 긴 동굴 같은 1970년대 중반의 군사독재시절이었으니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신동아 연재소설인 이청준씨의 ‘당신들의 천국’은 나환자촌 소록도라는 특이한 공간에서 파도와 싸우는 간척공사를 통해 뜻을 이루려는 소장의 리더십과 환자들과의 갈등이 무엇인가의 상징인 듯했다. 소설이라는 장치가 시대상황을 웅변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젊은날에 신동아에 온통 신세만 지다가 1989년 가을, 조그마나마 빚을 갚을 기회가 생겼다. 황석영씨의 갑작스런 방북으로 신동아의 연재소설에 구멍이 났을 때, 마침 우리 출판사에서 전작 장편으로 출판을 준비중이던 이청준씨의 ‘자유의 문’ 원고를 신동아에 먼저 연재할 수 있게 내놓은 것이다.

    지금은 100여 쪽의 컬러화보와 광고가 화려하게 신동아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1970년대에는 10여 쪽의 흑백화보와 광고 두세 쪽에 불과했다. 지금은 어림없는 일이지만 출판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0년 무렵에는 상징적으로 책 광고를 내는 ‘우정출연’도 할 수 있었다.

    흑백화보 중에는 ‘한국인’, ‘신한국인’이라는 이름으로 너댓 쪽의 인물평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던 지면이 있었다. ‘저명인사’라는 요즘의 평가절하된 통속적 개념이 아니라 정보의 통로가 막혔던 당시에 사회 각계의 존경받을 사람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그 분들을 한국의 ‘큰바위얼굴’들로 생각하고 기획한 것이리라.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어 1999년에는 ‘한국인의 얼굴’로 바뀐 이 신동아 인물화보 자리에 필자가 나서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 자못 쑥스럽기도 했지만, “글을 읽고 글을 쓰다 비바람 냄새에 마음을 닦으며 살고픈 선비의식과, 단돈 10원을 보고 천리 물길을 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상업성을 상호보완적인 비적대적 모순으로 이끌어가는 출판인의 숙명”을 한눈팔지 말라는 격려로 읽었다.

    또 한번 지게 된 신동아에 대한 자연채무인 이 빚은 어떻게 갚아야 할지, 오늘밤에도 가야할 먼 길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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