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호

신동아 통해 사회학자의 비판적 역할에 눈떠

  •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입력2005-03-21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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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막이 열린 1987년의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진정 가슴이 떨리고 양심에 소용돌이가 이는 것을 느꼈다. 결단의 순간, 변화의 모멘트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당시 신동아는 다른 월간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나는 이화여대 서광선, 연세대 허영, 고려대 서진영, 한신대 박영호, 서울대 권태준·오석홍·노재봉 교수 등과 함께 신동아 객원편집위원을 맡아 일했는데, 한번도 격론 없이 헤어진 적이 없을 만큼 편집회의는 매달 활력이 넘쳤다.

    당시 대학가에는 민민투와 자민투 사이의 이념논쟁이 한창이었고, 민중을 변혁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 관심을 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진보와 보수를 다같이 비판하면서 ‘중민론(中民論)’의 관점을 옹호했다. 그러다보니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학문적으로는 항상 논쟁의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서광선 칼럼 즐겨 읽어

    때문에 신동아는 내게 자료 공급원으로서 가깝게 다가왔다. 한 보기가 박종철군의 죽음이었다.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자 그가 ‘억’하고 쓰러졌다는 공식발표를 과연 누가 믿었겠는가. 자연히 숨은 정보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신동아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미사 전문을 읽었고, 얼마 뒤에는 사건의 축소조작을 공개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관한 흥미있는 스토리, 특히 김승훈 신부와의 인터뷰 ‘국민이 정부보다 교회를 믿어요’를 감명 깊게 읽었다.



    나는 또한 서광선 교수의 칼럼을 즐겨 읽었다. 그는 온화한 얼굴에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글도 차분했지만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는 예리했다.

    ‘삶의 한 복판에서 87년 새 아침에 꾸는 꿈’을 필두로 하여 그는 ‘한국의 중산층에 고함’ ‘사상은 고문으로 막을 수 없다’ ‘수난과 부활의 의미’ ‘정치의 봄을 기다리며’ ‘다시 개헌을 논의해야 할 이유’ ‘1987년 6월10일 이후’ ‘자유의 관리와 책임’ ‘대학 민주화에 교수가 해야 할 일’ ‘아버님, 통일의 날은 언제 옵니까’ ‘어떤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인가’ ‘크리스마스, 새로운 탄생의 교훈’까지 12꼭지의 칼럼을 썼는데, 나는 매달 그의 글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다.

    내가 서교수를 좋아하고 존경했던 것은 그가 머리로는 나의 중민론을 지지했지만 가슴으로는 민중론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중민’은 생활수준으로는 중산층이지만 민중의 권익신장에 깊은 관심을 갖는 개혁지향적 집단을 가리켰다. 지식인, 신중간층, 교회신도, 전문직 종사자들 사이에 중민이 적지 않았다. 서교수는 이런 중민의 가치지향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중산층의 정치적 상징을 항상 경계했다.

    자유주의자의 쓴 소리들

    그러던 참에 신동아는 1987년 4월호에서 민중사회학 논쟁을 특별기획으로 실었다. 한완상 당시 서울대 교수(현 교육부총리)가 ‘민중사회학의 방법론’을 기고했고, 내가 ‘민중사회학의 민중론 비판’을 썼으며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민중사회학의 발전적 심화론’을 썼다. 이 기획은 독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두 한(韓)씨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논평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민중의 상징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민중을 무산대중으로 좁혀보는 데는 반대했다. 그 이유는 중산층 안에 민주화를 포함하여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집단이 결코 적지 않으며, 이들은 민중의 밖이나 주변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주장은 1987년 6월항쟁에서 어느 정도 입증된 셈이다. 이를 계기로 한완상 교수도 민주화에 관한 중산층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나의 기억에 신동아는 자유주의자의 쓴 소리를 모으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극분열 또는 대립의 위험을 지적하고 체제개혁의 길을 설파했다. ‘극좌, 극우론에 정치적 함정 있다’는 1988년 10월호의 권두토론이 그 좋은 보기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쇼크가 컸던 1999년 5월호에도 비슷한 톤의 권두토론을 실었다.

    또한 나는 신동아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80년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 기자의 취재수첩 ‘광주사태, 그 날의 5가지 의문점’이 1987년 9월호에 실렸고, 이어 10월호에는 광주지역 사령관 정웅 장군의 인터뷰가 실렸다. 또한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20사단의 충정작전 보고서 원자료 전문이 1988년 12월호에 공개됐고, 1989년 5월호에서는 ‘외국인이 증언하는 80년 5월 광주’라는 특별기획에 실린 생생한 증언 세 꼭지를 깊은 관심 속에 읽을 수 있었다.

    이런 글들은 1980년대 후반부의 현실에서 나에게 신선한 자극과 관심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편집위원들과 매달 만나 담소하면서 시국 현안과 지적 관심에 관해 가슴을 열고 토론했던 것을 즐겁게 기억한다. 나는 신동아를 통하여 사회학자로서의 비판적 역할에 새삼 눈을 뜨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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