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몽주의, 사회주의, 심지어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까지 추앙받는 루소.
- 그러나 과연 그는 자유와 자아 실현의 가치를 주창한 혁명의 사상가였나. 파시즘·테러리즘의 창시자로서의 루소를 새로 만난다.
우리나라에서 ‘사상’이란 단어는 이중의 의미에서 종종 ‘이상하게’ 쓰인다. ‘사상범’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불온한 것, 혹은 현실과는 유리된 대단히 관념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해온 것이다.
‘강도범’이나 ‘강간범’의 강도나 강간처럼 사상이 범죄의 하나로 불리는 나라가 20~21세기에 우리말고 또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더 일반적인 문제는 관념벽으로서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몇 년 전 어느 출판사에서 낸 ‘103인의 현대사상’이란 책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103인이 아니라, 10인을 꼽는다 해도 나로서는 당연히 포함시킬 사람들이 대다수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간디, 타고르, 쑨원, 레닌, 트로츠키, 제임스 듀이, 다윈,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밀, 파농, 오웰, 러셀, 밀스, 프롬 등이다. 내가 좋아하는 모리스나 톰슨이나 사이드도 물론 없다. 그 출판사나 편집진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위 몇 명은 ‘객관적으로도’ 현대사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반면 위 책은 103명 중 반 이상을 철학자에 할애했다. 문학자는 6명, 역사학자는 3명에 불과했다. 그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 중 상당수를 나는 모른다. 예컨대 괴델, 김재권, 노이만, 메츠, 악셀로드, 야콥슨, 오덤, 정화열, 튜링 등은 ‘무식하게도’ 처음 듣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각 분야에서는 대가들이리라. 그러나 사상가라고 하면 어떤 전문 분야의 대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을 뛰어넘어 학문이나 예술, 나아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위 책에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람시, 루쉰, 니체, 들뢰즈, 마르크스, 마오쩌둥, 베버, 사르트르, 일리치, 촘스키, 푸코 등 열 명 정도에 불과했다. 만일 내가 ‘20인의 현대사상’이란 책을 편집한다면 이들과 위에서 언급한 103명에서 제외된 몇몇 사람들을 그 주인공으로 삼을 것이다.
최근 프랑스 현대사상이 우리나라에 널리 소개되고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이 역시 철학이나 문학, 역사학 분야에 한정돼 있다. 프리드만이나 낭시처럼 그 사상의 범위가 대단히 넓고 영향력도 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제외되어 있다. 이는 ‘현대사상’뿐 아니라 모든 사상의 이해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예컨대 여기서 다룰 루소는 ‘근현대사상’에서 그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지대한 사람 중 하나다. 그가 다루지 않은 분야, 그가 영향을 끼치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나는 그 어떤 전문분야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 생각이 없다. 루소가 사상가로서 의미가 있다면 우리 시대의 모든 생각을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상가로서의 루소를 검토하는 경우 그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그에 대한 극단적 찬양도 있고 비판도 있다. 공동체주의의 선구자로 칭송되는가 하면, 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선구자로 비판받기도 한다. 심지어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위클러의 책에서는 루소를 ‘제한 없는 자유의 조건 속에서의 다양한 자아 실현을 제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고 있다. 과연 그런가?
나는 이 글에서 그런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즉 모더니즘의 상징인 중앙집권적 전체주의의 창시자로서 루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모더니즘의 기원으로 계몽주의를 바라보는 경우 나는 루소에 대해 비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역시 그 근본에 있어 루소로부터 비롯된 문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루소와 대한민국 헌법
최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창녀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한다. 민주공화국이란 말은 민(民)이 주인으로서 함께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 민에 창녀가 포함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대단히 복잡하게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그 출발이 되는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 역사를 보면 대단한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프랑스 대혁명이라 부르는 1789년의 혁명이, 기본적으로 중세까지의 삶의 터전이었던 촌락공동체와 같은 중간집단을 철저히 배제하고, 개인과 국가만을 양 축으로 두는 정치체제를 지향했다는 점에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창녀까지 언급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그런 중간집단의 배제를 논의하거나, ‘개인=국가’라는 순수한 등식의 구조를 이야기한 적이 없다. 도리어 촌락공동체는 고향이라는 심상의 근거로 언제나 미화되거나, 영호남이라고 하는 부정적 지역감정의 근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적어도 법적, 정치적으로 민주공화국은 그런 중간집단의 배제를 전제로 한다. 특히 이는 봉건적인 것만이 아니라, 모든 집회 결사에도 해당되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즉 경제적 차원의 결합인 봉건적 길드만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의 지방자치도 배격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사회적 차원의 결사도 배척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기인 1791년에 제정된 노동조합 금지법인 르 샤프리에 법은 1864년까지 유지되었다. 동시에 문화적 차원의 모든 지역주의적 다양성도 국가주의적 통일성에 의해 배척되었다. 그래서 각 지역의 방언이나 문화는 철저히 획일화된다. 그런 국가주의를 프랑스만큼 완벽하게 추구한 근대국가도 없다. 우리나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이런 국가주의가 대단히 강한 나라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노동조합이 금지되었고, 지금도 그 결성이나 활동에 제한이 많으며, 지방자치도 대단히 제한적이고, 사회적·문화적 획일성도 강하다.
여하튼 프랑스에서 중간집단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은 중간집단을 대신해 법적 권리 주체, 즉 ‘인권의 주체=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국가의 주권에 복종하는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따라서 망명자나 무국적자처럼 국민에 속하지 않거나, 병역 거부자처럼 국민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인권의 주체인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물론 식민지 민중은 당연히 제외되었다.
이처럼 적어도 프랑스 대혁명에서 민주주의란, 법적으로 국가는 유일한 주권자이고 개인(사실 구체적으로는 부르주아 남자였다)은 국가가 인정하는 인권의 주체인 정치체제를 말한다. 여기서 인권은 국가에서 나오고, 인권의 주체인 개인은 주권에 복종하는 국민이면서 인권의 향유 주체가 된다. 그것이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 헌법의 기본 발상이다. 따라서 이를 천부의 불가양적 자연권 사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이를 흔히 근대사상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개인주의’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정확히 말해 이는 ‘국민주의’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미국·독일·이탈리아 등 서양 대다수 근대 국가에서 성립된 정치체제는 바로 그런 국민주의의 국민국가였다. 그 틀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를 계승한 우리나라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개인의 자유 억압하는 ‘사회계약’
이러한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이론적으로 사회계약으로 설명된다. 그 대표자인 루소는 중간집단이나 혈연, 지연 등에서 완전히 독립된 개인이 그 의지에 근거한 자발적이고 공화적인 사회계약으로 국가를 세운다고 말한다. 그 계약을 형성하는 전형이 국민투표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를 세우는 현장에서 그런 계약을 실제로 한다는 식의 설명이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안다. 역사는 그와 반대로 개인이란 그런 계약 없이 이미 설정된 국가 제도에 포함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으로 불리게 됨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 이래 사회계약론은 르낭의 ‘국민이란 무엇인가’를 비롯한 19세기 국민주의론을 거쳐 최근 뤽 페리나 핀켈크로트의 보수적 사상에 이르기까지 뿌리깊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 문제는 국가의 구성 단위가 자유로운 개인이라면 당연히 그 자유와 다양성이 인정되어야 할 터인데, 국가가 개인에게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한다면 그 자유와 다양성은 억압당하고 소멸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인은 자신의 권리는 물론 존재 자체를 국가에 양도함으로써 국가 내부의 평등을 확보하며 특권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 유일한 지배자인 국가의 의지를 루소는 일반의지라고 부른다. 루소는 모든 개인의 평등하고 완전한 권리 양도에 따라 국가와 개인은 투명한 의사소통을 통해 동일성을 보증받으므로, 일반의지는 또 하나의 ‘자기’, 즉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자기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일반의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므로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합치된다는 것이다.
루소의 대표작 ‘에밀’(좌)과 ‘신 엘로이즈’에 수록된 삽화
이러한 국가의 근거라고는 투표밖에 없다. 그것도 전원일치여야 한다. 즉 반대표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반대자는 일반의지를 잘못 안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소에 의하면 100% 찬성의 공산당이나 파시즘은 일반의지를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는 곳이 된다.
여기서 소수자의 의견, 즉 의견의 다양성이란 존재할 여지가 없다.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주권은 유일하고, 나눌 수 없으며, 양도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선언한 것은 그 단적인 보기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한 우리나라 헌법 제1조도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다.
물론 주권에 대한 현대적 이해는 1791년의 그것과는 다르고,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소수자의 인권을 당연히 중시하고 있으나, 그 출발이 원래 그런 것이었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탄압이 그런 국가주의적 주권론에서 나오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루소는 사회계약, 즉 적어도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국가를 자신이 태어나 산 제네바와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입장이 어떻든 그의 이론은 제네바가 아닌 프랑스에 적용되었다. 현실의 프랑스는 제네바보다 몇백 배, 몇천 배나 거대한 국가였다.
1789년 혁명 이후 역사는 그런 민주주의가 그대로 정착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혁명은 루소의 이론대로 반대자에 대한 처절한 살육을 불러왔고, 다시 나폴레옹을 불렀으며, 그의 몰락 후에는 왕정으로 복귀했다. 게다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급속한 진전에 의한 빈부 격차의 확대, 빈민의 대량 도시 유입 등의 ‘사회문제’에 의해, 종래 중간집단을 배제하려는 공화주의만으로는 질서유지가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다시 중간집단의 존재가 부상된다. 유기적 연대라는 개념에 따라 중간집단을 매개로 개인주의화와 분업화를 통해 국가 기초를 강화하려 한 뒤르켐의 사회학도 바로 이 시점에 등장했다. 물론 이 중간집단은 중세의 그것이 아닌, 국민국가 통제하의 새로운 형태다. 이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으로부터 제3공화제의 산업정책과 사회정책으로 구체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민국가의 틀이 변한 것은 아니다.
‘제네바 사람’ 루소
앞에서 나는 루소가 제네바를 모델로 삼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루소가 1712년 제네바에서 태어난 것은, 그 어떤 다른 사상가의 고향이 그에게 갖는 의미보다 더 중요하다. 그가 태어날 당시 제네바는 인구 2만 명 정도의 독립된 소도시 국가였다. 말이 ‘소도시 국가’지, 인구로 따지면 지금 우리의 면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가 민주주의의 터전이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그 정도 크기였다.
그러나 인구의 대다수가 노예였던 고대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듯, 루소 출생 당시 제네바도 다섯 개의 신분으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었고, 몇몇 특정 집안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루소는 그런 제네바를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특히 스파르타)와 함께 가장 이상적인 정치모델로 생각했다. 이는 몽테스키외나 볼테르를 비롯한 18세기 계몽사상가 대다수가 영국을 이상적인 정치모델로 삼은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한편 루소는 만년에 제네바 공화국이 자신의 ‘사회계약론’을 탄압하자 제네바의 도시국가체제를 25명의 독재자가 좌지우지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루소를 찬양하는 사람들, 특히 공동체주의자들은 루소가 말한 정치란 제네바 같은 소단위 국가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루소 이론을 근대국가에 적용시켜 비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여하튼 루소는 지금도 제네바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시계 기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렇다고 그를 노동자 출신이라고 보는 일부 사회주의자의 견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루소는 제네바를 지배하는 소수 집안 출신이었고 그 때문에 루소 자신이 노동자에 애정을 가졌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도리어 부르주아적 성향의 소유자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루소는 15세에 제네바를 떠나 스위스나 프랑스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주로 귀족 집안의 음악 가정교사로 지냈다. 그가 ‘백과사전’에 쓴 글도 음악에 대한 것이었고, 나중에는 오페라도 작곡했다. 음악은 그가 평생을 두고 매달린 분야였다. 그래서 지금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는 그를 철학자, 교육학자 겸 음악가, 음악평론가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지금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시에 식물학, 교육학, 소설, 자서전 등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었으나 지금은 교육학 이외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사슬에 매인 인간들이여”
로베스피에르
루소는 학문과 예술은 개인의 미덕과 정직, 인간관계의 신뢰와 진실, 정치적 자유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불평등하고 절대주의적인 통치 속에서 복원된 학문과 예술은 인간을 억압하는 사슬에 화환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주장이 당대의 낭만주의나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어 두 번째 논문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는 인간의 정치 사회적 불평등은 사적 소유를 축으로 하는 권위의 관계에 기인한다고 하여, 죽고 난 뒤에 사회주의자들을 그 제자로 삼게 된다. 루소는 인간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거주지를 만듦으로써 사회가 형성되었고 이웃과 교제하는 생활방식이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이 초기사회를 인간의 황금시기로 보았다.
그러나 그 황금시기는 오래가지 못하고, 사랑과 함께 질투가 생겨나 자신의 능력과 성취물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불평등과 악이 생겨났다고 루소는 본다. 그리고 재산의 출현으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정부가 만들어짐으로써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평화를 제공하고 재산권을 보장하기 위해 등장한 시민사회는 주로 부자에게 이익을, 즉 기존의 소유권을 적법한 것으로 정착시켜 가난한 자는 계속 무소유 상태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정부를 세우는 것은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얻는 것이 적은 한 정당하지 못한 사회계약이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 속의 인간은 결코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가난한 자 못지않게 부자도 행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간은 끝없이 갈등하고 적개심을 친절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채 서로 미워한다고 루소는 보았다.
그렇다면 개선책은 무엇인가? 우리는 위의 논리로부터 당연히 개인주의나 무정부주의 또는 권능이 매우 제한된 정부 그리고 재산의 공유제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제자들이 나옴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루소 자신은 ‘사회계약론’에서 국가통제주의와 집단주의를 주장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사슬에 매여 있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책은, 사실 그 사슬을 타파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도리어 그 사슬을 정당화하는 사회계약을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가 루소에게 묻는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이 점을 다시금 요약해보자.
개인들이 맺는 사회계약은 당연히 모든 개인이 주권의 주체이고 지배자이게 한다. 이것이 그의 인민주권론이다. 이어 그러한 사회계약에 의해 창설되는 국가는 개인이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통일성, 공동일체감, 생명과 일반의지를 가진 도덕적이고 집단적인 기구이자 공공인격체가 된다. 여기서 국가의 주권은 개인에게 전체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한다는 국가주권론이 나온다.
이처럼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설명한 부정한 사회계약과 반대로 ‘사회계약론’에서는 시민사회나 국가가 참된 사회계약에 근거하면 인간은 자연상태의 희생을 대가로 더 나은 자유, 즉 스스로 부과한 국가의 일반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참된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반의지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는다. 루소는 그것이 정당하기만 하면 다수 또는 소수, 나아가 개인의 의사일 수도 있다고 본다. 따라서 루소가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공동체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은 허구다.
루소가 자연상태의 인간은 동물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한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은 볼테르에게 네 발로 걷고 싶어졌다는 식의 야유를 받은 것처럼, ‘사회계약론’도 계몽주의자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그것이 재발견된 것은 프랑스 혁명 직후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들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루소는 19세기 이래 국민국가론의 아버지로 추앙되었다.
루소를 재발견한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의 상징으로 불린다. 하지만 프랑스 역사에서 그는 여전히 높이 평가된다. 몇 년 전 로베스피에르에 대항한 당통을 높이 평가하고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한 영화 ‘당통’을 만들었던 폴란드의 영화감독 바이다는 프랑스측으로부터 맹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하튼 역사는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 약 40만명의 프랑스인이 죽었고, 그밖에 내란으로 약 60만명, 나폴레옹 전쟁으로 100만명이 죽었음을 증언한다. 형식적이기는 했으나 재판에 의해 죽은 사람도 3만명 이상이었다. 특히 혁명재판소가 활동하기 시작한 1793년부터 로베스피에르가 실각당한 이듬해 7월까지 파리에서만 1862명이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의 ‘덕, 평등, 인민의 일반의지’를 내세우면서, 그것에 반하는 ‘악, 특권, 일탈을 감시하고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처형당한 사람들 중에는 진보의 화신으로 혁명 직후 공교육위원회 대표로서 혁신적 공교육 제도를 주장한 콩도르세와, 왕권과 대립해 시민의 재산권과 신체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투쟁한 마그제르브가 있다. 그밖에도 많은 계몽주의자들이 죽었다.
카뮈, 루이 16세 처형을 비판하다
그런 비참한 역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프랑스 대혁명은 민주주의 그 자체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반동으로 간주되어왔다.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도 그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195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그런 주장을 더욱 명확하게 들고 나섰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소개된 조르주 르페브르, 알베르 마티에즈, 알베르 소불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은 그다지 적극적으로 소개되지 못했다.
이에 대한 최초의 이의 제기는 1951년 카뮈가 쓴 ‘반항인’이었다. 역사학자도 교수도 아닌 소설가 카뮈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재평가를 내린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역사학계에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27년 뒤인 1978년, 역사학자 프랑수아 퓌레에 의해서였다. 우상파괴자인 카뮈는 프랑스 혁명의 영웅인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를 공격했다. 카뮈는 그들의 주장, 즉 ‘원리는 온건한 것이어야 하며, 법률은 잔혹한 것이어야 하고, 형벌은 냉혹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을 단두대 스타일이라고 비판했다.
카뮈는 그들의 광신적인 면을 지적하고, 자코뱅당의 혁명에는 이상적 목적을 위해 비열한 수단을 동원해 파렴치의 종교를 설립하려는 의지가 있음을 밝힌다. 특히 루이 16세의 처형을 찬양하는 태도를 이렇게 비판했다. “확실히, 약하고 선량한 한 인간의 공공연한 살해를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한 순간으로 치부했던 것은 혐오할 만한 추문이다.”
자코뱅당의 지도자 마라의 죽음을 묘사한 다비드의 1793년작 ‘마라의 죽음’
카뮈는 ‘반항인’에서 루소를 “시민 사회에 있어 사형을 정당화하고 주권자가 왕권에 대한 신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을 정당화한 최초의 사람”으로 본다. “이 개념은 또한 스탈린식 재판의 그 열광적 피고들의 상황을 설명해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카뮈는 파시즘까지 루소와 연관짓지는 않았지만, 이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부심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보았듯 루소의 일반의지는 ‘보편적 이성’인 법률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천성이 선량하지 못하다면 그 정당성은 상실되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범죄로 만들어버리기에 이른다. 즉 전제정치다. 독재, 개인적 테러리즘 혹은 국가적 테러리즘. 정당성의 결여에 의해 정당화된 이것들은, 인간의 반항이 그 뿌리로부터 단절되고 일체의 구체적 도덕을 상실하는 순간부터, 20세기 양자택일의 양자가 되었다고 카뮈는 주장한다.
카뮈가 말하는 ‘역사적 반항’은 1793년 신의 대리자로 여겨진 왕을 살해하여 반항이 혁명으로 변한 날로부터 시작된다. 카뮈는 그 근거를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찾는다. 루소의 제자 생-쥐스트가 왕을 시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의 종교가 시작된다. “인간의 위대한 자유라는 것은, 사드의 비극적 성으로부터 포로수용소에 이르기까지, 단지 인간의 범죄의 감옥을 건립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연상시키는 이 문장은 또한 리오타르가 인간 진보의 거대이론으로 부른 것 위에 현대정치가 수립되었다고 보는 것을 연상하게도 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명백히 루소와 상반된다. 또한 카뮈는 ‘사회계약론’이 교리문답의 어조와 독단적 언어를 가졌다고 보았다. “그 새로운 종교의 신은 자연과 혼동되는 이성이며, 그 지상의 대표자는 왕이 아닌 일반의지를 지닌 인민이다.”
19세기에는 나폴레옹과 나폴레옹적 철학자인 헤겔이 나타나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자유란 이름 아래 테러리즘을 합리화하여 효율성의 시대를 열었다. ‘끊임없는 논쟁과 권력의지들의 투쟁’으로 요약되는 헤겔의 사관은 파시즘이나 마르크스주의에 이용됐다. 그래서 죽이든가 굴복시키는 일만이 남았다. 죽이는 쪽은 니힐리즘과 테러리즘, 굴복시키는 쪽은 유물론 혁명운동으로 나아갔다. 즉 파시즘과 공산주의다. 그것이 20세기이다.
협력적 계약인가, 일방적 예속인가
루소의 공화주의는 ‘중앙집권적 국가 주권에 대한 시민의 복종’을 주장한다. 이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루소가 말하는 사회계약이 협력적 공화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 예속 계약 아니냐는 점에 있다. 시민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한다면 루소가 말하는 전면 양도를 전제로 하는 계약이 아니라, 언제나 해제할 수 있는 개별적 사회계약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루소에 대한 최초의 비판자인 19세기의 프루동은 말한다. “사회계약은 각 시민의 복지와 자유를 증대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일부 시민이 계약으로 인해 시민의 다른 일부에게 예속되고 착취된다면, 그것은 계약이 아니라 사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기에 대해서는 계약을 해제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프루동은 시민의 자유를 전면 양도함에 의해 성립되는 주권, 그리고 유일한 주권에 기초를 둔 국민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시민이 언제나 해제할 수 있는 개별 계약에 근거한, 권력의 분산을 가능케 하는 분권화 사회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중앙집권국가를 가능케 하는 투표나 법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소수파는 다수파에 언제나 예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루동의 사상도 중간집단의 다양성을 주장한 점에서 뒤르켐의 사회학과 그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뒤르켐이 국가 내의 중간집단을 상정한 것과 달리, 프루동은 국가주권에 대항하는 중간집단의 재흥(再興)을 주장했다. 또한 중간집단 자체의 집권성조차 인정하지 않는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더욱 달랐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주의적 중간집단은 19세기 후반부터 대두한 철도·광산·공장 등 자본주의 산업화로의 구조 변화에 의해, 특히 20세기 전반부터의 철강·화학·기계 등의 중화학공업의 등장에 따른 노동력의 균질화 집단화에 의해 몰락한다.
이는 1871년의 파리 코뮌 패배 이후 프랑스 노동조합운동을 대표하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CGT가 급속히 후퇴한 것으로 나타나,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 후 CGT는 사회주의 정당을 매개로 해 국가에 통합된다. 그 후 국가는 물론 사회주의 정당으로부터도 자율성을 주장하는 사회운동은 1968년의 자주관리 노동운동이나 ‘새로운 사회운동’이 생겨나기까지 역사에서 사라진다.
루소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인가
그러나 프루동의 주장은 벤야민이 ‘폭력비판론’에서,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도 되풀이하고, 특히 프랑스에서는 1920년대의 초현실주의와 지드, 1930년대의 바타이유, 블랑쇼, 사르트르, 카뮈, 이어 1968년 이후 프랑스에서 바리바르가 ‘시민 주체’를 통해, 그리고 최근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각각 제기한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논의까지 이어진다.
예컨대 카뮈는 “생디칼리슴은, 코뮌과 마찬가지로, 관료적이며 추상적인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부정, 그것도 현실을 위한 부정이다”라거나 “반항은 무엇보다 가장 구체적인 현실, 즉 사물들과 인간들의 살아 있는 심성과 존재가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직업이나 마을 등에 기반을 둔다” 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나키즘 노동조합운동인 생디칼리슴을 옹호한다. 이렇듯 밑으로부터 위로 완성되고자 하는 것이 아닌, 위로부터 밑으로 완성되고자 하는 20세기 혁명은 정치요 이데올로기로서 공포정치 및 현실에 가해지는 폭력을 피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위클러는 루소를, 제도화에 반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였다고 평한다. 비산문적인 말과 비장식적인 음악, 사회성이 제거된 인간의 본성, 교사가 없는 교육, 통치자가 없는 국가, 교회가 없는 신의 현존과 같은 다양한 퇴행을 통해 ‘제한 없는 자유의 조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다양한 자아 실현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루소가 통치자 없는 국가를 주장했다는 것은 오류다. ‘사회계약론’ 이전의 책이나 ‘신 엘로이즈’ ‘에밀’ 등의 책은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도 나는 의문을 느낀다.
‘신 엘로이즈’는 여자 주인공인 줄리를 가리키는 말로, 그녀는 자연적 이성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중류 계급의 교사가 상류계급의 여학생 줄리와 신분법상 금지되는 사랑을 하는 이야기를 통해 사랑의 자유로운 감정표현과 극단적 감수성을 표현한 점에서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고 낭만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루소가 귀족적 사회질서 그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어느 가정교사가 부잣집 아들을 가르치는 이야기를 담은 ‘에밀’은 ‘사회계약론’의 공화주의 윤리와 ‘신 엘로이즈’의 귀족윤리를 번갈아 내세우면서, 악과 오류는 어린이의 본성이 아니라, 외적 영향에 의해 일어나므로 교사는 그런 악영향을 막고 자연(본성)에 따라 어린이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성적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에밀’은 계시나 교리를 갖지 않는, 단순화된 기독교인 개인종교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어 루소는 ‘사브와 지방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에서 성서를 근거로 한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 대신, 자연에서 느끼는 신앙을 주장하고 양심을 강조한다.
만년의 ‘고백’에서 루소는 고상과 천박 사이를 오가는 자신을 고백하면서, 특히 여성에 대한 과도한 미화와 난폭한 관능성의 모순을 보여준다. 이는 루소가 인간은 근본적으로 착하다고 믿은 것이, 지적 확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약함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는 반전이었음을 증명한다. 즉 모든 책임을 사회와 문명에 돌림으로써 자신은 편리한 원시와 야만의 신화 속에 안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원시주의는 당시 사회로부터 경멸받고 천시당한 부르주아의 심성이었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또한 루소가 분명하게 주장한 점은 전통과 관습의 타파가 아니라 도리어 그 권위의 존중인 충성과 애국심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기준이고, 민주주의적으로 전환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루소는 개인주의에 대립하는 철학자다. 여기서 개인주의란 영국의 로크나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것이다. 루소는 개인주의 비판의 근거를 플라톤에서 찾았다. ‘국가’는 그 자체가 도덕적이고, 국가에 대한 정치적 복종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이며, 법과 권리의 문제는 부차적일 뿐이라는 게 플라톤의 해석이다. 심지어 루소는 ‘코르시카 헌법 초안’에서 국가만이 재산의 유일한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소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 앞에 존재한 다수의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재산권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았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계약이라는 개인주의적인 민법의 개념을 사용하나, 그 내용은 위에서 본 것처럼 국가가 유일하다는 주장에 불과하므로 사실은 계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게다가 루소가 말한 개인의 자유란 개인으로 하여금 대중이나 당파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한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는 ‘우리들의 의사가 일반의사다’ ‘우리의 혁명 정부는 폭군정치에 대항하는 자유를 위한 전제정치다’라고 주장했다.
루소는 일반의사는 정의의 기준이자 절대적 진리라고 하나, 왜 그런지, 누가 그렇게 판단하는지를 밝히지는 않는다. 결국 이는 국가가 그런 판단을 하는 불가사의한 능력을 가졌다고 보는 전제에 선다.
따라서 국가의 강화와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국가적 애국주의를 이상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루소가 그런 민족국가로부터 제국주의를 이상화했다고는 볼 수 없으나, 그가 동시대의 몽테스키외나 디드로처럼 식민지의 참상을 비판하고 인권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18세기의 루소에 대해 19세기, 나아가 20세기의 모든 인류악에 대한 원흉이냐 아니냐를 논의함은 무리이리라.
루소는 1778년에 죽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기 11년 전이었다. 혁명의 선구자로 받들어진 그는 혁명 5년 뒤인 1794년 팡테옹으로 이장되었지만, 그가 과연 혁명에 찬성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루소는 혁명은 그것이 고치고자 하는 질병보다 더 나쁜 상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어느 계몽사상가보다도 그 혁명의 선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