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연비수’의 라스트 신에서 황인식의 무술은 누가 봐도 대단하고 찬란하다. ‘흑연비수’의 도장 안 결투 시퀀스와 거의 흡사한 장면이 또 하나 있다. 이소룡의 ‘정무문’ 도장 안 격투 시퀀스다. 황인식은 이소룡과 작업했고, 둘 간의 교류도 있었다. 한 기자가 황인식에게 이소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그는 말을 아끼고 아껴 단 한마디만 한다. “이소룡은 스펀지처럼 어깨너머로 본 모든 장점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영춘권으로 무술을 시작한 이소룡은 한국 무술 배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장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그중 황인식의 합기도는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관절기와 화려한 발차기 기술이 그랬다. ‘흑연비수’ 속 황인식의 무술 연기와 ‘정무문’에서 이소룡의 무술연기는 거의 같다. 특히 쉬지 않고 돌려차기를 해서 여러 명의 상대를 무너뜨리는 액션 장면에서 두 배우의 동작은 비슷하다. 그런데 이소룡의 그것이 훨씬 파워풀하다. 황인식은 수많은 무술 기예를 쏟아내기만 한다. 그러나 이소룡은 쓸데없는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 한 가지 액션만을 특화시켜 관객의 뇌리에 박히도록 한다. 특히 가장 화려한 기술은 액션 장면 속에서 구성점(plot point)으로 작용하도록 섬세하게 조절돼 있다. 이소룡은 어깨너머로 본 멋진 동작들을 재빨리 자기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이야기가 있는 액션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이소룡은 액션을 통해 주인공의 캐릭터와 그들의 감정을 대사 하나 없이 표현하는 연출을 한다. 액션영화를 활극이라 부른다. 액션을 통해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액션영화의 최고 경지다. 이소룡은 그것을 해냈다. 그러나 황인식 본인, 그리고 그와 함께한 연출가들은 무술 액션 하나하나가 영화를 구성하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결정하며 나아가 감정을 이끌어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황인식이 영화배우가 된 건 우연이었다. 대개의 무술 고수들이 그렇듯, 황인식도 어릴 때 몸이 약해 운동을 시작했고, 그러다가 합기도라는 무술의 매력에 빠져 고수가 된 케이스다. 1970년대 초 그가 운동을 하던 서대문의 합기도 도장에 한국의 발차기 무술을 공부하기 위해 홍콩의 영화감독 황풍과 일찍이 무술감독에 뜻을 둔 홍금보가 찾아온다. 그들은 황인식에게 다리 기술, 관절기 등 중국 무술에 없는 비기(秘機)들을 배워 돌아갔고, 성심껏 자신들을 지도한 황인식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를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로 초청한다. 황풍 감독은 황인식과의 인연으로 자신이 준비하던 권격 영화의 제목을 ‘합기도’라 정하고 황인식을 배우로 캐스팅하기까지 한다. 영화 ‘합기도’는 한국에서 ‘흑연비수’로 개봉된 영화. 황인식은 이후 수많은 권격 영화에 출연하게 된다. 처음부터 배우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 자신의 가장 화려한 특기인 360도 돌려 차 상대방의 목을 가위꺾기 하는 비기도 자기가 사용하지 않고 상대 여배우에게 주어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액션 연출에 대해 이소룡처럼 관심도 없었다. 연출에 욕심 많은 이소룡이 자신의 액션 연기를 훔쳐 제 것으로 만들고, 질투심 때문에 자신을 초라하고 형편없는 단역으로 출연시켜도 군말 없이 해내는 것이다. 황인식의 인품이 드러나는 대목이긴 하지만, 이소룡이 최고의 액션 배우로 성장하는 시기에 이소룡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 무술가 황인식은 그렇게 소모돼갔다.
포스트 이소룡

황인식이 출연한 합기도 액션 영화 ‘흑연비수’ 포스터.
영화가 시작되면 콧수염을 기른 호리호리한 몸매의 험상궂은 사나이가 등장한다. 이 사나이는 중원의 무시무시한 킬러. 그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없다. ‘돈을 받으면 무조건 죽인다!’가 그의 신조다. 이 신조가 소름끼치는 것은 그의 발차기가 너무나 빠르고 정확하며, 발을 손보다 더 자유자재로 써서 발바닥으로 상대방의 뺨따귀를 갈겨 목뼈를 부러뜨리는 자였기 때문이다. 피스톤 킥인가? 아니면 독수리 발톱인가? 발끝으로 눈을 찌르고 발끝으로 상대방 목젖을 부숴버린다. 아니 어디서 저런 무시무시한 보물을 데려왔어! 홍콩 영화계는 이 사람의 등장으로 발칵 뒤집혔다. 누구냐 저자는. 그가 바로 황정리. 한국에서 건너간 발차기의 고수였다. 성룡은 이런 무시무시한 사나이와 맨 정신으로 싸울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며 싸워야 겨우 운 좋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