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호

‘한국판 쉰들러’ 현봉학

흥남대철수 작전의 숨은 주역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5-04-22 15:4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현박사는 다급했던 흥남대철수 때 민간인 철수를 강력히 주장해 10만명에 가까운 북한 주민이 남한으로 내려올 수 있게 한 주인공이다.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지금, 그의 행동이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평생을 살면서 정말로 남을 위해 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더구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쥐고 있을 때, 남을 도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 것인가. 생살여탈권은 평생에 한번 쥐기도 어렵거니와 그 권한은 더 없이 크고 막중해서, 장삼이사(張三李四) 같은 평범한 남녀라면 그 무게에 눌려 제대로 행사해 보지도 못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넘기고 말 것이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임상병리학과 과장을 맡고 있는 현봉학(玄鳳學·78) 박사.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각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형제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공부했다는 것 등을 제외하면, 그는 특별한 특장점을 지니지 않은 많고 많은 원로 의사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는 한창 나이 28세 때, 그 어떠한 정복자보다도 큰 생살여탈권을 쥔 적이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이 권한을 생(生)을 탈(奪·빼앗고)하고 사(死)를 여(與·주는)하는 쪽으로 행사하지 않고, 생(生)을 여(與)하고 살(殺)을 탈(奪)하는 쪽으로 사용한 후 경건히 이 권한을 하늘에 되돌려 주었다.

    6·25전쟁 때의 이야기다. 일본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중심으로 급히 편조된 미 10군단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낙동강 전선에 밀려 있던 미 8군과 한국 육군으로 구성된 한미연합군이 총반격에 나섰다. 1950년 10월1일 한국군 3사단이 최선두로 38선을 돌파하면서부터 한미연합군은 앞다투어 북한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현봉학은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한순간에 한국 해병대 소속 문관이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 서술한다). 한국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 때 미 해병대 1사단과 함께 인천에 상륙해 서울에 들어왔다. 그리고 낙동강전선에서부터 쫓겨 올라오는 인민군을 섬멸하기 위해 강원도 고성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현봉학도 한국 해병대를 따라 고성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미 10군단은 맥아더 원수로부터 ‘다시 배를 타고 함경도 원산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10군단이 원산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원산을 점령(10월10일)해버려, 미 10군단은 안전하게 원산에 ‘행정상륙’할 수 있었다. 10월24일 맥아더 원수는 “한미군은 모든 지상군 부대를 투입해 신속하게 한·만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이른바 ‘무제한 북진’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따라 미 10군단장 알몬드(Almond) 소장은 미 해병대 1사단을 이끄는 스미스(Smith) 소장에게 “미 해병대 1사단은 함경남도 한복판에 위치한 장진호를 따라 압록강 중류 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바(Bar) 소장이 이끄는 미 육군 7사단에 대해서는 “함경남북도의 경계선을 따라 압록강 최상류인 혜산진으로 돌격하라”고 지시했다.

    알몬드 소장과의 만남

    이 무렵 알몬드 군단장이 군단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Edward Forney) 해병대 대령을 데리고 강원도 고성에 있는 한국 해병대로 시찰을 나왔다. 미국에 유학한 적이 있어 영어에 능통한 현봉학은 알몬드 군단장과 한국 해병대 여단장 신현준 준장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다. 신준장과 대화를 마친 알몬드 소장은 봉학에게 “당신 영어를 아주 잘 한다.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었다. 봉학이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 주립의과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대답하자, 알몬드 군단장은 깜짝 놀라며 “내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주의 루레이(Luray)다”라며 매우 반가워했다.

    이어 알몬드 군단장은 “당신의 고향은 어디인가?”라고 물었다. 봉학이 “미 10군단 사령부가 위치한 함흥이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알몬드는 “나와 함께 당신의 고향(함흥)으로 가자. 그렇지 않아도 우리 부대에는 함흥을 아는 사람이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고 말했다.

    며칠 후 함흥 공회당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함흥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현봉학은 미 10군단의 초청을 받아 신현준 준장 등과 함께 이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념식이 끝나자 알몬드 군단장의 부관인 알렉산더 헤이그 대위(훗날 NATO군 사령관을 거쳐 레이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냄)가 ‘현봉학을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명함’이라는 명령서를 들고 왔다.

    이로써 현봉학은 10군단 민사부에서 일하게 됐는데, 이것이 그가 일생일대의 가장 큰 생살여탈권을 쥐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 10군단은 점령한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군정(軍政)을 펼쳤는데, 군정 담당 부서가 바로 민사부였다. 민사부장은 무어(Moore) 대령이었다. 무어 대령은 현봉학에게 함경남도 도지사와 함흥 시장 인선 문제를 의논해왔다. 현봉학은 물망에 오른 사람들을 검토해 그들의 과거 행적에 대해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구하(李龜河)씨가 함경남도 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현봉학은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함흥 지역의 병원을 찾아가 의약품을 지원해 주는 일을 도왔다. 현봉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공산 치하 5년 동안 숨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여러 교회를 찾아가, 신도들이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이런 가운데 스산한 소식이 들려왔다.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맥아더 원수는 북진을 독려했는데, 11월24일 맥아더 원수는 그 유명한 ‘End the War Offensive(終戰을 위한 총공세)’ 명령을 하달했다. 미군 병사들은 이 명령을 ‘크리스마스 전에 전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총공격’으로 해석하고, ‘Home by Christmas Offen- sive(크리스마스 대공세)’로 바꿔 불렀다. 맥아더 이하 전 미군은 당연히 그들이 승리할 것이라며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팽덕회(彭德懷)가 지휘하는 중국의 인민지원군은 한미연합군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깊은 산맥을 따라 내려와, 한미군 후방 깊숙히 침투해 있었다.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 팽덕회는 그 유명한 ‘운동방어(運動防禦)’ 전술을 구사해, “한미연합군을 궤멸하라”는 대공격 명령을 내렸다. 운동방어란 적군이 쳐들어 오면 후퇴하는 척 물러나 깊숙한 곳까지 유인한 후, 후미를 차단함과 동시에 대부대를 동원해 포위 섬멸하는 고난도 전술이다.

    중국의 인민지원군은 일본군과 대장정을 펼치며 싸운 경험이 있어, 이러한 전술을 능란히 구사할 줄 알았다. 중공군에 포위된 한미연합군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먼저 청천강 지역에 포진한 미군 부대가 와해되고 이어 전(全)전선에서 한미연합군이 퇴각하는 이른바 ‘청천강 도미노’가 일어났다.

    청천강 도미노

    청천강 도미노의 공포는 현봉학이 몸담은 함흥의 미 10군단에도 몰아쳤다. 적진으로 진격시킨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이 포위됐다는 것을 안 알몬드 군단장은 두 부대에 화급히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두 부대가 진격한 곳은 해발고도가 1000m가 넘는 개마고원 지대라 기온이 영하 30∼40℃까지 떨어졌다. 두 사단은 중공군은 물론이고 엄혹한 추위, 굶주림과 싸우며 후퇴를 거듭했다. 알몬드 군단장은 두 부대의 퇴각로를 뚫어주기 위해 이 무렵 참전한 영국군 제41코만도(특공대)를 장진호 쪽으로 투입했다.

    청천강 일대에 있던 한미연합군이 대오도 갖추지 못하고 퇴각한 데 반해, 미 해병대 1사단은 대오를 갖춰 싸우면서 후퇴했다. 미 해병대 1사단은 이 싸움을 단순한 후퇴가 아니라는 뜻으로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으로 명명했다. 장진(長津)을 일본어로 읽으면 ‘쵸신’이 된다. 당시 미군은 일본이 작성한 한국 지도를 들고 작전을 짰는데, 이 지도에 그려진 장진호에는 ‘쵸신’을 영어로 옮긴 ‘Chosin’이 적혀 있었다. 미 해병대는 너무 힘들었던 장진호 전투를 기리기 위해 훗날 새로운 상륙함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Chosin’으로 명명했다.

    김백일(金白一) 소장이 이끄는 한국군 1군단 예하의 수도사단과 3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 하류로 진격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자 이들도 서둘러 퇴각했다. 다행히 이들의 기동로가 해안에서 가까워서 해안에 접근한 미 7함대가 함포사격으로 엄호 사격을 해줘,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전(全)전선에서 한미연합군이 퇴각하자, 도지사와 시장까지 임명해 해방 무드를 느끼던 함흥의 분위기도 하루아침에 오그라들었다. 이때 함흥 남쪽에 있는 원산에 적 게릴라 부대가 출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자 알몬드 10군단장은 원산을 거쳐 육로로 철수하는 것을 포기하고 장진호에서 철수해오는 미군과 청진 쪽에서 내려오는 한국군을 흥남으로 집결시켜, 배로 빼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미 10군단 사령부를 함흥에서 흥남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봉학은 섬뜩한 위기를 느꼈다. ‘한미연합군이 철수해 버리면 이 지역이 해방됐다고 좋아하던 함경도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미 10군단이 철수하면 이들에게는 죽음만 남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한 현봉학은 알몬드 군단장을 만나 “함경도에서 우리를 도와준 인사와 기독교인들도 함께 철수시켜야 한다. 이곳을 피바다로 만들지 않으려면 이들도 함께 철수시켜야 한다”고 미친 듯이 설득했다.

    알몬드 소장도 고민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알몬드 군단장이 현봉학을 불렀다. 10군단 부참모장 포니 대령과 민사부장 무어 대령, 그리고 한국군 1군단장 김백일 소장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알몬드 군단장은 “UN군을 도와준 한국인과 기독교인들을 흥남으로 철수시킨다. 오늘 밤 12시 전까지 4000여 명의 한국인을 기차에 태워 흥남으로 데려갈 테니 함흥역으로 나오게 하라”고 말했다.

    그 순간 현봉학은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내리 꽂히는 듯한 희망과 함께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연락한단 말인가’ 하는 아찔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고민하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는 미 10군단 군목(軍牧)인 클리어리(Cleray) 신부에게 “가톨릭 교인들은 밤 12시 전까지 함흥역으로 모이라고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개신교 군목인 옥호열 목사의 지프를 타고 시청·도청 그리고 함흥 시내에 있는 교회를 돌며 “오늘밤 12시까지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현봉학의 외침은 날개를 단 듯이 펴져 나갔다. 그날 밤 4000명이 아니라 함흥 시민의 절반에 해당하는 5만여 명이 함흥역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는 미 10군단에서 받은 빨간 딱지를 관공서와 교회에 나눠 줬었는데, 빨간 딱지를 가진 사람만이 함흥역으로 들어와 기차를 탈 수 있었다. 빨간 딱지가 없는 사람은 미군 헌병들에게 막혀 역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새카맣게 운집한 군중을 보며, 현봉학은 생살여탈권이 자기 손안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고 전율했다.

    이때 그는 미군 헌병을 도와 질서를 잡아주고 있던 함흥고보 동창 최승혁을 보았다. 잠시 다른 일을 하던 현봉학은 뒤늦게 ‘그는 빨간 딱지가 없다. 그러나 저 친구만은 기차에 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최승혁을 찾았다. 그러나 이때 최승혁은 미군 헌병에 밀려 거대한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끝내 그는 기차를 타지 못했다. 이러한 소동을 겪으며 자정에 떠나기로 한 기차는 새벽 2∼3시쯤에야 함흥역을 출발했다. 탑승자는 5000여 명이 넘는 듯, 기차 지붕 위에도 빼곡히 사람이 올라가 있었다.

    함흥에서 흥남까지는 30리 남짓한데, 몸이 무거운 기차는 헉헉대며 3시간을 간 후에야 흥남역에서 긴 숨을 토해 놓았다. 그러는 사이 기차를 타지 못한 함흥 시민들은 30리밖에 되지 않는 흥남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투를 앞두고 비상사태가 선포된 지역에서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의 통행은 엄격히 제한된다. 이때 통제를 하는 것은 헌병이다.

    평시에 헌병은 군기(軍紀)를 잡고 군에서 일어난 사건을 수사하며 국군의 날 같은 행사 때 질서를 잡는 일 정도만 한다. 그러나 전시가 되면 군용 차량과 병력이 신속히 이동할 수 있도록 모든 도로를 통제하는 일부터 한다. 또 최전선에서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도망쳐 오면, 바로 뒤에 포진해 있다가 이들을 즉결처분하기도 한다. 헌병의 이러한 즉결처분권 때문에 병사들은 적을 향해 돌진하는 효과를 거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함흥과 흥남을 잇는 도로에도 미군 헌병들이 개미떼처럼 깔려 민간인을 통제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헌병이 없는 논틀 밭틀을 따라 흥남으로 철수했다. 날이 밝자 흥남에는 기차를 타고 온 5000여 명 외에도 시골길을 따라 철수해온 주민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 명이 복작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싣고 갈 배가 도착하지 않았다. 어렵게 사지를 뚫고 나온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도 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철수 포기한 친구

    이때서야 현봉학은 함흥 운흥리 교회에서 데리고 나오지 못한 친구 박재인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현봉학이 운흥리교회를 찾아가 빨간 딱지를 나눠주며 “오늘 밤 함흥역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박재인은 “마누라가 만삭이다. 오늘 내일 몸을 풀 것 같은데, 어찌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 현봉학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인민군이 오면 기독교인인 자네는 죽는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박재인은 “마누라가 기차에서 해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못 간다”고 했다.

    그래서 박재인은 함흥에 남았는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현봉학 박사는 ‘1951년 4월 박재인이 북한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흥남에 도착한 미 10군단은 배를 보내달라고 무전을 쳤다. 많은 사람을 태우려면 함포가 탑재된 군함보다는 상륙작전에 쓰이는 LST(전차 상륙용 대형 주정)가 유리하다. 현봉학은 원래 한국 해병대 소속이었으므로, 한국 해군을 향해 LST를 보내달라고 무전을 쳤다. 일주일여를 기다리자 호위함대와 함께 사람을 태우고 갈 배 11척이 흥남항에 도착했다. 세 척은 한국 해군의 LST고, 나머지는 미군 LST와 일본에서 급송된 미국 상선이었다(상선도 물자를 싣는 공간을 비우면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다).

    포니 대령의 자비심

    흥남항에서 철수를 총지휘한 이는 미 10군단의 부참모장인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 대령이었다. 포니 대령은 흥남항에 모여든 민간인을 태우고 공간에 여유가 있으면 흥남항 부두에 모아 놓은 유류와 탄약 등 전투물자도 실으려 했다. 이때 포니 대령이 전투물자를 실으려고 결심했다면 많은 피란민이 북한에 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니 대령은 전투물자의 탑재를 포기하고 피란민들을 태우게 하는 자비심을 일으켰다.

    11척의 함정은 콩나물 시루처럼 군인과 피란민을 싣고 미 7함대 전투 함정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으로 출발했다. 이중 몇 척은 재빨리 부산항에 사람을 내려 놓고 다시 흥남항으로 와 또 사람을 태워가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산은 밀려온 피란민으로 복작거리고 있었다. 여기에 흥남에서 온 피란민들까지 보태지자 더욱 복작거렸다.

    일부 함정은 포항에 피란민을 내려놓았다. 부두가 없어도 사람을 내려 놓을 수 있는 LST는 거제도의 장생포로 가서 피란민을 상륙시켰다. 거제도는 이렇게 해서 이북 사람들이 발을 딛기 시작했는데, 그 후 북한군 포로수용소까지 생겨, 남쪽 끝에 있지만 유독 월남자가 많은 섬이 되었다(현봉학의 어머니인 申愛均 여사는 1951년 거제도에 ‘일맥원’이라는 고아원을 차리고 이어 대광중학교 분교를 열어, 함경도에서 어렵게 내려온 사람들을 거두었다).

    11척의 배가 군인과 피란민을 실어나르는 동안 미 7함대 전투함들은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많은 포탄을 발사해 중공군의 추격을 차단했다. 인천상륙작전 때 맥아더 원수가 탔던 기함(旗艦)은 ‘마운트 맥킨리’함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이 배에 승함해 흥남 포격을 지켜보았다. 11척의 배가 마지막으로 흥남을 떠난 것은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펼치던 미군 병사들이 전쟁의 마지막날로 학수고대했던 12월24일이었다. 마운트 맥킨리함을 비롯한 전 전투함은 일제히 흥남 부두에 늘어놓은 유류통과 탄약을 향해 함포 사격을 가해, 흥남 부두 전체를 파괴했다.

    오랫동안 한국은 흥남대철수를 패배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미군의 평가는 전혀 달랐다. 미군은 흥남에서 많은 병력과 인원을 안전하게 철수시켰기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싸울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이듬해 봄 철수작전을 주도한 알몬드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켰다. 한국이 흥남대철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45년이 흘러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쉰들러 리스트’란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였다.

    이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에야 우리 사회는 ‘흥남대철수가 단순한 패전이 아니고 많은 사람을 사지에서 구해낸 장엄한 행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때 우리 사회가 찾아낸 사람이 의업에 종사하고 있던 현봉학 박사였다. 현봉학 박사가 약관 28세 때 민간인 철수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9만8000여 명이라는 많은 민간인은 북한 땅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현박사는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박사는 날 때부터 한국의 쉰들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1922년 그는 함흥에서 영생고녀 교목(校牧)을 지낸 현원국(玄垣國) 목사와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지낸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5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이중 남동생 하나가 6·25전쟁 전에 결핵으로 죽어 4남1녀가 장성했는데, 그의 큰형 영학(永學·80)씨는 이화여대 교수로 오래 봉직한 신학자다. 바로 밑의 동생 시학(時學)씨는 해군 소장으로 예편해 모로코 대사 등을 역임했고, 동생 웅(雄)씨는 ‘피터현’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마친 그는 평양기독병원에서 인턴을 끝낼 즈음 광복을 맞았다. 그 후 고향인 함흥으로 의사생활을 하러 갔는데,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박해가 너무 심해 의업을 열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하던 봉학은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윌리엄스 부인(1907년 충남 공주에 영명학교를 세운 분)의 주선으로 미국 리치몬드의 버지니아주립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2년여 동안 임상병리학을 공부하고, 195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 6·25전쟁을 맞았다.

    그날부터 그는 피범벅이 된 채로 병원으로 밀려드는 병사들을 치료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사흘째(6월27일) 되는 날 자정 무렵, 문창모 세브란스 병원장이 전직원을 모아 놓고 “인민군 전차가 시청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각자가 알아서 활로(活路)를 모색하라”고 언명했다. 이때서야 현박사는 ‘큰일났구나. 나는 월남자인데다 미국에서 공부했고 기독교인이니, 인민군에 잡히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병원 직원 두 명과 함께 피신을 결심했다.

    구멍난 조각배로 한강 건너

    그가 손쉽게 피신을 결심할 수 있었던 데는 서울 신당동에 있던 그의 집에는 어머니와 여동생만 있고 나머지 형제들은 군이나 미국에 가 있어, 신경 쓸 가족이 적었다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현박사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알아서 몸을 피할 것으로 믿고 피신을 결심했는데, 얼마 걷지 않아 그는 “꽝” 하는 폭음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울 시내를 향해 거꾸로 올라오는 피란민들을 통해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한강으로 나간 현박사 일행은 강변을 따라 서빙고 쪽으로 걷다가 구멍난 나룻배 한 척을 발견했다. 세 사람은 ‘한 사람이 구멍에 앉아 엉덩이로 물을 막고, 한 사람은 물을 퍼내며, 또 한 사람은 손으로 노를 저어 건너가 보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그 방법으로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수원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세브란스 동기생인 주정빈을 만났다. 주정빈은 소령 계급장을 단 육군병원장 자격으로, 경기도립병원에 야전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봉학은 친구를 도와줄 요량으로 이 병원에 남아 부상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약품이 너무 부족했다. 소독약과 마취약이 없어 절단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오면 끓는 물로 톱날을 소독하고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절단하는 수술을 감행하곤 했다. 한마디로 병원은 생지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육군병원도 인민군의 공세 때문에 대전으로 철수했다가 다시 대구로 후퇴했는데, 봉학도 이 병원을 따라 대구로 내려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그는 2대 국회의원 황성수씨(목사)를 만났다. 황의원은 “내가 신성모 국방장관을 잘 안다. 닥터 현의 일자리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봉학은 일본에 주둔하다 부산항을 거쳐 들어와 막 마산에 주둔한 ‘미 25사단의 사단장(Kean 소장) 통역으로 일하라’는 국방장관의 명령서를 받아들었다.

    봉학은 마산으로 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왔다가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해군 총참모장 손원일 제독을 인사차 방문했다. 그리고 해병대의 백남표 소령이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미 25사단 사령부를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백소령은 미 25사단 사령부를 지나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진동리의 한국 해병대 부대 앞에서 지프를 세웠다. 백소령은 “당신 같은 사람은 미군부대가 아니라 한국 해병대에서 일해야 한다”며 껄껄 웃었다. 이것이 현박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제는 통일을”

    그날 이후 현박사는 해병대 문관이 되었다. 그는 한국 해병대가 무기 등을 얻기 위해 미 25사단을 찾아갈 때 통역을 담당했다. 문관으로 봉학은 진동리 전투와 통영전투에 참여했다. 이 시기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일본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을 주축으로 10군단을 구성했다. 이때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 1사단에 배속돼 미군과 함께 인천으로 향하게 되었다. 서울을 수복한 후 그는 한국 해병대를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다가 알몬드 10군단장을 만나 역사적인 흥남 대철수에 관여하게 된 것이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생살여탈권을 잘 활용해 흥남에서 9만8000여 명을 살려냈다면, 그의 가슴에는 자부심이 그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누구도 그의 공적에 주목하지 않았듯이 그 또한 수많은 사람을 살려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살아난 9만8000여 명이 아니라, 함흥에서 기차 타기를 거부한 친구 박재인과 흥남항에서 끝내 배에 타지 못한 2000여 명의 고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짓누르는 또 하나의 고통이 있다. 그가 흥남철수작전으로 10여만명을 구한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로 인해 10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는 뜻이 된다. 이산가족들의 고통이 실향민인 그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최근 세 차례나 이루졌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본 그는 “상봉이 아니라, 이제는 이산가족들이 한데 살 수 있어야 한다. 남북이 화합하고 통일을 이루는 날이 하루빨리 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