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14일 오전 평양 고려호텔에서 남측 수석대표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북측 수석대표인 권호웅 내각참사를 비롯한 남북대표들이 제16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진행하고 있다.
양측 대표 다섯 명이 참가한 공식 테이블에서의 논의는 6월 면담에서 나온 이야기를 반복해 점검하는 수준에서 맴돌았다. 평양으로 떠나는 회담 대표팀이 야심차게 발표했던 ‘평화체제 논의’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통일부, 남북회담사무국,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에 이르기까지 당국자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바뀐 것은 그날 밤이었다. 이제껏 회담에서 논의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의 합의문 초안이 테이블 위에 던져진 것. ‘실질적인 조치들에 대해 협의하고 실천’ ‘6·15 시대에 맞게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한 실천적인 방도를 적극 모색…’. 겉돌던 주제를 ‘…을 폐지한다’는 부정적인 어휘 대신 ‘…방도를 모색한다’는 긍정적인 어휘로 대체한 전략적인 문안이었다.
당국자들의 의구심은 한 가지로 모아졌다. 북측이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나 17일 이른 아침, 북한 대표단은 전격적으로 문안에 동의한다. 예상 외의 일이었다. 북측 대표단은 마치 협상문안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면밀한 검토도 없이 논의를 마무리했다.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에게조차 미스터리일 만큼 갑작스러웠다. 누군가가 미리 조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극적인 타결이었다.
미스터리를 푸는 키워드는 테이블에 앉은 공식 협상팀 이외에 평양에 있던 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서훈 통일부 실장(1급). 공식 브리핑은 물론 언론을 통해서도 방북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대외 직함은 ‘실장’일 뿐, 통일부 어떤 부서 소속인지 설명이 없다. 실제로는 국가정보원 대북전략국장이기 때문이다.
남측의 국정원과 북측의 노동당 통일전선부. 양측을 대표하는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회담 준비에 관여하거나 은밀하게 사전조율을 하는 것은 오랜 관행이다. 이들은 회담기간 중 공식적으로 정보기관 직함이 아닌 ‘청와대 실장’ ‘국무총리 특보’ 같은 위장 신분을 사용한다. 북측에서는 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내각’의 직함을 내세워왔다. 서로 정보당국자임을 잘 알지만 모른 척하는 일종의 묵계인 셈이다. 언론에서도 회담 기간에는 ‘대외 명칭’을 사용해 기사를 작성하다가 끝나면 ‘진짜 명칭’으로 돌아간다.
특히 이번 장관급 회담의 북측 단장을 맡은 권호웅 책임지도원(공식 직함은 내각 책임참사)은 서훈 국장과 오랫동안 카운터파트로 일한 인물이었다. 이번 막후협상에서 서 국장의 움직임이 크게 작용했다는 사실은 당국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동영 장관은 공식 테이블의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에 대비해 이 ‘별도 채널’의 사전조율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9월16일 아침 테이블에 올라온 협상문안은 실제로는 이 채널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권호웅 단장이 쉽게 문안에 동의한 것임을 자연스레 유추할 수 있다. 한 회담 관계자는 “큰 틀에서는 정 장관이 합의를 이뤄냈지만, 구체적인 부분에선 서훈 국장의 공이 컸다”고 말했다.
국정원-통전부 라인은 6월 정 장관의 평양 방문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6월17일 이른바 ‘대북(對北) 중대제안’이 논의된 정 장관과 김 위원장의 단독면담 당시 배석한 인물이 서훈 국장과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다. 서 국장은 이때도 단독면담에 관한 막후접촉 및 전략기획을 담당했다는 전언. 이 무렵 통일부 당국자들 사이에는 정동영-김정일 면담에 국정원 관계자만 배석한 것에 대해 볼멘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