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전파되는 맹신 동물로의 회귀

  • 입력2005-10-27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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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파되는 맹신 동물로의 회귀

    일러스트 박진영

    “어,어! 누르지 마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좁은 공간 한편에서 터져 나왔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이수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엘리베이터에 늦게 탄 한 젊은 여성이 문을 닫는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그 여성이 주춤하고 손을 그냥 내리자 다른 탑승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엘리베이터는 단추를 누르면 그때부터 또 3분을 기다리거든요” 하고 말한다. 모두 그 여성이 단추를 누르는 ‘무모한 짓(?)’을 중단한 것을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러한 광경은 그 다음 7호선 살피재역에서도 재현됐다. 필리핀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사람들이 다 탔으니) 엘리베이터의 목적층 단추를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단추를 누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에 걸려온 옆 사람들의 제동과 간섭에 그는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문득 ‘이 사람들, 참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엘리베이터의 제어장치는 처음 버튼을 누른 시각으로부터 3분 후에 작동하는 것이지, 누를 때마다 다시 3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를 때마다 3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지식(?)은 그저 ‘들은 풍월’로 들은 대로 남의 이야기를 되팔고 있는 것이고, 그 사람들은 틀린 지식을 갖고 남에게 함부로 간섭하려 들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참 쉽게 남을 가르치려 든다. 자신이 ‘마땅히 그렇다’고 생각할 때, 남에게 강요하는 태도도 단호하다. 이것은 대단한 신념이다. ‘신념’에서 나오는 이러한 행동은 상대편과 나 모두를 위해서 좋으라고 하는 일이기에 잘못을 탓하기도 어렵다.



    사람들은 ‘참고 기다려라’고, 혹은 ‘참을성 없이 함부로 단추를 눌러서 전기를 낭비하지 말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떠나자고 단추를 누르면, 제어부는 곧 상황판단을 위한 안전 확인 절차인 서브루틴(subroutine)을 건너뛴 채 바로 출발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단축된다. 결과적으로 전기도 절약되기 때문에 ‘떠납시다’ 하고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누르는 일은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단추 하나의 전기를 아낀다고, 오히려 무수히 많은 논리회로에 전류를 흐르게 하면서 시간과 전기를 낭비하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문 닫는 단추를 누르려는 사람에게 ‘참을성이 결여됐다’며 비난하는 것은 더군다나 이해 못할 일이다.

    한국인에게 ‘너희들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처분만 기다려라’는 분위기가 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런 분위기는 억압적인 통치자에게 매우 편리한 사회환경일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처분만 기다리라’는 복종 분위기가 (지하철 객차 유리창 하나 깨지 않고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간) 대구 지하철 화재에서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나게 한 원인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엘리베이터라는 기계장치에 대해서까지 기다림의 미덕을 갖도록 강요하는 압력은 실생활 곳곳에서 제법 많이 관찰된다.

    한번은 엘리베이터에서 지상층에 가겠다는 단추와 문 닫는 단추를 눌렀더니, 먼저 탄 아낙들이 “손을 대면 그때부터 3분!”이라며, 또 늦겠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제어회로에 ‘어디에 간다’거나 ‘다 탔다’를 알려서도 안 되고 그저 엘리베이터를 타면 숨죽이고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필자가 미소를 띠고 “잠깐만요” 하고 양해를 구하며, 엘리베이터가 떠나기 직전까지 두세 번 단추를 더 눌러 그래도 제 시간에 엘리베이터가 출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출발 단추를 다시 누른다고 해서 늦어지는 것은 아님을 증명하고 “내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사람”이라고까지 말해줬는데도, ‘단추에 손대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사람들의 맹신(盲信)이 좀처럼 흔들리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정확한 지식을 쌓아 더 깊은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서 들은 그대로 맹목적으로 말을 옮기고, (확인해보지 않고 남의 이야기를 옮겨, 사실은 그 이야기가 잘못된 것이어서 그 허황된 소문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있어도) 남의 이야기를 쉽게 전한다.

    옳고 그름조차 모르면서 잘못된 정보로 중론과 통념을 형성해가면서 살고 있는 셈이니 지난 여러 시대에도 억울한 오명을 씌워 남을 희생시킨 일이 많았을 것이다.

    화제를 바꿔 지난날 인류사회 역사 기록의 한정된 시각이 우리에게 남긴 여러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필자는 전세계를 ‘강한 문명’과 ‘약한 문명’으로 크게 나눠 동서양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동양은 그 옛날 인류를 대표할 만한 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반면 서양은 너무나 미개한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와 겨우 우리 역사의 문명화한 모습을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BBC, CNN 등 서방 언론이 독점 공급하는 세계 여론의 ‘기조(컴퓨터의 디폴트 밸류(자정출발수치)와 비슷하다)’와는 달리, 필자는 지난날의 아랍권, 페르시아 그리고 우리 동이권(東夷圈)의 문명 등 ‘추축 문명(Axis Civilization)’을 ‘강한 문명’으로 보고, 18세기 이후 번번이 ‘연합국’으로 행동해온 영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의 문명을 ‘약한 문명’이라 명명한다.

    사실, ‘세계적인 사조’라는 것도 AP, UPI 등 초창기 서방 통신사들이 대량으로 쏟아낸 이야기가 결국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이 되어 다른 시각은 불가항력적으로 밀려나버린 것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에도 혹시 남의 이야기에 의해서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처럼) 경우와 같이 무책임하게 대세에 쏠리면서 (문명과 문화의 역사가 월등히 긴데도 오히려 지난 200년간 약세에 몰린) 동양의 ‘강한 문명’에 갖은 후진적 이미지를 씌워온 것은 아닐까.

    러시아와 영국은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배당하는 일에만 움직이는) 시스템 군대를 만들어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주된 세력이 되면서, ‘연합(Allied)’을 형성해 움직였고, 그 다음 세기에는 소련과 미국 등이 (무력만이 강대한) 제국주의, 이른바 강국을 형성했다.

    새롭게 생긴 제국은 분명, 상고시대부터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해왔고 농사를 지도해서 전체 유라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친 단군 제국과는 다르다. 동양을 ‘강한 문명’으로 분류하는 것이 정 이해가 안 가면 ‘정신적으로 강한 문명’이라 고쳐 부를 수도 있겠다.

    단군시대 이래 진정한 힘을 얻으려면 도를 닦고 고행을 통해 선통(禪通)과 도통(道通)을 해야 했다. 따라서 정신력 강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후 여러 국가가 무력화하면서 진나라와 한나라 등 무력과 정신력 양쪽이 강한 나라들이 생겼는데 한국족(부여, 신라, 고구려 등)은 여전히 백성을 위한 천제(天帝)의 제국을 이어갔다.

    시스템 군대에 반(反)해서 백성을 위하고 성군을 위하는 이러한 ‘강장주의(强將主義)’는 중앙아시아에서 ‘한’과 ‘탄’으로 도시명과 국명이 끝나는 여러 나라를 거쳐 서방으로 전달돼 동양의 끝자락 소아시아까지, 그리고 ‘아틸라(Attila)’의 흉노(Huns) 등은 유럽 끝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맑은 태양을 잃은 채 한랭 다습한 서북쪽 땅으로 밀려가, 체질의 강단성을 잃고 숭고한 정신력을 모르는 ‘약한 문명’을 갖게 된 서양인은 동양인처럼 ‘천지와 우주의 경(vertical)과 위(horizontal)를 꿰뚫어보면서’ 인류 전반을 경영할 계제가 아니어서 합종연횡하는 일에 강점을 보이게 됐다.

    지난 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협력하여 아랍, 터키, 페르시아 및 달단국(Tartary·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 동단 연해주까지 뻗어 있던 광대한 나라, 러시아에 패망) 등 중앙아시아에 중심을 둔 추축 문명의 후예들을 멸망 또는 약화시켰는데, 그렇다고 당시 패망한 국가를 문화적 견지에서 원시국이나 야만국으로 규정해선 안 된다.

    특히 우리 민족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정신적 깊이’를 찾고, 참을성 있고, 장래를 대비할 줄 아는 ‘만물의 영장’이 되기 위하여 반만년을 노력해왔다. 그 결과, 체력과 정신력이 강인한 우수 민족이 됐는데 이제 와서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점점 마모되고 있는 것 같다.

    국민은 의지박약한 생활 방식으로만 흘러가고 있는데 정부는 이를 방치하고, 대기업은 미디어를 통해 소비자 심리조작에만 전력을 다하고 뒤따르는 폐단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광복 이후 반세기 동안을 관찰하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인류가 불안에 떨지 않고 공존하려면 조지 부시식(式) 무력 질서가 아니라 ‘동양적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단군 질서’나 ‘유교적 가르침’ 등 이미 이 사회가 예부터 이룩해놓은 것이 있다.

    필자는 민주주의가 한국에 도입된 이래의 역사를 줄곧 관찰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영국은 대부분 땅을 독점하고 있는 소수의 유복한 가족만이 별도고,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특권 귀족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끼리 대를 물려 ‘힘을 합쳐서’ 살아남는 훈련이 몸에 배어 있어서 무리 없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활용하고, 나머지 서구도 이에 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구가 시작한 민주주의는 그것이 실제로 표방하는 것보다 여러 면에서 미비점과 한계가 있다.

    영국인에게 한 가족의 지지 정당은 할아버지 때부터 일어난 여러 일이 누적돼 결정되는 것이라 우리 여건과는 다르다. 그들에겐 단결력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남의 힘에 기대는 것이 기본이지만, 우리는 사회정의가 뚜렷해서 ‘외톨이의 경우라도 신념으로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한다’거나 ‘하늘도 무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우리 민족에게는 신성한 통치이념을 위해서 혼자라도 싸울 지배자의 피가 흐르고 있다.

    ‘만민 평등의 (서구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그 방식을 가능케 하는 작은 대중의 무수한 묶음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유연성 있게 흥정할 줄 알고, 매스컴에 속지 않는 많은 지식인, 그리고 회의 진행법을 속속들이 알고, 서로 힘을 합칠 줄 알면서(나는 이것을 ‘약한 문명의 기술’이라 부른다)도, 양심이 항상 살아 있어 진정 대중을 위해 기여하려는 뿌리깊은 역사의 기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기반이 없는 곳에서 무조건 투표수만으로 민주주의가 원활하게 이룩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세칭 ‘민주주의’라는 표결주의(Ballotcracy)가 뜻을 가지려면 강자의 요구에 호락호락하지 않는 체질을 기르고, 서로 힘을 합할 줄 아는(나아가 나라들이 연합국을 쉽게 형성하는) ‘약한 문명’의 바탕이 그 사회에 깔려 있어야 서구식 민주주의를 영위할 수 있다.

    한국은 지금까지 민주주의가 아니라 예부터 각 가정, 마을과 이웃, 그리고 이 사회 전체에 깊숙이 심어진 ‘도덕과 율법’의 덕을 입어 장구한 역사를 통해 세계가 부러워하는 ‘질서’를 유지해왔음을 모두가 시인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기반의 덕을 계속 향유하면서 천천히(또는 하는 수 없이) 서구의, 즉 ‘약한 문명’의 기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 사회에서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강행되는 세계화는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한국의 강압적 ‘세계화’라는 것은 말끝마다 ‘바꿔야 한다’를 내세워 결국은 정권을 노리는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에서 나온 책략, 또는 상업적 목적을 겨눈 바람잡이 구호일 때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깊숙이 깔려 있는, 그러나 마음 가다듬으면 훤히 보이는 우리의 옛 ‘질서’ 체계를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서방 언론에 젖어서(필자도 예외가 아니지만), 또는 문화적이고 우아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양의 ‘약한 문명’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동방(東方)의 귀중한 기반을 감안해서 ‘전세계는 하나의 문명밖에 있을 수 없다’는 바보스러운 ‘부시 신조’가 횡행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잘 모르면서 용감하게 이웃을 견제하는 사람들의 표는 그래도 투표장에서 존중해야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비판하고 판단할) 자료를 정직하게 공급하는 지성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언론은 페어플레이 정신에 입각하여 구성원이 여러 주장을 소개할 기회를 골고루 제공해야 한다.

    옆에서 주워듣고 생각 없이 되파는 ‘자본주의 만능’의 무반성(無反省) 풍조는 우리를 약육강식의 동물 상태로 되돌리고 있다. 그러한 ‘동물로의 회귀’가 작금 오히려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있기에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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