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테러’ 브루스 링컨 지음/김윤성 옮김/ 돌베개/299쪽/1만5000원
한편 9·11 직후 부시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단시간 에 무너뜨렸으며 나아가 이라크 공습까지 계획했다. 그러자 세계 각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수많은 민간인의 희생을 초래할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그런데도 부시 정권은 이라크전쟁을 감행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 과정에 부시의 공격적인 외교정책과 전쟁 감행을 적극 지지한 집단이 있다. 제리 팔웰과 팻 로버트슨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파’가 바로 그들이다. 이를 계기로 지식인들은 부시 정권의 강력한 지원세력인 ‘기독교 근본주의’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됐다.
9·11을 계기로 국제정치 차원의 테러리즘과 종교적 근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와중에 나온 이 책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 9·11 이후 종교와 폭력에 관한 지적 성찰을 담은 역저이다.
서구 근대성과 종교의 私事化
이 책이 지닌 최대의 장점은 9·11을 단순한 테러리즘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견 종교학자인 브루스 링컨은 9·11을 낳은 근원을 심층적으로 추적한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9·11의 본질은 서구 근대성의 전세계적 확산과 그에 대한 도전에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그의 논지를 따라 부연하자면 이렇다.
서구의 근대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전 유럽사회가 황폐화하자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 해법으로 종교적 관용과 신앙의 자유를 내세웠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교(國敎) 제도의 철폐와 정교(政敎) 분리가 이뤄져야 했다. 종교에 대한 국가권력의 간섭과 정치에 대한 종교의 간섭이 동시에 해소돼야만 온전한 의미의 종교자유가 보장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예술, 과학, 경제, 철학 영역에서도 종교의 입김을 제거하는 논리로 확대되어 종교의 영역은 매우 축소됐다. 이제 종교는 개인의 내면, 즉 영혼 구원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 관심에 한정돼야 했다.
서구 근대성은 종교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제시했는데 그것이 결국 종교의 사사화(私事化)와 주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세 기독교 왕국이 해체되면서 예술, 철학, 과학, 정치, 경제가 독자적인 살림을 차려 분가하고, 그 모체이던 종교는 개인의 내면세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것이 계몽주의이며 그것의 대변자가 바로 칸트다. 이후 공공 영역에서 철수한 개인 단위의 사적 종교가 서구 종교의 바람직한 모델이 됐다.
저자는 서구 종교의 이러한 역사적 변동 과정을 최대주의적(maximalist) 종교에서 최소주의적(minimalist) 종교로의 변동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전자는 종교적 요소가 모든 사회 영역에 침투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종교가 여러 사회 영역 중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지칭한다. 서구 근대는 최소주의를 종교의 이상 모델로 선택한 것이다.
신실한 자에 의한 신성한 의무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모델이 서구 제국주의를 통해 비(非)서구 세계에 강요됐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이전의 거의 모든 비서구 세계는 종교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최대주의 형태였으나 식민지 경험 이후 최소주의 모델을 강요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독립국의 집권세력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는데, 이들은 서구를 모델로 한 세속국가를 표방했다. 잘 알다시피 세속국가는 헌법에 정교분리와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고 종교를 개인의 사적 영역에 위임하는 최소주의 모델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델에 근거해 출범한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에서 집권세력의 독재와 타락, 빈부격차의 증대와 같은 문제로 대중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혼란 속에서 대중을 등에 업고 등장한 것이 바로 이슬람 원리주의다.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이슬람 내부의 최대주의’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집권세력이 최소주의 모델을 지향하는 데 반해 원리주의자들은 최대주의 모델을 고수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서구 근대성에 기초를 둔 최소주의 모델이 서구사회의 타락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의 세속화를 초래한 장본인이라고 비판하면서 최대주의 모델을 그 해법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이슬람 원리주의의 타깃은 자연스럽게 두 개가 된다. 하나는 서구 근대성을 대표하는 미국 자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구의 세속 문화를 수용하는 현 아랍국가의 집권세력이다. 저자의 시각으로 보면 9·11테러는 바로 이슬람 최대주의에 의한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심판이자 아랍국가 집권세력에 대한 경고이다.
이 책에서 9·11이 지닌 성격을 탐색하기 위해 1차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9·11 비행기 납치범들에게 내려진 최후 지령’ ‘조지 W. 부시의 대국민 연설’ ‘오사마 빈 라덴의 비디오테이프 연설’ ‘팻 로버트슨과 제리 팔웰의 700클럽 인터뷰’다. 저자는 알 카에다와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원리주의(최대주의) 진영의 자료와 부시, 로버트슨, 팔웰로 대변되는 기독교 근본주의(최대주의) 진영의 자료를 서로 교차해 분석했다. 그 결과 두 진영의 문서에서 놀라우리만큼 유사한 구조를 발견했다.
알 카에다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9·11 비행기 납치범들에게 내려진 최후 지령’에 따르면 납치범들은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순교자의 자세로 매 순간에 임해야 하며 살해 행위를 희생 제의(祭儀)로, 파괴를 정화(淨化)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이교도와 불신자를 살해하는 것은 ‘신실한’ 자에 의한 신성한 의무 이행으로 간주된다.
빈 라덴의 연설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가 신성성의 메타포로 채색되어 나타난다. 눈에 띄는 것은 이교도보다 더 위험한 집단으로 위선자를 지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위선자는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으면서도 미국과 타협하는 최소주의적 무슬림을 가리킨다. 세속화한 무슬림을 위선자로 규정해 주요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최대주의 종교의 파괴력
부시의 연설문은 빈 라덴의 것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덜 드러난다. 그러나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거기에도 기독교적 악마론이 잠재해 있다. 기독교인은 부시의 ‘세속적’ 연설문에서 투쟁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읽게 된다.
로버트슨과 팔웰의 인터뷰에는 악마론이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알 카에다와 빈 라덴을 악마의 화신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9·11을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신(神)의 경고라고 해석한다. 현대 미국사회에 만연한 낙태, 동성애, 여성주의 등은 신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신이 이를 심판하기 위해 9·11을 허락했다는 식이다.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가 이교도와 위선자를 주요 타깃으로 삼았듯 이들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교도와 세속적인 미국을 적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미국이 하루빨리 기독교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최대주의자들이다.
이슬람 최대주의와 기독교 최대주의는 극단적으로 대치하고 있지만, 빛의 아들과 어둠의 자식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해 상대방을 악마로 간주하는 악마의 정치학을 공유한다. 악마의 정치학에서는 선과 악 사이의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엄청난 폭력을 동반한 십자군전쟁이나 지하드가 선포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최대주의 종교는 우리와 거리가 먼 남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한국 개신교 일각에서 보이는 극우 파시즘적인 행태, 타종교와 전통문화에 대한 정복주의와 승리주의, 남아시아의 지진 해일과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이교도와 동성애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매도하는 수사적 폭력 등은 한국 개신교 최대주의가 매우 위험한 수위에 와 있다는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