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농민의 논리, 국가주의 앞에 무너지다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5-11-11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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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은 중화 문명의 상징이다. 한국인 관광객이 장성을 보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이징 인근의 바다링(八達嶺). 그러나 허베이성 오지의, 영화 ‘귀신이 온다’ 세트장을 에워싼 장성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경치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장성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에서 촬영한 영화 ‘귀신이 온다’는 일본군에 점령당한 한 시골마을의 이야기로 200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일본군이 점령한 시골 마을의 순박한 농민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는 내용의 영화 ‘귀신이 온다’.

    베이징에서 탕산(唐山)까지 고속버스로 2시간이 걸렸다. 기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중국에선 과거 기차가 거의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다. 그런데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망이 발달하고 쾌적한 신형 고속버스가 증가하면서 도시와 도시를 이동할 때 어지간한 거리면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장거리를 운행하는 고속버스는 대개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짐칸과 화장실이 있다. 2층 버스를 탈 때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멀리 떨어져 앉는 것이 화장실 냄새를 피하는 요령이다.

    탕산을 거쳐 영화 ‘귀신이 온다’의 무대인 허베이(河北)성의 외딴 시골로 가려는 길이다. 외딴 농촌에 귀신, 아니 일본군이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귀신이 온다’의 무대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물속에 잠긴 장성의 돈대(墩臺)가 넓은 호수 한가운데 덩그렇게 떠 있는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중교통편도 없고, 웬만한 지도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그곳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 과연 제대로 찾아갈 수는 있을지 막막했다. 베이징에서 청더(承德)를 거쳐 가는 방법과 탕산을 거쳐 가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탕산을 택한 것은 필자가 탕산을 중국의 상징으로 여겼던 때가 있어서다.

    원래 탕산은 명나라 때부터 자기 생산지로 명성이 높았다. 종이처럼 얇은 자기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유명 자기는 대부분 탕산 제품이다. 하지만 나에게 탕산은 지진의 도시로 각인됐으며, 현대 중국에 호기심을 갖게 한 곳이다.

    지진의 도시 탕산



    리영희 선생이 ‘8억인과의 대화’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룬 중국 관련 글은 1980년대 대학에서 중국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을 ‘중공’이라고 부르고, ‘중공’하면 괴뢰, 붉은 야만, 기아, 침략, 반란, 피비린내 나는 린치 따위를 조건반사처럼 떠올리던 때 리영희 선생의 글은 냉전 시대적 사고, 반공 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을 보게끔 했다. 내가 탕산 지진을 처음 접한 것도 리영희 선생의 글에서였다.

    1976년 7월 탕산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그해 12월 미국 뉴욕에서는 12시간 동안 정전 사태가 벌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재난을 당한 두 도시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뤘다. 탕산에서는 작은 난동도 일어나지 않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이웃을 돕는 희생정신이 발휘되는 등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탕산을 목격한 주중 일본대사는 “땅은 흔들리고, 건물은 계속 허물어진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전체를 위해 행동했다.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과 감동에 말없이 숙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지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정전이 지속된 12시간 동안 뉴욕은 정반대였다. 백화점과 상가가 약탈당하고, 살인과 강간, 방화, 파괴, 난동이 잇따랐다. 그야말로 공포의 밤이었다. 그날 밤 뉴욕 경찰은 3776명을 체포했다. 리영희 선생은 ‘당산 시민을 위한 애도사’에서 두 도시의 상황을 대비시키면서 이렇게 썼다.

    “부자 나라의 시민들은 남의 것을 빼앗고 강간했다. 세계에서 어쩌면 제일 가난한 사회의 당산 시민들은 자기 것을 버리면서 이웃을 도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엄청난 인간행동의 질적 차이였다.”

    마오쩌둥 시대의 종말

    선생의 글을 읽은 뒤로 나의 머릿속에 탕산은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깊이 새겨졌다.

    탕산 시내 한복판에 ‘항진(抗震)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항진 기념관’이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으로 남기는 것보다 중국인이 얼마나 지혜롭게 지진에 대항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기념물이 전시되어 있다.

    탕산 대지진이 일어난 것은 1976년 7월28일 새벽 3시42분. 진도 7.8의 강진이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제대로 서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온 도시가 폐허로 변했다.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24만2000명이 죽고, 16만5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서방 세계에서는 80만명가량 사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당시 탕산 인구가 100만명이었으니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1976년엔 중국 정치와 역사에 탕산에서만큼 강도가 센 지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해 1월, 중국인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죽었고, 7월에는 중국공산당 군대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가 죽었다. 한 사람은 정치와 외교를 맡았고, 한 사람은 군대를 맡아 중국 공산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각각 마오쩌둥(毛澤東)의 왼팔과 오른팔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떠난 뒤 탕산에 진도 7.8의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탕산 지진의 피해가 채 수습되기도 전인 9월9일 마오쩌둥이 죽고 말았다. 중국인에겐 강진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당시 중국인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제 와서 보니 탕산 지진이 괜히 난 것이 아니다. 황제이던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나면서 탕산 사람들을 데려간 것이고, 탕산 지진은 마오쩌둥의 죽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중국에서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데, 용이 승천할 때 많은 사람을 데려간다고 믿었다. 중국인이 마오쩌둥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위대한 인민 승리의 기록’

    마오쩌둥이 죽고 한 달 뒤 장칭(江淸) 등 문화대혁명을 이끈 이른바 ‘4인방’이 체포됐다. 탕산 지진이 일어난 1976년에 마오쩌둥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탕산 지진을 마오쩌둥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정치적 상징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항진 기념관’에는 마오쩌둥 이름으로 중공당 중앙이 내려 보낸 ‘13호 지시’가 전시되어 있다. 탕산 일대에 발생한 지진에 전국 당원과 군, 인민이 모두 긴급 복구에 나서라고 지시한 문건이다. 아마도 마오쩌둥이 중국 각급 기관과 인민에게 내린 최후의 지시였을 것이다. 기념관에는 지진으로 형편없이 구겨진 철로 등 피해 사례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지만, 주요 전시물은 당과 군, 인민이 하나가 되어 피해 복구 사업을 펼친 ‘위대한 인민 승리의 기록’이다.

    그 기록 사진들 위에 ‘사람은 결국 하늘을 이긴다(人定勝天)’고 씌어 있다. 인간의 운명과 일의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중국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이지만 마오쩌둥은 사람의 의지가 더 강하다고 믿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통행에 장애가 되는 마을 앞 큰 산을 옮기기 위해 평생 산을 파던 우 노인이 죽자 하늘이 감동하여 산을 옮겨줬다는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를 국민 교육 자료로 자주 애용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역사는 사람들의 의지에 달려 있어서 어려운 난관도 극복할 수 있고, 하늘은 그런 사람을 도와주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는 마오쩌둥은 모든 중국인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길 바랐다. 추위와 굶주림, 국민당군이 포위 공격하는 악조건 속에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2만5000리 장정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마침내 중국 대륙을 차지한 마오쩌둥다운 신념이다.

    역사 발전의 동력을 객관적 법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신념에서 찾는 마오쩌둥의 사고를 두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 하늘을 이긴다고 믿는 마오쩌둥은 인간중심주의자였고, 자력갱생의 신봉자였다. 그는 중국이 낙후되어 있지만 중국인이 단결하여 노력하면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중국인이 그렇게 생각하게끔 교육했다. 탕산 지진 현장은 단순히 재난 복구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라 중국인에게 그런 마오쩌둥 정신을 교육하는 마지막 교육장이었다.

    폐허 속에 꽃피운 정치학습

    지진이 나고 사흘 뒤부터 마을별로 정치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당 간부들이 상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마다 “지진은 곧 공산주의 교육이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지진이 쓸고 간 곳에서 우리는 혁명을 한다’ ‘지진이 태산처럼 우리를 눌러도 우리는 허리를 굽히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은 끝까지 인민의 재산을 복구한다’ ‘탕산의 재난을 보지 말고, 그 재난 위에 핀 붉은 꽃을 보라’…. 당시 탕산에는 이 같은 정치 표어가 적힌 깃발이 나부꼈다. 탕산은 이미 정치학습의 장이 된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거듭된 인도주의적 원조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외국 구호팀에 섞여 스파이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이유보다 이미 훌륭한 교실이 된 재난 현장에 외국인의 진입을 허용해 공산주의 정치교육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탕산은 마오쩌둥이 죽기 전 그의 사상과 정신을 중국인에게 주입하는 최후의 교육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한 기자의 취재수첩엔 그런 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8월3일 ‘항진 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 개학식장에는 이런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지진을 이기기 위해 학교를 열고, 재난 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키워내자.’ 2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했고, 혁명적인 학부모 대표와 초등학교 홍위병 대표, 빈농 대표들이 연설을 했다. 다들 항진 학교의 개학은 마오 주석의 혁명 노선의 위대한 승리라고 말했고, 초등학교 홍위병들은 ‘우리는 적들의 파괴책동을 막는 데 각별히 노력하고 인민해방군을 도와 우리의 역할을 다하자’고 외쳤다.”

    탕산 지진 때 중국인이 보여준 공동체 의식이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한 면이라면, 지진으로 폐허가 된 탕산을 정치학습의 장으로 둔갑시키는 과잉 정치화된 사회, 사람들이 철저하게 국가에 조종당하고 통제된 채 마오 정신을 실천하는 전체주의 사회 또한 마오쩌둥 시대 중국의 한 면이다. 탕산은 마오쩌둥 시대의 그런 두 가지 면모를 보여주는 곳이다.

    그 두 면을 균형 있게 보는 것이 마오쩌둥 시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이 아닐까. 지난날 내가 한 면만 보면서 편향에 빠졌듯 둘 중 어느 하나로 마오쩌둥 시대를 색칠하는 일이 중국에서도, 세계적으로도 흔하다. 그럴수록 중국을 제대로 보는 길은 멀어진다.

    갈 길이 아득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중국에 오면 늘 그렇듯 더우저얼(豆汁兒)이라고 하는 콩국에 멀건 쌀죽 한 그릇, 그리고 밀가루반죽을 긴 꽈배기처럼 만들어 기름에 튀긴 유타오(油條)와 속에 아무런 소도 넣지 않은 만터우(饅頭)로 아침을 먹었다. 중국인의 가장 일반적인 아침식사이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속에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든든하다. 중국식 콩국을 먹을 때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침에 이런 콩국과 죽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든든하게 먹었으니 이젠 택시비 흥정에 나설 차례다. 일단 중간 지점인 쳰시(遷西)현까지 택시로 갈 작정이다. 탕산에서 쳰시까지 약 80km. 1시간30분쯤 걸릴 것이다. 택시를 잡고 흥정한 끝에 150위안(한화 1만9500원)에 가기로 했다. 중국에서, 특히 관광지에서 가장 힘들고 짜증나는 것이 가격 흥정이다. 예전에 항저우에서 인력거를 타고 골목길을 돌아볼 때였다. 10위안(1300원)에 가기로 했는데, 도착해서는 20위안(2600원)을 내라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졌더니 중간에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한 번 대기했으니 10위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따져도 당할 수가 없어서 결국 10위안을 더 얹어주고야 말았다. 그 일이 있은 뒤로는 인력거를 타거나 말을 타거나 택시를 탈 때 확실하게 챙긴다. 중간에 쉬어도 되는지, 사람 수에 따라 요금이 다른지, 편도인지 왕복인지, 두 번 세 번 거듭 확인한다.

    이번엔 운전수를 잘 만난 것 같아 쳰시까지만 탕산 택시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목적지까지 계속 타고 갔다. 목적지까지는 미터기 요금대로 가고, 탕산으로 돌아올 때는 100위안(1만3000원)을 더 내는 조건이었다. 나중에 탕산에 돌아와 계산해보니 총 450위안(5만8500원)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꼬박 열한 시간을 달린 것을 생각하면 거저 다녀온 셈이다. 만약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면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아마 2박3일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마땅히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최종 목적지는 시펑커우(喜峰口)라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댐에 수몰된 장성이 있고, 영화 ‘귀신이 온다’를 찍은 세트장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장성이 물 속에 잠겨 있을까.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 하나로 버티면서 탕산에서부터 다섯 시간을 내리 쉬지 않고 달렸다. 살면서 그처럼 많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쓴 적도 없다. 일대가 온통 철광석 광산 지대였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돌들이 온통 철광석이고, 길옆으로 늘어선 산에는 생전 처음 보는 노천 철광이 연이어 나타났다.

    중국은 철광석 매장량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나라다. 하지만 세계 1위의 철강 소비국이자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대 철강 수입국이다. 우리나라에서 철강을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가 바로 중국이고, 전세계 철강 소비량의 23%를 차지한다. 특히 최근 들어 중국의 자동차, 가전, 조선, 건설업이 활기를 띠면서 철강 수요가 급증해 세계적으로 철강 가격이 급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인근 제련소로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트럭들이 일으키는 시커먼 흙먼지를 대책 없이 들이마셨다. 옷도 얼굴도 온통 새까맣다. 침을 뱉으니 그마저 까맣다. 따가운 목을 생수로 헹구는데 문득 공포가 엄습했다. 중국의 비약적 발전이 인류에게 비극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중국의 운명은 좋건 싫건 세계적 공안(公案)이고, 근접해 있는 우리에게는 특히 민감한 문제다. 중국은 머지않아 경제 대국, 또 하나의 제국이 될 것이다. 그 제국이 인류에게, 동아시아에, 무엇보다 중국인에게 축복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중국 작가 루쉰을 흉내 내어 말해보자면, 중국은 마땅히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미국이나 서구 근대가 갔던 길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자격요건

    이러이러한 사람이 한국인이고, 이런 사람이 중국인이라는 식으로 어느 나라의 국민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나열한다면 한국 국민과 중국 국민이 되기 위한 공통 조건 중 하나는 일본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일 것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은 국민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자, 국민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처럼 여겨진다. 양국에서 ‘항일(抗日)’은 대외용이 아니라 대내용인 경우가 다반사다.

    올해 중국의 반일(反日)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일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그리고 일본인이 단체로 광저우에서 성매매를 하다가 적발된 일이 맞물려 최근 몇 년 동안 반일 열기가 고조됐는데, 올해 들어 정점에 달한 느낌이다. 일본 패전 60주년을 우리는 광복 60주년이라고 하고, 중국은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60주년’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국을 지켜냈다는 항일전쟁 승리에 대한 자부심이 여기에 들어 있는 셈이다.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차지하기 위해 장제스(蔣介石)의 중국국민당과 경쟁할 때, 중국공산당이 민심을 잡은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중국공산당의 항일운동이었다. 항일운동 때문에 중국인은 중국공산당을 민족주의 세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항일은 일본의 잔악한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폭로하는 일이자 중화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것이 바로 중국공산당임을 부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가 중국인으로 하여금 항일전쟁의 기억을 상기하도록 적극 나서는 정치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전 승리 60주년을 기념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가 끊임없이 선을 보이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그래서 그런지 내용이 천편일률이다. 중국공산당이 항일투쟁을 지도하는 가운데 전중국인이 나서 지난한 전투 끝에 마침내 일본군을 이기고, 일본군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고정 레퍼토리다.

    그런데 영화 ‘귀신이 온다’는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된 후 50년 동안 지속된 중국 항일 영화의 패턴을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무대는 일본에 점령당한 한 농촌 마을이다. 그러나 항일운동을 지도하는 중국공산당이 등장하지 않고, 마을 주민에겐 일본에 대한 분노나 적개심이 없다. 마을을 점령한 일본군과 아무 일 없이 잘 지낸다.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중화 문명의 상징이 된 장성. 쟝원 마을 파란 호수 위에는 물에 잠긴 장성의 돈대가 그림처럼 떠올라 있다.

    그렇다고 친일 영화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일본의 침략을 중국이라는 국가에, 중화 민족에게 일어난 재난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민족적·국가적 차원의 항일전쟁 영화가 아니라 허베이성의 외딴 시골 마을에, 농사만 알고 사는 농민에게 일어난 재난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국이라는 국가의 재난이 아니라 시골 마을의 재난을, 중화민족의 수난이 아니라 농민의 수난을 그린 영화다. 시골 마을을 침략한 사람들의 논리와 마을 주민의 생존 논리가 충돌하는 현장을 다룬다.

    돈대만 덩그러니 떠올라

    탕산에서 다섯 시간을 택시로 달린 끝에 마침내 더는 갈 수 없는 곳, 길이 끊어진 곳까지 왔다. 택시 기사도 알지 못하는 곳을 물어 물어서나마 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일대에서 그곳이 가장 유명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찍은 뒤 세트장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쟝원(姜文) 감독의 이름을 따 ‘쟝원 마을(姜文村)’로 불렸고, 아무나 붙잡고 영화를 찍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정도다.

    막다른 길에 이르자 택시에서 내렸다. 그런데 장성도, 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찾아온 것인가? 길 아래로 큰 호수가 보일 뿐이다. 댐 쪽에서 윗옷을 벗은 열 살 남짓한 소년이 올라온다. 장성과 마을을 보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아야 한다며 30위안(3900원)을 달란다. 다시 또 흥정. 편도인지, 왕복인지, 왕복 요금이면 마을과 장성을 둘러볼 동안 몇 시간이나 기다려줄 수 있는지 확인한 뒤, 결국 20위안(2600원)에 1시간 구경하는 것으로 흥정을 끝냈다.

    나룻배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자, 기적처럼 파란 호수 위에 뜬 장성의 돈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산등성이를 따라 달리던 장성이 호숫가에서 끊어진 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호수 한가운데 돈대가 떠 있다. 그 사이의 장성은 물 아래 잠겨 있다.

    장성의 높은 부분인 돈대만 물 위에 덩그러니 떠올라 있다. 몸은 잠기고 수면 위로 머리만 내민 형상이다. 돈대에 자란 풀들이 마치 머리털 같다. 장성을 여러 번 봤지만 물 위에 뜬 장성은 처음이다. 절경이다. 돈대의 통로로 물이 드나든다. 그러면서 조금씩 물에 침식되어 허물어져간다. 댐 덕분에 천하의 절경을 보게 됐지만, 어쩌자고 여기에 댐을 만든 것일까. 장성이 잠길 줄을 몰랐을까. 물에 떠 있는 저 장성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우주에서 장성을 보았는가?”

    장성은 중화 문명의 상징이자, 중국 역사의 상징이다.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중국 역사는 장성을 쌓아간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원의 발달된 문명을 탐내는 북방 오랑캐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장성을 쌓아야 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뒤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진시황이 드넓은 천하를 갖게 되자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드넓은 자신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영토가 넓어진 만큼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강박관념도 커진 것일까.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담장을 높이 치듯 진시황도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은 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한 강박관념에 늘 시달려왔다. 중국인이 나라가 여러 개로 쪼개지고 분열하는 것에, 외국의 침략에 더없이 민감하고, 공포를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2003년에 중국 최초의 유인 왕복 우주선이 비행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기자회견장에서 중국인 기자가 비행사에게 “우주에서 장성을 보았는가?” 하고 물었다. 비행사의 대답은 “보지 못했다”였다. 달에서 지구를 볼 때 인공 구조물 중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장성이라는 중국 교과서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우주에서 보이든 보이지 않든 장성은 인간이 지구에 쌓은 가장 긴 인공 건축물이다. 장성은 진(秦)나라 때부터 명(明)나라 때까지 동쪽 고비사막의 자위관(嘉틾關)에서 동쪽 해안가 산하이관(山海關)까지 쌓은 길이 5000km의 거대한 장벽이다. 대략 한반도 남쪽 끝에서 북쪽 끝에 이르는 길이의 5배쯤 된다.

    장성을 쌓기 시작할 당시, 진나라 인구가 2000만명이었다. 그중 노동이 가능한 남자 인구가 500만명이었는데, 이중 절반이 넘는 300만명이 장성을 쌓는 데 동원됐다. 장성을 쌓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시체마저 장성을 쌓는 데 사용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성에는 중국 민중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장성에 올라설 때면 그 위대함에 감탄하기에 앞서 벽돌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을 중국 민중의 희생을 떠올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쌓은 장성이 오랑캐를 막은 적은 없다. 칭기즈 칸이 “성벽의 힘은 성벽이 아니라 성벽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용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지만, 오랑캐는 늘 장성의 문을 통해 들어왔고, 왕조는 오랑캐 때문이 아니라 내부 문제 때문에 무너졌다. 그래서 작가 루쉰은 장성을 두고, “많은 인부가 장성 때문에 고역에 시달리다 죽기만 했지, 장성 덕분에 오랑캐를 물리친 적은 없다”면서 “위대하고도 저주스러운 장성이여!”라고 했다. 장성은 오랑캐를 막기보다는 정권 유지용, 내수용으로 더 가치가 있었다.

    영화 ‘귀신이 온다’에서도 일본 귀신들은 장성의 문을 통해 들어온다. 일본 귀신만 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 정부군도 미군도 모두 이 장성을 통해 들어온다. 장성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

    ‘귀신이 온다(鬼子來了)’

    영화 ‘귀신이 온다’의 주인공 마다산은 자루 속에 든 일본군을 보호해줬으나 결국 그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오랑캐를 뜻하는 말, ‘귀신’

    아편전쟁(1840∼42)이 일어나고 외국인이 몰려들자 중국인은 외국인에게 귀신 ‘귀(鬼)’자를 붙여서 불렀다. 처음 영국인이 광둥에 장사를 하러 왔을 때 밤에도 쉬지 않고 바쁘게 일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광둥 사람들은 밤에도 낮처럼 일하는 영국 사람을 보고 ‘귀신(鬼子)’이라고 불렀다. 중국은 농업 국가여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고, 잔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심야 골동품 시장을 ‘귀신 시장(鬼市)’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연유하여 밤에도 낮처럼 활동하는 영국 사람을 귀신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점차 ‘서양귀신(洋鬼子)’ ‘일본귀신(日本鬼子)’ 같은 형태로 쓰이면서 ‘귀신’이 오랑캐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영화 제목에서 ‘귀신’은 일본인을 가리킨다. ‘일본귀신’이 중국 외딴 농촌에 나타난 것이다.

    배를 타고 물에 뜬 장성을 지나가자 산기슭에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영화의 무대가 된 곳이다. 장성이 병풍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푸른 산과 마을, 장성, 그리고 마을 앞에 펼쳐진 호수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영화 촬영을 위해 지은 세트라지만 방금 전까지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듯하다. 골목에 풀이 우거져 있긴 하지만 영화에서 본 광경 그대로다.

    입장료 10위안(1300원)을 냈다. 영화가 유명해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 세트장을 관리하고 있다.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가 따라온다. 그러면서 이곳저곳을 설명한다. 이렇게 나이 든 할머니도 ‘귀신이 온다’를 봤나 싶어 물었더니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설명을 들은 값으로 옥수수 4개를 10위안 주고 샀다. 점심용으로.

    영화는 농촌 마을에 사는 주인공 마다산(馬大山)의 집에 갑자기 낯선 사내가 들이닥쳐 포대 두 개를 던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내는 권총으로 위협하면서 섣달 그믐날 찾으러 올 테니 그때까지 자루를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하고는 사라져버린다. 두 개의 포대 안에는 각각 일본 군인과 그의 중국인 통역이 있었다.

    마다산과 그의 처는 사내가 찾으러 올 때까지 두 사람에게 밥을 해먹이며 잘 ‘보관’하고 있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데 사내는 약속한 날짜가 지나도록 찾으러 오지 않는다. 마다산은 결국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을 알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 전전긍긍한다. 마을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알리자니 자루를 맡긴 사내가 돌아오면 어쩌나 두렵고, 감추고 있자니 일본군에게 발각되면 큰일이다. 다행히 일본군에게 발각될 고비를 넘기면서 6개월이 흐른다.

    사실 중국 항일 영화의 전형적 패턴으로 보자면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일본 군인 하나야와 그 앞잡이인 통역관을 진즉 살해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다. 마을의 안전이 위태로우니 살해하자고 의견을 모으지만, 마다산은 결국 죽이지 못하고, 장성에 숨겨놓고 온다. 마다산이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여?”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느냐? 마누라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람을 죽이느냐?”

    마다산에게 일본 군인 하나야는 일본인이기 전에 사람이다. 이러한 ‘개인의 기준’은 마을 사람들이 일본 군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농민의 기준’으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심문 과정에서 일본군인이 원래는 농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로써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한결 풀어지자 일본군인 하나야가 제안을 한 가지 한다. 자신을 풀어주면 일본 군대에 돌아가 양식을 가져다주겠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마을 사람들은 하나야의 제안을 선뜻 반기고, 약속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정식 ‘계약’을 체결한다. 침략자 일본인과 피해자 중국인이라는 국가의 기준, 국민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나아가 농민과 농민의 기준으로 계약을 맺고 약속을 한 것이다.

    많은 중국인은 이러한 내용의 영화를 보고 중국 농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평했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온 일본군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하나야가 중국인의 살가죽을 벗기거나 여자를 겁탈한 것도 아니어서 일본군이면 무조건 처형해야 한다는 국가의 논리, 국민의 논리가 농민에게 먹혀들 리 없다.

    마을 사람들은 국민의 논리가 아니라 농민의 논리, 생존의 논리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그래서 양식과 일본군인을 맞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일본에 대해 분노와 적대감을 갖는 중국 국민이기에 앞서 하루하루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다급한 농민이다. 양식과 일본 군인을 맞바꾸기로 한 결정은 농민의 진실한 논리이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다. 항일 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중국에서 역사에 대한 해석, 역사에 대한 기억은 늘 국가가 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국가의 통제에 균열을 내면서, 한 시골 마을 농민의 기억, 민간의 기억을 보여준다. 중국 정부가 이것을 달가워했을 리 없다. 중국 정부는 일부 장면이 불온성을 띠고 있다며 삭제를 요구했고, 제작진이 여기에 응하지 않자 쉽게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한동안 DVD 판매도 금지했다.

    한국인이 장성을 보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베이징 인근의 바다링(八達嶺)이다.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편하게 장성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관광객들로 붐비고, 재미도 없다. 베이징 인근에 있는 쓰마타이(司馬臺)나 진산링(金山嶺)으로 가는 것이 훨씬 낫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을 경우 택시를 한 대 빌려서 가는 것이 좋다. 바다링 장성이 박제된 전시용이라면 이들 두 곳은 야생의 장성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장성 트레킹도 할 수 있다. 원래 장성에 훨씬 가깝다.

    국가의 논리에 몰살된 농민

    그러나 그곳의 풍경도 이곳 ‘귀신이 온다’ 촬영지에 있는 장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마을을 관통해 올라가면 바로 장성이다. 허물어진 장성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기분이 남다르다. 그야말로 장성의 아우라(aura)가 느껴진다. 장성 위에 서서 호수와 물에 떠 있는 돈대와 마을을 내려다보는 경치 또한 장관이다.

    계약을 체결한 마을 사람들은 일본군인 하나야를 넘겨주러 장성을 통과해 일본 병영에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일본군 장교는 원래 계약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식을 내놓으며 직접 마을까지 실어다준 뒤 잔치까지 열어준다. 일본군과 마을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즐긴다. 이때는 이미 일본 천황이 항복한 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즐겁게 노래 부르고 놀 때, 극적 반전이 일어난다. 일본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 마을 사람들의 사람의 논리, 농민의 논리에 일본 군인들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화답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결국 국가의 논리, 일본 국민과 일본 군인의 논리로 대응했다. 마을 사람들과 계약을 맺었던 일본군인 하나야도 전직 농민에서 대일본 제국 군인으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다.

    마을이 몰살을 당했지만 주인공 마다산은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마침 해산하러 가 있는 아내를 데리러 처가에 간 사이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귀신들이 들어왔던 장성을 통해 이번에는 중국 정부군과 미군이 들어온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매우 위압적인 자세로 확성기에 대고 주민을 호령한다. 일본군은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마다산이 그 포로수용소에 도끼를 들고 쳐들어간다. 배은망덕한 일본 군인을 죽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중국 정부군에게 잡히고 만다. 중국 정부군이 나서 대신 복수를 해주는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 중국 정부군은 “중국 정부는 포츠담선언에 따라 포로를 대우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다산은 포츠담선언을 어기고 포로를 살해하려고 한 죄로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다. 중국 정부군 장교는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인 하나야에게 마다산의 목을 베라고 지시한다. 마다산은 자신이 살려준 하나야에게 목이 잘리고, 몸통이 떨어져 나간 얼굴로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흑백이던 영화는 컬러로 바뀐다.

    귀신은 지금도 떠돌고 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마을 농민이 모두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중국 국민이기 이전에 농민이다. 그런 그들이 왜 죽었는가. 이 마을 사람들은 귀신에 죽고, 귀신 때문에 마을 공동체가 해체됐다. 그런데 귀신은 일본군만이 아니다. 농민에겐 농민의 논리를 거부하는 국가주의의 논리가 농민을 죽이는 귀신이다. 중국은 농민의 나라다. 중국 소설가 가오샤오성(高曉聲)은 한 소설에서 중국 농민의 특징을 이렇게 열거한다.

    “손을 잘 쓰지만 입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 노동은 잘하지만 사색은 못하는 사람들, 손해를 볼 정도로 순진하지만 따질 줄 모르는 사람들, 단순해서 사기를 당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고난을 견디면서 즐거움을 추구할 줄 모르는 사람들, 시종 두 개의 믿음, 즉 어떤 힘든 조건에서도 자기 노동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과 공산당이 자신들 생활을 개선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이런 중국 농민이다. 단순하고 순진하고 어리석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기준으로 복잡한 현실을 파악한다. 농민의 지혜다. 그 단순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생존의 논리다. 영화 속 양식의 논리, 먹고 사는 논리다. 그들 농민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과 중국이라는 국가주의 논리가 아니라 농민의 논리, 양식의 논리였다. 그들은 진정 농민이었다. 그 농민의 논리는 국가주의 앞에 철저히 무너졌다. 그 귀신들, 농민의 논리를 잡아먹은 귀신들은 지금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도처에! 200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의 의미가 단순한 항일을 넘어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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